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듬잇돌

요즘에는 한복보다는 양복이나 양장이 더 흔하고, 귀해진 한복들의 천도 거의가 다듬이질이 필요 없는 모직이나 화학섬유들이라 다듬잇살이 고운 한복을 보기가 어렵게 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현대 생활에 강요된 합리와 능률의 여덕으로 그 자리와 구실을 빼앗긴 것이 다듬잇돌이다........

다듬이돌 네 발은 다듬이돌의 무게 뿐만 아니라 온 땅덩어리를 이고도 끄떡이 없도록 힘차다. 힘찬 네 발과 몸 사이는 돌을 쪼아 내어서 알맞은 공간으로 남겼고 그 위에 다듬이잇돌판은 펑퍼졌다.

불끈 짠 정갈한 물행주로 닦으면 까맣게 반질거리는 다듬잇돌 위에 자주, 노랑, 잇빛, 연두 따위로 물들인 명주나 눈발 같이 흰 무명을 얹고 할머니와 어머니 또는 어머니와 누나가 마주앉아 밤을 지새우며 다듬이질을 하는 방망이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든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중년층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귀를 귀울이면 다듬잇돌과 대추나무나 박달나무다듬잇방망이가 무명이나 모시나 비단을 사이에 놓고 맞부딪는 소리 속에서 소음이 아닌 화음을 쉽게 알아차릴 수가 있다.

다듬이돌 다듬이돌에 대한 정성과 마음쓰임이 어떠했던가는 다듬이질을 하다가 돌을 많이 치면 여자의 팔자가 거칠어진다는 속신이 있었던 것으로도 짐작이 가는 일이다.

언제까지나 그칠 줄 모르는 다듬잇소리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다듬이질을 하는 천의 얇고 두꺼움을 알 수 있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더러는 다듬이질을 하는 마음까지도 훤히 들을 수 있게 된다. 얼마 안 가 딸을 여의게 될 어머니의 방망이소리에는 시름 섞인 기쁨이 깃들고 시집가는 딸의 방망이소리에는 마냥 좋아 부푼 그리움이 튕긴다. 봄의 어스름 달밤에 듣는 다듬잇소리에는 나른한 여운이 있고 여름의 찌는 듯한 더위가 가시고 이슬로 젖은 밤에는 서늘한 기운이 돌며, 가을의 달밝은 밤에는 맑고 고왔다가, 겨울의 하늬바람이 속소리치는 밤에는 카랑카랑하다. 이렇게 사람 따라 철따라 매양 같은 귀에 같은 다듬잇돌에 같은 다듬잇방망이건만 달리 들리는 것은 듣는 마음이 다른 탓도 있을 것이다.

다듬이돌 쓰임새를 떠나서 한갓 조형으로서도 다듬잇돌이 아름다운 까닭은 바로 대물림해 쓰는 사람과 만드는 석공들의 허술하지 않은 마음쓰임 때문이다.

그런 다듬이질소리는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또 밤에나 낮에나 한해 열두 달 흔하디흔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다듬이질이 없는 날이란 마을에 초상이 났거나 이에 버금할 큰 불행이 있는 날뿐이었다. 마치 삶의 찬가와 같이 울리고 울렸던 다듬이질하는 방망이소리가 끊기게 되면서 나는 다듬잇돌을 눈여겨보는 버릇이 새로 생겼다.

다듬이질에 대한 정성과 마음쓰임이 어떠했던가는 다듬이질을 하다가 돌을 많이 치면 여자의 팔자가 거칠다는 속신이 있었던 것으로도 쉽게 짐작이 가는 일이다. 다듬이질에 대한 마음쓰임이 이렇고 보면 다듬잇돌을 만드는 석공들의 손길도 허술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다듬잇돌이 한두 해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물림을 해가며 쓰일 것임을 생각했다면 왼손에 쥔 정이나 바른손에 잡은 망치에나 절로 힘이 괴었을 일이다.

다듬잇돌이 어느 것이었거나 쓰임새를 떠나서 한갓 조형으로서도 아름다운 까닭이 바로 쓰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의 마음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겠다.

