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인간 - 사도세자의 죽음과 조선 왕실, 개정증보판
정병설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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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책과 마주하다』



조선과 관련된 역사책을 여럿 읽다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중심으로 18세기 궁궐사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사도세자의 탄생부터 성장 과정 그리고 죽음, 그의 죽음 이후 영조의 반응과 정조의 역사 왜곡, 나아가 순조 때 혜경궁이 『한중록』을 집필하는 과정까지 세세하게 구성되어 있어 꽤 흥미로웠지 않았나 싶다.

참고로 오래 전 출간되었지만 이번에 새롭게 개정되어 오류를 바로잡고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한 새로운 내용을 보강했다고 한다.


저자, 정병설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이다.

『완월회맹연』과 같은 한글고전소설로부터 출발하여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조선시대의 인간과 문화를 탐구해 왔다. 기생의 삶과 문학을 다룬 『나는 기생이다』(문학동네, 2007), 그림과 소설의 관계를 연구한 『구운몽도』(문학동네, 2010), 음담에 나타난 저층 문화의 성격을 밝힌 『조선의 음담패설』(예옥, 2010), 사도세자의 죽음을 통해 조선정치사의 이면을 살핀 『권력과 인간』(문학동네, 2012), 조선 후기 천주교 수용을 다룬 『죽음을 넘어서』(민음사, 2014) 외에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6), 『한국고전문학수업 수업』(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9), 『혜빈궁일기』(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0) 등의 책을 펴냈으며, 『한중록』과 『구운몽』을 새롭게 해석하고 번역한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현재 한국 문화의 위상과 성격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Ⅰ 사도세자의 어른들


1694년에 태어난 영조는 여든세 살까지 살며 역대 임금 중 재위 기간이 53년으로 가장 길다.

삼십 년 이상 지켜본 혜경궁은 영조의 성격을 상찰민속이라 표현하며 세세히 신경쓰는 것은 거의 병적이라고 했다.

(상찰민속이란, 꼼꼼히 살피면서 동시에 재빠르다라는 뜻이다.)

죽음과 관련된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을 정도로 죽음을 극도로 두려워했다는 영조는 사람을 죽이거나 불길한 말을 들으면 양치질을 하고 귀를 씻었다고 한다.

심지어 영조는 좋은 일 혹은 좋지 않은 일을 할 때에 드나드는 문이 달랐다.

그래서 혜경궁이 영조가 사도세자를 만나러 경화문으로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불길한 일이 생길 것이라 이미 알아차렸다고 한다.

생사, 내외, 호오, 애증을 엄격하게 가르고 철저히 행했다는 것으로 보아 영조는 편집증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짐짓 추측해볼 수 있다.


그 누구도 권위에 도전할 수 없고 뜻 또한 거를 수 없는 자리, 바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리이다.

그러나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유일하게 거스를 수 있는 또하나의 절대권력이 있었으니 바로 부모다.

효를 중시하는 유교는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부모의 말과 뜻을 거스를 순 없다.

대개 왕이 서거한 후에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니, 살아 있는 임금의 부모는 임금의 어머니나 할머니이다.

임금이 너무 어릴 경우에는 대비가 나서 어른이 될 때까지 대신 통치하기도 했는데, 수렴청정은 세조비 정희왕후부터 익종비 신정왕후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행해졌다.

아무런 권력 기반도 없었지만 불안한 왕자 시절을 보냈던 영조를 왕세제로 만들고 대권을 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영조의 어머니 인원왕후다.

인원왕후는 영조의 생모는 아니지만 엄연히 영조의 어머니였다.

숙종에게는 세 부인이 있었다. 인경왕후, 인현왕후 그리고 인원왕후다.

1701년 8월, 인현왕후가 죽고 10월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자 중궁전이 공석이 되었는데, 이를 비울 수 없어 숙종은 결혼을 서둘렀고 이듬해 10월 인원왕후가 궁으로 들어오게 된다.

당시 숙종은 마흔두 살이었고 인원왕후는 열여섯 살이었다.

인원왕후는 후사를 얻지 못했지만 장희빈의 아들이었던 경종에게 왕권을 넘기는 중요한 역할을 도맡았다.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하자마자 후계를 정하자는 상소를 받게 되는데 이때 인원왕후가 영조를 후계로 정하자고 지지하였고 영조는 왕세제가 될 수 있었다.

왕세제로서 대리청정을 할 때도 영조는 인원왕후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박상검 사건으로 인해 영조도 위험해지고 경종 또한 자신의 수하를 쳐내기 어려워했지만 단호하게 그들의 처벌을 결행한 사람이 바로 인원왕후였다.

