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녀

그날 옷섶에서
가만히 내어주신 선물
싸고 싸고 또 싸서
보드러이 감추어 두셨던
옥비녀!

파릇 산 듯 눈부신 그 빛
졸음낀 눈이 총명스레 밝아집니다.
말없는 이 비녀
어느 날 내 머리에 꽃으리까?

-모윤숙의 시 '옥비녀'에서

비녀

여자들의 머리에 쪽을 고정시키는 물건이다.
왼쪽그림 : 옥잠, 칠보죽잠, 석류잠, 산호잠 / 오른쪽 그림 : 봉잠, 은죽잠

비녀는 한국의 옛여인들에게는 가장 소중한 애장품의 하나였다. 부인의 땋은머리를 쪽찌어 풀어지지 않도록 쪽에 가로질러 꽂는 장신구로 쓰임이 주용도이나, 장식성도 겸했으므로 여인의 생활반경에서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필수적인 악세서리였다.

재료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금, 은, 백동, 놋, 진주, 비취, 산호와 같은 귀중품에서 나무, 죽, 뿔, 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그러므로 전자와 같은 재료의 비녀는 마치 반지, 목걸이, 귀걸이, 노리개 등과 같은 비중의 재화적 가치를 지녔음을 알 수가 있다. 때문에 사사로이 쓸 돈이 흡족치 못했던 여인네들이 급전이 필요한 때에 이것이 한몫을 해냈을 것임은 쉽게 추측이 간다.

비녀가 패물로서의 가치를 지닐수록 자연스레 남녀간 애정의 표시로 자주 이용되었을 법하다. 전시(前示)한 시에서 보듯 남자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는 선물로 옥비녀를 선택했던 것은 하나의 관습이었다. 오랜 출타에서 돌아온 지아비가 조강지처 지어미에게 또는 사내가 몰래 정분을 나눈 여인에게 정표로 준 것도 이것이었다.

비녀는 또 옛 여인들이 향유했던 몇가지 안 되는 화장구 중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규방의 장지문 앞에서 면경을 든 부인을 상상해보라. 오늘날과 같이 피부 다듬기의 기초화장이나 특정 부분을 강조하는 부분화장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있어서는 깨끗한 세수와 정갈한 머리손질이 화장의 주류를 이루었을 것이다.

빗치개

빗치개는 원래 빗살 틈의 때를 빼는 도구이지만, 가리마를 타거나 밀기름을 바르는 데도 쓰였다. 빗치개는 뒤꽂이로도 사용되었다.

비녀의 생김새는 대개 한쪽이 일(一)자형으로 밋밋하고, 반대편은 뭉툭지게 하여 쪽머리에서 빠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흔히 이 꼭지 쪽에 여러모양의 장식을 꾸몄는데 장식이 많은 비녀를 <꾸민잠>, 별로 모양을 내지 않은 걸 <민비녀>라 부른다. 서민 부녀자는 민비녀를 썼고, 중류층 이상의 계층에선 꾸민잠을 상용했는바, 비녀를 종류별로 나눌 때는 이 꾸밈의 형태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비교적 정형화된 몇가지 모양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 봉잠(鳳簪) : 봉황의 모습을 새긴 비녀. 2. 용잠(龍簪) : 용 머리의 형상을 새긴 비녀. 3. 화월잠(花月簪) : 꽃과 달의 모양을 꾸며 새긴 비녀. 4. 매죽잠(梅竹簪) : 매화나 대의 잎 모양으로 새긴 비녀. 5. 국잠(菊簪) : 국화잎 모양을 새긴 비녀. 6. 석류잠(石榴簪) : 비녀 꼭지에 금이나 은으로 석류 꽃송이를 새긴 비녀. 7. 각잠(刻簪) : 비녀 몸체를 모지게 만든 비녀.

이밖에도 호도잠, 서북잠, 흑각잠 등이 있으나 일반인들 사이에 널리 쓰였던 것은 형태가 가장 단순한 오두잠이란 비녀였다.

누군가는 비녀야말로 부녀자에게 있어서 정조의 자물쇠요 그 빗장이라고 갈파했다. 비녀가 안온하게 자리잡아 있을 양이면 행실이 한치 흐트러질 턱이 없고 동시에 정절에 흠이 갔을 리 없다는 뜻이겠다. 또 비녀 꽂은 자리가 어지럽다면 문빗장이 열렸음의 증좌이려니 그로써 난행을 짐작해볼 수도 있잖겠는가?

