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얼굴 - 총을 들지 않을 자유와 양심의 명령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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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믿는 사람은 어리석은 법률가가 될 수 밖에 없으므로, 남들이 모두 진리라고 믿어 온 것도 반드시 자기 머리로 한번 의심해봐야 한다는 것이지요.-5쪽

제 기대는 병역거부가 더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된 저의 경향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 우리 모두는 폭력이 일상화된 사회, 전쟁이 분쟁 해결의 중요한 수단으로 받아들여지는 세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이런 세계에 살면서 평화를 모색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습니다. 말뿐이 아닌 평화의 실천을 고민하다보면, 어느새 병역거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변한 것처럼 여러분도 이 변화를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계속 늘다 보면 언젠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드는' 그런 날도 오겠지요. 이 책은 '그들'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나'의 문제를 고민하게 된 저의 지적 여행을 기록하고 있습니다.-35쪽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둘러싼 이런 오해는 용어의 번역 과정에서 파생된 문제입니다. 서양에서 매우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의미로 쓰이는 '양심' 개념이 번역되어 우리 일상에서 쓰일 때 '다른 사람의 평가'와 관련된 객관적인 의미로 확장되었고, 거기에 '적'이라는 일본식 표현까지 덧붙어 그 의미가 매우 불분명해졌습니다. 물론 우리말에서도 '양심'은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바른 말과 행동을 하려는 마음'을 뜻합니다. 적어도 사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국어사전이 알려주는 의미에 따르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관계없이 자기가 옳다고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양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그 사람 참 양심적이야"라는 표현은 대부분의 경우에 "그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야"가 아니라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 믿을 만한 사람이야"라는 뜻으로 쓰입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뉘앙스에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많은 오해가 여기에서 시작됩니다.-38-39쪽

'a good conscience'란 자기 마음에 비추어보았을 때 떳떳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객관적으로 '좋은 양심'이냐 아니냐의 문제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양심은 누구나 자기 내면에 지니고 있는 거울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윤리적 감각과 관련 있기는하지만, 보편적인 윤리나 도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각자 나름의 판단과 행동의 기준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이상해 보여도 스스로 자신을 그 거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떳떳하다면 그것은 'a good conscience'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제19조가 이야기하는 양심의 자유는 모든 사람의 내면에 혼자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 것입니다. 헌법학자들이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양심이란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서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는 자신의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입니다.-40쪽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의 자유가 진지하고 절박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소리를 뜻한다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행동에는 충분히 '양심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이 그저 남들이 다 가는 군대이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징병에 응한다면 그것은 굳이 양심의 자유와 연결시킬 필요가 없는 문제입니다. '내가 군대에 들어가지 않는다면 내 인격적인 존재 가치가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 때문에 견딜 수 없어 군대에 들어가는 사람은 그리 많진 않을 테니까요.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의 입영 행위는 '비양심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과 크게 상관없는 문제'로 볼 수 있습니다. -40-41쪽

'양심에 따른 거부'는 개인과 국가의 관계에서 개인이 행사하는 광범위한 거부권을 의미합니다. 자기 양심에 따라 국가의 요구를 거부하는 모든 행동을 포괄하는 표현이지요. 여기에는 자기가 동의할 수 없는 이념이나 정책을 펴는 국가에 반대해 세금을 내지 않는다든지, 독재 정권에 대항해 투표를 거부한다든지 하는 다양한 형태의 저항이 포함됩니다. -42쪽

