가락지

금, 은, 옥, 칠보로 장식된 가락지를 우리 민족처럼 선호해온 습속은 달리 찾아볼 수 없을 듯하다.

금, 은, 동, 칠보, 비취반지와 가락지이다.(조선조)

가락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자체의 재화적 가치도 있지만 맹세, 약속의 징표여서 한층 마음속 깊이 소중하게 치부했다. 예나 이제나 혼인을 약속하거나 재회의 다짐을 할 때는 불변의 물질인 금, 은, 옥가락지로 대신했다. 또 다른 물건들은 잠시라도 몸에서 떼어둘 수가 있지만 가락지는 잠자리에 들거나 목욕을 할 때에도 떠나지 않으므로 소기의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물건이다.

여인이 지닌 여러 개의 가락지들은 모두 나름대로의 애정이 솔기솔기 밴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다. 친정어머니, 남편, 시어머니로부터......혹은 귀밑 볼을 붉혀야 될 이로부터 받아서 남몰래 간직한 사연도 있을 것이다. 어떻든 인연을 중시했던 우리 선대들은 이 가락지를 소지하면서 그걸 건네준 사람을 가슴속 불씨로 담아두었으니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살림이 넉넉한 대가집이라면 또 몰라도 대부분의 향반집에선 시어머니가 임종 전에 며느리에게 금가락지와 은비녀를 물려주는 걸 여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써 며느리 구박했던 과거를 다 보상받고, 마지막까지 시혜하는 시어머니의 긍지를 살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또 며느리는 며느리대로 비로소 안주인이 되었다는 자족감을 뿌듯하게 누렸다.

가락지의 재료가 되는건 금, 은, 옥만은 아니다. 귀한 것으론 밀화, 비취에서 값싼 것으로는 백동과 구리로 만든 것도 있다. 아무런 문양도 없이 고운 광택을 내는 백옥, 비취도 좋지만, 한 등 뒤지는 금속제도 마냥 푸대접받을 수는 없다. 특히 은, 백동 가락지에는 흔히 박쥐문이 들어가 있는데, 이는 박쥐가 하늘의 사자 또는 복신(福神)의 사자로 인식되었던 데서 연유한다. 또 은에 주황, 청록의 칠보를 입힌 가락지는 얼마나 화려한가. 다른 재료의 가락지가 은근의 미를 드러내는 데 비해 칠보는 찬란한 멋을 발한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들에서 핀 들꽃을 꺾어 꽃반지를 만들어 끼어도 싱그럽다.

가락지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로 주로 혼인예물로 사용

여인은 치장을 함으로써 꽃이 된다. 머리에 댕기를 매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꼽고서야 입이 벙싯거려지는 걸 누가 탓하겠는가?

"한국인의 마음"은 한국인의 전통미와 시인의 감수성이 교감하면서 빚어내는 언어로 쓴 우리 마음의 재발견!입니다. 글쓴이 신중신님은 사상계로 등단한 시인으로서, <호텔 新羅>의 사보와 <현대 精工>사보에 5년간 연재한 에세이를 옮긴 것입니다. 옮기는 과정에서 편의상 전문을 다 싣지 못하고 줄인 점이 안타깝고 죄송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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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임의
다시 오진 못하는 삼만리.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

                                     -미당'서정주'의 "귀촉도"3연중 앞부분

장도

소재는 백옥, 금, 은으로 만들었고, 형태에 따라 팔각장도 등으로 이름이 붙여진다.

장도(粧刀)는 평소 소지하고 다니기에 편리하게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한다. 흔히 이 땅의 규방 부인들이 장신구 겸 보신용으로 취했는데, 노리개로 차고 다니는 것을 패도(佩刀),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것을 낭도라 했으며, 나이든 부인네들은 실용성에 따라 옷고름에 늘 차고 다니기도 했다.

은장도는 여러 형태가 있어 원통형, 을자형, 그리고 네모 또는 여덟모의 각을 진 다각형도 눈에 띈다. 그러나 흔히는 손잡이 길이와 칼집 길이가 비슷한 채 그 끝이 둥글리면서 부리를 서로 반대쪽으로 살짝 휘어지게한 을자형이 많다.

칼집의 무늬가 화사한 점도 예외가 아닐 테지만 여기에 더해 단순한 끈외에 매듭과 보옥을 달아 아주 이쁘게 의장하여 노리갯감으로도 훌륭하게 장식했다. 부인네 말고도 병사나 지체가 있는 사류(士類)에서도 이것을 간직했지만 이처럼 멋을 내 단장하지는 않았다. 패도란 말은 옛사람들이 수건 따위를 옷고름이나 허리띠에 차고 다니는 걸 <패(佩)>라 한 뜻에서 유래된 것이다.

