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적절한 균형>의 등장인물은 저마다의 꿈을 품고 도시로 와서 뼈가 부서져라 일한다. 하지만 그들이 꾸는 꿈은 국가와 시대라는 거대한 힘 앞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상담시간에 담임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일제 강점기로 돌아간다면 독립운동을 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의 문제였다. 아이들은 대개 독립운동을 하겠다 답했다. 애국심에 의한 것일 수도 있고 국가라는 거대한 상황에 눌리면 개인의 인생은 지탱하기 어렵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책 <아사의 나라>는 가야의 왕녀 아사와 사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요새 한참 인기 있는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면 가야계 인물들은 안 됐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몸 바쳐 헌신했지만 충성심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여왕이 잘 해줘도 80년 핍박의 세월 때문에 쉽사리 그것을 믿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아사와 사비 역시 신라에게 흡수 통합된 다라국 왕족의 후손으로 망국의 슬픔을 안고 산다. 그나마 신라와 한때 힘겨루기를 했던 대가야의 왕족도 아니고 신라에 통합되는 것을 선택한 김유신 쪽의 금관가야 세력도 아닌 터라 신라 안에서 그들의 지위는 미미한 것이었다. 더구나 삼국시대는 신라, 백제, 고구려가 힘을 겨루던 시기고 다라국의 기반인 대야주의 대야성을 배경으로 연이어 전투가 벌어진다. 정확하게는 농구공 던지듯이 백제의 점령지가 되었다가 신라의 점령지가 되고는 했다. 그런 상황에서 왕족이기는 하나 신라의 귀족보다 못한 상태였던 아사는 불교에 귀의하는 것을 꿈꿀 수밖에 없었다. 망국의 왕녀로 그녀의 앞날은 지극히 불투명했던 것이다. 오빠처럼 생각한 다라국 장수 진술래는 나라의 부흥을 꿈꾸고 신라에 반기를 들 생각을 하고 있었고 다라국 왕족들은 신라의 눈치를 보기에 바빴다. 그때 아사에게 운명의 상대가 찾아온다. 신라의 장수이자 후에 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설오유였다. 두 사람은 신라의 장수와 가야의 왕녀라는 위치를 넘어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전선으로의 보강을 위해 대야성에 주둔하고 있던 신라군이 떠나자 백제군이 밀려들고 아사는 볼모로 잡혀가고 만다. 이미 국가와 시대에 의해 뒤틀리고 있던 가야 왕녀 아사의 인생이 격류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아사는 고국으로의 탈출을 꿈꾸지만 격류에 휩쓸린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휘둘리고 만다. 사실 가야 왕녀 아사의 사랑 이야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사가 책략에 능하고 주변 정세에 관심을 크게 기울이는 것으로 나와서 사랑 이야기보다는 삼국의 흐름에 주목하게 될 때가 많았다. 선덕여왕이 어떻게 통치를 하고 김춘추의 사위가 성주로 있던 대야성이 어떻게 빼앗겼는지 여왕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 난을 일으켰던 비담의 최후까지 신라 역사를 말하는 부분이 꽤 있었던 것이다. 백제 역시 아사가 볼모가 되고 사비가 백제 땅에서 살게 되면서 백제의 의자왕이 어떻게 나라와 함께 몰락의 길을 걷는지가 묘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책의 제목은 아사의 나라로 되어 있지만 아사와 그녀의 딸 사비의 삶을 1,2부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망국의 설움을 느끼는 가야 왕녀 두 사람이자 사랑하는 사람을 번번이 잃고 마는 두 모녀의 이야기를 삼국 시대의 역사와 함께 읽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다만 신라의 입장이 아닌 가야의 입장으로 읽으니 그들을 침략자로 보게 되어 기분이 좀 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씁쓸했던 점은 가슴 아픈 사랑이야기이기 이전에 나라를 잃고 부서지고 만 개인의 인생사로 보여서 서글펐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에는 스누피가 나오는 만화영화가 방송되었었다. 스누피의 존재도 존재지만 정작 관심을 끈 것은 자신의 이불을 끌고 다니는 아이의 존재였다. 어린 아이를 비롯해서 사람은 무언가에 애착을 품는다. 그것은 때로는 사람이고 때로는 동물이기도 하고 때로는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덕분에 꼬질꼬질한 이불을 아이에게서 떼어내서 버리기도 어렵고 누군가의 죽음을 설명한다는 것은 더욱 곤혹스럽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것에 애착을 품는다. 그것은 소유욕이라는 형태로 대놓고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잃고 나면 허전한 느낌을 주는 은근한 기운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누구나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무언가를 언젠가는 잃게 되지만 그것에 익숙하지도 현명하게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이 책 <좋은 이별>은 그런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를 말하는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마음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릴 정도의 고통을 겪지만 정작 어떻게 애도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그 구멍이 