'양심에 따른 거부'란 매우 광범위한 시민불복종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요컨대 우리나라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로 번억해 쓰는 co는 정확히 번역하자면 '양심에 따른 거부'가 맞고, 거기에는 병역거부뿐만 아니라 세금 거부, 투표 거부, 화폐 사용 거부, 집총 거부 등 국가를 상대로 하는 다양한 형태의 거부가 포함됩니다. 이 목록은 얼마든지 더 길어질 수 있습니다. 양심에 따른 거부의 여러 수단 가운데 하나가 병역거부라는 걸 이해하고 나면 '비양심적 병역이행'같은 기괴한 반대 논리가 자리 잡을 여지는 전혀 없지요. –-49쪽

pacifism은 처음 쓰일 때부터 반전주의를 의미했습니다. 지금도 대개의 영어 사전들은 "전쟁은 잘못된 것이며, 전쟁에 나가 싸우는 것도 잘못이라는 믿음", "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또는 폭력에 반대함, 윤리적 또는 종교적 이유에서 무기 사용을 거부함"등으로 평화주의를 정의하고 있지요.-50쪽

'평화주의'라는 단어를 드을 때 퀘이커나 메노나이트, 아미시 같은 특정 기독교 교파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자나 사회주의자 중에도 국가에 의한 징집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하므로 평화주의가 기독교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도 역시 평화주의에 속함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런 복잡성을 고려할 때, 우리가 평화주의를 이해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렇게 정의하기 어려운 여러 평화주의에서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 뿐입니다. 다행히 그 공통 분모를 찾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을 거부한다'는 점이지요. 일단 이 책은 그 공통분모에 기초하여 평화주의를 이해하려고 합니다. 평화주의를 '전쟁에 반대하는 일련의 사상적 흐름 또는 종교적 믿음'이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51쪽

평화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이 전쟁만은 '필요악' 또는 '정당한 전쟁'이라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며 찬성표를 던집니다. 심지어 전쟁터에 나가 사람을 죽이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을 평화주의자 범주에 넣을 수는 없습니다. 평화주의자가 되려면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것 이상의 강한 확신이 필요합니다.-52쪽

평화주의와 구별해야 하는 개념으로 '비폭력주의'가 있습니다. 비폭력주의는 평화주의보다 훨씬 넓은 개념입니다. 평화주의가 '전쟁'을 반대하는 입장이라면, 비폭력주의는 '폭력'을 거부하는 입장입니다. 전쟁에 반대하면서도 부모나 교사가 드는 회초리에는 찬성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평화주의자이기는 하지만 비폭력주의자는 아닙니다. 기독교 교파 중에는 전쟁에 절대 반대하면서도 가정 교육에서 일반인들보다 더 엄격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비폭력주의자는 대부분 평화주의자입니다만, 평화주의자가 되려고 비폭력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보통 평화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 중에는 동물에 대한 폭력까지 반대해서 채식주의자가 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국가권력이 행사하는 폭력에만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보다 훨씬 범위가 넓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을 묶는 유일한 공통점은 이들이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는 것처럼, 반전주의자가 되려고 반드시 비폭력주의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52-53쪽

사실 "강도가 네 여동생을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이라는 질문도 여러 차례의 변형을 거쳐서 나온 것입니다. 질문자들은 왜 "강도가 너를 죽이려 한다면"이라거나 "강도가 너를 강간하고 죽이려 한다면" 같은 질문을 들고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미 그 질문의 답을 예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정에서 그런 질문을 던지고, "저는 강도를 죽이고 자신을 구하기보다는, 차라리 제 생명을 포기하겠습니다"같은 대답을 듣는 것은 질문자에게 곤혹스러운 일입니다. 신념을 위해 자기 생명도 포기할 수 있다고 결단한 사람에게는 누구라도 경의를 표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평화주의자들이 그런 존경을 받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질문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에 무관심한 사람이라는 굴레를 씌우려고 말이지요.