은장도는 칼집의 재료와 장식한 보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는바, 대추나무외에 무소뿔인 서각, 소뼈인 우공을 비롯하여 흑각(黑角), 침향(沈香), 흑시(黑枾), 산호, 비취, 호박, 대모, 금패(錦貝), 옥, 밀화가 사용되기도 한다.

제작과정이나 재료는 중요하지 않다. 은장도에 담긴 한국 옛 여인의 삶의 자세와 슬기에서 더욱 멋이 돋아난다. 그것은 정결을 지키고자 한 서릿발 같은 결의의 표상으로서이다. 난리나 사화와 같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약한 부녀자들은 정조를 보호받기가 어려웠다. 양가집 여인이 몸을 더럽힌다는 것은 죽음보다 두려운 일이었다. 또 집안이 역적으로 몰릴라치면 사대부가의 부녀자는 목숨을 부지하는 대신 관기로 전락하는 오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이런 환난 말고라도 규방을 침입하여 음행이 일어났음직한 세월을 우리는 얼마든지 상정해볼 수 있다. 연약한 여인이 무엇으로 물리치고 방패삼으랴. 그래서 은장도가 소용되었다. 적을 격퇴하는 무기로서가 아니라 자위수단처럼 자결의 방편으로서 이용되었다.

하늘과 부모가 준 육신을 자해함은 큰 죄악이지만 정결이 생명보다 소중했던 사회배경에선 이것이 미덕으로 받아들여졌었다. 잠자리에서도 장도를 품고 있다가 위난을 당하여 칼을 빼어드는 여인, 상대방을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라 해를 입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결의에서 은장도는 애틋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장도

잘 만들어진 은장도는 어머니가 출가하는 딸에게, 임종을 맞은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물림한다. 몸을 조심하고 집안의 명예를 지키라는 무언의 교훈이 이로써 전수된다. 하나의 동작이 수천 마디의 타이름이나 경계의 훈도보다 더 명료한 경우가 이래서 가능하다. 어여쁘고 사치스럽기까지 한 은장도에 이러한 서슬 푸른 내훈이 깃든 점도 소중하지만,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걸>하는 염의까지 깃들었으니 이 얼마나 미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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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고무신

흰고무신! 그래, 그것은 발을 보호하는 단순한 일용품만으로서가 아니라 무한한 선망의 애완물, 몸과 마음을 하늘 높이 둥둥 띄워올리는 미약(媚藥)으로 여겼던 시대가 있었다. 어쩌면 이렇듯 깨끗하고 가볍고, 탄력성이 있어 편안하고, 때 묻을까 근심되어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면 품속에 품고 가고 싶은 앙증맞은 것-그런 느낌으로 숨막혔던 한때가 있었다.

당혜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신었던 신발의 일종으로 신코의 뒷축에 당초문을 새겨 넣는다

한반도에는 옛부터 화(靴), 이(履), 혜(鞋)로 구분되는 신발이 있어왔다. <화>는 목이 길어서 방한, 방침(防侵)에 알맞은 북방 계통의 신이고, <이>는 운두가 낮아 발목이나 발등이 드러나는 남방 계통의 신을 말한다.

고분벽화에 말타고 사냥하는 고구려 무사들의 신은 예외없이 <화>에 속한다. <혜>는 원칙적으로 <이>의 한 종류이다. 그러나 조선시대를 통해 양가집에서는 당혜, 운혜의 착용이 일반화되어, 근대화 이후 구두와 고무신이 출현할 때까지 정형화되었으므로 따로 구분해봄직하다. 여하튼 혜와 짚신류는 개화기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민족에게 신발의 주종을 이루어온 것이었다.

당혜(당혜)는 지금의 고무신과 모양이 흡사한 것으로 융같은 푹신한 감으로 형태를 짓고 비단으로 감싼 사치스런 신이었다. 양가집 여인들은 당혜를, 일반 여염집 여인들은 구름무늬가 있는 운혜를 상용했다. 이런 마른신으로서 남자가 신는 것은 태사혜(太史鞋)라 불린다. 이런 신발들은 실용적이기보다 아름다운 장식성이 농후하다.

