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으로 읽고 각으로 쓴다
저자 김미옥
파람북
2024-05-10
인문학 > 책읽기/글쓰기 > 글쓰기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나는 나무에 기대어 울었다. 혹독했던 그녀의 시대가 나의 시대에도 별반 달라질 게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돈과 자기만의 방’이 없는 가난한 여자가 무슨 글을 쓰겠는가? …… 그때 다시 나를 구원한 건 '읽고 쓰는' 것이었다.
책도 사람처럼 운명이 있다. 인간에게 자기만의 서사가 있듯 책도 자신의 역사가 있다. 누군가의 서명과 여백에 깨알같이 쓴 글은 책이 살아온 시간이 아니겠는가. 헌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경건해질 때가 있다. 책을 소장했던 이의 품격이 느껴지는 경우다.
그날따라 상당히 많은 책이 집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있는데 경비아저씨가 집배원이 맡긴 책 박스와 책 봉투를 들고 있었다.
"매일 웬 책이 이렇게 많이 오나요?"
"책이 저를 찾아오는 겁니다."
백석은 감성과 열정과 지성을 갖춘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백석은 내게 '연애하는 남자'로 생각된다. 그에게 결혼은 어울리지 않았다. 너무 열정적이어서 그의 사랑은 탐색이 없었다. 첫눈에 반하면 구혼으로 직진했다. 세 번의 결혼을 하고 종종 사랑을 했는데, 그게 묘하게 어울렸다. 누구의 남자도 아닌, 그냥 백석이었다.
그녀가 믿으니 모두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오늘날 '아름다운 나타샤'는 자야가 되고 '가난한 나'는 백석이 되어 눈길 푹푹 빠지는 산속에서 당나귀는 지금도 응앙응앙 울어대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생태계의 입장에서나, 인간 자신의 입장에서나 너무 빨리 먹이사슬의 정점에 올랐다는 것이다. 인간은 최근까지도 잡아먹히는 쪽이었기에, 포식자에 대한 공포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성과 잔인성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결국 인간이라는 종 사이의 파멸적인 전쟁이나 인간에 의한 다른 종의 무차별적 파괴는 인간의 너무 빠른 도약에서 기인한다는 결론이다. 그의 말대로 인류는 스스로의 힘을 어쩌지 못하는 자연계의 폭군이 되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생태계의 복수일 수도 있다.
공존의 그늘이 깊고 길다.
나는 글을 읽다가 '아주 가정적'이란 표현에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프카는 가끔 나를 웃게 하는데 특유의 진지한 유머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로 진지한 농담을 하는 사람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렌 굴드의 바흐입니다. 가능하다면 인적이 드문 산길이나 호숫가로 가세요. 그리고 벤치에 앉아 눈을 감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세요. 가을 햇살이 그의 손가락을 빌려 당신의 상처를 치유할 것입니다. 반드시 글렌 굴드의 연주여야 합니다.
최근 나처럼 하늘의 별을 좋아하는 싱글맘이 책을 내고 작가가 되었다. 처음 망설이는 그녀에게 내가 한 말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정직했고 그녀가 잘하는 일은 진솔하게 글을 쓰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