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품절


집안의 대들보 같은 중요한 가족 성원이 세상을 등지면 유족의 생활에는 엄청난 타격이 미친다. 그런데도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면, 유족의 생활 보장이라는 생명 보험 본래의 사명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자살로 인한 사망은 생명보험료율의 기초를 이루는 생명표의 사망률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을 배제하면 보험회사가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게 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현재 일본 생명보험회사에서는 가입 후 1년 동안을 자살에 따른 면책기간으로 삼고 있다. 처음부터 자살을 염두에 두고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1년인나 죽음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는 어렵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과연 이 1년 이라는 기간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23쪽

"신문에서 보았는데,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잖아? 원래 독일어를 잘못 번역한 것으로, 전혀 병태와도 일치하지 않고 다중인격과도 착각할 수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불치병 같은 어두운 어감이 강해서, 그런 선고를 받으면 가족들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리지. ...... 그와 마찬가지로 정성결여에 대해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게 좋다고 생각해."

"잠깐만요. 당신까지 단순한 언어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신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자코 담배만 피웠다.
"당신은 정말로 이 세상에, 인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211쪽

"r전략이라는 것은 곤충처럼 수많은 자손을 만든 다음 거의 내버려두는 방법이고, K전략은 인간처럼 소수의 자식을 에지우지하면서 키우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특히 자식을 소중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K전략자이지요. 옛날에는 잠시 눈을 떼기만 해도 아이가 죽어버리는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모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부모 없이도 자식이 자랄 수 있게 되자 r전략의 상대적 유리성이 증가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식을 만들고 싶은 만큼 만들어두고 내동댕이쳐도 사회가 돌봐주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식을 남길 수 있지요. 즉, 자식을 열심히 키우는 것보다, 자식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전략이 유리해져 버린 것입니다."

가나이시는 얼음이 녹은 버번을 한 모금 들이켜 마른 목을 적셨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떠올린 것처럼 히죽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선의로 가득 찬 길도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 미국에 유학 갔을 당시에 친했던...... 어느 친구에게 배운 속담이지요. 약한 자를 보호해 주는 사회보장제도가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냉혹한 r전략 유전자를 급속히 증가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사이코파스의 정체이지요." -242-243쪽

"이런식의 명렬한 유전독성으로 인한 환경오염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이 된 최근 10년은 사이코파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한 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이쓴 전자파가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도, 반드시 망설(妄說)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예로 든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얽히며 인간의 DNA를 손상시켜서, 사이코파스의 증가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실마리를 풀어가는 단계에도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사이코파스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49-250쪽

"문제는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한 사람의 사이코파스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승수효과에 의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좋지 않은 영향이지요. 그것은 지금의 현실을 둘러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까지 배금주의가 침투하고, 정의와 도덕을 입에 담는 것은 촌스럽다고 조소당하고, 다른 사람을 태연하게 상처입히는 사이코파스적 가치관을 냉정하다든지 멋있다는 이유로 입이 닳도록 칭송하고 있지요. 예를 들면...... 글쎄요. 요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절반은 사이코파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전의 만화에는 조금 더 인간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요즘에는 상대방이 악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량한 주인공이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그냥 죽여버리잖아요? 게임에서는 더욱 심각합니다. 적이 되어 싸우는 상대방을 처음부터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히 움직이는 표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251-252쪽

가나이시는 생명보험에 관한 범죄 중에서도 보험금을 노린 살인에는, 다른 범죄에 비해서 사이코파스가 관여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일단 그의 논거는 앞뒤가 맞는 것처럼 보였다. 우발적인 범죄나 격정에 휘말린 범죄와 달리 보험금 살인에는 주도면밀한 계획성과 의심을 받지 않으려는 용의주도함, 나아가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상대를 살해하려고 하는 냉혹한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55쪽

그에게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실감은 거의 없었다. 사치코의 죽음이 남긴 것은 단지 생리적인 불쾌감과 꺼림칙한 뒷맛뿐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치코가 아무리 잔악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귀라고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퀴벌레의 목숨을 빼앗은 것만큼의 감정 밖에 솟구치지 않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는 오히려 뒤꼭지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448-449쪽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이 악의에 가득찬 것으로 보이는 거에요. 그러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교묘한 트릭을 사용하게 되지요. 배신을 당해도 상처 입지 않도록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의 인연을 끊거나 애착을 갖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사악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막상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고통당하지 않도록 배수진을 쳐두지요. 우리 사회에 정말로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알아보기 쉬운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454-455쪽

생명보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신지는 자리로 돌아가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뛰어난 치안과 저축을 좋아하는 근면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세계 제일의 가입률을 달성한 시스템.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경제가 순조롭게 발전하여 생명보험회사들은 화려한 봄을 구가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한때의 지나간 꿈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사회 전체가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거대한 도덕적 붕괴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가치를 경시하고 돈이 최고라는 풍조, 사고력과 상상력의 쇠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결여, 그러한 징조들은 이미 손해보험 분야에서 시작되고 있다. 손해보험업계에서는 공공연하게 청구 금액의 절반은 사기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생명보험에까지 파급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보장에 대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결국 그 부담은 국민 전체에게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세기말이나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469-470쪽

인간의 정신적 위험인 모랄 리스크는, 예전에는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어가고 있다. 그 원인은 죽은 가나이시와 일부 사회생물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복지제도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현재의 복지제도가 약자에게 그렇게까지 따뜻하게 배려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농약이나 식품가공물, 다이옥신, 전자파와 같은 사회오염이, 인간 존재의 근간인 유전자를 잠식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 중략 ...

