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머리

가우듯이 고개를 뒤으로 제끼고 빗는 여인의 이마에 흐르는 물소리가 소북한 등성이를 이룩하며 삼월에 온다. 온전히 이 한때를 귀 기울이고 겸허히 빗을 잡는 손이 이따금 가벼운 원을 그리며 거기 무늬로 퍼지는 곳에 여인의 모은 눈은 무엇을 새기는가. --- 박양균의 시 '머리를 빗는다'에서

쪽진 머리

사람의 신체 중에서 그 일부를 자유자재로 꾸미고 변화를 줄 수 있는 곳이 머리카락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시대에 따라 혹은 제도에 따라 여인의 여러 가지 발제(髮制)가 있어서 근세조선기만 해도 어여머리, 새앙머리, 얹은머리, 트레머리, 땋은머리, 쪽찐머리가 계층별로 유행되어왔다. 그 중에서도 미혼일 때는 머리를 길게 길러 양쪽 귀밑머리를 땋고 다시 한 묶음으로 기다랗게 땋아 댕기를 맨 땋은머리였다가 혼인을 하게 되면 머리를 쪽찐다.

남자가 더벅머리로 땋았다가 혼례를 올리면 상투를 틀어올리는 관습과 일치한다. 여인들은 이때 귀밑머리를 풀어 길게 빗질해서는 뒷목께에서 틀어올려 쪽을 찌고 비녀를 꽂았다. 이로써 시체말로 여인의 정절을 허물어 뜨릴 때 <귀밑머리를 풀어준다>는 말은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앞에 인용한 시에서도 보는 바와 같이 여인의 머리를 빗는 모습은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동백기름을 발라서 참빗으로 곱게 빗은 머리는 이 땅의 여인네들의 단아함, 매서울 만큼 정돈된 멋, 한치 흐트러짐이 없는 모든 금도(襟度)를 표상한다. 더구나 모시옷에는 옥비녀, 비단옷엔 칠보 매죽잠이라도 꽂았을 양이면 화사함이 더하고, 덧붙여 귀이개, 빗치개 따위 뒤꽂이로 매무새를 지으면 야무져 보이기가 이를데 없다.

우리의 고유 머리 모양은 원래 <얹은머리>가 많았던가보다. 머리를 땋아서 앞머리에까지 둥글게 둘러얹은 것인데, 이후 <다리>를 활용하게 되어서 머리타래가 점점 커지고 높아지기에 이르렀다. <다리>는 숱이 적은 여자들이 머리카락에 덧들이는, 꼭지를 맨 딴머리를 말한다. 단원 김홍도나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보면 여염집 부녀자들이 거창하게 머리를 땋아올린 모습들을 볼 수가 있다.

이처럼 불편을 무릅쓴 사치가 극심해지자 영조 연간에 이르러 왕명으로 쪽머리로 통일할 것을 포고하여 시행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하지만 풍습이란 건 제도만으로 뿌리째 뽑히지는 않는 법이다. 머리 치장에 맛을 들인 여인들은 이후에도 가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시집을 갈때는 의류나 장롱과 곁들여서 <다리>도 동백기름으로 잘 손질하여 소중하게 간직해 갔던 사정으로도 짐작될만한 일이다.

쪽머리에서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장신구에 족두리가 있다. 부인네들이 의식용으로 쓰던 일종의 관이랄 수 있겠다. 대개 까만 비단으로 만들었는데 아래는 둥글고 위쪽은 여섯 모가 진 데다 옥구슬, 색색의 보석, 수실을 달아 화려하게 꾸몄다. 나라에서 <다리>를 금하고 쪽머리를 하도록 강제했을 때, 검소한 생활을 위해 검은 족두리를 쓸 것을 장려한 뒤로 항간에서 일반화되기도 했었다.그런데 이 또한 호사가 극해지자 말썽이 일기도 해서 차츰 퇴조하여 예복을 갖출 때에만 쓰다가 드디어는 전통혼례때 신부가 착용하는 것으로 정착되고 말았다.

