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철학을 전공했으면서도 마르크스를 제대로 접할 기회가 없었고, 마르크스 철학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자본론>이나 <독일이데올로기> <경제학노트> <경제학-철학 수고> 등의 80년대 케케묵은 완전 헌책방 구석에나 처박혀있을 법한 오래된 책들을 간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에 대한 전기와 평전은 많이도 읽었다. 정말이지 책욕심, 지식욕심은 많아가지고 대학 학부 시절 대학원 박사과정생이었던 몇마디 주고받아봤던 한 선배가 책을 누군가에게 주려고 한다길래 무조건 한 상자 받아가지고 와서 집에 모셔놨던 것이 죄다 마르크스 철학책이다. 아마도 지금 구하려면 제법 구하기 힘들 법한 그런 책들을 난 가지고 있는 것인데 정작 나는 마르크스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이 책들은 나의 책장 맨 꼭대기에 올려져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지금까지 읽은 마르크스 철학서는 없지만서도 마르크스에 관한 전기와 평전은 꽤나 읽어, 97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나름 세계적인 석학 이사야 벌린이 쓴 마르크스에 관한 책이라 해서 관심을 받았던 <칼 마르크스>, 런던대 철학과 교수로 있는 조너선 울프의 <한 권으로 보는 마르크스> , 마르크스의 생애나 사상을 진지하게 바라보는 앞의 두 책에 비해서는 좀 가볍고 오히려 일부러 진지함을 떨어뜨려 쉽게 접근하려 애쓴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등이 내가 접한 마르크스 책이다. 엄밀히. 마르크스에 '관한'  책이다. 이 밖에 그에 '관한' 책으로는 살림에서 나온 문고판 책자 <칼 마르크스> 와 프란시스 윈이 지은 <마르크스 평전>도 있다. 그에 관한 책은 이 정도. 하지만 그의 이론에 관한 책은 이보다 훨씬 많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떠받들어 실전에 적용하려 했던 구 소련은 이미 망했고, 중국도 자본주의의 맛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분명히 지금 현재 세계지도의 사상구도를 살펴봤을 때 마르크스가 애초 외쳤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 완패당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은 더 깊어졌고, 그와 관련된 책들 또한 무수히 번역되어 서점에 진열되었다. <독일 이데올리기> <자본론> <공산당 선언> 이렇게 세 가지 주요 저서만 해도 각종 다양한 해석서와 번역서들이 늘어져있다. 무게 좀 잡는다 싶은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논하고, 마르크스에 대해 아는 척하며, 마르크스를 재 해석한다. 80년대의 암울한 대한민국이야 마르크스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왜 2006년의 지금인가.

  또 한명의 세계적인 석학이라 불리우는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가 <마르크스 평전>을 썼다. 기존에 나와있는 것만 해도 꽤나 많은데 또 동일제목의 <마르크스 평전>을 쓴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까 싶지만서도, 그들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각자 나름대로 살펴보고 해석해왔던 흔적들을 이렇게 책으로 엮어 보여주고 싶어한다. 자크 아탈리의 <마르크스 평전>을 읽었을 때 기존에 읽었던 다른 전기와 평전과 구별되는 점은 마르크스가 밟아왔던 그 과정들을 차근차근 되짚어주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와 딸과 아들과 그 밖의 주변인에 대해서도 물론 이야기하지만 이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부분에 한정해서만 다루고, 저자는 마르크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어 걸음을 걷는다. 특별히 그의 철학사상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도 않고 마르크스의 삶의 궤적을 천천히 밟는다. '독일의 철학자'로서, '유럽의 혁명가'로서, '영국의 경제학자'로서, '인터내셔널의 스승'으로서, '자본의 사상가'로서, '세계의 정신'으로서, 그를 불러본다. 저자는 각각으 장에서 제목에 어울리는 호칭에 맞는 마르크스으 모습을 조명한다. 그러나 관점에서 따른 마르크스를 다루었다고 해서 마르크스의 생애를 시간순서를 무시하고 뒤죽박죽 섞진 않는다. 시간순으로 올라오되 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메인테마를 설정한 것이다. 이 책은 마르크스에 관한 책이므로 마르크스의 사상의 한 부분을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가 남긴 말들 중에 유명한 한 문구가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비약일수도 있겠지만 이전까지의 모든 철학자들이 머리속으로 철학을 했다면, 마르크스는 행동으로 철학을 하려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론과 생각을 통해 현실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과 러시아 세계 곳곳에서 변혁의 모습으로 다가왔고,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어쨌든 그의 이론을 가지고 전 세계는 양분되기도 했다.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는 자유롭게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꾼 노릇을 하고 오후에는 어부 노릇을 하며 저녁에는 목동 노릇을 한다. 결코 직업적인 사냥꾼, 어부 또는 목동이 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그가 꿈꿨던 세상이다. 그러나 그는 공산주의를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공산주의자가 아님을 밝힌다. 이는 마르크스를 오해하는 이들을 위한 발언일 터.

