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온실 수리 보고서

저자 김금희

창비

2024-10-04

소설 > 한국소설





처음에 배운 건 수리의 종류에 관한 용어들이었다. 종수와 중창과 재건의 차이 같은 것. 면접을 끝내고 받아 온 『고건축용어사전』에서 가장 먼저 찾아본 말들이었다. 면접은 친구 은혜가 소개해준 자리였다. 건축사사무소인데 문화재 공사 백서 기록담당자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내가 너 석모도 헤밍웨이라고 자랑 많이 했다. 저번에 시청이랑 일해서 낸 저서도 보내주고, 그 독수리 책."



"창덕궁이랑 같이 있는 창경궁, 그 안에 대온실 있는 거 아시죠? 그 보수공사입니다"

밑줄을 긋듯 그가 힘주어 대답했다. 모처럼 큰 공사를 맡아서 담당자들이 기대하고 있다고. 이런 대공사와 함께 온 걸 보면 영두씨가 운이 좋은 것 같다고.

하지만 나는 창경궁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주 축축하고 차가운 이불에 덮인 것처럼 마음이 서늘해졌다. 내가 10대 시절을 보낸 곳이 창덕궁 담장을 따라 형성된 서울의 동네, 원서동이기 때문이다. 빗방울이 떨어져내리면 더 짙고 선명해지던 검은 기와들의 윤기가 생각났고, 하숙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 당시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안국역과 빨래터와 정독도서관을 하염없이 돌던 열네 살 때의 막막함이 또렷이 떠올랐다.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아빠의 고민을 들은 할머니는 의외의 말을 했다. 서울로 고등학교를 다니려면 차라리 빨리 전학을 오라고 한 거였다. 리사라는 이름의 자기 손녀도 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전학 와서 그나마 적응이 빨랐다고. 나는 할머니가 우리 집 형편을 모르고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엄마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더이상 배를 타지 않는 아빠는 섬에서 손 닿는 대로 일하며 지냈다. 불성실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안정적이거나 주기적이지 않았다는 말일 뿐이다. 아빠는 봄가을에는 새우 건조장에서 일하고 관광객이 많은 여름에는 횟집에서 주차 관리를 하거나 때론 외포리 모텔촌에서 공사 인부로 일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손녀 리사와 방을 같이 써야 한다는 점, 학교는 3호선을 타고 한시간 정도 가는 강남에 있다는 점, 새벽 여섯시에는 일어나 등교를 준비해야 늦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주말에는 하숙집 일을 좀 도와주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나는 어쩌면 그게 내가 서울에서 지내기 위한 방법이구나 싶어 서글퍼졌지만 뒤이은 할머니 말에 마음이 풀렸다.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 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 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기관에서는 그런 면을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살아남은 거요?"

"네, 그리고 실측이 진행 중인데 지하 공간이 발견됐거든요. 좀 흥미로워졌어요."



"장마가 그런데 어쩔 것이야, 다음을 기다려봐야지. 그런다고 바다 소금이 어디 가버리는 것도 아니고. 사는 게 말이야, 영두야. 꼭 차 다니는 도로 같은 거라서 언젠가는 유턴이 나오게 돼. 아줌마가 요즘 운전을 배워본 게 그래."

"유턴이요?"

"응, 그러니까 돌아올 곳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알고 있으면 사람은 걱정이 없어. 알았지? 잘 왔다, 잘 왔어."



"사람을 믿는 게 잘못은 아니야. 네 말대로 그렇게 혼자라면 믿어야 살 수 있으셨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래서 누군가를 믿기도 해."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우리 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었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아이도 없었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내 것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양육자들이 이기지 못해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아마 산아도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 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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