족두리는 장식이 없이 까만 천으로만 된 것을 민족두리, 옥판을 밑에 받치고 산호, 창강석, 밀화(蜜花), 진주구슬을 꿰어 치렁치렁 매단 것을 꾸민족두리라 한다. 사방에 금박을 박고 여러 가지의 패물로 꽃장식한 것을 칠보족두리라 부르기도 해서, 칠보단장을 한 젊은 여인의 고운 얼굴을 두고 <칠보홍안>이란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얹은 머리(왼쪽) / 땋은 머리(오른쪽)

안방 장판이 거울같이 반지르르한 가운데 좌경(座鏡)을 앞에 두고 머리손질을 하던 여인의 모습은 이 나라에서만 볼 수 있었던 표정이었다. 까만 머리카락을 올올이 수건으로 비벼 말리고, 가리마 꼬챙이로 머리카락을 이마로부터 정수리까지 양쪽으로 갈라 붙여 가리마가 선명하게 지도록 한 다음, 참빗으로 거푸거푸 빗질을 한다. 서캐가 있으면 말끔히 털어내어 비로소 칠칠한 윤기가 감돈다. 머리타래를 칭칭 감아 목 위로 바짝 조여서 쪽찐 후 비녀를 살풋 꽂으면 화장치레는 끝난다.

하얀저고리 동정 위에 목덜미는 그대로 백옥이요 상아 빛깔이다. 이제 곧 어룬님이 찾아드실 터이다. 옥양목버선을 신어야지, 단정하게 빗어넘긴 쪽머리가 여닫이창에 비쳐서 금방에 또하나 달덩이가 비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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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

지아비를 위해 경대 앞에서 단장을 하는 아낙네의 자태는 그지없이 고혹스럽다. 거울 앞에 앉을 때는 자기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남에게 제 모습이 어떻게 비쳐질까를 더욱 염두에 두게 되므로 거기에는 자연 애교와 미태가 끼어들게 마련인 때문이다.

목침 겸용 좌경(왼쪽) / 좌경(오른쪽)

확실히 거울은 여심의 허영을 부채질하고 관심을 집중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무르녹는 봄밤에 임을 기다리면서 펴든 손바닥만한 동경(銅鏡), 산골길을 가다가 계곡물에 땀을 훔치고 지그시 용자를 응시했던 수경(水鏡), 또는 곧 자리에 들 낭군을 기다리면서 목덜미의 분칠이며 몸매를 감싸는 옷매무새를 살폈던 체경, 그 어느 것도 마음을 다잡아매는 신통력은 매한가지였다.

고려조의 대문장가 이규보(이규보)는 일찍이 '경설(경설)'에서 이렇게 설파한 바 있다. <거울이란 얼굴을 보는 것이다. 얼굴에 불길한 것이 묻지나 않았는가, 또는 얼굴빛이 평화스럽지 못하지나 않은가 하는 것을 살피는 것이다. 그래서 군자는 거울을 대할 적마다 그 거울의 맑은 본성을 취해 얼굴에 비치는 거울처럼 자신의 마음을 맑게 하여 세상을 비추었던 것이다.>

어떤 연유로든 남녀에게 공히 요긴했을 거울은 세월을 거슬러 오를수록 귀했다. 아마도 문명시대 이전의 원시인들은 돌 한쪽 면을 갈아서 쓴 석경(石鏡)을 사용했을 터이다. 오늘날에도 거울을 두고 <색경>이라 발음하는 사연도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청동기시대와 철기시대를 거치면서 한반도에서도 여느 지방과 다름없이 동경과 철경(鐵鏡)을 많이 남겼다. 사실, 구리를 재료로 한 푸르스름한 동경은 삼국시대뿐만 아니라 고려조와 근세조선기를 일관하며 널리 인구에 회자되었던 거의 유일한 거울이었다. 그런 사이에도 중국으로부터 은거울, 수정거울, 후대에 와선 유리거울이 들어와서 상류계층에 호기심을 자아내며 귀애되었을 건 짐작키 어렵지 않다.