옛 속담에 <행사 후에 비녀 빼어갈 놈>이란 말도 우연히 생긴 게 아니겠다. 짐짓 불량스럽고 의리, 인정 없는 사내를 일컫는 속담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그 근저에는 역시 정절과 비녀가 동의선상에 놓여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우리 한국인에게 있어서 비녀는 어디까지나 단정한 품행, 고아한 정실의 상징이다. 그리고 은비녀, 옥비녀도 울긋불긋한 중국 비단옷의 장식물로선 어울리지 않고 흰 명주 또는 모시 치마 저고리 위에 받쳐졌을 때에야 제 격조를 지닌다. 명징한 아미로부터 가리마를 넘어서 쪽찐 비녀로 감도는 능선에서 우리 옛 여인들의 절제된 미, 서슬 푸르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가늠할 수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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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3-28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문화를 찾아서.
님의 유익하고 재미있고 은은한 향내마저 감도는 글,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편안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함은 옷가지나 일용의 자질구레한 물건을 담아두기 위해 나무로 만든 궤짝(상자)을 뜻한다. 농이 옷 간수를 주목적으로 하여 방 한켠에 좌정시킨 치장용 가구인 데 비해 함은 특정한 물건을 간직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꾸민 애완물의 성격을 띠고 있다.

가장 많이 쓰는 혼인 예장함(禮狀函)은 혼서, 채단을 넣기 편리하게끔 직사각의 형태를 지닌 편이다. 이밖에 노리개나 보석 따위를 넣어두는 함은 아주 작고 가벼워도 무난하다. 관복함은 함 바닥에 관복을 개켜 넣고 뚜껑 쪽으로 사모를 넣기 좋도록 가운데가 불룩 솟아나게 했으며, 딴머리함은 8각으로 각을 지게, 또 족두리함 같은 것은 6각으로 높다랗게 만들어 아래쪽으로 서랍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함은 귀중품을 보관하는 상자의 일종으로 내실용은 대부분 칠을 하거나 자개로 만든다. 이 함은 길체가 긴것이 특징이다.

함은 다양한 용도로 이용되어왔으나 오늘날에 이르면서 그 활용도는 주로 예장함만으로 좁혀든 것 같다. 시대와 풍속의 변천에 따라 여타의 내용물은 사라져갔으므로 지금은 오로지 <납폐>의 용구로만 남게 되었다.

납폐는 유교를 숭상했던 조선시대의 엄격한 혼인절차의 한 단계를 의미하는 말이다. 육례의 그 여섯가지 예의절차는 이런 것이었다.

1. 납채(納采) :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혼인을 구하는 의례, 흔히 매파라 불리는 중매쟁이를 통해 서찰을 보내면 신부집에선 허혼례의 답장을 보냈다.

2. 문명(問名) : 양가의 뜻이 동했다 하더라도 궁합이 안 맞아 틀어질 수도 있으므로 신랑집에서 신부될 처녀의 생년월일을 묻는 절차.

3. 납길(納吉) : 문명후에 좋다는 조짐을 얻으면 이를 신부집에 알려주는 일.

4. 납폐(納幣) : 정혼(定婚)의 징표로서 신랑집에서 신부집으로 채단과 혼서의 예물을 보냄. 이 예물을 담은 상자를 예장함이라 한다.

5. 청기(請期) : 신랑집에서 혼인 날짜를 정하여 신부집에 지장의 유무를 묻게 된다. 신부집에서 날을 정한 연길(涓吉)답장을 보내게 마련이다.

6. 친영(親迎) :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신부를 직접 맞아들임. 또는 그 의식을 말하니 즉 혼례식에 다름아니다.

혼례용 기러기와 지함

예장함에는 대개 혼서와 함께 채단으로는 신부의 치마저고리 한 벌감으로 푸른색과 붉은색의 비단을 넣는 게 관례였다. 또 처녀를 곱게 길러낸 신부댁의 노고에 미진함이 있었던지 인정의 표시로 예물의 물목을 적은 내역서가 넣어지기도 했다.

<재물이 곁들여진 혼인은 오랑캐들이나 하는 풍습>이라 타기했으므로 혼수가 열 가지 안넘게 조신한 미풍양속을 지켜왔다.