가나이시의 말을 대변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하도록 진화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언젠가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되리라.

그것은 가나이시의 병적인 염세주의가 낳은 환영에 지나지 않을까. 죽음의 악취로 충만한 검은집이 우리 사회의 내일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470-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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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안보구 책으로 읽는 거예요? 아프님도 이런책 읽는구나 ㅎㅎ

이잘코군 2007-07-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먼저 보고 책도 보는거에요. :)
이거 곧 영화칼럼(?) 나갑니다. 쓰려고 마음만 먹고 있는 중. 오늘 중으로 쓰려고 하는데 지금 지치고 더워서 뇌가 호흡곤란을 일으켜서 맛난거 먹으며 쇼파에서 티비나 보다 오려고요.

프레이야 2007-07-14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원작이군요. 저도 언능 이 영화 보고 싶던데, 아직이네요.
아프님 칼럼 기다립니다.^^

푸른신기루 2007-07-1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프님도 이런 소설 읽는구나ㅎㅎ
急친근^-^
영화는 어땠어요?? 재밌어요??
영화랑 책 중에 어떤 게 더 괜찮아요??

이잘코군 2007-07-1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이 영화도 좋았고, 책도 좋았어요. 영화는 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을 표현해줬고, 책은 영화가 담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담아냈죠.
신기루님 / ㅎㅎㅎ 둘 다 재밌습니다. 이 소설 누구한테 빌린건데;;;

red7177 2007-07-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은 아직 못 읽었는데, 책이 더 으스스하다고 하네요. 정말 그런가요?
조금 더 더워지면 한밤중에 읽으려고 하고 있답니다. ㅋ

이잘코군 2007-07-1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자꾸 상상하게 되니깐요. 근데 영화를 먼저 봐서 책을 통해서 상상되는 장면도 영화의 장면이 먼저 떠올라요. 영화와 다른 으스스한 부분이 책 뒷부분에 나오는데 무섭습니다. 이제 엘리베이터도 못타겠습니다. :)

sweetmagic 2007-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별 용달 보다는 **택배 하지 ㅋㅋㅋ

이잘코군 2007-07-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매직님 댓글 잘못 단거 같아요. ㅋㅋ 이 페이퍼가 아닌데.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와 한겨레 신문을 통해 신간을 접하고, 관심 목록을 뽑아내는데, 한국일보는 우리집에서 구독하니 집으로 오지만, 한겨레는 구독하진 않으니 토요일자를 사기 위해 집 밖으로 나서야 한다. 가까운 편의점에 가면 구할 수 있지만 조금만 늦으면 편의점 가판대에 있는 세 부 정도의 한겨레 신문이 동난다. (근데 왜 꼭 한겨레 신문은 다른 신문보다 널려있는 부수가 적냐. 편의점 하나 당 두 부 정도 밖에 보지 못했다. 안팔려서 그런가.) 나 같은 이들이 동네이 있는 듯 하다. -_- 그리하여 오늘도 늦게 일어나 헛걸음질하고 반대편에 있는 도로로 나가 횡단보도를 건너 길거리 가판대에서 한 부 사온다. 매주 토요일 아침 이 짓은 이제 나의 일상이 되었다.

  비록 두 신문사의 책소개란을 통해 신간을 접하지만, 두 신문사의 책소개는 성격이 매우 다르다.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등의 다른 신문사들은 어찌 구성되는지 궁금해서 모든 신문 토요일자를 하루에 다 구입해서 보고픈 충동도 느낀다. 한국일보의 간판은 <진보의 역설>이란 책이었고, 한겨레의 간판은 <폭력에 대한 성찰>이었다. 한국일보는 <폭력에 대한 성찰>을 인문/사회 구석공간에 짧게 소개했고 한겨레는 <진보의 역설>을 다루지 않았다.

  또한 한겨레는 헤겔의 법철학을 다시 읽는 <차이와 연대>, 명목상 프랑스에 속해있으나 그로부터 배제되는 방리유를 통해 보는 우리 시대의 모습을 다룬 <공존의 기술>과 같은 묵직하고 손에 쥐기 힘든 책들을 소개하였다. 반면, 한겨레에는 없지만 한국일보에는 모습을 드러낸 책들도 꽤 많다. 앞서 말한 <진보의 역설>이 그렇고, 미국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선거 25건을 소개한 <네거티브, 그 치명적 유혹>, <한국의 보수와 대화하다> 와 같은 책들이 다소 비중있게 다루어졌다.