이처럼 남녀노소나 빈부귀천을 초월해서 선호되었던 거울에의 갈증은 1880년대에 우리 나라에서도 판유리공장이 세워짐으로써 일시에 해소되기에 이르렀다. 유리 뒷면에 아말감을 올려서 빛이 반사됨으로 인해 모든 물체를 비추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주로 청동거울을 거울걸이(鏡架)에 걸어놓고 비추어 보았거나, 유족한 집안에선 경대함의 윗뚜껑을 젖혀 거울을 40도쯤 각도로 세우게 해서 몸을 숙인 채 바라본 경대가 있었다. 이 경대야말로 지난 시대의 여인의 숨결과 정서를 대변해주는 멋진 유산이다.

좌경

조선시대 후기에 거울이 보급되면서 제작되기 시작한 이래 그 사용이 널리 유행되었다. 뚜껑을 열면 뚜껑에 달린 경첩이 꺾어져 뚜껑 안쪽에 부착된 거울이 비스듬히 서도록 지탱해준다.

경대는 목재를 써서 직사각형의 함 모양을 이룬 화장용구였다. 흔히 윗뚜껑 내면에 동경이나 거울이 부착되어 있기도 하고 혹은 뚜껑을 반닫이로 접어 열고는 안쪽에 따로 거울판이 있어서 그 위에 40도 각도쯤 세워지게 구성된 것도 있다. 경대엔 대개 서랍이 달려 있어서, 한 개로 깊게 달린 것이거나 앝은 서랍이 세 낱 층층으로 되어 있기도 하다.

이 서랍 속에 화장구라 할 빗, 빗치개, 비녀, 뒤꽂이, 족집게 따위가 옹기종기 포개져 있고, 또 다른칸에는 분접시와 분물통, 연지 반죽그릇 같은 화장품이 들어앉았다. 셋째 칸에는 머리빗질할 때 빠진 머리카락들이 알뜰히도 모아져 있기 십상이다. 머리카락은 신체의 일부여서 함부로 버리지 않고 이처럼 모았다가는 정월 초하룻밤에 한꺼번에 태우곤 했다.

경대는 생나뭇결에 옻칠을 한 것, 홍칠을 한 것 혹은 나전칠기를 한 것 또는 화각이나 대모(玳瑁)장식을 한 것 등으로 다양한데,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전아하기 짝이 없다. 나전무늬를 입혔거나 대모문양장식으로 수놓은 것은 그것대로 화려하고, 단단한 목질에 모서리와 필요한 곳마다 백동 또는 놋쇠장식을 단 것은 그런대로 엄전스러웠다.

규방의 아취나 법도는 이러한 유형의 물상, 아리따운 장식물에서도 영향받는 법이다. 단아한 경대를 앞에 두고서 머리손질에 한치의 흐트러짐이 있을 수 있겠으며, 차분하게 단장을 끝낸 자세에 부실함이 끼어들 틈바구니가 어디 있겠으랴. 여인의 하루는 경대 앞에서 빗질하는 걸로 아침을 맞고, 밤중엔 여기서 비녀를 푸는 것으로 마감된다.

어찌 여심이 경대에 다소곳이 스며들었지 않을까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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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빗

빗은 머리카락을 빗는데 쓰는 도구이다. 옛 우리 풍속에서는 이발하는 관행이 없었고 서양에서처럼 가발이나 머리털을 볶아 장식하는 법도 없어서, 남녀를 막론하고 생머리카락을 가지고 그대로 꾸밀 수밖에 없었다.


빗은 남자용과 여자용에 따라 크기가 달랐으며 빗살이 촘촘한 참빗과 얼레빗이 있었다.

