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시공주니어 문고 2단계 15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롤프 레티시 그림 / 시공주니어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삐삐'란 이름에는 향수가 어린다. 그 향수에는 어렸을 적 즐겨보았던 티비 드라마의 추억이 담겨있다. 그 외화 시리즈를 다시 한 번 방영되길 학수고대 하고, 책 속 삐삐의 대화문은 이름 모를 한국인 성우의 목소리와 계속 중첩된다. 그 유명한 작품을 이제서야 원작인 소설로 읽었다. 삐삐가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오랜 기간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까닭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할머니의 작가적 역량 덕분일거라고 생각하면서. 그 어떤 아동문학에서, 소설에서, 영화에서 삐삐만큼 독특한 캐릭터를 찾아볼 수 있을까.

원작으로 처음 읽은 삐삐는 요사이 유행하는 '엽기 코드'에 가깝다. 그 아이의 행동거지, 상상력, 무궁무궁한 거짓말, 세상과 기존 질서에 대한 시선은 가히 '엽기적'이라 할 만하다. 삐삐를 요즘 말로 부른다면 '엽기 소녀'쯤?... 하지만 삐삐를 '엽기 소녀'라고 부르기에 삐삐는 너무 오래 전에 탄생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왔다. 다시 말해 요즘의 '엽기'와는 분명 다른 구석이 있는 것이다. 삐삐의 '엽기성'은 어떤 것이며 요즘의 '엽기'와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요즘 대부분의 '엽기'는 단순한 일탈과 눈요기를 추구하는데 비해 삐삐의 엽기성은 파괴적인 상상력에 기초해 건전한 다시 보기를 시도하는 듯 하다. 삐삐의 말과 행동은 지극히 '비사회적'이고 우리가 바라는 '착한 어린이상'과는 동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질긴 제도와 관습의 굴레에서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하고 이를 의심하고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다.

온실속의 화초처럼 곱게만 자라온 옆집아이들, 토미와 아니카에게 놀라운 즐거움을 안겨주는 많은 에피소들을 어찌 잊을 수 있을지, 나도 그렇게만 놀고 싶다. 게다가 티파티에서 가정부들 흉을 보는 위선적인 주부들에게 그보다 더한 가정부 이야기를 해대는'맞불작전'은 얼마나 통쾌한지.

어찌보면 논란의 소지가 있을 수 있는 이러한 삐삐의 말과 행동은 어떠한 악의도 없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다. 삐삐는 도둑들을 혼내주지만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준 도둑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서커스를 망치지만 서커스 속 힘 대결의 승리자로 당연히 받아야 할 상금을 거절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삐삐가 불난 집의 아이들 구해주는 장면은 삐삐가 '착한 아이'라는 점을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주는 장면이다. (린드그렌 할머니는 어쩌면 '노파심' 때문에, 즉 삐삐가 나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혹 삐삐를 읽은 아이들이 삐삐처럼 될까봐 걱정할 부모들의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이 책의 마지막을 이렇게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이유로 삐삐가 아동문학 작품으로 과연 괜찮은 건지 의심하는 눈초리나 논란들은 그야말로 '노파심'으로 봐도 별 무리가 없을 듯 싶다. 성인문학의 인물들은 소설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모두들 '비정상적'인 인물들인데 아동문학의 캐릭터는 모두 착한 어린이의 전형이 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나 삐삐를 좋아하던 나도 이렇게 범생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데(?) 아이들이 삐삐를 읽는다고 해서 집안을 어지럽히거나, 소란을 피운다거나, 학교에 가지 않는다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부정적인 요소들을 승화시킬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엽기'이든 무엇이든, 파괴적이면서도 건전한 상상력으로서 말이다. 어른들에게 '착한 어린이'로 규격화되어 자라길 강요받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에게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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