  아마도 이건 책을 접하고 선정하는 기자들의 개인적 취향이 많은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국일보의 '책과 세상'의 책임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이왕구 기자의 글이 조금 더 많고, 한겨레는 고명섭 기자의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두 사람의 글 또한 많이 다르다. 이왕구 기자의 소개글은 소개하는 책에 충실한 반면, 고명섭 기자의 글은 본인이 그간 읽어왔던 어떤 책들과 그와 관련된 경험, 자신의 지식을 조합하여 책을 소개한다. 단순한 책소개라기보다는 서평내지는 리뷰의 느낌이랄까.

  어떤 것이 좋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한국일보와 한겨레 둘 다 검토하는 이유는, 수많은 신간 중에 눈에 띄지 못한 채 지나치게 되는, 관심가질 만한 서로 다른 책들을 소개해주기 때문이다. 한겨레가 좀 더 지식욕이 있는 독자들을 겨냥한다면, 한국일보는 그냥 무난하다. 내게는 한국일보보다는 한겨레에서 소개해주는 책에 관심을 더 갖게 되지만, 한겨레가 놓치는 책들을 한국일보를 통해 접한다. 더 많은 신문사들의 토요일자 신문을 접하게 된다면 그물은 더 커지고 그물코는 더 작아지겠지만 지금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검토해야 할 대상이 많아질수록 스트레스는 더해간다. 적당히 조절해야지.  


* 관련글 : 오늘의 관심 도서 12 (http://blog.aladin.co.kr/drumset/1410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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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7-14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고로 경제신문 신간소개코너는 음...말을 말아야지....
암튼 고루해요...ㅋㅋ 오로지 경제이론서와 자기개발서 중심이라죠.

이잘코군 2007-07-1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메피님 일간지 중에서 경제신문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하핫. 그만큼 전 거기서 멀리있다는거겠죠? 재테크에 밝으려면 경제신문을 매일 꼬박꼬박 읽어야 한다고 - 무슨 말인지 몰라도 - 하던데, 저는 관심조차 없으니 어쩝니까. 근데 돈은 벌고 싶고. -_-

자기'개'발서와 경제이론서는 전 영 아니에요.

로쟈 2007-07-14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론 한겨레의 북리뷰가 토요일로 옮겨간 게 유감입니다. 토요일에 외출할 일이 드물어서 대개 온라인으로밖에 못 보거든요. 아울러 경향신문의 북리뷰들도 저는 추천합니다...

이잘코군 2007-07-14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저도 전에 있던 18℃ 사라진게 참 그렇습니다. 토요일자 신문에 끼워들어가면서 비중이 아무래도 좀 줄어들고. 씻고 옷 갈이입고 나간 저도 귀찮았지만 그래도 안보면 안될거 같아서 나갔다왔답니다. 경향신문도 더불어 봐야겠군요. 로쟈님 때문에 제 그물만 커졌습니다. 하하.

비로그인 2007-07-14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읽고있던 책에 대한 스포일러 만땅인 J일보의 신간코너를 보고 화나서 이메일 보냈더니 상품권을 주더라구요. -..-; 그다지 반갑진 않았어요. 뭔가 뇌물먹은 기분이랄까. 여하간, 그래서 그냥 여러신문들 신간도서의 제목들만 보지요. 매번 뭐가 유행하면 그것에 대한 책들이 번역되어 우루루 나오잖아요. 요즘은 또 뭐가 유행이래? 그러면서요. 몇달이 지나서도 계속 사람들이 언급을 하면 그때 사볼 생각이 나지요.

이잘코군 2007-07-14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구리님 꼭 그런 메세지 같은데요? 그냥 막 말하자면, 이거 받고 그냥 입닫아라, 이런 거 아닐까요. -_- 미안해서라기보다는. 정말 뇌물같은 기분. 전 개인적으로 한겨레 고명섭 기자 글 좋아합니다. 그의 소개글 속에 제가 알지 못하는 다른 저자나 책을 접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관심있는 주제이고 관심가는 책이어서 봤는데, 그 안에 또 다른 녀석들로 줄줄이 비엔나처럼 연결되는. 싸이의 파도타기 같은 느낌. 그래서 또 다른 녀석을 접하게 되고 그러죠.
 

 

 

 




  알라딘 마을의 '승주나무'님께서 시사저널 사태에 대해서는 기사도 쓰셨고, 기자를 만나 인터뷰도 하셨고, 그 분의 서재에 많은 페이퍼를 통해 소개해주셨으므로 더 알고픈 분들은 서재 파도타기(?)를 권해드립니다. (http://blog.aladin.co.kr/booknamu

  승주나무님께서 사전에 페이퍼로 공지해주신 덕분에 오랫만에 일찍 자려던 걸 참고 피디수첩을 보았다. 결국 시사저널 前 기자들은 이제 사표를 냄으로써 22명 모두 백수가 되었고, 피디수첩의 피디에 따르면 9월부터는 그들이 힘을 합쳐 새로운 주간지를 내놓는다고 하였다. 그 이름은 비록 '시사저널'은 아니지만 난 그 스물 두 명의 기자들을 믿고 정기구독을 하련다. 맨날 돈 없다 돈 없다 대출금 내야한다 하면서 돈 없는 티 팍팍 내고 있는 나지만 써야할 땐 써야한다.

