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 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에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 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香煙)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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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고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老人)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롱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 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 둘 곳 몸 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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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 이랑 만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여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 빛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 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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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슴 대길이



새터 관전이네 머슴 대길이는

상머슴으로

누룩 도야지 한 마리 번쩍 들어

도야지 우리에 넘겼지요.

그야말로 도야지 멱 따는 소리까지도 후딱 넘겼지요.

밥 때 늦어도 투덜댈 줄 통 모르고

이른 아침 동네길 이슬도 털고 잘도 치워 훤히 가리마 났지요.

그러나 낮보다 어둠에 빛나는 먹눈이었지요.

머슴방 등잔불 아래

나는 대길이 아저씨한테 가갸거겨 배웠지요.

그리하여 장화홍련전을 주룩주룩 비오듯 읽었지요.

어린 아이 세상에 눈 떴지요.

일제 36년 지나간 뒤 가갸거겨 아는 놈은 나밖에 읽었지요.


대길이 아저씨더러는

주인도 동네 어른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요.

살구꽃 핀 마을 뒷산에 올라가서

흩적삼 큰아기 따위에는 눈요기도 안하고

지게 작대기 뉘어 놓고 먼 데 바다를 바라보았지요

나도 따라 바라보았지요.

우르르르 달려가는 바다 울음 소리 들었지요.

찬 겨울 눈더미 가운데서도

덜렁 겨드랑이에 바람 잘도 드나들었지요.

그가 말했지요

사람이 너무 호강하면 저밖에 모른단다.

남하고 사는 세상인데


대길이 아저씨

그는 나에게 불빛이었지요.

자다 깨어도 그대로 켜져서 밤 새우는 불빛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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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 - 사유의 길을 밝히는 철학의 쓸모
이명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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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

저자 이명현

21세기북스

2024-08-01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85년간 이명현 서울대 명예교수가 길어 올린 철학의 정수를 담은 철학책 한 권을 추천해보려고 합니다.

어렸을 때부터 제 책사랑은 유별났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시집과 소설만 주로 읽다가 대학생이 되고 나서는 깊이있는 독서를 통해 성장하고자 인문/철학 분야를 많이 읽었었습니다.

그러다 교양과목 중에 철학 과목이 있어 한 번 수강하게 되었는데 당시 교수님께서 내셨던 쪽지시험 문제가 생각납니다.

[중세 철학이란 무엇인가?]

그간 배웠던 수업 내용으로 이면지를 채우기엔 역부족인지라 읽었었던 철학책 내용들 전부 소환시켜 적어냈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에 대한 진리를 알려주시곤 페이지 수십 장씩 한 번에 넘어갔었기에 광범위한 철학의 배움에는 끝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철학을 배우면서 느낀 것은 답이 없다는 것입니다.

답이 존재하는 일반적인 학문들과 달리 철학은 그 어떤 것도 답이 될 수 있기에 결론적으로 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답이 없는 학문이라고 해서 배워야 하지 않을 학문은 아닙니다.

답이 정해진 일반적인 학문들이 곧 철학으로 귀결됩니다.

그렇다면 매순간 질문을 던지는 우리의 삶에서 철학을 통해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일까요?



인간은 외톨이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더불어 삶은 더불어 있음의 한 양태요, 모듬살이가 더불어 삶의 구체적 방식이다.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 맺음은 이러한 더불어 있음의 양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외톨이로서 자연과 만나기보다는 우리로서 만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우리로서 자연과 관계 맺음의 역사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맺음의 역사로 엮어진 천이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음 속에서 엮어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객체화하여 자기 자신과 대화하며, 자기 자신과 겨루며,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반성적 존재라는 사실 속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음의 방식이 드러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인간의 삶이란 자연-타인-자기자신 틀 속에서 엮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틀 속에서 인간은 있음과 바람직함에 관한 개념의 지도를 그리며 됨을 위한 탈바꿈의 몸짓을 하는 것이죠.

철학함이란 이러한 개념의 지도 그리기와 탈바꿈을 노리는 몸짓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삶은 함의 다발로 엮어져 간다. 함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힘에 끌려 나타나는 과정이다. 욕망, 욕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러한 힘이다. 삶은, 그러므로, 욕구에 의해 추진되는 함의 집합이요, 그 연속 과정이다. 함은 일정한 방향이 요구된다.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알찬 함이 될 수 없다. 아무렇게나 덮어놓고 하면, 소갈머리 없는 함밖에 되지 않는다.