혼서(혹은禮狀)는 대개 가로 50센티미터, 세로 36센티미터 정도의 한지에다 집안의 어른 되는 혼주가 격식에 따라 정중하게 신부를 맞아들이는 인사치레의 글귀를 적은 서찰이다.

이런 물품을 담은 예장함은 대개 <함진아비>라 불리는 머슴이나 이웃 상인(常人)을 빌어 혼인 전날 밤에 신부집으로 보내졌다.

그러므로 함은 한국인에게 편의로서의 <상자>이상의 가치를 표상한다. 물론 질 좋은 나무로 여덟 군데 모서리가 반듯한 궤, 칠이 잘 되고 장식이 반듯한 엄격하고 딱딱한 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격조를 지닌다. 규격제품인 가방의 무성의한 속(俗)티도 없고, 또 물질만능, 편리한 운반용구와 같은 물신의 이미지가 깃들지 않는다.

함의 외양처럼 그렇게 격식을 갖추고 정성을 주고받았던 한국인의 마음이 더욱 돋보인다. 보자기면 어떻고 골풀상자면 어땠으랴만 그래도 사람의 인연과 운명을 담아 보내는 그릇으로 이만쯤의 외화(外華)는 결코 경제의 잣대로 가늠되어선 안 될 일이다. 아취 넘치는 예장함이 남아 있는 한 우리겨레가 오랑캐도 <상것>도 아닌 본데 있음을 자긍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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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잔대

하늬바람이 휘몰아치는 삼동의 밤은 길다. 달이 없는 밤이면 먼 하늘에 별빛도 희미하게 얼어붙어 발 밑도 가릴 수가 없다. 바람소리와 문풍지 우는 소리에 곁들여 외양간에서 여물을 삭이는 소의 풍경소리가 이따금 섞일 뿐 사방은 묵직한 어둠인데, 초가삼간의 봉창 언저리는 달무리처럼 손바닥만하게 밝았다.

등잔대 석유나 전등이 들어오기 전까지 등잔은 우리의 밤을 밝혀주었다.

소나무를 까뀌로 깎아 만든 등잔대에는 사기등잔에 명씨기름을 붓고 거기에 솜을 곱게 꼬아서 적신 심지 끝에서 작은 불꼬리가 촐랑거린다. 가장자리는 군데군데 해어졌을망정 삿자리는 깨끗이 걸레질이 되어 정갈한데, 단칸방 한 모서리에 놓인 희미한 등잔불 아래에서 할머니는 물레질에 여념이 없고 어머니는 씨아를 돌리며 무명씨를 앗기에 바쁘다.........

밤이 이슥하게 되면 그들은 한 차례 밤참을 나눈다. 밤참이라야 움에서 내온 배추 뿌리거나, 얼음이 뜬 국물이 시원스런 동치미거나, 때로는 뒷산에서 주운 도토리로 만든 묵이 고작이지만 모두 달게 먹고 첫닭이 홰를 칠 무렵이 가까워서야 두 방의 불은 조용히 꺼진다. 그때까지도 먼 초당에서는 마을 머슴들이 부르는 노랫가락이 바람결에 들려온다.

오늘날에 가장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등잔이나 호롱이나 초를 제자리에 놓으려고 장만했던 받침이나 걸이다. 등잔받침, 등잔걸이, 호롱받침, 호롱걸이, 등경, 등가, 유경, 촛대 따위로 불리는 이들의 가장 기본되는 생김새는 대나무 마디의 꼴을 한 것이다. 곧 둥글거나 네모난 바탕이 밑에 있고, 가운데 가느다란 토막 기둥에 대나무 매듭을 조각하고 그 위에 네모지거나 둥근 바탕보다는 훨씬 작은 등잔과 호롱이 얹힐 만한 받침을 만들었다. 그러자니 크게는 세 부분으로 나뉘는 셈인데, 그 길이와 너비와의 비례라든지 전체 모양에 무리가 없어 조화가 잘 이루어졌다.

기름받침이 달린 등잔대 슴벅이는 등잔이나 호롱불 아래서 한집안 식구끼리, 정다운 이웃끼리 오손도손 정겨운 모습이 지난날의 삶이었다.