  사실 전에 한겨레21 한참 열독하고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 대략 2001년 - 그때도 정기구독은 하지 않았다. 한겨레에서 전화도 몇 번 왔고 매번 가판대에서 구입하는거 보다 정기구독을 해주면 더 고맙겠다고 했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도 알았지만 구독하지 않았다. 매번 챙겨보기보다는 주제에 따라서 사봤기 때문이고, 가판대에서 직접 내 손으로 구입하는 손맛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따뜻한 주간지를 손에 넣기 위해 종로쪽으로 일부러 가서 한겨레21을 사오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예정된 날짜보다 하루 정도 앞당겨서 종로나 광화문 쪽에 미리 배부된다는 사실을 몇달에 걸쳐 주간지를 구입하며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던 한겨레21도 정기구독을 하지 않았는데, 아직 나오지도 않은, 이름도 모르는 주간지를 정기구독하겠노라 약속한다. 솔직히 나 지금 사표낸 스물 두 명의 시사저널 기자들이 시사저널에 있을 때도 시사저널 사 본 적 많지 않다. 시사저널이 독립언론이란 것도, 어떤 주간지보다도 팩트에 충실하다는 것도, 어떤 압력과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도, 기자들의 글발이 '상당'을 넘어 베껴쓰며 익혀야 할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나는 한겨레21에 빠져있었기에. 시사저널이 멀쩡했을 때도 구입하지 않았는데 그 기자들이 나와서 꾸리는 새 주간지를 미리 사겠다고 말하니 난 뭐에 혹해 이런 발언을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 '기자'라는 직함으로 '기자'가 해야 할 제 역할에 충실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그들에게 힘을 조금이나마 보태주고 싶어서, 정기구독을 하려는 것이다. 9월이 아니라 준비되는대로 하루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2007년의 대한민국에서 어떻게 감히 이미 인쇄소에 넘어간 기사 세 쪽을 들어내고 광고로 떼워버릴 수 있단 말이냐. 언론자유 언론자유 부르짖는 조중동은 꼭 이럴 땐 침묵하더라. 조중동 뿐 아니라 다른 언론도 마찬가지다. 한겨레 빼고는 시사저널에 대해 다룬 신문을 보지 못했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한국일보까지도. 언론자유가 무참히 짓밟히는 이 형국에 왜 타 언론사의 기자들은 함께 소리쳐주지 않는가. 그럴거면 뭣하러 기자됐냐고 묻고 싶다. 일반 월급쟁이 회사원이나 기자나 다를 바 없다면 말이다.

  결국 돈이 펜을 눌러버렸고, 삼성의 힘은 위대했다. 삼성이 직접 압력을 가하지 않았더라도, 직접 손대지 않고서도 누군가가 삼성의 뒤를 봐준다는 사실만으로도, 오히려 이런 사실이 더더욱  삼성의 위력을 느끼게 해준다. 겉으로는 괜찮은 기업인 것처럼 포장하고 속은 아주 썩었다. 얼마전 삼성신입사원의 매스게임광경과 또 얼마전 삼성직원 한 명이 사내 게시판에 올렸다는 장문의 사직서가 떠오른다. 그리고 또 아마도 한겨레21에서 본 것으로 추정(?)되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스키장 체험기(?)가 머리 속에 떠오른다.

 스물 두 명의 기자들이 이렇게 들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 분들은 제때 월급 받아 집에 가져다줬을 것이고, 삼성도 이미지 버리지 않았을 것이고, 시사저널 금창태 사장도 지금처럼 티비에 얼굴 들이밀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들은 시사저널 '前' 기자를 너무 낮게 평가했고, 그들이 고분고분 말을 들을 것이라 생각했나보다. 기자들은 다행히(?)도 부정의에 대해서는 시정을 요구하는, 참 언론인이었고, 사태는 결국 모두가 인상 구기는 쪽으로 마무리 되었다.

  2007년 2월에 나온 책 <기자로 산다는 것>은 시사저널 前 기자들의 기자로서의 삶에 대한 생각을 담아놓은 책이다. 오늘 MBC 피디수첩과 더불어 시사저널 사태와 관련해 꼭 봐야할 책이다. 그들은 이제 시사저널 기자가 아니지만 새로운 매체에서 시사저널의 애초의 정신 그대로 '사실과 진실의 등불을 밝'히고,  '이해와 화합의 광장을 넓'히며, '자유와 책임의 참 언론을 구현'해주리라 믿는다. 출처조차 밝히지 않으며 미국 언론의 기사나 번역하고 짜깁기하며 기자의 이름조차 가명으로 싣는 지금의 '짝퉁' 시사저널은 가라. 정기구독자들을 우롱하고 있다. 기존 시사저널의 독자들은 시사저널의 기자정신에 지지를 보낸 사람들이므로 그들은 짝퉁을 견딜 수 없을 것이고 구독을 중지 할 것이다. 그렇다면 짝퉁 시사저널이 살아남을 길은 하나 남았다. 조중동의 친구가 되는 방법이다. 이제 우리는 주간조선, 주간동아와 동일선상에 시사저널을 올려놔야할 것이다. 9월 창간되는 새 주간지를 통해 스물 두 명의 기자들이 자본과 권력에 거침없이 대항해주기를 적극 바란다.