어김없고 그러면서 아름다운 물건이란 그것을 쓰는 사람들의 마음쓰임과 마음가짐 속에서 만들어져 나올 수 있다는 지극히 소박한 상식을 오늘날 제 구실을 저버려 쓸모가 없게 된, 그러면서도 지닌 바 아름다움에 티끌만한 변함도 없는 다듬잇돌에서 배운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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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짇고리

지난날에 우리 여자들이 지녀야 했던 여러 가지 덕목 가운데서 바느질 솜씨는 길쌈 솜씨, 음식 솜씨와 더불어 가장 무겁게 여기던 터였다. 그래서 여자 아이를 낳으면 철이 들까말까 한 나이부터 바느질을 가르쳤다. 바느질, 이른바 '침선'을 배운다기보다는 자연히 그 세계로 젖어든다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종이로 만든 팔각반짇고리

양장이 없었던 때에도 옷맵시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었다. 꽃답고 값진 중국 비단으로 만든 옷에 대한 동경은 그지없어도 여염 살림에서는 어림이 없어 옷감으로는 겨울이면 무명, 여름이면 삼베가 고작이었다. 명주나 세목, 아니면 모시를 철따라 입을 수 있으면 큰 호사로 알았다.

어려운 살림살이를 규모 있게 꾸려가야 하는 터수로는 분수에 넘치는 사치는 감히 하늘이 두려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비록 옷의 사치는 못한다손 쳐도 짇고리만이라도 곱고 예쁘게 가꾸고자 했던 여자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유물은 흔하게 볼 수가 있다.

사각나전칠기반짇고리 옷의 사치는 못한다손 쳐도 반짇고리만이라도 곱고 예쁘게 가꾸고자 했던 여자의 마을을 읽을 수 있는 유물은 흔하게 볼 수 있느데 반짇고리가 바로 그런 것이다.

화려한 반짇고리로는 통영 지방에서 즐겨 만들던 나전칠기가 있다. 오동나무나 은행나무처럼 나뭇결이 순하고 가벼운 것으로 반짇고리의 바탕을 만들고, 검거나 붉은 칠을 두껍게 올려 전복 껍질로 온갖 무늬를 놓은 것이다......

그러나 가장 가벼우면서 또 가장 흔하게 쓰였던 것은 대로 견 반짇고리다. 참대를 곱게 다스려내어 둥글게 결어 겉을 삼고 속대를 납작하게 다듬어 삿자리처럼 곱게 엮어서 안을 받쳐 마무리 변죽은 까만 오죽으로 두른 대반짇고리는, 이렇다 할 무늬도 없으나 새것일 때는 대가 지니는 깨끗함으로 하여 처녀의 속살처럼 정갈한 멋이 있고, 해가 묵으면 곱게 손때가 올라 반질거려서 그런대로 다소곳이 늙어가는 금방의 중년처럼 품위 있게 아름답다.

규방에서 언제나 한 모서리를 차지했던 반짇고리도 재봉틀이 들어오고 화학섬유들이 판을 치게 되면서는 점차로 저버려지고 있어서 지금은 시장에서 나도는 반짇고리를 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또 희미한 호롱불 아래에서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단정히 앉아 밤이 깊은 줄도 모르고 첫닭이 홰를 칠 무렵까지 바느질을 하던 아낙의 모습도 보기가 드물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우리 여자들의 손끝에서도 맵짠 바느질 솜씨는 점차로 자취를 감추어가고 있다. 이 모두가 세월의 변천과 거기에 따르는 생활 양식의 변모의 소치로서 그것을 새삼스럽게 탓할 수도 없고 그럴만한 까닭도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반짇고리에 어린 향수가 쉽게 지워지지도 않으니 딱하다.

문득 흥보타령의 비단타령에 오른 허다한 옛 비단들의 생각이 나곤 한다.