죽절등잔이나 호롱받침 말고도 바탕을 거북으로 삼고, 기둥은 학이 한 다리를 깃에 감추고 서 있는 모양으로 새겨서 그 머리 위에 받침을 놓은 정교한 조각품으로 된 것이라든지, 바탕은 넓은 연잎을 조각하고 기둥은 연꽃대로 되어 자잘한 줄기와 가는 가시까지를 세밀하게 새겨, 받침은 막 피어날 듯한 연꽃으로 가늠한 것에서 옛 장인의 빼어난 솜씨가 보이는 것도 있고, 나무토막을 아무렇게나 깎아서 만든 우악스럽고 힘찬 것도 있으며, 선비가 소일 삼아 장도로 온갖 기하학적인 무늬를 정성들여 아로새긴 것도 있다.

이들의 재료는 오지, 사기, 나무, 벽돌, 놋쇠, 무쇠, 구리, 옥돌같은 갖가지가 있고, 형태가 저마다 다르며, 크기에서도 한 길이 넘는 것에서부터 한 뼘도 차지 않는 것까지 다양하며, 솜씨는 더더구나 천층만층이다.

이와같은 모든 것에 아랑곳없이 실용을 위한 기능의 철저한 추구는 형태의 아름다움을 어김없는 것으로 하였고, 이에 곁들여 하루도 없어서는 안되었을 생활 속의 필요성은 그것을 곱디고운 생활의 때와 애정으로 겹겹이 감싸서 아름답기가 한결같게 했다.

슴벅이는 등잔이나 호롱불 아래가 아니면, 촛대 위에서 눈물을 흘리며 타들어가던 촛불의 그늘에서 한집안 식구끼리, 정다운 이웃끼리 오손도손한 정겨운 모습이 지난날의 삶이었다. 그랬던 것이 석유에서 전기로, 백열등에서 형광등과 수은등으로, 그것도 모자라서 오색이 현란한 네온싸인의 독버섯이 대낮이 무색하게 우리의 밤을 밝혀도, 저마다의 가슴에는 오손도손함보다는 도리어 차디차고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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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 로

향로는 향을 피우는 그릇이다. 향로에 향을 피우는 일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밝혀지지 못하고 있으나, 향로의 유물로는 1916년에 평안남도 대동군의 낙랑시대 고분에서 출토된 청동으로 만들어진 박산로가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는 '삼국유사'에 "묵호자가 향을 살라 왕녀의 병을 고쳤다"는 대목이나 '삼국사기'에서 "미녀 김정란의 몸에서 향내가 풍기고 있었다"는 것 따위가 있다........

이렇게 옛날부터 향이 널리 피워졌던 까닭은 무엇보다도 그 내음이 아름다운 데에 있었는데, 그러다보니 어느덧 거기에 뜻이 깃들게 되어서 하늘이나 땅을 받드는 제사에나 부처님이나 공자님을 우러르는 의식에 없어서는 안될 물건이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사(邪)된 귀신이나 온갖 나쁜 재앙을 가져오는 잡귀를 몰아내고 복을 주는 착한 잡신을 맞아오는 힘이 있는 것으로까지 믿게 되었다. 또 향이 스스로의 몸을 태우면서 풍기는 아름다운 향내 때문에 세상살이에서도 긴한 구실을 하였다. 곧, 조정에서 정사를 의논할 때나 선비가 호젓이 마음을 가다듬고 글을 읽거나 골똘히 생각에 잠길 때나 반가운 벗이 멀리서 찾아왔을 때 무엇보다도 먼저 향을 피웠다.........

향로 향로는 시대에 따라 생김새를 달리했고 놓일 자리를 좇아 크기를 달리 했으며 형편에 따라 소재를 달리했다.

향로의 생김새나 소재 또는 크기가 다양한 것은 향의 종류가 많은 것과도 상관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향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향로에 피우는 훈향만을 놓고 볼 적에 빻아서 가루로 만든 말향이 있고, 빻은 가루를 환으로 빚은 환향이 있는가 하면 국수가락처럼 가락으로 늘인 선향 따위가 있는데, 선향 하나만 보아도 굵기와 길이가 저마다 다르다.......