상투를 틀어올린 남정네나 트레머리를 한 여인네 또는 머리를 땋아 늘였던 처녀, 총각의 어떤 머리털도 풀어 감으면 긴 생머리카락이게 마련이었다. 그러자니 몸 치장에는 으레 각종 빗이 따랐고 그것이 즉 기초 화장용기구가 되기도 했다.

근세 조선의 탁월한 풍속화가였던 김홍도의 화첩 '빨래터'에는 개울에서 허벅지가 드러나도록 치마를 걷어붙이고 빨래를 하는 아낙네 곁에서 감은머리를 손질하는 여인의 모습을 배치하고 있다. 발치에는 예외없이 얼레빗과 참빗이 가지런히 놓였다. 그 장면을 바위뒤에서 점잖은 양반네가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훔쳐보고 있어 해학을 물씬 풍긴다.

단오를 앞두고는 모든 여인들이 창포물에 삼단같은 머리를 감아 곱상하게 가리마를 타서 빗어넘겼다. 물기가 가신 머리카락에 동백기름이라도 바를라치면 까만 윤기가 돌면서 단정함이 얼음장처럼 매서웠다. 그런 한편, 하얀 목덜미를 설핏 보이면서 머리 손질을 하고 있는 자태는 또 얼마나 관능적이며 고혹적이란 말인가. 단원의 그림에 나오는 양반도 결코 주책머리 없다고 눈흘김해선 안 될 성싶다.

시인 이규호는 그 살냄새가 아련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촉촉한 언어로 읊은 바 있다.

물 넘듯, 그대는/ 첫김 서린 목욕물 넘치듯/ 발가벗고 앉아서 머리를 빗는다./ 그대 머리숱은/ 잎 핀 수양버들의 물오른 가지로 치렁치렁 늘어서서/ 빗질하는 그대 손가락 마디의/ 주름살 길로 비켜 나와/ 물 넘듯, 그대는 해를 옮겨 얹힌다.

봄비 소곡(小曲)'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저 지난 시대의 농염한 기녀 황진이의 이미지가 와 닿는다. 머리 손질하는 여인이 실제로 나체가 아니어도 풀어헤친 머리카락은 여인에게서 개방과 방심을 환기시키므로 발가벗었다는 은유가 성립될만도 하겠다.

이처럼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머리 손질을 할 때에 빗이 필요하다. 먼저 헝클어진 머리를 용이하게 풀기 위해 얼레빗(月梳)을 사용한다. 반월형으로 생긴, 빗살이 성긴 것을 말한다. 얼레빗으로 첫손질이 끝나면 그 다음 참빗으로 정성을 다해 말끔히 빗는다.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이 낱낱으로 빗기려니와 모발에 박힌 가루 같은 서캐도 씻은 듯이 훑어진다.

기름때가 올라 윤이 반지르르한 참빗이야말로 여인네의 숨결이 밴 제일의 애완용품이었다. 일명 진소라고도 하는데, 중앙에 가로 널찍한 대쪽이 앞뒤에 붙어 있고 양날은 대오리를 잘게 쪼개서 빗살이 아주 가늘고도 촘촘한 대빗이다. 크기도 한 손아귀로 쥐기에 안성맞춤이며 무게 또한 위에서 아래로 쉬 훑도록 가볍다.

빗,빗집,살쩍밀이
빗과빗을 보관하는 빗접이다. 살쩍밀이란 남자가 상투를 틀고 망건을 쓸 때 관자놀이와 귀사이에 난 머리털, 즉 살쩍이 흩어져 내리는 것을 막기 위하여, 망진속으로 밀어 넣을 때 쓰던 물건을 말한다.