* <기자로 산다는 것> 리뷰  :  http://blog.aladin.co.kr/drumset/1067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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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7-04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데 평창을 위해 IOC위원으로 투표장소에서 열심히 얼굴도장까지 찍고 있다죠.
뭐가 뭔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소설로 말하면 지나친 복선과 반전이 난무하는
대한민국입니다.소설속의 행인 1인 저같은 사람은 죽을 맛이죠..

이잘코군 2007-07-0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성이 이미지 메이킹은 잘하는거 같아요. 대신 썩은 내부는 꼭꼭 감추죠. 아주 잘하고 있어요. 삼성에 대해서는 기사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력이 들어오겠죠. 지난번 읽은 한겨레21의 어느 기사를 보면 현장에 있지 않아도 확실히 느낄 수 있겠더군요. 거대 자본, 권력의 썩은 부위를 확실히 드러내 줄 언론이 필요합니다. 이에 대항할 수 있는 매체도 별로 없는데, 시사저널이 썩어버렸으니 어디에 기대를 해야할지 모르겠군요.

BRINY 2007-07-04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PD수첩 봤어요. EBS 인터뷰 다큐멘터리랑 번갈아 채널 돌려가면서 보느라고 힘들었는데. 그리고 메피님께사도 언급하셨지만, 바로 전 9시 뉴스에서 이건희 IOC위원이 나와서 동계 올림픽 유치가 국민소득향상에 도움이 될거다 운운하는 것도 봤구요. 모든 건 양면성이 있다지만, 정말 뭐가 뭔지..

전자인간 2007-07-0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꼭 정기구독할 생각입니다. 단, 수취 주소는 회사가 아니라 집으로 해야겠네요..

홍수맘 2007-07-0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울 옆지기 협박해서라도 정기구독 시킬겁니다.

이잘코군 2007-07-04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이니님 / ebs는 뭐하는거에요? 저는 티비를 잘 안봐서. 피디수첩도 사실 거의 안봤는데 어젠 승주나무님 덕에 보게 됐습니다.
전자인간님 / 네. 저도 정기구독할래요. 아직 제호도 모르지만 스물 두 명을 믿습니다.
홍수맘님 / ㅋㅋ 네. 이런 분들은 밀어줘야해요. 에어콘 팔아서 생활비를 댄다니. 허참.

BRINY 2007-07-04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BS가 뭐하는거라니욧~ 어제는 인요한(존 린튼) 세브란스 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 나와서 인터뷰했었어요.

이잘코군 2007-07-04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이니님 / 하핫. 어떤 방송인지 몰라서 물은게 아니구 어떤 프로그램을 했길래 양쪽 다 놓치지 않으려고 하셨나 궁금해서 그런거랍니다. 크크. :)

네꼬 2007-07-04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보다가 울어버렸어요. 눈물을 머금고 "잘못된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라"는, 어느 기자의 아내가 기자들에게 한 말씀이 어찌나 마음을 울리던지요. 우리 같이 응원하기로 해요.

참 근데 그 막내 기자는 훈남이었어.
: )

이잘코군 2007-07-04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꼬님 저두. 근데 우는 새에 훈남인건 또 언제 알아채셨어요? 본능인가봐 =333

승주나무 2007-07-12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아프 님의 감독적인 페이퍼를 이제야 봤네요.. 브리핑에 떴으면 진작에 봤을 텐데.. 알라딘 개편이 불만스런 이유^^;

이잘코군 2007-07-12 22:26   좋아요 0 | URL
저는 설정을 아예 브리핑이 젤 첫 화면에 뜨도록 해놨어요. :)
예전만큼 많은 브리핑은 안되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해야겠더라구요.
더 많은 글을 브리핑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는데 - 지기님께 - 아직 변화가 없네요.
 

서재 2.0으로 변신한 후 좋아진 점 하나는 오른쪽 측면에 마이리스트 책들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이다. 관심 갖는 주제별로 가끔씩 선보이는 것도 - 나 이런 주제에 관심있어요 라고 - 나쁘지 않지만 갑자기 머리를 스쳤던 생각 하나는, 내가 특별히 좋아한 책, 감명받은 책들을 소개해주면 어떨까 하는 거였다. 나를 알고픈 이들은 그걸 참고하고, 그 누군가에게 개미발톱만큼이라도 내가 영향을 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지식성장이나 시력을 높이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다면 더 할 나위 없이 영광이겠다 싶어 이 리스트를 마련한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숫자가 늘어나 리스트를 둘로 나눈다.