대다수의 서민층에선 평소에 남녀구별없이 짚신을 상용하였다. 볏짚으로 엮은 이것은 가는 새끼를 꼬아 날을 삼고, 총과 돌기총으로 울을 삼아서 만든 것이다. 볏짚외에도 왕골이나 부들을 재료로 삼은 것도 있다

각종의 <혜>나 짚신은 나룻배의 모양이다. 배가 사람을 태우고 가듯 신발은 사람의 발을 태워 간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리고 한말 이후에 등장한 고무신도 혜의 감각을 살려 우리 고유의 모델을 창조해낸 셈이다.

여자용 흰고무신은 앞쪽 끄트머리에 외씨 같은 코가 날렵하게 솟아 있고 볼이 갸름하고 길다. 펑퍼짐하다면 미련스러울 테고 두꺼우면 둔탁하게 보일 텐데 마치 카누처럼 밋밋하고 날씬하다. 여자의 발은 볼이 좁아보여야 예쁘기에 너나 할 것 없이 좁은 버선을 신어서 발 모양새를 다듬었다. 꽉 끼는 버선으로 조봇해진 발을 고무신에 갖다 넣으면 꼭 버선발모양 그대로이다. 발바닥 폭이 좁으므로 걸을 때의 착지가 방만해질 수 없으므로 절로 조신성이 몸에 배었겠다.

또 흰 색깔은 순결을 상기케 한다. 하얀 모시옷, 새하얀 옥양목 치마 저고리에는 참으로 흰고무신에 조화를 이룬다. 흰 버선과 고무신은 한번 외출에서 돌아오면 씻어 말리니 그 또한 위생적이다. 고무신에 색색의 선이 가미된 것도 나왔지만 그 본령은 아무래도 장식이 전혀 없는 흰고무신이다.

당혜

오늘날에도 애경사(哀慶事)에는 여인들이 한복에 흰고무신을 착용한다. 한복에 구두 차림은 갓 쓰고 지게를 진 것만큼이나 어색하고 균형이 없다. 특히 상사를 당해서 여인들이 화장기 없는 얼굴에 거친 흰옷과 흰고무신을 신은 모습이 정겹다고들 한다. 혹은 봄바람에 귀밑머리카락을 날리며 흰고무신 차림으로 걷는 여인의 자태는 무척 고혹적으로 바라보인다고도 한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그 모습에서 우리 옛 여인의 전형이 일별되고 향수가 묻어 나오기 때문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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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질

깊은 밤의 정적을 깨며 또닥또닥 이어지는 소리, 혹은 희미한 등잔불에 비쳐 마주앉아 다듬이질하는 두 여인의 그림자가 창호지 문살에 실루엣을 그리는 정경은 누구나의 추억에도 물무늬로 남아있다. <추야장 긴긴 밤에 기러기 울어 예는데, 은은한 다듬이소리는 그 무슨 정인고>의 정서야말로 한국인의 생활이 그려내는 멋이다.

다듬이질 하는 여인

생활체제나 가옥구조가 극도로 인력과 노동을 요구했던 시대에 한국의 여인네들은 하루 낮 동안 내내 집안일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절구에다 보리를 빻고, 부엌에 들어가 쌀을 안치고 반찬을 장만한다. 상을 들여보내고 설거지하는 것도 몫, 집안을 대강 청소한 후 산더미같은 빨랫감을 이고 개울로 나간다. 그외에도 길쌈이며 밭일로 해가 짧다. 저녁이 이슥해져 몸이 푸솜같이 되었을 때 다듬잇돌을 건넌방으로 들여놓고 고부간에, 동서간에, 시누올케간에 마주앉아 다듬잇방망이를 두드린다.

한국의 대다수 서민 여인네들은 이런 소태나는 삶을 살아왔다. 목구멍에선 화근내가 받치고 굵은 땀방울이 목덜미를 적셔도 불평을 몰랐다. 그래도 마음속에 한가닥 앙금이 남아 있었다면 무명이나 삼베를 두드리면서 요샛말로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했겠다. 하지만 고운 모시나 명주를 다듬이질할 땐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칫 졸아서 헛치기라도 할라치면 구멍이 송송 뚫려 못 쓰게 만들기도 할테니까.

똑같은 다듬이질도 형편 따라 경우 따라 다름을 다음의 시가 설명해준다.