점점 커져 버리는 사람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누군가를 잃는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그 순간을 곱씹어보면 좋았던 것보다 나빴던 것만 많은 것 같아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의 죽음부터 친구와의 이별, 애인과의 결별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사람의 뇌는 감정에 좌우되고 묘하게도 부정적인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죽어버린 가족과의 마지막 대화가 다툼이었다거나 전학을 가는 친구와 제대로 작별을 할 순간을 어처구니없게 놓쳐버린 일 등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회와 미련만이 남는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을 계속 하다보면 벌어진 상처를 헤집는 것 같아서 제대로 슬퍼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고 한다. 진짜 문제는 그런 곳에서 발생한다. 사람은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면 바로 그것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려버린 손가락에 감각을 느끼듯이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서 그 이별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이 아닌 공허한 환상만을 쫓거나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면 그 반작용이 온다고 한다. 결국 상처는 상처고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슬픈 것은 할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를 쌓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영혼의 일부를 넘겨준 것과도 같다.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자신, 누군가의 친구였던 자신, 누군가의 연인이었던 자신이 그렇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계를 죽음이나 몇몇 다른 이유로 잃고 나면 자신이 넘겨주었던 영혼도 관계와 함께 죽어버린다. 깊은 상처가 생기고 그것이 아물더라도 상처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으며 예전의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아물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을 발산할 곳을 찾거나 실컷 슬퍼하고 실컷 울어야 하는 것이다. 아픈 것을 아파하지 못하면 마음은 안으로 곪아 터진다. 당시에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담담하게 견딘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이 그런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좋은 이별>은 다정하게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었다.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이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의 예를 들어 상실과 애도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길을 따라 끝까지 가도 잃어버린 것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아파해야 할 응어리를 억지로 누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인터넷이 보편화되고 이메일 계정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된 이후에 궁금했던 점은 어떻게 거대한 용량의 이메일이 공짜로 서비스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한 지금은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의 게임 잡지에서는 약간 시기가 지난 정품 게임 CD가 공짜로 제공되었었다. 물론 많은 패션 잡지에서도 저렴한 가격을 유지하면서도 수많은 부록이 존재한다. 할인점에서는 1+1행사라는 이름으로 두 개의 제품을 하나의 가격으로 제공한다. 이 모든 공짜 전략은 어떻게 유지되는 것일까. 이 책 <FREE 프리>에서는 그러한 공짜 전략을 깊이 있게 파고든다.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고 공짜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싫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공짜 뒤에 무언가 대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겁을 내는 것이지 자신의 돈을 들이지 않고 어떠한 상품을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은 꽤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가능하며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누군가 말하는 것처럼 공짜, 무료는 무가치한 것과 동의어가 아니다. 가치가 있는 상품이 소비자에게 제공되고 그것이 이익으로 유지될 수 있는 경제, 그것이 이 책 <FREE 프리>에서 말하는 새로운 경제다. 당연히 공짜 경제는 말 그대로 아무런 대가없이 운영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대가를 누가 부담하는가가 다르며 때로 화폐가 아닌 비화폐로 대가가 치러진다는 점이 기존의 것과 다르다. 잡지를 예로 들어보면 분량이나 정보의 질에 비해서 잡지는 대체로 저렴한 가격 수준을 유지하며 동시에 공짜로 부록이 따라붙는다. 