참빗질을 해서 머리를 땋거나 틀어올리면 끝매무새로 면빗을 써서 귀밑머리털을 수습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귀밑머리털이 아니라 뺨 위의 귀 앞에 난 잔 머리카락으로, 이를 <살쩍>이라 한다. 남자가 망건을 쓰고난 후 이 살쩍을 망건 속으로 밀어넣는 걸 <살쩍밀이>라고 한다. 살쩍을 손질하는 빗이 면빗이며 대개 반달형으로 된 아주 조그마한 빗을 가리킨다.

이외에도 오늘날의 빗처럼 기다랗게 만든 빗은 음양소(陰陽梳)라 했다. 빗은 대나무로 많이 만드나, 그밖에 쇠뿔, 대모(玳瑁 ), 박달나무, 밀감나무, 참죽나무, 배나무 따위 뿔과 목재가 재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모두 직사각형 또는 반원으로 모양을 만들어서 빗살을 용도에 맞게 굵고 잘게 에어내어 쓰임새 좋도록 만들었다.

우리 옛 여인들은 빗을 정조의 빗장쯤으로 생각했던 흔적이 역력하다. 규수가 간직했던 빗이 외간남자의 손으로 넘어가면 정조를 잃은거나 진배없이 낙심했다. 처녀가 죽으면 생전에 쓰던 빗을 뭇사람이 다니는 길바닥에 버려둠으로써 남자의 밟힘이 되게 한 것도 신원(伸寃)의 한 방편이었음을 유의해볼 일이다.

할머니, 어머니가 쓰던 참빗에선 해묵은 모성이 느껴지지만 남의 집 참빗은 도리없이 에로틱한 정념을 일깨운다. 이런 자연적인 충동을 누군들 계면쩍어할 필요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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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선

우리말에 <외씨 같은 버선>이란 비유어가 있다. 볼이 조붓하고 갸름하여 펀펀한 발 모양새를 캄플라주함으로써 신으면 맵시가 나는 버선을 일컫는다.

버선, 버선본(버선을 만들기 위한 본)

예로부터 동양권에서는 여인의 미의 척도로서 몇 가지의 잣대가 이루어졌다. 눈썹은 반달같이 가늘고 동그스름하며 어깨는 좁은 채 아담해야 하듯 발 또한 작고 오동통해야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당나라 이후부터 여인의 발을 작게 하기 위해 전족이 유행했었다. 여자아이가 네댓 살이 되면 발에다 긴 천을 친친 감아서 발의 발육을 억제한 것이다. 이에 비해서 버선을 고안하여 여자의 발을 걀쭉하고 통통하게 보이도록 도모했던 한국인들은 얼마나 슬기로운가.

버선은 발 모양을 어여쁘게 양식화한 버선본에 따라 무명, 광목을 재료로 하여 두 쪽의 천을 이어 붙여 만든다. 눈부시게 흰 옥양목으로 만든 버선발을 보노라면 한국 여인의 정서의 본향이 거기 있음을 발견한다. 새댁무렵의 어머니의 모성이 있는가 하면 여인의 관능이 숨쉰다.

버선은 그 모양만으로도 한껏 미감을 자아낸다. 버선목에서 뒤꿈치와 뒤축을 돌아서 앞부리에 이르는 선은 동그스름하여 평화와 풍만함을, 앞쪽 버선목에서 버선코로 휘어지는 곡선은 날렵하고 새침스런 느낌을 준다. 그 버선코는 어떤가. 그저 원만하고 대범스런 버선의 형태에 뾰족한 코를 만들어놓음으로써 전체적으로 다이내믹한 변화를 준다.

살짝 솟구쳐놓은 코. 이것이 한국인의 멋이다. 송편을 만들어도 소를 넣어 배가 볼록하게 드러나는 반달형을 지은 끝에 두 귀쪽을 뾰족하게 하여 살짝 휘감기게 한다. 기와집을 보면 용마루에서 사선을 이루며 내려 뻗다가는 처마끝에서 이 또한 날아갈 듯 치켜올렸다. 이승에 발붙여 살면서도 어딘가 피안의 세계를 꿈꾸며 지향하는 의지의 소산이겠다.

