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생각]-신현림

1.술 마시기 좋은 방

햇빛에 내어말린 고급 속내의만큼
사랑도 우정도 바래더라
변하지 않는 건 무엇인가
속이 텅 비면 견디지 못해 마시는
술과 음악은 세월을 썩게 하는 정겨운 습기라
겨울비 내리는 밤 빌리 홀리데이와
바하보다 절실한 <혼자만의 사랑> 열한 번
<백학> 일곱 번 번갈아 들으며
마음의 지붕인 쓸쓸함을 위하여
식구와 뭇사람의 건강을 위하여
홀로 건배하는데 창 밖 깊은 연못에서
거북이가 솟아올라
맥주 한 상자 밀고 방으로 기어오더라

2.술자리

내가 이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앞으로 몇 번이나 만날까
이것이 마지막이면 무슨 말을 할까
머리라도 쓰다듬어 줄까
情人들과 즐겁게 술상을 둘러 앉다
한 명씩 떠나는 것이 인생일까

조촐한 인생이란 술자리

.........................................................................................
* 외로워 술을 마신다
수시로 달려드는 허기처럼 혹은 오랜 갈증처럼 술을 마신다
자주 자주 덧나는 상채기에
그리움으로 싸매는 붕대인양,
억병으로 취하도록 술을 마신다

산다는 건
술취한 만고강산 노래하듯 흥겨운 추억처럼
때로 그윽하고 때로 아득한 외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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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구상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
*
"구원의 詩心"  가난한 영혼에 다 바친 시인 구상(具常.85세)선생이 11일 오전3시 지병으로 별세하셨다는 신문 보도를 읽다.
소개하는 시는 '문학사상'  2001년 10월호에 발표한 시로 시인 스스로 '내 사상을 가장 잘 담은 시'라고 한 작품이다.
살아 생전 그 많았던 유혹의 '자리' 제안 다 물리치고 '수염 기르며 사는 야인(野人)으로서의 삶'에 충실하며, 카톨릭 신앙을 바탕으로 인간존재의 문제를 탐구하며 영적 작품 세계를 일구어 내신 큰 시인 한 분 떠나 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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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상]-이재행

인생은 더러
외상일 수도 있는 일이라고
아내를 설득시켜 본다

당신은 어쩌면 그렇게도
외상을 좋아하느냐며
아내는 내 말에 함정이 있음을
눈치로 알고 있다

내 말의 위험한 함정을
아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는 바 아니면서

내 아내의 첫사랑의
눈부신 황혼녘을
나는 훤히 알고 있으면서

인생은 잡지의 표지나
혹은 안개와도 같은 것이라고
말을 달리 했더니

서러운 나의 所以(소이)를 눈치 챈 아내는
그런 허황한 소리가 어디 있느냐며
인생은 엄연하게
현금이라고 못을 박았다

사는 일이 어려워
오늘은 현금으로 술을 마신다
모르는 사람들과 처음 만나
하루의 溫氣(온기)로 술을 마신다

..........................................................................................................
.*
십 년 정도 터울 지는 형을 처음 만나 '형용사의 가을"이란 시집 한 권을 건네받은 그때가 봄이던가 가을이던가.
때로,
............
............
술을 마신다.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씹으며
형의 독설을 추억하며 술을 마시곤 한다.
어느날 문득 형은 인생은 엄연히 현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안간힘 끝에 진작 대봉성당 장례미사를 거쳐 금곡 천주교 장미공원으로 떠나 가고.....
요즘은 사는게 너무 절실해
때로 인생이 외상이었으면 하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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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맨살에 맨드라미 꽃모종을 심을 때]-이기철

나는 네 정결한 살 한 줌을 베어내고 거기다 맨드라미
꽃모종을 심고 싶다
그러나 그때마다 너는 두꺼운 철문이었고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었다. 성벽의 이쪽에서 내가 끌어당기는 예순 날의
끈 끝에는 너의 갈색 스타킹이 달려 나온다.
찔레꽃 향기 같은 너의 살냄새와 흰 블라우스 속에 감춘
너의 작고 앙칼진 속 마음이 군데군데 루즈 빛깔로 묻어 있는
너의 한 칸 방 벽지 조각도 더러는 달려 나온다.