청동은입사향완 고려시대, 검은 오동 바탕에 화사한 은사 연꽃을 깔고 구름 사이에는 용이 꿈틀대고, 그 사이사이에 영락이 드리워 지고 범자나 완자무뉘가 새겨져 있어 그 시대상과 인심을 보여주고 있다.(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소장)

여러 향료 가운데서도 사향은 강원도 고산 지대의 사향노루배꼽의 진에 고산식물의 꽃가루가 묻어서 엉긴 것을 따서 말린 것으로서 그 값은 금보다도 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난한 선비들이 향내를 즐기고자 할 때는 늙은 잣나무의 뿌리와 가지와 잎새 및 열매를 곱게 빻아서 단풍나무 진으로 반죽을 하여 환을 지어서 썼으며, 그것이 번거로우면 향나무 가지를 꺾어서 그늘에 오래도록 말렸다가 그것을 패도로 곱게 저며서 향로에 사르기도 하였다.

향로 쓸데없는 군더더기 장식이 없고 날렵하면서도 힘차고 다부져서, 이렇다할 꾸밈새가 없는 것이 되려 꾸밈새로 여겨질 만큼 아름답다.

사당이나 부처님 앞에 향상을 놓고 향상 위에 왼쪽으로 향로를, 바른쪽으로 향합을 얹고 경건하게 두 번 절을 하거나 세 번 합장배례를 하고 향로에서 향연이 그윽히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깊은 사념에 잠겨 삼매의 경지에 드는 모습이나, 솔바람소리와 물소리를 함께 듣는 산정에서 뜰 앞 푸른 이끼를 밟고 찾아든 벗을 맞아 향을 피우고 따끈한 한 모금의 차를 권하는 정경은 생각만 해도 흐뭇한 것이다.......

부녀자들은 향수를 즐겨 쓰고 있어서 이른바 파티장 같은 데에서는 향수 내음이 물씬할 때가 많다. 그 내음은 때때로 이웃에 두통이나 구토를 일으키게 할 지경인데도 그것만 좋아라 하고 향로에서 피어나는 훈향에는 무관심한 까닭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정작 이웃 나라들에서는 혼자만의 즐거움을 위해서 또는 찾아드는 손님을 환대하기 위해서 코언저리에 닿을까말까 하게 은은한 향을 피워두는 멋을 간직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와 같은 습속을 저버린 지 오래다........

깊어가는 겨울밤에 향상 위에 향로와 향합을 가지런히 놓고 거기 재 속에 간직된 불에 좋은 향을 사르는 한 순간을 연상해본다. 며칠에 한 번씩만이라도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또 이와 같은 생각이 공감을 얻어서 향과 향로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질 수 있다면 나날의 숨가쁨이 청아하게 누그러질 수도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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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반

나라를 앗겼을 때에 북간도로 가는 기차는 이민 열차와 같았다. 3등칸은 늘 고향과 선산과 이웃과의 정의를 끊고 눈물을 흘리며 스산한 낯선 땅을 찾아 나서는 유민들로 가득 찼다.

한결같이 겨울이면 흰 무명옷을, 여름이면 누런 삼베옷을 입고 남정네는 지고 아낙네는 이고 코흘리개들을 앞세우고 나라를 떠났다. 모든 것을 훌훌 떨어버리고 나서는 길이었지만 그래도 대를 이어 물려받은 손때 묻은 소반만은 얼마 크지 않은 봇짐 위에 소중히 얹어 가는 것이 약속처럼 되었다.

소반은 생활 속에서 그토록 긴하고 소중하였다. 우리들은 예부터 음식을 땅바닥에 놓고 먹는 것을 부끄러움으로 알았다. 심지어는 남의 문전마다 찾아다니며 음식을 빌어먹는 거지에게조차 맨바닥에 음식을 주는 일이 없었다.

사람이면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소반에 받쳐 음식을 들기 마련이었고 따라서 거기에 따르는 범절도 여느 일용품을 쓸 때에 비겨서 까다로웠다. 이를테면 소반 모서리에 앉아서는 안된다든지, 수저를 쓸 때에는 소반에 소리가 나도록 해서는 안된다든지, 또 소반에 칼을 얹어서는 안된다든지, 처마끝 밑에 상을 올려서는 못쓴다든지 하는 따위와 같은 여러 금기들이 모두가 하나같이 소반을 중히 여기고 그럼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소홀함이 없기를 기약하는 일이었다.