개화기까지만 해도 우리 겨레는 버선에다 짚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다. 삼 껍질로 여섯 날을 두어 삼은 미투리를 신으면 버선코가 끼인 채 삐져나왔다. 착용감이 가볍고 한산해서 걸음조차 조붓하고 얌전스러웠겠다.

하지만 양가의 부녀자 맵시만으로 버선을 이해하는건 무리이다. 모든 남정네도 광목버선과 짚신을 신고 돌자갈길과 진흙땅에 젖으면서 가파른 산야를 헤집고 다녔던 것이다. 물기에는 속수무책이고 바닥이 흙투성이가 되어 남루를 떨칠 길 없었으리라, 이런 습속이 외국인의 눈엔 기이하게 보였던지, 근세조선 후기에 이 땅으로 밀입국했던 카톨릭 선교사들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당신은 적어도 버선은 신게 될 것입니다. 조선 사람은 누구나 극빈자가 아닌 한, 그리고 들일을 하지 않을 때는 버선을 신으니까요. 하지만 비단이나 양털, 면 같은 재료로 만든 탄성 있는 양말이라고는 생각지 마십시오. 그것은 그저 끝이 뾰족하게 되고 발 모양에 맞도록 거친 천 두조각을 꿰맨 것으로 신으면 거북한 것이나 어떻든 발을 가려줄 것인데, 이 것이 조선의 버선입니다.>

이처럼 황량한 세월을 살다가 일제때 흰고무신이 출현하여 드디어 버선은 광채를 띠기에 이르렀다. 여인의 흰고무신은 볼이 좁고 갸름한 버선발을 담기에 안성맞춤으로 만들어져 나왔다. 여름철엔 홑버선으로 산뜻하고 겨울이면 겨울대로 겹버선으로 푸근했다. 발이 시릴 정도면 솜버선, 누빈버선을 신을 수 있었고 명절 때 아이들은 꽃버선을 자랑했다.

버선 본집(왼쪽) / 버선 본집과 버선본(오른쪽)

버선은 두짝이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나 모든 사물을 음양과 내외로 분별할 줄 알았던 한국인들은 이것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버선목의 바느질 눈이 오른쪽으로 된 것은 오른발, 왼쪽으로 된 것은 왼발용으로 찾아신었다. 분별은 절도를 낳고 절도는 예의에 이른다.

우물에서 부엌으로, 안방에서 대청마루로 들락거렸던 저 옥양목 외씨 버선,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사붓사붓 걸었던 여인의 걸음걸이엔 달무리 같은 정서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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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 두루마기

남자들의 웃옷은 저고리, 조끼, 마고자가 주종을 이룬다. 저고리는 모든 한복이 다 그렇듯 여름에는 통기가 잘 되고 겨울에는 보온이 되는걸 기본으로 한다. 계절에 따라 옷감을 달리해서 춘추용으로는 항라, 삼팔, 노방, 부사견, 옥양목을, 여름용으로는 모시, 항라, 생삼팔, 춘사, 안동포, 초포 등을, 겨울용은 방초, 명주, 옥양목이 주재료가 된다.

남아 광목 솜 바지 저고리

저고리는 상체를 감싸는 천에다 동정과 고름을 장식한 옷이다. 더운 철에는 홑감이지만 추운 때에는 솜을 받쳐서 지었으므로 한결 푸근하고 넉넉했다. 조끼는 남자들의 한복 차림에서 악세서리적 구실을 해주는 데 불과하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실은 호주머니가 여럿 달려 있음으로 인해 소지품을 보관하는데 기여한다. 물론 저고리 앞섶이 헤어져서 헛헛할 우려가 있기에 단추가 많이 달린 조끼를 착용함으로써 단정을 기하는 이점도 간과할 수 없는 점이긴 하다.