잡지를 실제로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운영되지 않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잡지에 광고를 게재하려는 광고주가 일정 수준의 돈을 내고 잡지의 실제 소비자는 그에 따라 공짜에 가까운 가격으로 상품을 얻을 수 있다. 덕분에 포르투갈의 신문사의 경우에는 신문에 은식기를 덤으로 주는 행사를 해서 구독률과 수익을 대폭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한다. 공짜를 준다는데 마다할 사람이 없을 뿐더러 공짜 경제는 규모의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은식기를 비롯한 대부분의 상품은 대량으로 구매를 하게 되는 경우 그 가격은 대폭 하락하며 양이 많아질수록 개인의 부담은 '0'에 가까워진다. 공짜 경제는 실상 규모의 경제가 없다면 유지하기 어려운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이 더욱 부흥하게 된 것은 웹상에서의 비용은 한층 낮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웹을 통한 경제는 계속 넓어지고 있고 그에 따라 이용자도 대폭 늘어났다. 전체 100% 중 고급 사양의 유료 서비스를 선택하는 5%만 있어도 나머지 95%는 조건 없는 무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 혹은 광고주가 대신 대가를 치르는 구조나 하나는 무료로 다른 하나는 유료로 파는 것 이외에도 블로거가 컨텐츠를 제공해서 올리고 사람들은 그에 따라 트래픽이나 구독률을 명성으로 제공하는 식의 공짜 경제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보면 해적 행위조차 명성이라는 대가를 줌으로써 공짜를 가능하게 한다는 논리였다. 비용이 대폭 낮아질 수 있는 비트 경제 아래에서의 공짜 경제와 규모에 따라 많이 낮아질 수는 있으나 제약이 따르는 원자 경제 아래에서의 공짜 경제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것이 이색적이었다. 게다가 공짜 경제에서 대가로 제공된 명성 등을 현금화하는 것은 당사자가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고 공짜 경제에만 의존해서는 경제가 운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정말 대가없는 공짜, 이용하기에 따라 문제가 없을 수 있는 공짜 경제의 미래를 보여준 것은 꽤 신선했다. 정말 공짜로 경제가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던 것이다. 비트 경제 안에서의 혁명적 미래, 앞으로도 새로운 방식으로 경제를 뒤흔들 공짜 전략이 기대된다.
5~10분 거리였던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와 달리 고등학교에 들어서는 30분,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1시간이 넘는 거리를 통학하다보니 멍한 머리로 엉뚱한 생각을 자주 했었다. 아침의 차가운 공기에 몸을 떨면서 어느 학교에나 늘상 있는 고갯길을 오르다보면 절로 초능력을 갈구하게 된다. 친구들과 자주 했던 말은 순간이동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하고 겹쳐서 파리 인간 꼴이 나지 않도록 지정 장소로 이동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단순히 통학 시간을 줄이고 조금이라도 더 자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엉뚱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런 엉뚱한 생각을 미군 내 최고인재들이 했었다고 한다. 벽을 향해 걸으면서 자신의 몸의 원자가 분리되고 벽을 통과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명상을 통한 평정을 유지하면 그것이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는 사람은 지금도 버젓이 잘 살고 있는 장군이었다고 한다. 그는 군 특수부대 지휘관들에게 초능력부대를 통한 전장에서의 치료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지휘관들은 당연히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장군은 무안해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실제로 그 지휘관들은 그 주장을 굉장히 뛰어난 제안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에게 알리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은 기이한 내용의 논픽션이다. 존 론슨이라는 저널리스트는 1970년대부터 30년간 미군에서 진행된 기이한 활동들을 이 책에 담고 있다. 미군 내에는 초능력 혹은 심령을 통한 지원 부대가 있었으며 그들을 제다이 전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명칭만을 듣고도 한참을 웃었다. 스타워즈와 스타트랙 같은 SF물을 보는 사람을 괴짜라고 놀릴 것 같은 특수부대 사람들이 초능력을 익히게 만들고 그들을 '제다이 전사'라고 불렀다니 웃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한 훈련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염소를 노려봐서 심장을 멎게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단 한 번의 성공을 나았는데 그것을 성공시켰다고 처음 예상되는 사람은 한때 꽤나 유명세를 누렸던 용병이라고 한다. 그는 이미 죽었고 그 죽음에는 찬란한 영광을 유지한 내용과 우스갯소리로 만들어버리는 종류의 것이 각각 병존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저자는 그 용병의 죽음은 물론이고 염소를 죽였다는 내용조차도 가장 허약한 염소를 노려본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제시한다. 