소반은 그냥 반이라고도 했고 상이라고도 했으며 쓰임새에 따라 반상, 주안상, 다반, 향상, 번상, 제상, 교자상, 대궐상, 돌상, 약반 따위로 이름을 붙였다. 그 뿐만 아니라 소반의 천판 생김새에 따라 열두모반, 여덟모반, 네모반, 책상반, 반달반, 연엽반, 두리반의 구분이 있고, 또 다리의 꾸밈새를 좇아 개다리소반, 범다리반, 죽절반, 외다리반 따위로 나누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흔히 쓰이는 것은 산지에 따라 붙여진 이름으로서 전국에서 가장 이름이 있는 것은 경상남도의 통영반과 전라남도의 나주반과 황해도의 해주반이라 할 수가 있다. 이 세 고을에서 만들어졌던 소반들은 천판과 다리를 이어 만든 꾸밈새의 바탕은 같으나 저마다의 특색을 지니고 있다.

해주반 천판은 통영반과 같으나 좌우로 널을 써서 다리로 삼았으며 천판 밑의 앞뒤에는 운각을 받쳐서 짜임새를 갖추게 했다.

생각해보면 소반만큼 지난날에 우리 삶과 깊이 어울린 공예품도 드물었던가 싶다. 어머니는 이미 아기를 배스리기 전부터 소반에 정화수를 떠놓고 첫새벽마다 해와 달과 별들에 옥동자를 점지해주기를 빈다. 이윽고 아기가 들어선 다음에도 열 달 순산을 바라는 기원이 소반위에서 이루어지고 아기가 태어나면 태어난 대로 세 이레를 소반에 미역국을 올려놓고 삼시랑님에게 아기가 명복과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손이 발이 되도록 빈다.

백일이 지나고 돌이 되면 돌상을 차린다. 소반 위에는 책과 활과 엽전을 놓는데 아기가 그 가운데서 먼저 잡은 것으로써 아기의 장래를 점치며 희망을 걸어보기도 한다.

지체와 형편에 따라 왕가에서는 주칠과 흑칠을 하여 용, 봉황, 모란 따위의 온갖 호화로운 무늬를 한결 돋보이도록 새기고 파고 뚫어 만든 대궐반으로 호사를 누렸고, 여염에서는 소반에 나비, 박쥐, 완자, 구름, 아자, 초룡 등 무늬에 생칠을 하여 형세대로 소반을 쓰는 기쁨을 누렸다. 또 끼니를 잇기가 어려운 가세에서는 조각도 칠도 못한 백골반일망정 들기름을 곱게 먹여 아침저녁으로 행주질에 정성을 쏟아 옻칠 못지않는 윤이 나게 된 소반을 아꼈다.......

개다리소반 소반은 다리의 꾸밈새를 좇아 개다리소반, 범다리반, 죽절반, 외다리반 따위로 나누기도 한다.

또 먼 길을 찾아온 반가운 벗과 더불어 마른안주 한 접시와 놋주전자와 놋잔이 놓인 자그마한 연엽반 주안상을 끼고 향기로운 가양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거나하게 취하는 정경은 우리 살림에서 볼 수 있었던 멋의 집약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다........

소목들은 소반의 쓰임새와 그 아름다움을 위해서 사랑스런 아기의 볼을 어루만지듯이 나무를 다룬다. 그들의 일에는 노동의 괴로움보다는 새로 이루어지려는 소반에 대한 기쁨과 애정이 괴어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 입에 길게 문 장죽에 연신 군침이 타고 흐르는 것도, 또 어느덧 콧등에 얹은 돋보기가 콧부리로 처져내리는 것도 잊고 저도 모르게 양산도 가락을 흥얼거리게 된다. 그럴 때면 그들은 일의 노예가 아니라 아름다움의 나라를 다스리는 왕이 된다.

그래서 나무소반 뿐만 아니라 놋쇠소반이나 나전칠기반이나 노엮개반이나 할 것 없이 심지어는 상주들이 쓰는 아무런 칠도 장식도 없는 백골반에 이르기까지 소반의 아름다움은 한결같다.

지난날의 소반들은 쓰면 쓸수록 아름다움은 더해가고 세워이 가면 갈수록 추억과 생색을 더해가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소반은 어떤가? 얼마 동안 쓰다가 아무런 미련과 애착도 느낌이 없이 손쉽게 버리기에 안성맞춤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은 소반의 황폐는 오늘날의 생활과 마음의 가난함에서 빚어졌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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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가분아저씨 2004-03-27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북한에서 마구잡이로 들여오는 해주 소반중엔, 쉬운 반입을 위해 해체해서 갖고 와 남한에서 재조립 하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더군요.
온전한 아름다움을 위해 잠시 영리를 위한 마음을 접을 수 있다면 좋을톈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