있음에 관한 개념의 지도가 무지와 그릇된 지식에서 나오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해주는 효능을 지니고 있으며, 바람직함에 관한 개념의 지도는 억압적인 모듬살이의 틀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새로운 가능성의 모형을 제시한다. 그리고 두 지도는 모두 인간을 제자리로 인도한다. 앞의 지도가 현실 세계의 구조가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사실의 메시지를 제시해준다면, 뒤의 지도는 가능 세계의 구조를 펼쳐 제시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러나 두 지도가 모두 이론의 차원에 놓인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철학은 곧 하나의 학문입니다.

학문이 하나의 상식이라고 한다면 대상의 의미와 특징을 설명하는 것인데 철학은 이에 더해 단순히 성질에 대해 알려주기보단 그 자체의 특성을 표현하거나 묘사하는 것이지요.

즉, 단순한 그리기일 뿐만 아니라 됨을 위한 탈바꿈의 몸짓인 것입니다.



철학함은 현실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인간은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일정한 공간과 시간의 좌표 선상에 있다.

변화하는 공간의 축과 시간의 축이 서로 만나는 그 좌표점들의 연속선상에 인간은 존재한다.

…… 우리는 철학함은 있음과 바람직함에 관한 개념의 지도 그리기요, 됨을 겨냥하는 말짓과 몸짓하기라고 하였다. 인간이 역사적 존재요, 그의 생각함도 역사적일 수밖에 없기에 그의 생각함은 산물인 사상도 역사적일 수밖에 없다.

…… 철학이 '있음'과 '바람직함'에 관한 지도를 그린다고 하나, 작성된 지도는 특정한 역사적 지평 위에서 보인 지도일 뿐이다. 그 지도는 그 지도 작성자가 부딪치고 있던 그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보면, 간혹 철학에게서 잡다한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철학에 등장하는 사상들은 '역사성'을 품고 있는데, 이때 지도 작성자들은 개념적 지도들을 한데 모아놓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철학사를 살펴 보면 현실에 부딪친 지도 작성자가 특정한 역사의 지평에서 써내린 지도만 남았을 뿐이죠.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각기 늘어놓는 말들에 일관성이 없으니 갈피를 못 잡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본 인상은 잠시 제쳐두고 속에 담긴 풀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문제'로서 파악한 것과 그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제시되었던 것을 오늘의 우리의 현실에서 보면, 그것이 왜 '문제'가 되며, 그 '해답'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실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철학함은 개념의 지도 그리기라고 하였다. 그러한 지도 그리기 작업이 노리는 것은 인간을 곤경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이다.

개념의 혼란이 빚어내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함과 동시에 억압적인 상황의 탈바꿈을 통하여 우리를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함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여기에 내놓은 서로 맞물림의 틀은 이런 여러 가지 문제들과 뿌리에서 서로 만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여기에 제시되어 있지 않다.


저 서로 맞물림의 틀이 함축하는 것의 하나는, 내가 '초월의 삶의 태도'라고 부르고자 하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 맺음의 방식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애초의 모습이 서로 맞물림의 꼴이라면, 인간이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 양식은 초월의 삶의 태도일 수밖에 없다.



민주화, 과학 기술과 같은 근본적인 물음은 물론 크고 작은 문제들 모두가 결국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어떤 틀에서 보느냐에 따라 당면하게 되는 문제인 것입니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초월의 삶의 태도'란 욕망의 대상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도모하는데 초점을 두지 말고 맞물림이라는 원초적 구조와 어긋나는 자기 욕망에 대해 초월적 태도를 취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개념의 기동훈련이 아닌 자기의 탈바꿈이라는 됨의 사건을 통해 이룰 수 있습니다.

서로 물려 있다는 것은 결국 존재의 원초적 구조입니다.

즉, 원초적 구조를 바로 보지 못해 양산되는 문제들이니 이러한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바로 보는 것입니다.





1부에서는 삶과 철학에 관한 내용으로 1장에서는 삶의 조건을 바꾸는 철학에 대해, 2장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지혜에 대해, 3장에서는 사유에 드리운 허무의 그림자를 없애는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2부에서는 신문법과 관련된 내용으로 1장에서는 신문법의 의미에 대해, 2장에서는 신문명과 신문법에 대해, 3장에서는 신문명을 위한 신교육 체제의 기본 철학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교수님께선 종종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이 말도 맞을 수 있고, 저 말도 맞을 수 있지.'


끊임없이 사유하는 학문이지만, 전혀 상관없는 외길로만 빠지지 않으면 철학은 그 어떤 답안도 품어줄 수 있는 신기한 학문입니다.

단순하지만 전혀 단순하진 않은데 그렇다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시작도 전에 어렵다고 생각하면 이미 마음은 저만치 돌아설 수밖에 없으니 쉽게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읽어야 철학책도 나름 재미있게 파헤칠 수 있습니다.

『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는 내용만 잘 따라오면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으니 철학책에 입문해보고 싶으신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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