그것도 당연한 것이 3일을 노려봐야 염소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왜 염소를 죽여야 하는지도 알 수 없고 총을 쏘면 1분도 안 걸릴 일은 3일 동안 노려보면서 죽여야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염소 백 마리를 노려보기의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말이다. 염소를 노려보는 것으로 살해할 수 있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나왔는데 그 사람은 아직도 버젓이 살아 있으며 자신의 초능력을 만천하에 떨치고 싶은 것 같았다. 아직도 키우는 햄스터로 실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증명하려 들고 여기저기에서 그 기술을 가르쳐달라는 제의가 들어온다는 것이다. 뭐랄까 아무리 들어도 말이 안 되는 내용 같은데 당사자는 더없이 진지하니 점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런 기괴한 초능력 연구가 아직도 진행 중이라는 점에 있었다. 대표적 어린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노래를 통해 포로를 심문하거나 심령을 통한 감시 활동과 암살을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웃어야 할지 당혹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허나 그런 기괴한 연구의 진행중에 일반 시민을 상대로 LSD를 먹이거나 살해를 하는 등의 행위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는 점, 계속하여 초능력에 관한 이야기로 희화화해서 포로에 대한 유린 행위를 덮는 고도의 공작이 진행되었을 가능성, 초능력이 인기를 얻으면서 일어났던 집단 자살 같은 집단 히스테리까지 오싹한 부분도 꽤 되었다. 모두가 미친 가운데에는 미치지 않은 사람이 가장 비정상이라는 말처럼 읽으면 읽을수록 알 수가 없어지는 내용이었다. 초능력 부대 그 이면에는 대체 뭐가 있는 것일까.
책을 읽을 때 즐거운 점의 하나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자신이 가진 기분에 따라 같은 날이 다르게 해석되듯이 전혀 다른 사람의 눈으로 통해 본 세상은 내가 본 것과는 상이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가 많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읽어내는 시각을 보는 것은 때로 좋은 자극이 된다. 공감을 하든 못하든 타인의 시각은 신선한 즐거움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이 책 <시냇물에 책이 있다>는 그런 면에서 신선한 자극이 남는 책이었다. 독특한 제목을 가진 이 책은 문인보다 더 글을 잘 쓰는 연극인이 쓴 에세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사실 그 말에 그다지 동의할 생각은 없으나 머리말에 쓰여진 것을 보면 더없이 진지하게 글쓰기에 매진하는 사람이 쓴 에세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자신이 받아들이는 삶, 여행, 공부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하나의 진한 생각을 한 자, 한 자 글로 적어냈다는 느낌이 강했다. 에세이라고 해서 가볍게 읽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생각을 꼬이게 만들 때가 잦은 책이었다. 아버지가 반대한 연극 공부를 해서 유대가 부서지자 그 유대를 잇는 유일한 방법은 반대한 공부에 계속 매진하는 것이었다는 내용부터 프랑스 인 부자가 울면서 그를 찾아왔던 이야기 속의 말과 단절에 대한 것은 진한 여운과 깊은 생각거리를 남겼다. 아버지와의 단절의 계기가 단절 이후의 관계에서 유일한 관계의 끈이었기에 계속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이제 어버이의 입장에서 자식에게 기대하게 되는 마음을 이해하는 것도 점차 공감할 수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서 혼자만의 고독을 느끼고 있을 때 울면서 찾아온 아이를 위한 전화 연결과 대화를 하지 않은 채 관계의 단절을 했을 때 남겨진 자의 고통처럼 말과 관계의 단절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여 한없이 무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읽은 책에 대해 써놓은 부분이나 프랑스에서 아내를 독려하고 친구들을 보고 싶어 하는 부분, 자신의 나라를 경유해서 가는 자들을 의심의 나라로 보게 된 나라의 이야기처럼 천천히 읽어나갈 수 있는 부분도 있었다. 책의 전체 분위기 자체가 조용한 숲 속을 걸으며 바람 소리, 숲이 뿜어내는 소리, 자신이 자아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 차분한 편이라 단숨에 읽어나가기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문과 담의 관계와 다른 점에 골몰해보기도 하고 팬과 프로팬의 차이점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또한 안이 보이는 술집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사람들이 안이 보이지 않게 되자 목소리가 낮춰졌다는 이야기 다음을 궁금해 하기도 했다. 산책을 하다보면 자신에게 익숙한 것을 다시 보게 되기도 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떠올리거나 뭉쳐있던 생각을 정리하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느낌이었다. 타인의 생각의 두루마리를 슬며시 풀어내어 읽어가다보면 머릿속에서 천천히 산책을 하고 있는 것만 같은 감각에 휩싸였다. 다른 사람이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것과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결국 모두 삶에 대한 이야기라 마지막에는 하나의 점으로 모여들고 다시 퍼져나갔지만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