  "나는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자유에 대한 부정이며, 나는 자유가 없이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국가 안에 사회의 모든 힘들을 집중시켜 탕진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손 안에서 소유권의 중앙집권화로 귀결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 나는 그게 뭐가 됐든 어떤 권위적인 수단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연합의 길을 통해 아래에서 위로 공동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사회를 조직하기 원한다. 자, 내가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집산주의자인지 보라!"

  앞의 발언에서의 공산주의와 뒤의 발언에서의 공산주의는 같다고 볼 순 없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다른 이들의 자신이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이들에게 짜증을 내면서, 이와 같은 발언을 한게 아닌가 싶다. 공산주의와 집산주의를 구별하며, 또 국가의 중앙권력에 대한 거부감을 이야기하며, 그가 말하는 공산주의란 것이 무엇인가를 또렷히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저자 자크 아탈리의 말에 따라 그 누구보다 많은 독자를 확보한 철학자이며,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던 철학자이기도 하며, 또 그의 이론에 관한 많은 해설서를 배출해낸 철학자이기도 하다. 마치 각 문명의 종교 창시자들의 저서가 이들을 믿는 이들에게 희망이고 구원이듯이 마르크스도 한 때 그와 같은 때가 있었다. 그는 비록 신은 아니지만, 또 신을 자처하지도 않지만, 가난한 삶을 살았던, 그러면서도 자신이 꿈꾸는 세계에 대한 체계를 세우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스스로에게도 희망을 걸었던 그런 철학자였다.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가 돈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돈이 있으면 안되는 일이 없고, 그러다보니 돈의 노예가 될 수가 밖에 없다. 수많은 돈벌이 책들이 난무하고, 실제로 어떤 이는 대박을 맞아 인생역전을 하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며 살다 가기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의 정신 한 쪽 측면에서는 왠지 모를 허전함이 놓여있다. 돈이 많은 것을 해결해주었고, 또 자본주의는 그런대로 사람들에게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본주의 성장의 물결은 이미 마르크스가 예언한 바 있다. 마르크스는 그의 책에서 "기술이 에너지와 물품의 생산, 통신, 예술, 이데올로기 등의 혁명을 가져왔고, 노동의 고단함을 현격히 줄여주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했다." 또한 "시장이 전례 없는 성장의 물결을 타게 되거나 시장의 모순들이 절정에 달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불평등의 문제 등. 마르크스의 이론은 마치 이런 모든 자본주의의 병폐들을 예상하기라도 한듯 이에 대한 해결책들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이 행복하고 평등하게 잘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 마르크스만이 제기했던 문제는 아니지만 마르크스 만큼의 해답을 내놓은 철학자는 없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마르크스를 읽어야 하는 까닭이다. 마르크스 철학이 어렵다하지만 지금은 그의 저서에 관한 많은 해설서들이 나와있고, 관심만 있다면 마음먹고 마르크스를 공부해볼 수 있다. 청년시절에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었고, 경제, 정치, 역사, 법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 세계적인 석학으로 불리우는 동안 마르크스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자크 아탈리가, 마르크스를 공부하고 단숨에 마르크스 평전을 쓸 만큼의 마르크스 주의자가 되었다는 것, 그만큼 마르크스는 그때나 지금이나 매력있는 철학자이다.

  이 책은 프랑스 출간 당시 한동안 인문서적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저자인 자크 아탈리 덕이기도 할테지만 마르크스의 이름은 자크 아탈리 못지 않은 영향력을 주었을 것이다. 많은 자료를 잘 엮어내어 한 사람의 생애를 진중하게 살펴본 잘 쓰여진 평전이라는 생각이다. 마르크스의 생애와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상이 한데 잘 버무려져 매우 읽기 쉽게 쓰여졌다. 죽은 마르크스가 지금까지 이렇게 주목받는다는 사실을, 사랑받는다는 사실을 알면,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의 가족의 죽음,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했던 시절, 정치적 망명을 해야했던 시절 등등의 온갖 고생한 보람이 있다며.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이라면 누구나 자본주의가 내리는 쾌락과 자본주의로부터 오는 불만족스러움을 느낀 바가 있을 터이고, 이 책은 그런 이들을 위한 것이다. 고로 우리 모두는 마르크스를 읽어야 한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춤추는인생. 2006-11-2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으로 접한 마르크스에 관한 책은 마르크스의 복수였어요;;
이책 꼭 읽어보고 싶네요 ^^

