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은 시대의 내비게이션이다

저자 이명현

21세기북스

2024-08-01

인문학 > 철학 일반 > 교양 철학





인간은 자연 안에서, 자연과 더불어 자연을 밑천으로 삼고 살고 있다. 인간은 외톨이로 사는 존재가 아니라, 더불어 사는 존재이다. 더불어 삶은 더불어 있음의 한 양태요, 모듬살이가 더불어 삶의 구체적 방식이다.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 맺음은 이러한 더불어 있음의 양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은 외톨이로서 자연과 만나기보다는 우리로서 만난다. 인간의 역사는 인간이 우리로서 자연과 관계 맺음의 역사와 인간들 사이의 관계 맺음의 역사로 엮어진 천이다.



인간의 삶은 함의 다발로 엮어져 간다. 함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힘에 끌려 나타나는 과정이다. 욕망, 욕구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그러한 힘이다. 삶은, 그러므로, 욕구에 의해 추진되는 함의 집합이요, 그 연속 과정이다. 함은 일정한 방향이 요구된다. 덮어놓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은 알찬 함이 될 수 없다. 아무렇게나 덮어놓고 하면, 소갈머리 없는 함밖에 되지 않는다.



철학이 하나의 학문이며, 학문은 이론의 작업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상식처럼 되어 있다. 이런 상식에 따르면, 철학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무엇이 어떠함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는 것이거나, 바람직한 가치가 무엇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철학은 개념의 지도 그리기일 뿐 아니라, 됨을 위한 탈바꿈의 몸짓이라 하였다. 됨을 겨냥하는 말짓과 몸짓은 물론 위의 기능을 지닌 언어와 완전히 독립된 것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언어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가에 있다.



그러기에 보통 사람들의 삶의 세계와 개별 학문은 철학적 사고의 원자재 공급지이다. 이 공급 현장으로부터 원자재 공급을 받지 않고는 현실에 응답하는 살아 있는 철학은 태어날 수 없다. 그러기에 새로운 철학 문화의 창조를 위해 노력하는 철학도들은 모름지기 책 속의 언어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현실의 삶의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일어나는 보통 사람의 애환의 현장 속에 뛰어들어 가서 문제를 발견하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다.



오늘의 이러한 '철학의 종언'에 대한 위기의식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그 '철학의 종언'의 인식을, 맨 처음으로 명료하게 표현한 사람은 로티가 아니라, 20세기 철학의 슈퍼스타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다. '철학의 종언'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은 그의 전기와 후기에 일관되어 있다. 전기와 후기에 있어서 '철학의 종언'에 관한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종언'을 말하는 방법에 있다. 물론 여기서 종언을 고하게 되는 철학이란 비트겐슈타인 이전의 철학이다.



지나간 서양의 철학사는 절대라는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미로 행각의 기나긴 수난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모든 조건이 없는, 무제약적인 관점을 서양의 학자들은 '절대'라고 표현했다. 그뿐만 아니라 절대는 변화가 없는, 영구불변한 것, 그리고 최후의 것을 함축했다. 최후의 영구불변한 어떤 것이기에 그것은 모든 것을 그 안에 포함하는 궁극적인 것이기도 하다. 지나간 서양의 철학사는 이러한 관점에 도달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표현이며,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본 인간과 세계의 모습에 대한 언어들의 집합이라 볼 수 있다. ……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서는 절대에의 탐구가 절대자의 탐구와 동일시되었으며, 그것은 바로 신에 대한 탐구로 간주되었다.



무제약적인 관점을 획득하려는 노력으로서의 절대의 탐구는 근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철학은 바로 그러한 무제약적인 관점을 획득하려는 노력과 그러한 무제약적인 관점에서 본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이론들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그것을 '아르케'에 대한 탐구라 표현했다. 그것은 최초의 것, 궁극의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함의 출발점을 뜻한다.

이러한 최초의 자리, 궁극의 자리, 절대의 자리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탐구하는 지적 노력과 그 결과물에 대하여 붙여진 명칭이 바로 절대 진리였다. 철학은 다름 아닌 이러한 절대 진리의 추구와 동일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구의 전통적 철학관이다.



그러나 허무주의는 신나는 세계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보금자리가 될 수 없다. 그것은 죽음의 음지일 뿐이다. 근대의 낡은 문법이 해체되었다고 해서 반드시 파멸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해체 공사가 갓 끝난 집터에는 황폐한 잔해가 널려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잔해가 제거되고 나면, 새로운 보금자리가 들어설 새 땅이 우리의 시야를 가득 채우게 된다. 그리고 새 땅 위에 세울 새로운 집의 설계도가 마련될 것이다. 그리고 머지않아 새로운 감수성과 시대의 요구에 알맞은 새 건물이 우리의 눈을 부시게 할 것이다.



종래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지적 활동은 그 시대의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온 지적 활동이었다. 우리가 지난 철학의 역사에 존재했던 사상을 탐구하는 것은 인류의 삶을 지탱해왔던 모습이 어떤 것이었던가를 아는 데 있다.



한국인이 지난 역사에서 논의하던 윤리적 질서는 그때의 모듬살이 틀 안에서 유효한 개념 틀이었다. 어제 불가능했던 것이 오늘의 새로운 상황에서는 가능한 것이 될 수 있다. 가능성, 불가능성의 개념은 그 개념이 어떤 상황에서 논의되느냐에 따라 그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 그러기에 상황의 틀을 떠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따지는 것은 헛바퀴 도는 말장난일 뿐이다. 어떤 개념 이 헛바퀴 도는 언어인지 아닌지 구별하려면 그것이 전제하고 있는 상황의 틀이 무엇인가를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삶의 방식은 바로 이런 상황의 틀과 다름없다.



‘외길의 시대’는 지났다. 절대적이고 유일무이한 외길밖에 모르는 사람은 신문명의 시민 자격이 없다. 외길밖에 모르는 자는 절대의 신봉자가 되거나, 아니면 허무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기 쉽다. 신문명의 성숙한 시민에게는 절대도 허무도 모두 미성숙의 징표로 인식될 뿐이다. 길이 하나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 지평의 한계를 모르는 자의 극단적 발언일 뿐이다. 절대는 신의 자리는 될 수 있어도 인간의 자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리를 올바로 인식하는 자는 사실의 세계와 당위의 세계에 관하여 자기의 자리에서 본 모습과 이웃의 자리에서 본 모습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할 뿐 아니라, 동등한 타당성을 부여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다원화는 바로 이런 의식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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