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일요일 아침에는 스누피가 나오는 만화영화가 방송되었었다. 스누피의 존재도 존재지만 정작 관심을 끈 것은 자신의 이불을 끌고 다니는 아이의 존재였다. 어린 아이를 비롯해서 사람은 무언가에 애착을 품는다. 그것은 때로는 사람이고 때로는 동물이기도 하고 때로는 물건이기도 하다. 그런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덕분에 꼬질꼬질한 이불을 아이에게서 떼어내서 버리기도 어렵고 누군가의 죽음을 설명한다는 것은 더욱 곤혹스럽다. 사람은 살면서 수많은 것에 애착을 품는다. 그것은 소유욕이라는 형태로 대놓고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잃고 나면 허전한 느낌을 주는 은근한 기운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누구나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무언가를 언젠가는 잃게 되지만 그것에 익숙하지도 현명하게 받아들이기도 어렵다는 점이다. 이 책 <좋은 이별>은 그런 이별에 대처하는 자세를 말하는 에세이로 이루어져 있다. 주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고 마음 한 가운데 커다란 구멍이 뚫릴 정도의 고통을 겪지만 정작 어떻게 애도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그 구멍이 점점 커져 버리는 사람에게 조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누군가를 잃는 순간은 예기치 않게 다가온다. 그 순간을 곱씹어보면 좋았던 것보다 나빴던 것만 많은 것 같아서 후회를 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의 죽음부터 친구와의 이별, 애인과의 결별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사람의 뇌는 감정에 좌우되고 묘하게도 부정적인 기억은 선명하게 남는다. 죽어버린 가족과의 마지막 대화가 다툼이었다거나 전학을 가는 친구와 제대로 작별을 할 순간을 어처구니없게 놓쳐버린 일 등 돌이켜 생각해보면 후회와 미련만이 남는다. 그런데 그런 생각들을 계속 하다보면 벌어진 상처를 헤집는 것 같아서 제대로 슬퍼하지 않으려고 할 때가 있다고 한다. 진짜 문제는 그런 곳에서 발생한다. 사람은 충격적인 사건을 목도하면 바로 그것에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려버린 손가락에 감각을 느끼듯이 잃어버린 사람에 대해서 그 이별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상실을 상실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현실이 아닌 공허한 환상만을 쫓거나 억지로 감정을 억누르면 그 반작용이 온다고 한다. 결국 상처는 상처고 잃어버린 사람이 있다면 슬픈 것은 할 수 없다. 사람과의 관계를 쌓는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자신이 가진 영혼의 일부를 넘겨준 것과도 같다.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자신, 누군가의 친구였던 자신, 누군가의 연인이었던 자신이 그렇게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계를 죽음이나 몇몇 다른 이유로 잃고 나면 자신이 넘겨주었던 영혼도 관계와 함께 죽어버린다. 깊은 상처가 생기고 그것이 아물더라도 상처가 있었다는 흔적이 남으며 예전의 자신과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상처를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아물게 하는 방법 밖에는 없다. 현실을 직시하고 감정을 발산할 곳을 찾거나 실컷 슬퍼하고 실컷 울어야 하는 것이다. 아픈 것을 아파하지 못하면 마음은 안으로 곪아 터진다. 당시에는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담담하게 견딘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부터 우울증에 빠지게 되는 것이 그런 이유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좋은 이별>은 다정하게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었다. 에세이 형식으로 되어 있어서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것이나 책에서 읽었던 내용의 예를 들어 상실과 애도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 길을 따라 끝까지 가도 잃어버린 것을 돌이킬 수는 없지만 최소한 아파해야 할 응어리를 억지로 누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