짱꿀라 2006-11-28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저도 어제 이 책 사왔답니다. 이제부터 천천히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책을 읽기 전 아프락사스님이 쓰신 리뷰를 먼저 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어느 정도는 내용을 알고 읽으니 더욱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비로그인 2006-11-28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탈리는 자유로우며 균형잡힌 시각을 지닌 분이지요.
아프락사스님의 마르크스 '평가' 정독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기인 2006-11-28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잘 읽었습니다. :) ㅋ 저는 아프락삭스님과 정반대로 맑스관련책은 한권도 안 읽은 것 같아요. 처음부터 '자본론'읽느냐고 죽는줄 알았죠 ㅋㅋ
근데, 그 책들 물려주신 박사과정 선배님은, 공부를 완전히 접으신 건가요? 아님 이제 맑스는 끝난다, 라는 신념으로 책을 '넘기신' 건가요? ^^; 궁금하네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06-11-2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산주의자는 자유롭게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꾼 노릇을 하고 오후에는 어부 노릇을 하며 저녁에는 목동 노릇을 한다. 결코 직업적인 사냥꾼, 어부 또는 목동이 되지는 않는다." ->이 말이 참 와닿네요. 마르크스, 꼭 읽어봐야 겠어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마늘빵 2006-11-28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춤추는 인생님 / ^^ 마르크스의 복수는 뭐에요. 소설인가요?

산타클로우슬리님 / 이 책 저는 출판사서 받은 것이지만 추천해드립니다. 지금까지 읽은 몇 안되는 전기, 평전 중에 젤 나은거 같아요.

한사님 / 감사합니다. ^^ 아탈리 책은 유목하는 인간 호모 노마드 집에 있는데 아직 안봤답니다.

기인님 / 자본론 아 더 어릴 때 한번 도전했어야하는데 졸업하고 나니 읽을 기회가 없습니다. 시간과 정신의 부담감 때문에. 그분은 공부를 접으신건 아니고 대학 강단에 들어서지 않고 외부로 나가신듯 합니다. 글쎄요. 어떤 의미에서 그 많은 책들을 넘겨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맑스관련 서적만 큰 책꽂이 반칸이 찹니다.

애쓰지 않은 사람님 / 반갑습니다. ^^ 공산주의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진실된 발언이 아닌가 싶어요.

marine 2006-11-28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밑의 리뷰에 번역이 엉망이라는 얘기가 있던데 문장 흐름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마늘빵 2006-11-28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루마린님 / 글쎄요. 저는 크게 문제 없는거 같은데요. 제가 원문과 비교해본건 아니지만 읽는데 별 문제는 없는 듯 합니다.

마법천자문 2006-11-28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주의 체제가 실현된다고 해도 "자유롭게 오늘은 이것을 내일은 저것을 하며... 직업적인 사냥꾼, 어부가 되지는 않는다" 는 생각이 실현되기는 힘들 겁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도 각자 재능과 적성에 따라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역할분담을 하는 방식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봐야겠죠.

물론 자본주의 체제에서 나타나는 이윤 추구를 위한 비인간적이고 야만적인 착취와 너죽고 나살자식 경쟁이 사라진 한결 인간적이고 살기좋은 체제가 되겠지요. 구소련식 엉터리 사회주의가 아닌 '진정한 사회주의' 가 실현될수만 있다면...
 
영어를 공용어로 삼자 - 복거일의 영어 공용론 SERI 연구에세이 3
복거일 지음 / 삼성경제연구소 / 2003년 2월
장바구니담기


비록 망의 가치가 꼭 사용자 수의 제곱에 비례해서 늘어나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사용자 수보다 훨씬 빠르게 늘어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20쪽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쓸 때, 한 언어의 가치는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점점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면서, 그것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21쪽

영어를 모국어로 가져서 영어를 잘 하는 사람들이 민족어로 모국어로 가져서 영어를 덜 잘하는 사람들보다 사회적 경쟁에서 훨씬 유리할 것은 분명하다. -50쪽

물론 이런 상태가 민족어들의 완전한 쇠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사라지기엔 민족어들이 담은 민족의 역사와 지적 자산들은 가치가 너무 크다. 그래서 민족어들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지만 전문가들에 의해 쓰이고 보존되고 이어질 것이다. 그런 상태에선 민족어들은 거의 진화하지 않고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박물관 언어'로 남을 것이다. -51쪽

이 사실은 사람들이 인종과 관계없이 어떤 언어든 배워서 쓸 수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프랑스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쓰고 한국 사람들이 조선어를 쓰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은 다만 프랑스어나 조선어를 쓰는 사회에서 태어나 그것들을 모국어로 배웠기 때문에 그것들을, 그리고 그것들만을, 잘 쓸 수 있는 것이다. 부모와 다른 모국어를 유창하게 쓰는 어린 아이들은 그런 사실을 떠받쳐주는 증거들이다. -58쪽