문을 열어라. 나는 너의 금욕과 함께 서른 개의 밤을,
동대구에서 추풍령으로 달리던 죽은 기차의 경적을 더불고
안락의자 두 개 놓인 너의 작은 방으로 가겠다.
문을 열어라. 그리고 너의 가장 깊은 바다에 닿을 수 있는
나에게 너의 비밀번호와 열쇠꾸러미를 빌려다오.
희고 포근한
담요 깔린 너의 부드러운 금기의 안방문으로 나는 가야 한다.
너는 그때 너의 굳게 잠긴 지퍼를 열고 숨겨 두었던 즐거움
한 가닥을 내 손바닥에 놓아 다오.

나의 수삼일의 불면과 열흘의 기도와 금식들이 천국보다
지옥의 만찬에 초대받을지라도 나 아닌 것은 모두 식물적인 것들 뿐이라면
즐거움은 더하겠다.
우리가 만나는 삼덕동이나 만촌동 길목은 언제나 무지개빛이고
겨울 눈발이고 풀벌레 잠드는 오월의 장미 잎새다. 문을 열어라.

.....................................................................................................
*좋겠다.
누군가의 맨 살 물컹 베어내고 맨드라미 꽃모종 심고 싶은 이가 있다는 것이.
때로 누군들 꿈꾸지 않았으랴 지옥의 만찬이라도 좋았을 한 철을.
삼덕동이나 만촌동 혹은 이름없는 골목길 그 어느 곳 쯤에
머물던 발길, 아니 그 헤메임의 몇 몇 날이
이제는 흔적도 없이 자취없는 나날되었으니...
오래된 시를 읽다 보면
추억이여, 그리움이여
세월은 늙고 하나, 둘 그리운 것들만 저홀로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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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정일근

모난 밥상을 볼때마다 어머니의 두레밥상이 그립다.
고향 하늘에 떠오르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달이 뜨면 피어나는 달맞이꽃처럼
어머니의 두레밥상은 어머니가 피우시는 사랑의 꽃밭.
내 꽃밭에 앉은 사람 누군들 귀하지 않겠느냐,
식구들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 먹고 싶다.
세상의 밥상은 이전투구의 아수라장
한 끼 밥을 차지하기 위해
혹은 그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이미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짐승으로 변해 버렸다.
밥상에서 밀리면 벼랑으로 밀리는 정글의 법칙 속에서
나는 오랬동안 하이에나처럼 떠돌았다.
짐승처럼 썩은 고기를 먹기도 하고,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밥상을 엎어버렸을 때도 있었다.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밥상에 앉고 싶다.
어머니에게 두레는 모두를 귀히 여기는 사랑
귀히 여기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라 가르치는
어머니의 두레밥상에 지지배배 즐거운 제비새끼로 앉아
어머니의 사랑 두레먹고 싶다.

*두레밥상: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음식을 차려먹을 수 있도록 크고 둥글게
만든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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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른아른 화사한 봄볕 같은 것이 혹은 발목을 건드리며 밀물져 오는 잔잔한 물결 같은 것이 마침내 훈훈하고 따스하게 온 가슴 번져 내리는 반공일 오후의 여유로움 같은 것이 문득 잔치날,그 옛날 외할머니 잔치날 같이만 정겨워라.

살아가며 진작 예전에 잃어버린,
두레밥상에 앉고 싶어라.
모처럼 일부러라도 짬내어
오손도손 머리 맞대고 올망졸망 꼬물, 꼬물락거리는
유년의 일가 꼬마들 죄모여 두레밥상 받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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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05-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올리시는 시는 항상 가슴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유년의 기억 한자락 불러내게 만드는군요.
항상 좋은 시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