일광단, 월광단, 송백단, 대단, 와룡단, 영초단, 화초단, 함포단, 장원주, 가겨주, 상사단, 공단, 호피단, 인조사, 복수단, 궁초단, 꾀초단, 모초단, 새발광릉, 노방주, 청사, 홍사, 통견, 백납릉, 월하사주, 당포, 윤포, 세양포, 수주, 통오주, 성천 분주, 경산도 횡저포, 갑사, 옥구 자주, 길주, 명천 세마포, 강진 나주 극상세목, 해남포, 도리마, 장성 모시, 한산 세모시, 생수삼팔, 갑회, 고사, 관사, 청공단, 홍공단, 백공단, 흑공단.......

이렇게 판소리에서는 비단들의 이름이 두루 섬겨져서 이름이나 남았고, 또 그것을 마름질하여 꿰매는 데에 쓰인 바늘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순조 때 사람인 유씨부인이 '조침문'을 지어, "......오호 통재라.......천은으로 집을 하고 오색으로 파란을 놓아, 곁고름에 채였으니 부녀의 노리개라. 밥 먹을 적 만져보고 잠잘 적 만져보아 널로 더불어 벗이 되어, 여름낮에 주렴이며 겨울밤에 등잔을 상대하여 누비며, 호며, 감치며, 박으며, 공그릴 때에 겹실을 꿰었으니......"하고, 오랜 동안 아껴 쓰던 바늘이 부러진 것을 슬퍼하는 글을 남겨서 규방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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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갯모

이조판서의 벼슬을 지낸 서유구가 지은 책으로 오늘날의 백과사전에 해당하는 '임원십육지'에 베개의 종류가 나와 있다. 그 책에 나온 베개를 들어보면 등나무 껍질로 짠 등침, 양털이나 말털로 베갯속을 하여 작은 방석처럼 여섯 개나 네 개를 만들어서 그것을 서로 이어서 폈다 접었다 하며 높이를 달리하여 쓰는 습첩침, 용반초로 채화무늬나 완자무늬, 수복무늬를 놓아 속에 짚을 채워 가장자리는 검은 녹피로 선을 두른 완침, 나무로 만든 퇴침, 대를 가늘게 다듬어서 곱게 짜 만든 죽점침, 전복 껍질로 여러 무늬를 놓고 옻칠을 해서 만든 나전침, 쇠가죽으로 만든 우피침 들이 있다........

베겟모 베개이름들이 한결같이 베겟모의 재료에 따라서 나누어지고 있다. 이는 곧 베게에서 베겟모가 차지하는 무게가 절대적이라는 뜻이 되겠다. 쌍학을 수놓은 수베겟모, '수', '복' 자와 같은 길상문자를 새겨 복을 빈 나전베겟모

베개는 남자 베개와 여자 베개와 어린이 베개로 구분하여 크게 세 종류로 나눌 수가 있으며, 그밖에도 부부가 함께 베는 베개인 봉침이 있다.

나전베겟모 원앙침, 구봉침, 두둥베게라고도 불린 봉침에 쓰인 나전 베겟모

봉침은 구봉침이라고도 하고 달리 원앙침으로 부르기도 하며 속말로는 두둥베개라고 하기도 한다. 한 쌍의 봉황이 일곱 마리나 아홉 마리의 새끼를 거느리고 있고 그 뒤에는 탐스런 모란이 서로 마주보고 피어 있으며, 그 아래로는 무지갯빛 바위가 우뚝 서 있고 가장자리에는 아자무늬나 뇌문으로 난간을 둘렀다. 봉황은 부부 사이의 금슬이 좋기를 바람이고 일곱 마리의 새끼봉은 슬하에 아들과 딸들이 많기를 바람이며, 모란은 집안에 부귀가 함께 깃들 것을 염원함이고 바위는 생명이 돌과 같이 오래 갈 것을 빎이다.

대체로 배겟모에 새겨지는 무늭들은 이처럼 수와 부귀와 자손이 많음과 편안함과 부부의 금슬이 한결같기를 바라는 것과 같이 복을 비는 뜻과, 그런 것들을 해치려 하는 사악한 잡귀신을 물리치려는 벽사의 뜻이 간직되어 있으니 볼품의 아름다움만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 베개의 베갯모에서 볼 수 있는 색과 무늬와 거기에 고인 정성에서 우러나는 아름다움은 이웃 중국이나 일본의 베개들에서 볼 수 있는 어줍잖은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하다. 또 주름이나 잡고 펑퍼짐하게 말아버린 서양의 베개들과도 바탕부터가 다르다.