오랫동안 사람들은 자기 종족의 언어만을 배우면 됐다. 그래서 사람의 뇌에서 언어를 관장하는 부분은 한 언어를 다루도록 진화했다. 그러나 고대 문명이 일어나고 다른 종족들과의 교류가 활발해지자 점점 많은 사람들이 둘 이상의 언어들을 배워야했다. 그렇게 갑자기 닥친 상황에 맞춰 뇌가 빠르게 진화할 수는 없었으므로, 뇌는 첫 언어가 아닌 차후의 언어들을 관장하는 일을 원래 언어를 관장하던 부분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돌렸다. 그래서 외국어를 쓸 때, 우리는 수학 문제를 풀 듯 의식적으로 조립해서 쓰는 것이다. -59쪽

언어는 사람의 삶에서 워낙 중요한 도구고 배우기가 무척 어렵고 습득에 많은 자원이 들어가므로, 컴퓨터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전환 비용이 높다. 이제 결정적 시기 가설은 언어의 전환 비용이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연히, 국제어를 모국어로 갖지 않는 사람들은 겹으로 불리하다. 그들은 모국어말고도 국제어라는 언어를 하나 더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생물학적 조건 때문에 그 국제어를 제대로 배워서 쓸 수도 없다. -61쪽

영어 공용은 정부가 시민들에게 영어를 쓰도록 강제하는 것이 아니고, 조선어의 독점적 지위를 허물어서, 시민들이 영어를 쓰고 자식들이 영어를 모국어로 고를 수 있도록 하는 조치다. 따라서 시민들은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영어의 습득과 사용에 관한 결정들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자연히,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언어 시장의 자유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91쪽

국제어인 영어를 제대로 못 쓰면, 남들에게 뒤쳐져 점점 큰 서러움을 겪을 것이기 때문에, 기를 쓰고 영어를 배우려는 것이다.
얼마전 일본의 역사 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우리 역사학자들의 기자 회견과 심포지엄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학자는 "미국의 교과서 집필자들이 한국사에 관해 제대로 쓰고 싶어도 한국에서 펴낸 한국사에 관한 영어 자료가 없어서 부득히 일본 역사책을 참고한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제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도, 우리는 영어를 잘 써야 한다. -108쪽

언어는 본질적으로 도구다. 언어가 사람에게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그리고 모국어가 우리에게 아무리 소중하다고 해도, 언어가 도구라는 사실과 사람들의 언어 구사 능력은 특정 언어에 매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언어는 한 사회의 문화에 근본적 영향을 미치고 상당한 정도까지 그것을 규정한다. 그러나 그 사실이 한 사회가 공용어를 바꾸면 어쩔 수 없이 손해를 본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특정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사람들이 그것에 큰 애착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그것을 신성한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은 어떤 명분과 이름으로 치장되더라도 비합리적이다. -111-112쪽

'만일 막 태어난 당신의 자식에게 영어와 조선어 가운데 하나를 모국어로 고를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자식에게 어느 것을 권하겠는가? 한쪽엔 영어를 자연스럽게 써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고 일상과 직장에서 아무런 불이익을 보지 않고 영어로 구체화된 많은 문화적 유산들과 첨단 정보들을 쉽게 얻는 삶이 있다. 다른 쪽엔 조상들이 써 온 조선어를 계속 쓰는 즐거움을 누리지만, 영어를 쓰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기피하고 평생 갖가지 불이익을 보고 영어로 구체화된 문화적 유산들을 거의 향유하지 못하고 분초를 다투는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얻지 못하고 뒤늦게 오류들이 많은 번역으로 얻어서 그것고 이용가능한 정보들의 몇십만분의 일이나 몇백만분의 일만 얻어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삶이 있다. 당신은 과연 어느 삶을 자식에게 권하겠는가? 아예 그에게서 선택권을 앗겠는가? 당신의 자식은 아직 조선어를 배우고 쓰지 않아서 조선어에 대한 물질적, 심리적 투자가 없고, 자연히, 조선어에 별다른 애착을 지니지 않은 터에?' -119-120쪽


댓글(7)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짱꿀라 2006-11-24 0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프락사스님 영어 잘하시나봐요. 저는 영어 잘하는 사람이 제일 부럽거든요.
내일도 변함없이 기쁜 하루를 보내시기를.........

마늘빵 2006-11-24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해십니다. 전 영어 공용화 반대입장이고, 이와 별개로 영어도 거의 못합니다. 고등학교에서 배운거 이래로 영어를 제대로 공부한 역사가 없습니다. ^^ 영어에 대한 반감으로 앞으로도 절실히 필요치 않은 이상 그닥 배우고싶지 않습니다.

비로그인 2006-11-2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세대는 읽고 쓸 줄만 알면 되었는데
요즈음은 듣고 말하기가 중요한 시절이 되었습니다.
저의 아이들은 잘 따라합니다.
아마 저는 영어 공용화 되기전에 죽을 겁니다.. 하하


marine 2006-11-24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자기 고종석씨가 쓴 "우리 모두는 그리스인이다" 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마늘빵 2006-11-24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종석씨도 영어공용화에 대해선 복거일씨와 비슷한 입장을 취하죠. 복거일도 이 책에서 고종석을 인용합니다. <감염된 언어>를 통해서.