임금이 원치 않거나 하지 못하는 일까지 하는 사람은 조선 천지에 대비밖에 없었으니, 당시 인원왕후가 영조를 위해 나섰던 것이었다.

이렇듯 영조에게 인원왕후는 권력의 전수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셈이었다.

인원왕후는 손자인 사도세자를 무척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물론 사도세자 또한 할머니를 믿고 따랐다고 하는데 당시 인원왕후가 더 오래 살았다면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일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영조에게 첫날밤 소박을 맞았다고 알려진 정성왕후는 서른 살이 넘어서야 왕비가 되었지만 남편의 사랑을 끝내 받지 못해 죽는 날까지 고독했다고 전해진다.

정성왕후의 병세가 심각해졌을 때도 영조는 찾아오지 않았는데 곧 죽을 것 같게 되자 그제야 병소로 왔다고 한다.

그런데 정성왕후에게 말 한마디 건네기는 커녕 아들 사도세자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만 꾸짖었다고 한다.

결국 왕비가 운명하게 되었고 장례 절차를 진행시켜야 하는데 영조는 죽은 아내를 곁에 두고 내인들에게 아내를 만났던 일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한다.

심지어 가장 사랑하는 딸인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의 부음이 들려오자 아내의 죽음에 형식적인 슬픔을 표하고 부마의 집에 거동하려 했다고 한다.

승지, 대사간 등이 말리자 영조는 그들을 해임하고 밤에 화완옹주 집에 갔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돌아왔다고 전해진다.

무려 33년이나 왕비의 자리에 있었지만 역사 기록에 따르면 영조가 왕비의 처소를 찾았다는 기록은 단 한 건도 볼 수 없다.

참으로 고독하고 고독했던 정성왕후였다.


1764년 7월 26일, 선희궁 영빈 이씨가 사망하게 된다.

그 날은 아들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난 달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마음의 병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원인은 화병이 아니었다.

그해 2월 선희궁은 영조가 정조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의 아들로 삼으라는 전교를 내리자 식음을 전폐했었다.

아들이 죽고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선희궁에게 손자 정조라도 보전하여 왕으로 세우기를 바랐지만 손자가 더이상 자기 아들의 아들이 아니게 된 것이었다.

이렇듯 당시 자살을 숨기고 병사로 덮었던 행태로 미뤄보아 선희궁은 자살을 택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

선희궁은 아들을 죽인 어머니라는 낙인을 가지고 있다.

사도세자가 죽은 날 아침, 선희궁은 영조에게 가 사도세자의 비행을 고했다.

사도세자가 병이 심해 상황 파악은 물론 주위 사람마저도 알아보지 못하니 아들의 대처분을 권한 것이었다.

세자를 죽이려 하는 영조를 보며 신하들은 말렸지만, 선희궁의 말을 들은 영조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 해도 선희궁이 아들의 죽음을 부추긴 것만은 사실이다.

선희궁의 남은 희망은 오로지 정조였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삼년상이 끝나갈 무렵 정조의 아버지를 사도세자가 아닌 효장세자로 두라는 명령을 받고 삶을 정리했을지 모른다.

훗날 영조와 함께 선희궁의 묘소로 간 세손 정조는 할머니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할머니께서 소자를 돌봐주신 은혜는 어머니와 다름없으셨고, 세상을 가르치심은 엄한 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하늘처럼 크신 덕은 망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1762년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소자가 할머니를 우러러 기댐은 전보다 배나 더했고, 할머니께서 소자를 가련히 여기심도 전날보다 더 심했습니다. 춥지나 않은지, 시장하지나 않은지, 아침저녁으로 한마음으로 살뜰히 돌보셨습니다. 이 모진 목숨이 끊어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 있음도, 어느 것이 우리 할머니께서 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조, 「영빈이씨제문」)




Ⅱ 사도세자의 광증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다.

영조는 마흔둘의 나이였고 이복형인 효장세자도 죽은 지 이미 칠 년이나 지났으니깐.

그렇게 모두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태어난 사도세자였지만 영조가 그에게 실망하기 시작한 것은 열 살 전후부터였다.

열 살부터 죽기 직전까지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골칫거리 아들이었고 사도세자에게 영조는 무섭고 두려워 피하고 싶은 아버지였다.

그 기간이 이십 년이나 되니 세자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다는 말도 이해가 갈 뿐이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열다섯 살에 대리청정을 한 다음부터 병이 생겨 그 총기를 잃었다고 한다.