사람에게 잠자리가 지니는 뜻은 깊고도 무겁다. 누군가가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고 했다던가? 그렇게 치면 베개도 역사의 한 몫을 차지하는 셈이겠고, 그 가운데서도 베갯모의 몫은 더 크다고 우길 수도 있는 일이겠다. 아닌게 아니라 그래서 예로부터 베갯머리송사를 가장 두려워했던 것도 그 딴에 까닭이 있는 셈이다.

혼인침이라고도 불리는 두둥베개를 베고 누워 밤을 지새며 하룻밤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기도 했다가 세월이 덧없이 흘러간 어느 날에는 등을 돌리고 남남이 되고 말기도 한다. 또 외방 나들이가 잦아진 낭군을 기다리며 첫닭이 울기까지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며 혼자 설움에 겨워 밤마다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베갯모의 아홉 마리 봉이 눈물의 강을 헤엄치게 되는 처지도 있다. 지극히 드물게는 첫날밤에 그 두둥베개를 베고 맺은 금슬이 10년이 하루 같아서 아들딸 낳아 시집 장가 잘 보내고 회갑을 맞고 희수를 치르고 그리고 회혼례를 맞을 때까지 평생을 한 베개로 지내다가 오누이처럼 이승을 마치는 다복한 삶도 있기는 있다.

베갯모는 그날그날의 삶이 좋았거나 궂었거나 역겨웠거나 자랑스러웠거나에 아랑곳하지 않고 밤마다의 반려로 아무 말이 없이 오직 화사한 아름다움과 애틋한 기원을 담고 잠자리를 감싸준다.

베갯모가 떨어져나간, 시체 같은 베개를 베고 사는 현대인들의 삶과, 난질이 잦고 생이별과 이혼이 흔한 현대의 사회현상이 어떤 상관관계라도 있는 것인지나 아닌지 하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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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文學藝術의 추천작으로 알려진 신경림을 생각하면 연상되는 기억들이 많다.
대학교 2학년 교내축제때 지금은 독일에 교환교수로 가있는 아나키즘을 전공한 구승회란 친구와 2인 시화전을 했었다.
급조된 마련으로 미술대학의 이젤위에 내건 서른편 정도 시화는 계명대학 미대를 다니던 박명호란 친구가 밤새워 그렸다.
막걸리 통을 시화밑에 가져다 두고 권커니잣커니 문학과 예술과 군사정권을 들먹이고 시위를 꿈꾸며 젊은 꿈을 쥐락펴락 도도하게 자신만만해지거나 터무니없이 쓸쓸해져 울먹거리게 만들곤 했다.

저 신경림의 '농무'에 나오는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
콩나물과 깍두기 뿐인 안주와 빈 속에 퍼넣던 막걸리에도 쉽게 취하거나 꺽꺽 올리기만 하던 그 시절.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고 앞날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 만큼이나 맨주먹 불끈 쥐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어 안달을 하곤 했었다.

신경림의 '農舞,를 읽던 그해 겨울,
"情限과 삶의 현장"이란 내 평론은 교정을 세차례 보고 교지에 실리려던 순간, 시국을 이유로 거부되고, 학보사 주간의 그 난해한 얼굴이라니...늘 학교에 상주하던 정보과 형사는 날 요주의하고...

아아,
뒷 강물이 앞 강물을 쳐 흘러간 시간의 물줄기는 가이없고,
때로 산다는 것은 이렇게 홀로 맛깔스럽게 곰삭아 가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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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

주머니는 몸에 지녀야 할 여러 가지의 자잘한 물건들을 갊아서 허리띠에 차는 것으로서, 흔히 겹헝겊으로 네모 모양이나 반달 모양으로 짓고 윗무리에 주름을 잡아서 끈을 꿰어 여닫도록 되어 있다.