야클 2006-12-0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영어공용화'로 인터넷 검색해보면 주거니 받거니 서로 논쟁한 글들이 많아요. 아주 재미있던데. 이윤기님의 글도 인상 깊고요. ^^

마늘빵 2006-12-02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지금 읽고 있는 다른 책 뒤에 부록으로 그 글들 다 모아놨네요. 재밌어요.
 
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절판


"죽음이란 가장 두려운 것이고, 죽음 앞에서 확고하게 버티는 것은 가장 큰 힘이 요구되는 일이다."

"죽음 앞에서 공포에 짓눌려 뒤로 물러나며 파멸로부터 스스로를 순수하게 보호하는 것은 삶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삶이라 할 죽음이다."

"사물의 표면을 꿰뚫고 사건들의 얼룩덜룩한 외관을 관통하는 '이성'의 눈을 가지고 보아야 한다." (헤겔 <정신현상학>)
-48쪽

"비판의 무기가 무기의 비판을 대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신체적인 힘은 신체적인 힘에 의해 소멸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론은 대중의 소유가 되는 즉시 신체적인 힘이 될 수 있다 "-111쪽

"돈으로부터 해방되려면 모든 종교들에서 해방되어야 하고, 특히 그 종교들의 기초를 이루는 유태교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유태인을 모든 종교적 정체성으로부터 해방시키면 모든 종교성의 기반들을 제거하게 될 것이며, 유태인이 모태가 된 자본주의의 기반들도 제거될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세속적 존재가 될 시민사회 안에서 모든 인간들이 해방되고 비로소 신학적 국가들이 변화되는 길이 열리게 될 것이다."-114쪽

마르크스는 소외란 정신이 자신에 대해 깨닫기 위해 스스로에게 돌아가려고 자신에게 떨어져 나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을 채택하여 이론에 이용했다. 더욱이 그는 헤겔처럼 철학이 보통의 의미에서 전복으로 정의되고, 그럼으로써 이성과 반대인 광기 사이의 근접성을 확립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진정한 단일성이란 부분으로 나뉘는 과정과 분리될 수 없다. 광기란 존재의 진실의 조건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그 시절에 깨닫게 된 것이다. -133쪽

그가 보기에 사적 소유권은 소외 노동의 근원이 아니라 결과였다. 소외는 노동 그 자체에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본 것이다. 소외를 인간 자신에 대한 외재성으로 정의한 헤겔이나 소외를 종교와 동일시한 포이어바흐와는 달리, 마르크스는 소외를 사회조직들과 종교들을 생겨나게 한 노동에 의한 현실과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 속에 포함시켰다. -144쪽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168쪽

"정치권력은 엄밀하게 말해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해 조직된 권력이다." -203쪽

마르크스는 제국이 언젠가 전복될 것이라고 예견했는가 하면, 노동자 프롤레타리아가 농민과 연합하지 않아 승리를 몰수당할까 염려하기도 했다. 더 정확히 말해 제국이 무너지게 되면 의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서서 국가를 회수한 다음 부르주아를 위한 국가로 만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혁명은 도시 노동자들이 시골의 소지주, 농민, 상인들과 연합하여 그 모든 파괴력을 국가에 대항하는 데 집중시키고, 모든 정치 혁명들이 점점 완벽하게 만들 뿐이었던 국가기구를 부숴버릴 때에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프롤레타리아 지도자의 과업은 거대한 연합, 즉 국민들 중에서 착취당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들까지 포함하는 다수의 정부를 구성할 목적으로 민중의 당을 창설함으로써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운명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게 만드는 것이다. -281쪽

"현대사회에서의 계급의 존재나 그들 간의 투쟁을 발견한 공로는 나에게 있지 않다. 나 이전에 오래 전부터 부르주아 역사가들이 이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언급했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그것에 관한 경제적인 분석을 하였다. 내가 새로 한 것이라고는 첫째, 계급의 존재는 생산의 일정한 역사적 발전 국면에만 연결되어 있다는 것, 둘째, 계급 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 셋째, 그 독재 자체도 모든 계급들의 폐지와 계급 없는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형성한다는 것 등을 논증한 것일 뿐이다." -283쪽

"공산주의자는 자유롭게 오늘은 이것을 하고 내일은 저것을 하며, 아침에는 사냥꾼 노릇을 하고 오후에는 어부 노릇을 하며 저녁에는 목동 노릇을 한다. 결코 직업적인 사냥꾼, 어부 또는 목동이 되지는 않는다." -293쪽

"인간은 실제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되고자 원하는 그 모습을 가지고 자신의 신으로 삼았다. 또는 그것이 그의 신이다." -330쪽

