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집
기시 유스케 지음 / 창해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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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대들보 같은 중요한 가족 성원이 세상을 등지면 유족의 생활에는 엄청난 타격이 미친다. 그런데도 자살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면, 유족의 생활 보장이라는 생명 보험 본래의 사명에 위반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자살로 인한 사망은 생명보험료율의 기초를 이루는 생명표의 사망률에 포함되어 있다. 그것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자살을 배제하면 보험회사가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게 된다는 지적도 나올 수 있다.

그런 이유로 현재 일본 생명보험회사에서는 가입 후 1년 동안을 자살에 따른 면책기간으로 삼고 있다. 처음부터 자살을 염두에 두고 보험에 가입했다고 해도, 보통사람이라면 1년인나 죽음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기는 어렵다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나 과연 이 1년 이라는 기간이 타당한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다. -23쪽

"신문에서 보았는데, 정신분열증이라는 병명을 바꾸자는 움직임이 있잖아? 원래 독일어를 잘못 번역한 것으로, 전혀 병태와도 일치하지 않고 다중인격과도 착각할 수도 있고 말이야. 게다가 불치병 같은 어두운 어감이 강해서, 그런 선고를 받으면 가족들은 절망의 늪으로 빠져버리지. ...... 그와 마찬가지로 정성결여에 대해서도 다른 표현을 쓰는게 좋다고 생각해."

"잠깐만요. 당신까지 단순한 언어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신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자코 담배만 피웠다.
"당신은 정말로 이 세상에, 인간다운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211쪽

"r전략이라는 것은 곤충처럼 수많은 자손을 만든 다음 거의 내버려두는 방법이고, K전략은 인간처럼 소수의 자식을 에지우지하면서 키우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포유류 중에서도 특히 자식을 소중히 생각하는 전형적인 K전략자이지요. 옛날에는 잠시 눈을 떼기만 해도 아이가 죽어버리는 유아 사망률이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부모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대가 지나면서 사회보장제도가 발달하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부모 없이도 자식이 자랄 수 있게 되자 r전략의 상대적 유리성이 증가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자식을 만들고 싶은 만큼 만들어두고 내동댕이쳐도 사회가 돌봐주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자식을 남길 수 있지요. 즉, 자식을 열심히 키우는 것보다, 자식을 만들어놓고 도망치는 전략이 유리해져 버린 것입니다."

가나이시는 얼음이 녹은 버번을 한 모금 들이켜 마른 목을 적셨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떠올린 것처럼 히죽거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선의로 가득 찬 길도 지옥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 미국에 유학 갔을 당시에 친했던...... 어느 친구에게 배운 속담이지요. 약한 자를 보호해 주는 사회보장제도가 마치 운명의 장난처럼 냉혹한 r전략 유전자를 급속히 증가시킨 것입니다. 그것이 사이코파스의 정체이지요." -242-243쪽

"이런식의 명렬한 유전독성으로 인한 환경오염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에 걸쳐 태어난 사람들이 성인이 된 최근 10년은 사이코파스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한 우연일까요? 한 마디 덧붙이자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이쓴 전자파가 하나의 원인이라는 것도, 반드시 망설(妄說)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예로 든 모든 것들이 복합적으로 뒤얽히며 인간의 DNA를 손상시켜서, 사이코파스의 증가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실마리를 풀어가는 단계에도 접어들지 못했습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사이코파스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되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나는, 그들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249-250쪽

"문제는 그들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한 사람의 사이코파스는 경제학에서 말하는 승수효과에 의해서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물론 좋지 않은 영향이지요. 그것은 지금의 현실을 둘러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까지 배금주의가 침투하고, 정의와 도덕을 입에 담는 것은 촌스럽다고 조소당하고, 다른 사람을 태연하게 상처입히는 사이코파스적 가치관을 냉정하다든지 멋있다는 이유로 입이 닳도록 칭송하고 있지요. 예를 들면...... 글쎄요. 요즘 만화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절반은 사이코파스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전의 만화에는 조금 더 인간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지만요. 요즘에는 상대방이 악당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량한 주인공이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그냥 죽여버리잖아요? 게임에서는 더욱 심각합니다. 적이 되어 싸우는 상대방을 처음부터 인격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히 움직이는 표적으로 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251-252쪽

가나이시는 생명보험에 관한 범죄 중에서도 보험금을 노린 살인에는, 다른 범죄에 비해서 사이코파스가 관여할 확률이 높다고 했다.

일단 그의 논거는 앞뒤가 맞는 것처럼 보였다. 우발적인 범죄나 격정에 휘말린 범죄와 달리 보험금 살인에는 주도면밀한 계획성과 의심을 받지 않으려는 용의주도함, 나아가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상대를 살해하려고 하는 냉혹한 의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255쪽

그에게는, 살인을 저질렀다는 실감은 거의 없었다. 사치코의 죽음이 남긴 것은 단지 생리적인 불쾌감과 꺼림칙한 뒷맛뿐이었다.