조선시대만 해도 누구나 다 주머니를 지니게 마련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구분도 없이 함부로 찼던 것은 아니다. 곧 주머니는 차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저마다 달랐으니, 그것을 크게 나누면 궁주머니와 여염주머니가 있었다. 귀주머니의 경우에 아가리에 육모 주름이 잡힌 것이 궁주머니요 세모 주름이 잡혔으면 여염주머니였다. 대체로 궁주머니는 부금 곧 금박을 올리고 수를 놓고 매듭과 천이 호화로웠으며, 여염주머니는 간소하고 단아하였다.

평소에 황색 천은 아무나 쓸 수가 없어도 장가가는 날 하루는 신랑에게 그 천으로 된 주머니를 쓸 수 있도록 했다. 그것은 비록 벼슬을 하지 못했다 해도 장가가는 사람만은 벼슬아치 옷차림인 사모와 관대와 관복을 입게 했던 것과 같은 이치라 하겠다......

신분에 따라 주머니에 구분이 있듯이 성별 곧 남녀에 따른 구분도 있었다. 여자의 것은 빛깔이 화려한 천을 썼으나 남자의 것은 단색이고, 수도 여자의 것은 복잡하고 아름다우나 남자의 것은 없거나 있어도 소박한 것이 예사였다.........

주머니 조선조 순조의 3녀 덕온공주의 손녀로부터 기증받은 남자의 귀주머니(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관 소장)

주머니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쓰임새를 위해서 정성껏 한 바늘 한 바늘 만들어졌던 것이지만 생활에 쓰이는 것만이 그 구실의 모두는 아니었다. 쓰임새에 곁들여 아름답게 몸치장을 하고자 했던 마음씨도 고여있고, 이에 더하여 사(邪)된 것을 물리치고 복을 빌고자했던 어여쁘고 애틋한 소망도 담겨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주머니는 유교적인 덕목과 범절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왕가에서도 그러하였거니와 여염에서도 돌잔치나 혼인잔치나 회갑잔치에는 주머니를 선물로 삼는 것이 거를 수 없는 인사였다. 특히 신부가 첫 근친에서 시가로 돌아갈 때에는 시댁 어른들에게 주머니를 지어 올리는 것이 법도로 되어 있었으니, 이 주머니를 효도 주머니라 일렀다........

수 오방낭자 홍, 청, 흑, 백, 황의 오방색 비단에 십장생을 수놓고 오색 다회로 주머니 끈을 꿰어 도래매듭, 국화매듭을 맺고 색동 봉술을 드리워 장식한 주머니

밝은 빛이 따사롭게 비치는 호젓한 규방 창가에 다소곳이 앉아 수틀을 잡고 무심히 한 바늘 한 바늘 수를 놓으며, 머지않아 배필로 나타날 낭군의 모습을 그려보며 혼자 볼언저리를 붉히는 처녀의 마음씨처럼 우리 주머니의 무늬는 아름답다.

그리고 대갓집 마나님이 청나라 비단을 필로 들여놓고 침선비들에게 사갓댁에 바칠 주머니들을 죽으로 마련하여 혼자 세상을 만난 듯 기쁨에 날뛰던 내력이나, 명절날 귀여운 어린 딸에게 빨간 비단 두루주머니 하나를 사주지 못해 가슴이 미어졌을 가난한 아버지의 사연이나, 한량들로부터 엽전을 걷어들이느라고 손때가 묻어 가죽처럼 번들거리던 주막집 주모의 무명주머니의 사연들이 이제는 아득히 저버려진 지난날의 얘기가 돼버렸다.
이런 저버림과 함께 주머니를 노래불렀던 민요들마저도 두루두루 잊혀져가고 있다.

남산 밑의 남도령아
서산 밑의 서도령아
하늘가에 올라가서
뿌리 없는 나물을 캐어
별당 안에 심어놓고
한 가지에 해가 열고
한 가지에 달이 열고
한 가지에 별도 열고
해를 따라 겉을 대고
달을 따라 안을 대고
금낭 하나 지어놓고
중별 따라 중침 놓고
상별 따라 상침 놓고
외무지개 선 두르고
쌍무지개 끈을 달아
임 줄라고 지은 염낭
임을 보고 염랑 보니
임 줄 뜻이 전혀 없네
(경북 의성 지방의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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