이 질문은 그런 악의에 찬 의도로 고안되었기 때문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토론을 지향하기보다는 청중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만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냐는 논의 대신에 '강간'같은 자극적인 단어를 써서 이 문제를 남성성의 문제로 전환해 논의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도록 유도하는 것이빈다. "네 여자가 강간을 당할 상황인데, 가만히 있다면 너는 사나이가 아니다" 전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전쟁터로 남성들을 유혹해내기 위해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가 바로 '강간'입니다.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어디 있습니까? 또 위의 질문이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네 여동생', '네 아내', '네 여자친구' 등 모두 '너의 OO'입니다. 그들이 나의 소유이기 때문에 소유권 침해를 막아야 한다는 남성 중심적 사고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67-68쪽

우선 전쟁은 '무죄한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개인적 차원의 방위와 구별됩니다.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내 방위행위의 대상은 분명합니다. 바로 강도 그 사람이 나의 상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아무 상관없는 제 3자가 피해를 입을 일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다릅니다. 전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은 '언제나' 무고한 양민들입니다. 역사상 모든 전쟁이 그랬습니다. 비행기를 납치하여 세계무역센터 빌딩으로 돌진한 테러범들은 (적어도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빈 라덴이 주축인 알 카에다라는 테러 조직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벌인 전쟁은 알 카에다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은 테러범 응징을 내세웠지만 결국 고통받은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민중들이었습니다. 강도에게 개인적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과 전쟁을 같은 차원에 놓고 비교하려는 시도는 매우 위험한 발상입니다.

... 중략 ...

전쟁이 위 질문의 상황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면 설사 제가 그 질문에 "예, 저는 강도를 죽이고 여동생을 살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병역을 거부할지라도 저의 두 태도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는 것입니다. -69-71쪽

공론의 장에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놓고 팽팽한 논쟁이 벌어져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게 되었을 경우, 누가 논증부담을 져야 할까요? 사람들은 보통 평화주의자들이 논증부담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론이 벌어지면 사람들은 전쟁의 정당성 또는 불가피성을 전제한 가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이유를 네 쪽에서 밝혀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고 해서 토론 패배를 인정하고 평화주의를 포기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관한 한, 잠정적 추정은 평화주의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전쟁이 가져오는 엄청난 인명 손실과 인권 침해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약'이어서, 전쟁을 옹호하는 어느 누구도 감히 전쟁 그 자체를 '선'이나 '정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쪽은 어떨까요? 먼저 예수님의 가르침 또는 성경의 입장이 과연 평화주의 쪽이었나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다 보면 평화주의적 입장에 설 가능성이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보았을 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평화주의 쪽에 서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잠정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전쟁과 평화에 관한 기독교 내부의 논증부담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 참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부담해야 합니다. –-83-84쪽

"병억 기피 풍조가 만연한 상황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집중적인 전도 대상이 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가 대체복무제에 귀가 솔직해 넘어갈 수 있다"는 한기총 정연택 사무총장의 이야기는 어떻습니까? 물론 대체복무제 같은 그럴듯한 미끼가 있다면 기독교인들 중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되는 사람이 나오지 말라는 보장은 없지요. 그러나 한번 생각해봅시다. 대체복무제가 전통적인 기독교 신자들에게도 허용된다면 이런 걱정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설사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신교 신자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개종하는 걸 막으려고 여호와의 증인들을 감옥에 보내야 할까요? 기독교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으로 넘어가는 걸 막는 일은 목사님들이 할 일이지 국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올바른 기독교 교육을 통해 막아야 할 일을 국가 형벌을 통해 해결하려는 태도가 과연 기독교 정신에 맞는지 의문입니다.-108쪽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앙갚음하지 마라.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대고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고 하거든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억지로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마라.
(<마태복음> 5:38-42, 비교 <누가복음> 6: 29 ) -112쪽