그는 너무나도 간단명료한 자신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사치코가 아무리 잔악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살인을 저지른 살인귀라고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인간이 아닌가!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퀴벌레의 목숨을 빼앗은 것만큼의 감정 밖에 솟구치지 않는 것이다. 양심의 가책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그는 오히려 뒤꼭지가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448-449쪽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 모든 사건이 악의에 가득찬 것으로 보이는 거에요. 그러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교묘한 트릭을 사용하게 되지요. 배신을 당해도 상처 입지 않도록 모든 것에 대해서 마음의 인연을 끊거나 애착을 갖지 않아요.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에 사악이라는 딱지를 붙여서, 막상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고통당하지 않도록 배수진을 쳐두지요. 우리 사회에 정말로 커다란 해악을 끼치는 것은 알아보기 쉬운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보다, 오히려 평범하게 보이는 보통 사람들이라고 생각해요." -454-455쪽

생명보험이란 과연 무엇일까. 신지는 자리로 돌아가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뛰어난 치안과 저축을 좋아하는 근면한 국민성을 바탕으로 세계 제일의 가입률을 달성한 시스템.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경제가 순조롭게 발전하여 생명보험회사들은 화려한 봄을 구가했다. 그러나 그것도 이미 한때의 지나간 꿈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사회 전체가 현재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과 같은 거대한 도덕적 붕괴에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의 가치를 경시하고 돈이 최고라는 풍조, 사고력과 상상력의 쇠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의 결여, 그러한 징조들은 이미 손해보험 분야에서 시작되고 있다. 손해보험업계에서는 공공연하게 청구 금액의 절반은 사기라고까지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생명보험에까지 파급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렇게 되면, 보장에 대한 비용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하게 되고, 결국 그 부담은 국민 전체에게 돌아가는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것을 단순히 세기말이나 과도기적 현상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 전체가 되돌릴 수 없는 파국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469-470쪽

인간의 정신적 위험인 모랄 리스크는, 예전에는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급격히 감소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의 방향을 더듬어가고 있다. 그 원인은 죽은 가나이시와 일부 사회생물학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복지제도에 있는 것일까. 그러나 현재의 복지제도가 약자에게 그렇게까지 따뜻하게 배려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그렇다면 농약이나 식품가공물, 다이옥신, 전자파와 같은 사회오염이, 인간 존재의 근간인 유전자를 잠식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 중략 ...

가나이시의 말을 대변하자면, 그들이야말로 새로운 사회에 가장 잘 적응하도록 진화한 종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언젠가 그들에게 잡아먹히게 되리라.

그것은 가나이시의 병적인 염세주의가 낳은 환영에 지나지 않을까. 죽음의 악취로 충만한 검은집이 우리 사회의 내일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는가. -470-4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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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1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안보구 책으로 읽는 거예요? 아프님도 이런책 읽는구나 ㅎㅎ

마늘빵 2007-07-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먼저 보고 책도 보는거에요. :)
이거 곧 영화칼럼(?) 나갑니다. 쓰려고 마음만 먹고 있는 중. 오늘 중으로 쓰려고 하는데 지금 지치고 더워서 뇌가 호흡곤란을 일으켜서 맛난거 먹으며 쇼파에서 티비나 보다 오려고요.

프레이야 2007-07-14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원작이군요. 저도 언능 이 영화 보고 싶던데, 아직이네요.
아프님 칼럼 기다립니다.^^

푸른신기루 2007-07-14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아프님도 이런 소설 읽는구나ㅎㅎ
急친근^-^
영화는 어땠어요?? 재밌어요??
영화랑 책 중에 어떤 게 더 괜찮아요??

마늘빵 2007-07-14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님 / 이 영화도 좋았고, 책도 좋았어요. 영화는 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섬뜩함을 표현해줬고, 책은 영화가 담지 못하는 사이코패스에 대한 깊이있는 대화를 담아냈죠.
신기루님 / ㅎㅎㅎ 둘 다 재밌습니다. 이 소설 누구한테 빌린건데;;;

red7177 2007-07-14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은 아직 못 읽었는데, 책이 더 으스스하다고 하네요. 정말 그런가요?
조금 더 더워지면 한밤중에 읽으려고 하고 있답니다. ㅋ

마늘빵 2007-07-14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은 자꾸 상상하게 되니깐요. 근데 영화를 먼저 봐서 책을 통해서 상상되는 장면도 영화의 장면이 먼저 떠올라요. 영화와 다른 으스스한 부분이 책 뒷부분에 나오는데 무섭습니다. 이제 엘리베이터도 못타겠습니다. :)

sweetmagic 2007-07-15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별 용달 보다는 **택배 하지 ㅋㅋㅋ

마늘빵 2007-07-16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매직님 댓글 잘못 단거 같아요. ㅋㅋ 이 페이퍼가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