예컨대 병이 발작이라도 하면 내인과 환관을 죽였고 발작이 그치면 후회를 했다고 전해진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뒤 세자를 동궁의 지위에서 내려 평범한 서인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전교에 "비록 미쳤다고는 하지만, 어찌 처분을 하지 않으리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이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며 미쳐서 한 행동이니 너그러이 처분해줄 것을 영조에게 당부하지 않았는가.

이후 사도세자가 죽고 난 뒤 장례에서도 영조는 사도세자를 미쳤다고 못박아 말했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수시로 깜짝깜짝 놀라며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하지만 이를 심각한 정신병으로 몰아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의 유무죄 여부를 떠나 어느 쪽을 택해도 문제가 생긴다고 했다.

실제로 사도세자에게 죄가 있었다면 정조는 물론 손자인 순조도 결코 임금의 자리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조가 측근의 꾐에 넘어가 아들을 죽인 것이라면 왕의 판단이 결국은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이니 즉, 혜경궁의 말처럼 어떤 쪽을 선택하든 결국 문제는 발생한다.


아홉 살 때부터 어지럼증을 앓고 있던 사도세자는 혜경궁과 결혼한 이듬해부터 행동이 예사스럽지 않다고 표현되어 있는데, 아마 신경증 초기이자 ADHD를 앓지 않았나 추정해본다.

또한 두 달 가까이 눈이 충혈되는 안질은 어린아이에게서 거의 볼 수 없는 병인지라 안경 착용을 고려했을 정도라고 한다.

세자의 병증은 서서히 진행되었다.

1752년 가을, 정조가 태어나고 궁궐에 홍역이 돌았다.

화협옹주가 홍역으로 죽고 사도세자 또한 병을 이겨내었지만 정성왕후의 환갑을 이틀 앞두고 영조가 전위하겠다고 소동을 일으켰다.

이 혼란 속에 사도세자는 「옥추경」을 읽으면 귀신을 부릴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벼락신을 부리기 위해 「옥추경」을 공부했지만 오히려 귀신이 보인다면서 겁을 먹었다고 한다.

홍역으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세자가 귀신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Ⅲ 사도세자의 죽음


1762년 5월 22일, 나경언이 사도세자를 고변한다.

곧 대권을 이어받을 세자가 반역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가 감히 세자의 반역을 고발한다는 것일까?

윤급의 겸종인 나경언은 노비는 아니지만 대갓집의 일을 돌봐주는 집사였다.

나경언은 머리를 써 궁궐의 내관들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내용의 고변서를 형조에게 바쳤다.

형조는 이내 영의정에게 알렸고 영의정은 곧장 영조에게 고했던 것이었다.

워낙 엄중한 문제인만큼 영조는 나경언을 직접 심문했는데, 이때 영조를 대면한 나경언은 또 다른 고변서를 꺼내놓았다.

즉, 형조에게 갖다 바친 고변서는 가짜였다.

세자의 죄상을 담은 고변서를 올렸다가 임금과 마주하기도 전에 죽을 것 같으니 미끼를 던졌던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고변서로 인해 영조는 물론 온 조정이 세자의 비행을 알게 되었고 영조는 세자를 폐위할 결심을 하게 된다.


임금의 행차는 즉각 혜경궁에게 보고되었었다.

혜경궁은 영조가 어느 문을 통해 들어와 어디로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경화문을 통해 들어와 선원전으로 갔단 소식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다.

징크스를 강하게 믿던 영조는 궂은일을 할 때 경화문을 통해 선원전으로 갔는데, 이는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이 확실해졌다는 전조였다.

사도세자는 곧장 영조에게 가지 않고 아내를 불러 이별을 고하고 세손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 부탁했다고 한다.

사실 정조의 휘항을 가져다 달라는 것은 온전치 못한 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혜경궁은 아들의 것은 작으니 세자 본인의 것을 쓰라고 답했다.

서로의 말에 대한 오해만 남긴 채 결국 사도세자는 정조의 것을 쓰진 않았다.

휘령전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세자는 관과 용포를 벗고 사죄하는 뜻에서 돌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하였지만 영조는 자결하라며 단호하게 요구했다.

세자의 죽음을 막아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손 정조도 살려달라 간청했으나 안겨 나갈 수밖에 없었고 뒤이어 신하들이 들어와 간청해도 영조는 단호하게 쫓아냈다.

결국 세자는 뒤주에 들어가게 되고 자정이 넘어서야 영조는 세자를 폐위하는 전교를 반포하게 된다.


