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에게 키스를!
수잔 제인 길머 지음, 이진 옮김 / 한숲출판사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결혼 후 나는 점점 페미니스트가 되어 가고 있다. 그동안 나는 페미니즘을 외면해 왔다. 흑백논리로 중무장해 전투만 하려 들고, 희생자로서 피해의식만 갖고 있는 듯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핵심인 결혼제도가 하루하루 나의 자유를 압박해오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별다른 선택의 여지 없이 페미니즘의 문턱에서 대답과 해결책을 구하고 있다. 나 자신의 문제 속에 빠져 허우적되지 않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책과 이론의 도움이 필요했다.

하지만 페미니즘 관련 책들을 읽을 수록 난 점점 답답해져만 갔다. 그 책들에서 보여준 문제의식과 비판의식은 오히려 이 현실이 얼마나 공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듯해 해결의 기미가 더욱 보이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칼날 세우지 않고, 이성적으로 살지 않고, 대충 이것저것에 맞춰 주며 살아가는게 오히려 행복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페미니스트로 사는 건 전혀 행복하지 않아 보였고 불행을 자초하는 길 같이 느껴졌다.

그건 어쩌면 많은 책들이 이론에만 머물고 구체적인 삶의 자리로 내려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우리가 페미니스트적인 시각을 갖고도 어떻게 당당하고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은 통통 튀고, 통쾌하고, 공유할 수 있고, 무엇보다 희망적이다.

우리나라와 미국의 가부장적 현실이 너무나도 비슷하고 꼭 우리나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무척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유교적인 가부장 문화의 본산이라 할 만한 우리나라와 보수주의이기는 해도 더욱 발달한 산업사회인 미국이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다니. 이 두 나라에서 여성의 현실이 피차일반인 걸 보면 역시 가부장 문화가 오랜동안 인류 문화에 뿌리박혀 여성을 억압해 온 제도라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

하지만 답답하지는 않다. 나의 현실이 모든 여성의 현실이라면, 다른 여성들과 함께 나의 삶을 조금더 여유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저자가 말했듯 나의 현실 역시 인간 존재의 불완전성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나의 불행을 굳이 행복이라 부르지는 않더라도 좀더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듯 하다. 우리가 언젠가는 넘어가야 할 산과 아울러 그 산을 넘는 과정에서 쉴만한 공간을 찾게 해준 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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