* 꾸준히 업데이트 예정
* 펼쳐봐야 모두 보입니다

 

 


13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관용과 열린사회
김용환 지음 / 철학과현실사 / 1997년 8월
7,000원 → 7,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2012년 06월 03일에 저장
구판절판
홍세화 님이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들어오며, 관용, 톨레랑스라는 개념을 소개했다면, 이 책은 관용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파고드는 책. 학술서에 가깝고, 그다지 친절하고 쉽게 쓰여지진 않았지만 생각의 꺼리를 제공한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옥중서간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8년 8월
13,000원 → 11,700원(10%할인) / 마일리지 650원(5% 적립)
2008년 02월 09일에 저장
구판절판
<만행>과 함께 내 인생의 가장 힘겨운 날을 보내던 시기에 눈물 흘리며 읽던 책이다. 난 <만행>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며 마음을 정화시켰고 그에따라 정신도 맑아졌다. 육사에서 교관으로 있던 신영복 교수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을 받고 대전, 전주 교도소에서 20년간 복역하다가 1988년 8.15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했다. 20년 20일 동안 감옥 안에서 힘겨운 날을 보내며 느끼고 생각한 바를 깨알같은 글씨로 서술한 편지글 모음이다.
만행 1-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현각 지음, 김홍희 사진 / 열림원 / 1999년 11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7년 07월 01일에 저장
절판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던 현각 스님은 숭산 스님의 강연을 한번 듣고는 곧바로 이 길이라는 확신에 낯선 한국 땅에 발붙였다. 모든 것들 버리고 떠나오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고민의 여정을 따라가면 그를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가 한 고민들을 함께 하게 될 것이다.
만행 2-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현각 지음, 김홍희 사진 / 열림원 / 1999년 11월
7,000원 → 6,300원(10%할인) / 마일리지 350원(5% 적립)
2007년 07월 01일에 저장
품절
도대체 이런 좋은 책을 왜 절판시키는건지. 품절이 아니라 절판이다. 출판사에서도 재판의 의지가 없다고 들었다. 스님이 쓴 책이지만 불교서적이 아니라 철학서적으로 봐야한다. 내 인생의 소중한 순간에 나를 위로해줬으며 유일하게 나와 대화를 나눈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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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2 2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법서설을 비롯하여 한권 한권 의미와 깊이를 지닌 책들입니다.
훌륭한 도서목록입니다. 아프락사스님.


이잘코군 2007-07-03 00: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제가 감명깊게 읽고, 또 다른 의미로 좋아하는 책은 훨씬 많지만, 그 중에서 제게 눈을 뜨게 해준 책들만을 이 자리에 모아봤습니다. 앞으로도 독서 중 그런 책이 발견되면 이곳에 추가할 계획입니다.

비로그인 2007-07-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학전공자셨군요 ^..~ 저에겐 좀 어려워서...전 소피의 세계를 읽었는데, 그건 좀 너무 가볍고 그렇드라구요.

이잘코군 2007-07-03 11:05   좋아요 0 | URL
너구리님 :) <소피의 세계>는 저는 뒤늦게 사놓고 아직 안봤어요. 재밌다고 해서 한번 보려고 하는데 두꺼워서. -_-

멜기세덱 2007-08-09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상의 발견 이후로, 냉면 먹을때 악착같이 가위로 자르는 걸 거부한답니다...ㅎㅎㅎ
이거 다 보려면, 저는 인생을 한 3~4번 살아야겠어요...ㅎㅎ

이잘코군 2007-08-30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가위로 안자르면 넘 자르기 힘들어서 항상 잘라달라해요. 여기 있는 책들은 제가 소중히 여기는 녀석들입니다. 두고 두고 또 읽고픈.

비공개 2007-08-30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행 1,2권 이거 제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책이랍니다. 왠지 뿌듯~~ ㅎㅎ

이잘코군 2007-08-30 12:37   좋아요 0 | URL
일전에 어느 웹진에 '내 인생의 책'이라는 제목으로 책 소개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고른게 <만행...> 이었습니다. 그냥 읽으면 별 내용이 없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다가오더라고요. 머리와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 이었습니다.

2008-02-08 2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8 2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8 2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8 23: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8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2-08 2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aviatrix 2009-03-06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어린왕자 GOOD~ 오강남씨 책도 GOOD~ 알퐁스도데의 "꼬마철학자" 믿고 함 읽어볼랍니다.

이잘코군 2009-03-06 09:22   좋아요 0 | URL
<꼬마철학자>는 번역본이 여러갠데 현재 나와 있는 것 중엔 어떤 게 좋은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읽은 건데 그때 푹 빠졌습니다.
 
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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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법률가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남들이 모두 진리라고 믿어 온 것도 반드시 자기 머리로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5쪽

제 기대는 병역거부가 더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 저의 경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전쟁이 분쟁 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평화를 모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뿐이 아닌 평화의 실천을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변한 것처럼 여러분도 이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다 보면 언젠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런 날도 오겠지요. 이 책은 '그들'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저의 지적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35쪽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이런 오해는 용어의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입니다. 서양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미로 쓰이는 '양심' 개념이 번역되어 우리 일상에서 쓰일 때 '다른 사람의 평가'와 관련된 객관적인 의미로 확장되었고, 거기에 '적'이라는 일본식 표현까지 덧붙어 그 의미가 매우 불분명해졌습니다. 물론 우리말에서도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뜻합니다. 적어도 사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국어사전이 알려주는 의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계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양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 사람 참 양심적이야"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가 아니라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오해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38-39쪽