이웃집 다듬이소리/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 잦아가네/ 무던히 졸리기도 하련만/ 닭이 울어도 그대로 그치지 않네

의좋은 동서끼리/ 오는 날의 집안일을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남편들의 겨울옷 정성껏 짓는다면/ 몸이 가쁜들 오죽이나 마음이 기쁘랴마는/ 혹시나 어려운 살림살이/ 저 입은 옷은 헤어졌거나 헐벗거나/ 하기싫은 품팔이, 남의 비단옷을/ 밤새껏 다듬지나 아니 하는가

_____양주동의 '다듬이 소리'에서

가난한 집에선 남의 빨래를 해주고 옷을 지어주는 품팔이가 일반화되었던 시대의 통증을 환기시키는 시편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에게 있어 다듬이질은 그 중 신명나는 노동에 속한다.

한참 동안 몰두하면 무아지경에 빠지고 어깨춤이라도 출 듯 없던 힘이 절로 솟구친다. 협동심과 조화감의 결정이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속담이 있을 만큼 갈등과 격의가 있었던 여인의 관계에서 이 시간은 이를 해소하고 간격을 좁히는 계기가 된다. 반드럽게 된 다듬잇감이 차곡차곡 쌓인 걸 보고는 어찌 서로 미소를 깨물지 않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보냐.

다듬잇돌은 주로 돌을 장방형으로 깍아 윗면을 매끄럽게 간 것이다. 여인이 혼자서 빠듯이 들고날 수 있는 무게라야 안성맞춤이다. 한 손에 쥐고 두드리기에 알맞도록 나무로 다듬은 방망이 네 개와 곁들여서 대개는 집집마다 마루 안쪽에 붙여놓았다. 피곤에 전 남정네가 마루에 몸을 누일때는 베개삼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에 족하지만 입이 비뚤어진다 하여 가까스로 삼간다.

다듬이질은 우리 고유의 풍정이다. 쪽찐 머리에 모시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여인의 다듬이질 모습은 그지없이 아름답다. 저 다문 입술, 두어가닥 삐져나온 귀밑머리칼......아, 그런데도 무정한 지아비는 목침을 돌쳐 누우며 이맛살을 찌푸린다. <동지섣달에 베잠방이를 입을망정 다듬이 소리는 듣기 싫다>는 조다.

어느 마을이나 이 집 저 집에서 또닥또닥 들리던 다듬이 소리, 어느 집일까 하고 귀기울여봐도 가까운 듯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고 보살피려는 여인의 갸륵한 정성이 꿈결에도 적셔졌던 그 소리가 잠적하면서 한국인은 멋 하나를 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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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맨발 .1- 蓮葉에게] -송수권

그녀의 피 순결하던 열 몇 살 때 있었다
한 이불속에서 사랑을 속삭이던 때 있었다
蓮 잎새 같은 발바닥에 간지럼 먹이며
철없이 놀던 때 있었다
그녀 발바닥을 핥고 싶어 먼저 간지럼 먹이면
간지람 타는 나무처럼 깔깔거려
끝내 발바닥은 핥지 뫃하고 간지럼만 타던
때 있었다.
이제 그짓도 그만두자 하여 그만두고
나이 쉰 셋
정정한 자작나무, 백혈병으로 몸을 부리고
여의도 성모병원 1205호실
1번 침대에 누워
그녀는 깊이 잠들었다.
혈소판이 깨지고 면역체계가 무너져 몇 개월째
마스크를 쓴 채, 남의 피로 연명하며 살아간다.

나는 어느 날 밤
그녀의 발이 침상 밖으로 흘러나온 것을 보았다
그때처럼 놀라 간지럼을 먹였던 것인데
발바닥은 움쩍도 않는다.

발아 발아 까치마늘 같던 발아
蓮 잎새 맑은 이슬에 씻긴 발아
지금은 진흙밭에 삭은 蓮 잎새 다 된 발아
말굽쇠 같은 발, 무쇠솥 같은 발아
잠든 네 발바닥을 핥으며 이 밤은
캄캄한 뻘밭을 내가 헤메어 운다.

그 蓮 잎새 속에 숨은 민달팽이처럼
너의 피를 먹고 자란 詩人, 더는 늙어서
피 한 방울 줄 수가 없는 빈 껍데기 언어로
부질없는 詩를 쓰는구나

오, 하느님
이 덧없는 말의 교예
짐승의 피!
거두어 가소서.

......................................................................................................
*띠 동갑 열 두 살 터울의 제자와 선생으로 만나
한 세상 발바닥 간지럼 먹이며 놀던 시간 덧없어라.
똥장군 져날라서 시인 만들고 대학 교수 만들었다는,
이제는 간지럼 먹여도 감각이 없는 발
그녀는 말이 없구나.

수술비 2억원.
송수권 산문집 "아내의 맨발"-'고요아침' 출판

책이나 많이 팔렸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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