"그러므로 권위를 거역하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을 거스르는 자가 되고 거스르는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라는 구절에는 '거역'과 '거스르는'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거역'은 그리스어 '안티타소'를 번역한 것인데 원래 군사 용어인 이 말은 '전투 태세를 갖추다'또는 '무기를 들고 대항할 준비를 하다'는 뜻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두 번의 '거스르다'는 그리스어 '안티스테미'를 번역한 것인데 이것도 무장반란이나 폭력적 저항을 의미합니다. 즉 위의 성경 구절에 나오는 '권위를 거역'한다는 의미는 국가권력에 폭력으로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 국가권력에 대한 '모든' 저항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지요. 따라서 위의 구절의 정확한 번역은 "국가권력에 맞서서 무장반란을 일으키면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것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자가 되고 그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가 되는 것입니다. -120쪽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장한 정당한 전쟁 이론의 핵심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 전쟁이 정당화될 수 있는지 그 기준을 제시한 데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전쟁은 정의를 보장하고, 평화를 되찾는 수단으로만 허용될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전쟁은 반드시 정당성을 지닌 통치자의 지도 아래 이루어져야 하며, 적에 대한 사랑이 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적과 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고, 비전투요원들은 보호받아야 하며, 학살, 약탈, 방화 등은 절대 금지됩니다. 수도사나 성직자들처럼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들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집합적으로 또는 법적 권위자에 의해 실현되는 '전쟁'과 개인 차원에서 일어나는 '폭력(또는 살인)
을 엄격히 구분하였습니다. 앞의 것은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136쪽

최초의 동기가 아무리 정당하더라도 그 방법이 정당하지 않을 때는 나의 행동 자체가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의 정당성과 전쟁에서의 정당성을 구분하려는 입장은 양자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불가분성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전쟁에서의 정당성과 전쟁의 정당성은 결코 분리할 수 없습니다.-150쪽

식민지가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놓이더라도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에게 병역을 강요할 수 없다는 원칙은 이때 처음 수립된 것입니다. 이 법안을 수용하면서 펜실베니아 의회의 한 의원은 "잠깐 동안의 안전을 위해 본질적 자유를 포기하는 자들은 자유도 안전도 얻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눈 앞의 안전을 위해 양심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유 민주주의의 기본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의미입니다. 기억해둘 만한 말이지요. -177쪽

톨스토이는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가 반드시 종교적 신념에 기초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톨릭이든, 이슬람이든, 불교도든 또는 어떤 나라 출신이든지 간에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은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1899년 징병을 앞둔 젊은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와 같은 입장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모든 정당한 사람들의 의무입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 시대를 사는 윤리적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병역을 거부해야만 합니다." 톨스토이의 평화주의는 이론적으로 매우 단순한 형태였지만 전 세계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습니다. –-184-185쪽

"누구든지 양심에 반하여 무기를 들고 전쟁에 복무할 것을 강요받지 아니한다." (독일 헌법 제 4조) -203쪽

"혼자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필요하다면 감옥에 갈 때도 있겠지만, 그곳에서도 혼자가 아닙니다. 옳은 것을 위해서 일어나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오해하고 비난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혼자는 아닙니다. 저는 '주님과 함께하는 자는 다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소수를 다수로 바꾸는 분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께 의지하여 올바른 일을 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당신 곁에 계실 것입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생의 마지막 몇 년 동안 베트남 반전 운동에 나서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놀라울 정도로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유명한 설교의 주인공으로 킹 목사를 자주 인용하는 한국 목사님들이 막상 킹 목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 정말 아이러니 아닙니까?

킹 목사는 평화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을 실천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받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반역자의 자리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평화의 실천은 그런 것입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킹 목사를 본받아서는 안됩니다. 평화는 최대한 추상적으로 말로만 떠들어야 하는 것이지, 절대 구체적인 전쟁을 언급하거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세상이 가르쳐주는 지혜입니다.
-227쪽

"내게는 전쟁을 단순화시켜서 생각하고 싶은 아주 개인적이지만 강한 유혹이 있다. 이를테면 제 6계명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살인하지 말지니라'의 말 뜻 그대로 믿고 싶은 마음이 있다. 또한 모든 윤리적인 원리들 가운데 가장 큰 원리인 '목표가 수단을 정당화해주지 않는다'는 말의 보편성을 에누리 없이 믿고 싶은 유혹도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인간 역사에 더 큰 살상을 막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필요했고 또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았던 순간들이 드물게 존재하고 있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다. 또한 이런 결론에 마음이 못내 불편하고 꺼림칙한 것도 사실이다."
(<아직도 가야할 길>의 저자 M 스콧 펙 박사)-248쪽