'a good conscience'란 자기 마음에 비추어보았을 때 떳떳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좋은 양심'이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는 거울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적 감각과 관련 있기는하지만,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각자 나름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스스로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떳떳하다면 그것은 'a good conscience'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제19조가 이야기하는 양심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헌법학자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가 진지하고 절박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소리를 뜻한다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충분히 '양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이 그저 남들이 다 가는 군대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징병에 응한다면 그것은 굳이 양심의 자유와 연결시킬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내가 군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때문에 견딜 수 없어 군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진 않을 테니까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영 행위는 '비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과 크게 상관없는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40-41쪽

'양심에 따른 거부'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개인이 행사하는 광범위한 거부권을 의미합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표현이지요. 여기에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이념이나 정책을 펴는 국가에 반대해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독재 정권에 대항해 투표를 거부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포함됩니다. -42쪽

'양심에 따른 거부'란 매우 광범위한 시민불복종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번억해 쓰는 co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양심에 따른 거부'가 맞고, 거기에는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세금 거부, 투표 거부, 화폐 사용 거부, 집총 거부 등 국가를 상대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부가 포함됩니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거부의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가 병역거부라는 걸 이해하고 나면 '비양심적 병역이행'같은 기괴한 반대 논리가 자리 잡을 여지는 전혀 없지요. –-49쪽

pacifism은 처음 쓰일 때부터 반전주의를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대개의 영어 사전들은 "전쟁은 잘못된 것이며,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도 잘못이라는 믿음", "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또는 폭력에 반대함, 윤리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함"등으로 평화주의를 정의하고 있지요.-50쪽

'평화주의'라는 단어를 드을 때 퀘이커나 메노나이트, 아미시 같은 특정 기독교 교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중에도 국가에 의한 징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평화주의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도 역시 평화주의에 속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복잡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평화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평화주의에서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 뿐입니다. 다행히 그 공통 분모를 찾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거부한다'는 점이지요. 일단 이 책은 그 공통분모에 기초하여 평화주의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평화주의를 '전쟁에 반대하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 또는 종교적 믿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51쪽

평화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전쟁만은 '필요악' 또는 '정당한 전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며 찬성표를 던집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평화주의자 범주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평화주의자가 되려면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강한 확신이 필요합니다.-52쪽

평화주의와 구별해야 하는 개념으로 '비폭력주의'가 있습니다. 비폭력주의는 평화주의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평화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부모나 교사가 드는 회초리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화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비폭력주의자는 아닙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는 전쟁에 절대 반대하면서도 가정 교육에서 일반인들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비폭력주의자는 대부분 평화주의자입니다만, 평화주의자가 되려고 비폭력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폭력까지 반대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에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묶는 유일한 공통점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비폭력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52-53쪽

사실 "강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이라는 질문도 여러 차례의 변형을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질문자들은 왜 "강도가 너를 죽이려 한다면"이라거나 "강도가 너를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같은 질문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저는 강도를 죽이고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 생명을 포기하겠습니다"같은 대답을 듣는 것은 질문자에게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도 포기할 수 있다고 결단한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평화주의자들이 그런 존경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씌우려고 말이지요.

이 질문은 그런 악의에 찬 의도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토론을 지향하기보다는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만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논의 대신에 '강간'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이 문제를 남성성의 문제로 전환해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빈다. "네 여자가 강간을 당할 상황인데, 가만히 있다면 너는 사나이가 아니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전쟁터로 남성들을 유혹해내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바로 '강간'입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또 위의 질문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네 여동생', '네 아내', '네 여자친구' 등 모두 '너의 OO'입니다. 그들이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소유권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67-68쪽

우선 전쟁은 '무죄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방위와 구별됩니다.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내 방위행위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바로 강도 그 사람이 나의 상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 상관없는 제 3자가 피해를 입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릅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언제나' 무고한 양민들입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랬습니다.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돌진한 테러범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빈 라덴이 주축인 알 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은 알 카에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테러범 응징을 내세웠지만 결국 고통받은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민중들이었습니다. 강도에게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과 전쟁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 중략 ...

전쟁이 위 질문의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설사 제가 그 질문에 "예, 저는 강도를 죽이고 여동생을 살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병역을 거부할지라도 저의 두 태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69-71쪽

공론의 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놓고 팽팽한 논쟁이 벌어져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누가 논증부담을 져야 할까요? 사람들은 보통 평화주의자들이 논증부담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론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전쟁의 정당성 또는 불가피성을 전제한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네 쪽에서 밝혀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서 토론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주의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한 한, 잠정적 추정은 평화주의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가져오는 엄청난 인명 손실과 인권 침해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약'이어서, 전쟁을 옹호하는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 그 자체를 '선'이나 '정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쪽은 어떨까요?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성경의 입장이 과연 평화주의 쪽이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평화주의적 입장에 설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았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평화주의 쪽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잠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기독교 내부의 논증부담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 참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 합니다. –-83-84쪽