조끼 위에 덧껴입는 마고자는 단순한 남성 복장에 호사함을 더해주고 추위를 막는 방한의 효과가 있다. 물색 고운 옷감에다 금이나 옥으로 된 큰 단추를 달아 한껏 멋을 낼 수 있었으므로 예전부터 널리 일반에 보급되어왔고 특히 노인들에겐 평상복으로 애용되었다. 바지는 온돌방 구조에서 앉아 생활하는 데에 썩 안성맞춤인 의복이다.

한복의 바지는 입기에 풍성하고 통이 넓은 게 특징이다. 풍덩하게 넓은 허리춤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접어 여미고 그 위에 허리띠로 동여맸으며, 가랑이 아랫도리도 역시 통을 접어붙여서 대님으로 졸라 매었다.

바지는 그지없이 편하다. 여름날에 서민들은 쇠코잠방이라는 통 좁은 바지를 입기도 했으나 겨울철에는 솜을 두어 지은 핫바지를 입는데, 좀 비속한 비유어이긴 하지만 너무나 쉽고 편한 것을 가리켜 <핫바지에 똥싸기>란 말이 생겨난 것만 보아도 알 일이다.

한복은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나라의 기후, 풍토, 습관과 또 이 터전에서 살아온 선조들에 의해 가다듬어져왔기 때문에 미관상으로나 위생적인 측면에서 가장 아름답고 안정감을 갖게 되며 품위가 돋보임도 사실이다.

그런 한편, 남자의 바지저고리가 이처럼 입성이 푸근하고 편안하여 한국인의 성정이 누긋하고 게으르며 무사안일에 빠지도록 한 것은 아닐까. 그것이 원만하고 평화롭게 하는 점은 취할만하겠으나 도무지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게 흠이다.

옷고름을 조붓이 매고 허리끈과 대님으로 조인 풍채는 절도를 표방하는 한편, 쉬 풀어져내려 옷차림이 산만해지기 쉬운 것은 낭만과 무절제의 악덕을 체질화하게 했음직하다.

우리의 남성 복장에서 체모를 살려주고 훤칠한 미감을 발휘케 하는 것은 바지저고리 위에 덧입은 두루마기일 것이다. 조선조까지만 해도 원래 남자의 겉옷은 다양하여 도포, 창의, 중치막, 중의 등이 있었다. 그러던 것이 전술한 바대로 갑신년 개혁때 장식이 단순하고 간편한 두루마기 하나로 통일되기에 이르렀다.

흑색 삼베로 만든 두루마기

흑색 삼배로 만든 두루마기이다. 형태는 두루마기와 같고 소매가 넓은 것이 특색이다. 홑으로 되어 있어서 등바대가 붙어있다.

어쩌면 두루마기는 우리가 한민족임을 지키고 그 긍지를 누리는 상징물일 수도 있다. 가슴에 끈을 동여맨 도포는 양반의 위엄과 권세의 한 표상일 것이나 두루마기는 서양문물에 대한 우리 전통의 보루, 일제 문화에 대항한 우리 자존의 방패였다. 일제 36년간에는 양복이 널리 보급되었으나 일제를 배격하는 반항정신과 민족정신의 현양으로써 우리 국민이 두루마기를 외출복으로 착용했던 점은 음미에 충분히 값한다

한복이 남아있는 한 우리 민족은 푸근한 인심, 여유로운 행동거지, 그리고 마음의 안락과 평화를 그려낼 수가 있었다. 바지저고리와 두루마기가 사라진 다음 사람들은 더욱 현실적 이익 추구에 급급해지며 영악스러워졌다. 옷이 풍속의 반영임과 동시에 옷에 따라 인심도 반응한다. 각박한 세태를 살면서 어찌 저 정관적(靜觀的)인 한복의 형태, 누긋한 입성, 바느질과 푸새, 다림질로 차림새에 정성을 쏟았던 세월에 향수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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