"우리가 어떤 개인을 판단할 때 개인의 생각에 따라서 판단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자신의 인식을 바탕으로 격변의 시대를 판단할 수는 없다. 이와는 반대로, 물질 생활의 모순들과 사회의 생산력들과 생산관계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에 의해 그 의식이 설명되어야 한다. 너무 큰 모든 생산력들이 발달되기 전에는 사회의 형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새롭고 더 뛰어난 생산관계들이라 해도 물질적 존재 조건들이 구 사회의 바로 한가운데서 만개하기 전에는 그 사회를 대체하지 못한다. 바로 이 때문에 인류는 완수할 수 있을 만한 과제들만 계획한다." -353-354쪽

그는 잉여가치를 증대시키는 방법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 첫번째는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노동자들의 탈진이라는 한계를 갖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임금 노동자들이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을 줄잉는 것, 즉 재화 제조의 노동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방법이다. 그것은 거의 무제한적이며 노동자들을 기계로 대체하는 과정을 거친다. 첫번째 방법은 노동자의 피로에 의해 제한되고, 두번째 방법은 기술 진보 때문에 제한적이다. 첫번째는 더 많은 노동을 필요로 하고, 두번째 방법은 더 많은 자본을 필요로 한다. -443-444쪽

"나는 공산주의를 아주 싫어한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자유에 대한 부정이며, 나는 자유가 없이 인간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는 국가 안에 사회의 모든 힘들을 집중시켜 탕진해버리게 만들기 때문이며, 그것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손 안에서 소유권의 중앙집권화로 귀결되고야 말기 때문이다. ...... 나는 그게 뭐가 됐든 어떤 권위적인 수단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운 연합의 길을 통해 아래에서 위로 공동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사회를 조직하기 원한다. 자, 내가 어떤 의미에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집산주의자인지 보라!" -474쪽

첫단계는 부르주아지로부터 그들의 권위를 단번에 박탈시키기 위한 혁명적이고 폭력적인 단계(파리 사람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처럼)이다. 두번째 단계는 방금 언급된 개혁들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들에 의해 반혁명적인 활동들(예를 들어 베르사유 사람들의 활동들)을 피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예를 들어 코뮌)이다. 세번째 단계는 '각자의 노동에 따라 각자에게'라는 워닉에 맞도록 생산을 재개시키는 사회주의이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 생산물을 동등하게 분배하고 집단들을 자유롭게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공산주의이다. -512쪽

"생산계급의 해방은 성에 대한 구별도 인종에 대한 구별도 없는 모든 인간들의 해방이며, 생산자들은 그들의 생산수단을 소유하게 되어야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생산 방식들이 그들에게 속할 수 있는 형태란 두 가지 밖에 없다. 첫째는 일반적 사실의 상태로서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고 산업 발전에 의해 점점 더 제거되고 있는 개인적 형태이고, 둘째는 물질적이고 지적인 요소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 그 자체에 의해 구성되는 집단적 형태이다. 이러한 집단적 소유화는 정당에서 조직되는 생산계급 - 또는 프롤레타리아 - 의 혁명적 활동에서만 비롯될 수 있으며, 그러한 조직은 프롤레타리아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들을 통해 추구되어야 한다. 이런 수단들 중에는 지금까지 속임수의 도구였다가 해방의 도구로 변화된 보통선거도 포함되어 있다." -592쪽

"자본 독점은 그것과 더불어 성장하고 번영한 생산양식에 족쇄가 된다. 논동의 사회화와 노동의 물질적 원동력의 집중화는 자본주의의 거죽 안에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거죽도 남아날 리가 없다. 수용자들도 이번에는 자신들이 수용을 당한다."
점점 더 많은 자본가들이 프롤레타리아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각 기업은 기업이 산출해 내는 이윤을 개인적으로 지키려 애쓰고, 전체 이윤의 비율은 투자 증가 때문에 떨어질 수 밖에 없으며, 이러한 것들은 위기로 이어질 수 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사회의 성격을 변화시키고 소외와 착취가 동시에 사라지게 될 사회를 열망하게 되며 결구 혁명을 선택한다. 오로지 혁명만이 그런 사회를 탄생시킨다. 그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 사회이다. -62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구판절판


방황은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물질과는 달리 싫건 좋건 자신의 행동,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만 하는 자유를 갖고 태어났다.
선택은 언제나 가치의 선택이고, 모든 가치 선택은 궁극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 가운데의 최선의 대답이 선택으로 나타난다. -15쪽

윤리적이란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희생하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씨이다. 수치심은 윤리적 결함 즉 내가 생물학적 나의 욕망을 초월해서 남의 아픔과 기쁨을 생각하지 않는 즉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물체로서만 존재하는 자기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다. -31쪽