"병억 기피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중적인 전도 대상이 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대체복무제에 귀가 솔직해 넘어갈 수 있다"는 한기총 정연택 사무총장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물론 대체복무제 같은 그럴듯한 미끼가 있다면 기독교인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되는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체복무제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허용된다면 이런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신교 신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걸 막으려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어가는 걸 막는 일은 목사님들이 할 일이지 국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독교 교육을 통해 막아야 할 일을 국가 형벌을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가 과연 기독교 정신에 맞는지 의문입니다.-108쪽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마라.
(<마태복음> 5:38-42, 비교 <누가복음> 6: 29 ) -112쪽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구절에는 '거역'과 '거스르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역'은 그리스어 '안티타소'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군사 용어인 이 말은 '전투 태세를 갖추다'또는 '무기를 들고 대항할 준비를 하다'는 뜻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두 번의 '거스르다'는 그리스어 '안티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도 무장반란이나 폭력적 저항을 의미합니다. 즉 위의 성경 구절에 나오는 '권위를 거역'한다는 의미는 국가권력에 폭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국가권력에 대한 '모든' 저항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국가권력에 맞서서 무장반란을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되고 그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120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정당한 전쟁 이론의 핵심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제시한 데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전쟁은 정의를 보장하고, 평화를 되찾는 수단으로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전쟁은 반드시 정당성을 지닌 통치자의 지도 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적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적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비전투요원들은 보호받아야 하며, 학살, 약탈, 방화 등은 절대 금지됩니다. 수도사나 성직자들처럼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집합적으로 또는 법적 권위자에 의해 실현되는 '전쟁'과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또는 살인)
을 엄격히 구분하였습니다. 앞의 것은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136쪽

최초의 동기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는 나의 행동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의 정당성과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구분하려는 입장은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불가분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정당성과 전쟁의 정당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150쪽

식민지가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병역을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은 이때 처음 수립된 것입니다. 이 법안을 수용하면서 펜실베니아 의회의 한 의원은 "잠깐 동안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눈 앞의 안전을 위해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기억해둘 만한 말이지요. -177쪽

톨스토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반드시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이든, 이슬람이든, 불교도든 또는 어떤 나라 출신이든지 간에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99년 징병을 앞둔 젊은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 시대를 사는 윤리적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병역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는 이론적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였지만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184-185쪽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여 무기를 들고 전쟁에 복무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독일 헌법 제 4조) -203쪽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감옥에 갈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일어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는 아닙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는 다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소수를 다수로 바꾸는 분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께 의지하여 올바른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 곁에 계실 것입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베트남 반전 운동에 나서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설교의 주인공으로 킹 목사를 자주 인용하는 한국 목사님들이 막상 킹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 정말 아이러니 아닙니까?

킹 목사는 평화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반역자의 자리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평화의 실천은 그런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킹 목사를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평화는 최대한 추상적으로 말로만 떠들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 구체적인 전쟁을 언급하거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지혜입니다.
-227쪽

"내게는 전쟁을 단순화시켜서 생각하고 싶은 아주 개인적이지만 강한 유혹이 있다. 이를테면 제 6계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말 뜻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이 있다. 또한 모든 윤리적인 원리들 가운데 가장 큰 원리인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말의 보편성을 에누리 없이 믿고 싶은 유혹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인간 역사에 더 큰 살상을 막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필요했고 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았던 순간들이 드물게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런 결론에 마음이 못내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M 스콧 펙 박사)-248쪽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입영률 100퍼센트 달성 지시를 내림에 따라 병무청 직원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모든 병역거부자(또는 병역거부가 예상되는 사람)들을 일단 군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병무청 직원들이 아예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장소인 왕국회관을 포위하여 징집 연령에 속한 사람들을 영장도 없이 군부대로 강제 입소시킨 다음, 군부대 내에서 입영 및 소집 명령서를 발부하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지요. 그야말로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높은 실적을 올리려고 멀쩡한 민간인을 붙잡아 억지로 군인으로 만든 다음 군형법을 적용한 것인데 누구도 그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270쪽

1990년대 초부터 일부 군사법원(국법회의의 후신)은 상관이 총을 두번 주었는데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두 번 다 거절하면, 각각을 독립된 범죄로 보아 마치 같은 죄를 두번 저지른 것처럼 가중하여 처벌하는 편법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법상 이른바 '경합범'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법정형으로 정해진 징역 2년의 상한선을 넘어 징역 3년을 선고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 거부했을 때 즉각 구속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총기를 수여함으로써 억지로 경합범을 만드는 이와 같은 처벌 방식은 당시 30개월이었던 현역 복무 기간보다 형이 더 길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었지요.-275쪽

동기는 좀 달랐다 하더라도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국가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려는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확대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경우에는 헌법상 기본적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의 의무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적 기본권인 사상, 양심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그 양자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자를 적절히 조화, 공존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예외 없는 처벌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 외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각자의 사상, 양심, 종교에 따른 실질적 평등을 보장받을 평등권 등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하여 헌법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단계에 왔다."는 박 부장판사(2002년 1월 29일 서울 지방 법원 남부지원 박시환 부장판사)의 선언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281쪽

대체복무에 반대하는 분들은 애국심이 남달라 강한 분들입니다. 누구라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의 애국심이 지금의 수준을 뛰어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남이 어떻게하든, 남이 돈을 써서 병역 면제를 받든말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든말든, 나는 내 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그리고 남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가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도 애국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애국자들이 대체복무와 같은, 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들이고도 남을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314쪽

남북 대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엄청나게 제한했던 유신정권과 논리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소수자들은 다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체복무 인정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따뜻한 배려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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