사도세자의 사인에 대해 세자가 미쳐서 그리되었다는 것과 당쟁에 희생되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작은 임금인 세자를 일반 죄수처럼 처형할 수 없기에 영조는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가 칼을 받아들고 목숨을 끊으려 할 때도, 옷을 찢어 목을 매려 할 때도, 돌계단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할 때도 신하들이 모두 손으로 막았다.

명목상으로 국정을 대리하는 조선의 최고 권력자인 세자를 그 누구도 손 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세자의 죽음을 목숨 걸고 막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을 도운 역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조의 처벌을 받을 순 있어도 유교 이념에 따라 용서받겠지만 거꾸로 충신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에 세자에 대한 충성심이 있건 없건 모든 신하들이 그의 자결을 막으려 노력했다.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누군가의 지시로 뒤주가 들어오게 된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결국 순순히 들어갔고 밤이 깊어지자 뚱뚱한 체구에 더위도 많이 타 저도 모르게 뒤주판을 차고 뛰어나왔다고 한다.

소식을 들은 영조는 세자가 깨고 나오지 못하도록 두꺼운 널판을 덧대어 큰못을 치고 동아줄로 뒤주를 꽁꽁 묶었다고 한다.

그렇게 뒤주는 세자의 관이 되어버렸다.

누가 뒤주를 들이게 했는지 알 순 없지만 세자를 죽이고자 한 사람은 뒤주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아닌 영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가야금을 연주하다 알게 된 곡이 있는데 바로 「꽃이 피고 지듯이」다.

유명했지만 보지 않았던 영화 「사도」의 OST인데 문득 사도세자에 대해 궁금증이 생겼다.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의혹이 있다?

▶뒤주에 갇히는 벌을 거스르지 못하고 순순히 들어가던 사도세자?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혀 죽였지만 이를 애통해하던 영조?

국사책에서 처음 마주했던 영조와 사도세자 그리고 정조.

어떻게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갇히게 해 죽게 했을까하는 의문만이 머릿속에 가득했었다.

아들의 죽음을 슬피 여겨 내린 시호, 사도는 당시 내게 있어서 매우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와 정조는 업적까지 꿰뚫고 있지만 사도세자에 대해 너무 알지 못하는 것 같아 내막에 대해 파헤져보고자 『권력과 인간』을 펼치게 되었다.


신하 앞에서도 대놓고 꾸짖으며 아들 사도세자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아버지 영조 그리고 아버지 영조의 꾸짖음 아래 도망치지도 못하고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아들 사도세자.

모두의 관심과 기대 속에서 태어났지만 공부를 싫어해 열 살도 되기 전에 영조를 실망시켰고 학자라기보다 예술가에 가까웠던 그였기에 사도세자는 아버지와 애초에 맞질 않았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조선이 아닌 현대에서 부자관계였다면 극한의 결말로 내몰리진 않았겠지.

사도세자를 둘러쌌던 어른들부터 탄생과 성장과정 그리고 죽음까지 지켜보고 나니 시대를 잘못 타고 태어난 비운의 인물이 아니었나 싶다.


간혹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해 제기되는 의문 하나가 있으니 뒤주에 갇히게 가는 것은 일종의 벌이지 죽음으로 내몰려는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영조가 아들을 죽일 뜻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는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보니 모두가 이에 대한 의문을 믿고 싶어한다.

사도세자는 모후인 정성왕후의 영혼이 깃든 휘령전에서 뒤주에 갇혔었는데 영조가 쓴 사도세자의 묘지명을 보면 뒤주는 강서원에 있었다고 표시되어 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든 다음 영조가 이를 승문원으로 옮기게 했다는 기록도 있는데 영조는 차마 어머니의 영령이 있는 곳에서 아들을 죽게 할 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경희궁으로 돌아가지도 않고 뒤주를 감시했으며 19일 사도세자가 죽음에 이른 시점에 환궁을 했다.

이때 혜경궁은 사도세자가 20일에 죽었다고 추측했는데 영조는 뒤주를 21일에야 열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으로 볼 때, 세자를 죽일 뜻이 없었다는 영조의 말에는 공감할 수가 없다.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는 단편적이기에 한 사건에 대해 전후사정을 알기 어렵다.

또한 역사 왜곡은 끊임없이 대두되고 있는데 달라진 것은 전혀 없으니 간혹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가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유사 역사가 아닌 진짜 역사, 즉, 진정한 역사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해 저자는 우리 학생들을 위해, 우리 역사를 위해 대중 역사서에 대한 본격적인 검토가 필요하며 이는 전문가들이 역사 대중화의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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