생명에 대한 애착은 곧 죽음에 대한 거부이다. 왜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는가? 죽음이 생명의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이러한 조건이 자연, 우주의 움직일 수 없는 질서이며 법칙이라면, 죽음의 거부는 우주질서의 거부이며, 우주 질서와 법칙의 거부만큼 불합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덧없는 삶을 악착같이 좀 더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부조리하고 어리석으며, 생명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치사하다.
하지만 우리의 어리석고 부조리한 태도와 치사한 집착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이 논리가 아닌 것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논리가 아니라 본능의 영역에 속하며, 삶에 대한 우리의 집착 즉 죽음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안건이다. -37쪽

죽어서 떠난 이의 텅 빈 자리가 허전하다. 한 생명의 죽음은 그가 애써 살아오면서 닦아 놓은 모든 것을 허망하게 한다. 죽은 후에 내가 살아오고 닦아 놓은 모든 것이 혹시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내 자신에게는 전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의식을 전제하지 않는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면 나의 의식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나의 죽음은 나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39쪽

혼자됨이 생명체의 객관적 존재조건을 지칭한다면 고독은 그러한 혼자된 존재조건의 주관적 체험을 가리킨다. 체험은 발달된 반성적 의식을 전제하며,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의식을 갖춘 동물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혼자됨이라는 존재조건을 '고독한' 것으로 체험할 수 있다. 어떠한 동물의 세계에도 고독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독'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인간만이 고독할 수 있는 동물이다. 고독이 혼자됨에 대한 인간의 반성적 의식상태를 말하지만 혼자됨에 대한 그러한 반성적 의식이 곧 고독이라는 의식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45쪽

고독은 자신의 곤경에 대한 남들의 사회적 무관심 속에 놓여있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인간의 상황이며, 고독감은 한 인간 혹은 한 인간 집단이 그러한 상황에서 혼자만으로 감당해야하는 고립감, 쓸쓸함, 아픔의 의식이다. 고독은 내가 참여하고 싶은 사회 즉 인간 공동체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남들과 인간으로서 공유하고자 하는 삶의 축제로부터 사회저으로 소외, 제거된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빚어내는 인간적 아픔이다. -47쪽

자살찬양은커녕 자살을 부정해야하는 다른 이유로 자살행위가 생명일반 특히 인간 생명의 가치를 부정함을 함의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자살행위가 자살자 본인의 생명의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부정을 의미한다고 하는 이유는 가치의 전제조건인 인간의 의식의 부정 내지는 소멸을 함의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역시 살아남기를 원하고, 어떤 경험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제 3자들 즉 사회의 이유가 될 수 있어도 자살자 본인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가치의 부정 혹은 의미의 부재를 따지는 행위 자체는 살아 있는 자들의 문제일뿐이지 자살한 본인 자신에게는 전혀 무의미하다. -55쪽

'가짜'에는 '사기'라는 의도가 은폐된다. 그것은 자신의 부당한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포장된 복제품이다. 나나 다른 모든 이들이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서로 다 같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내 목에 걸린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 성형수술로 아름다워진 코, 눈, 입등은 가짜가 아니라 일종의 화장이며 장식이다. 나의 상품이 복제품이라는 것을 나나 남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내가 팔고 남이 샀다면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그냥 복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태원에서 매매되는 복제품 가운데 많은 것들은 '가짜'가 아닌 그냥 복제품이다. 복제품이 원본이 아니라 복제품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공개적으로 밝혀진 것이라면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와 같은 뛰어난 복제품일 따름이다. 복제품이 어떤 이유에서이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복제품이 아니라 원본인양 행세를 할 때 비로소 가짜라는 범주에 속한다. '가짜'는 어떤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고자 하는 비도덕적 동기를 함축한 특정한 종류의 복제품을 지칭한다. 복제품이 원본보다 질적으로 더 뛰어날 수도 있지만,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런 물리적 및 기술적 속성과는 상관없이 복제품을 제조하고 소유하고 유통시키는 의도에 있다. -98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6-11-2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이문 교수님은 저의 중학시절 독서신문에서 이분의 글을 접한 후
평생 독자가 되었답니다.

마늘빵 2006-11-2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뒤늦게 접했지만 주요 저서들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
생각하는 삶에 대한 글들이 좋습니다.
 



  이 영화 기억하시나요? 아 이 촌스러운 영화 포스터하곤. 1998년에 나온 작품인데 고작 기껏해야 이제 8년지났구만 딱 나 스무살 때 나온 영화. 8년 이란 시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내 나이 스무살과 스물여덟살, 어리버리 꾸질꾸질하던 대학 신입생과 직장인 2년차, 한 겨울에 스킨 로션도 바르지 않던 놈과 에센스까지 꼬박꼬박 바르고도 별 티도 안나는 놈. 8년 이란 시간은 바로 이런 차이. 그리고 저 촌스러운 포스터와 8년전의 이성재와 심은하의 모습이란. 8년 참 무섭고나.