1970년대로 들어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이 입영률 100퍼센트 달성 지시를 내림에 따라 병무청 직원들은 목표 달성을 위해서 모든 병역거부자(또는 병역거부가 예상되는 사람)들을 일단 군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1974년부터는 병무청 직원들이 아예 여호와의 증인들의 집회장소인 왕국회관을 포위하여 징집 연령에 속한 사람들을 영장도 없이 군부대로 강제 입소시킨 다음, 군부대 내에서 입영 및 소집 명령서를 발부하는 불법을 자행하기도 하지요. 그야말로 윗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높은 실적을 올리려고 멀쩡한 민간인을 붙잡아 억지로 군인으로 만든 다음 군형법을 적용한 것인데 누구도 그 절차상 하자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270쪽

1990년대 초부터 일부 군사법원(국법회의의 후신)은 상관이 총을 두번 주었는데 여호와의 증인 신도가 두 번 다 거절하면, 각각을 독립된 범죄로 보아 마치 같은 죄를 두번 저지른 것처럼 가중하여 처벌하는 편법을 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형법상 이른바 '경합범'으로 보기 시작한 것이지요. 이를 통해 법정형으로 정해진 징역 2년의 상한선을 넘어 징역 3년을 선고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처음 거부했을 때 즉각 구속하지 않고, 다음날 다시 총기를 수여함으로써 억지로 경합범을 만드는 이와 같은 처벌 방식은 당시 30개월이었던 현역 복무 기간보다 형이 더 길어야 한다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되었지요.-275쪽

동기는 좀 달랐다 하더라도 이들의 행동은 분명히 국가 전체를 병영으로 만들려는 군사독재정권의 폭력과 억압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 하나 이들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지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이단'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이단이냐, 아니냐 여부는 궁극적으로 기독교 내부의 문제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기독교의 '이단' 정의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의 이단'으로 확대해서 받아들였습니다. 주류에 속한 특정 집단이 소수파를 '이단'으로 정의하는 순간, 사회 전체가 그 소수파를 '이단'으로 받아들이는 특이한 시스템이 구축된 것입니다. 반공, 애국, 기독교, 독재정권 등이 일체를 이룬 주류 사회가 소수자를 억압하는 데 철저하게 결합해 있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278쪽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의 경우에는 헌법상 기본적 의무로 되어 있는 병역의 의무와 자유민주적 기본 질서의 핵심적 기본권인 사상, 양심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게 되어 그 양자의 본질적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양자를 적절히 조화, 공존시킬 필요"가 있는데, 이들에 대한 예외 없는 처벌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 외에도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각자의 사상, 양심, 종교에 따른 실질적 평등을 보장받을 평등권 등 헌법상 기본권이 침해받을 가능성이 크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양심적 종교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하여 헌법적으로 검토해봐야 할 단계에 왔다."는 박 부장판사(2002년 1월 29일 서울 지방 법원 남부지원 박시환 부장판사)의 선언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문제를 한국 사회가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281쪽

대체복무에 반대하는 분들은 애국심이 남달라 강한 분들입니다. 누구라도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들의 애국심이 지금의 수준을 뛰어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진정한 애국심은 남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지나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남이 어떻게하든, 남이 돈을 써서 병역 면제를 받든말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하든말든, 나는 내 할 의무를 다하는 것이 진정한 애국입니다. 그리고 남의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내가 상당한 희생을 감수할 수 있는 것도 애국입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애국자들이 대체복무와 같은, 남에 대한 배려를 받아들이고도 남을 애국심을 지니고 있다고 믿습니다.-314쪽

남북 대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들을 모두 감옥에 넣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기 위해 그 가치 자체를 포기하자고 주장하는 모순된 논리입니다.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엄청나게 제한했던 유신정권과 논리 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어차피 소수자들은 다수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대체복무 인정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따뜻한 배려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3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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