* 심은하 맞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심은하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른 천방지축 덜렁이 춘희.

  스무살에 저 영화 무지 재밌게, 또 감동적으로 봤더랬다. 그래서 아마도 작년이지 인터넷 쇼핑하다가 <미술관 옆 동물원> 디비디 나왔다는 소리 듣고 바로 질러버렸던게. 그리고 사놓고는 안봤더랬지.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꺼냈다. 스무살에 봤을 때의 재밌음과 감동은 이제 재밌음과 유치함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이 영화가 왜 이리 마음을 울렸던지.

  스물 여섯 되도록 좋아하는 남자 앞에 가서 나 너 좋아해, 이런 말 조차 못하는 춘희와 이미 다른 여자가 들어와 살고 있는 옛 애인의 집에 뻔뻔하게 들어와 사는 스물 일곱의 군인 철수. 어쩜 이름도 이렇게 딱 자기 모습대로야. 촌스럽고 꾸미지도 않고 너무나 솔직한 면모만 보여주는 춘희와 뻔뻔하고 마구 들이대는 무대뽀 철수. 그리고 이름은 귀엽고 이쁘지만 도도하고 냉정한 철수의 옛 애인 다혜. 아 이 영화의 가장 미스 캐스팅 다혜. 송선미다. 지금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하는 송선미의 연기는 아주 맛깔난 주연급 조연이지만, 흐흐 이 영화에서의 송선미는 정말이지 너무 딱딱하고 어색한 연기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단발머리에 조신한 척 하는 캐릭터. 아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송선미는 철수의 옛 애인이기도 하지만 춘희의 소설 속 여자이기도.

  영화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의 첫 작품이었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이정향 감독이 시나리오에 당선됐고, 그것을 영화화하는데 본인이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고. 진실 혹은 거짓. 영화는 남녀의 기본적인 사랑 패턴을 밟아간다. 사랑하지만 육체를 허락할 수 없는 여자, 육체없이는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남자. 좋아하지만 다가섬이 너무 힘든 여자, 좋아하면 상대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들이미는 남자. 전형적인 여자와 남자의 사랑방식 아닌가. '전형적인'이 아니고 '전통적인'이라고 해야하나.

  영화는 많은 사랑에 관한 명대사를 남겼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 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넌 결국 그녀를 사랑했다기 보단 사랑에 빠진 네 감정을 사랑했던 거지" 
"넌 남을 배려해서가 아냐 단지 자신이 상처 받을까봐 그게 두려워서 일부러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척 즐기고있어"
"넌 사랑을 언제나 머리속으로만 해. 그게 다라고 여기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으니까 언제나 그 모양인거야 "


  철수  "넌 너 이외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가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춘희 "요즘 사람들의 사랑은 같은 음악을 들어도 각자 이어폰을 끼고 듣는 것 같아.
             왠지 뭔가 자기가 갖고 있는걸 다 내주지 않는..."

 
   그래. 스무살에 이 영화가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내가 철수와 춘희와 대화 속의 어느 누군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육체없이 정신으로 가능하다 생각했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녀를 놓아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진짜 사랑일 수도 있을거라 믿었으며, 사랑은 친구처럼 왔다 서서히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맴 돌다 그녀가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모르고, 혼자 또 아 날 좋아하지 않는건가, 생각하며 쉽게 포기하곤 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이정향 감독은 사랑을 머리로만 가능하다고 믿는, 또 섹스를 통해서만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 양쪽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쪽 뺨을 보여줌으로써 제 모습을 찾도록 해준다. 천방지축 날뛰고 맛난 음식 앞에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머리는 감지도 않고 제대로 씻지도 않는 춘희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너무나 솔직한 모습에서, 철수는 사랑을 느끼고, 내가 너보다 이 침대에서 더 많이 잤어, 섹스가 어쩌구저쩌구 대놓고 이야기하는 철수의 노골적이지만, 때로는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건네는 그런 모습에서 춘희는 철수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랑에 정답은 없다. 사랑은 불현듯 갑작스레 내 마음 속에 자리잡기도, 주변에서 오래동안 함께 지내던 털털한 이성친구의 모습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정신이고 육체고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고, 또 무엇이 필수이고, 무엇이 필수가 아닌지 그런 논쟁은 무의미하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가능한 법. 단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만의 사랑법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가려고 하는 여자, 동물원을 가려고 하는 남자, 둘은 서로 싸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술관을 가려했던 여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동물원으로, 동물원에 가려고 했던 남자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미술관에 와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으로 살며시 발을 한짝 들여놨을 때 사랑은 불현듯 다가온다.  시일이 또 한참 지난 뒤에 꺼내어 다시 보고픈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春) 2006-11-1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 기억하고 말고요. 저도 보고 싶을 것 같아서 DVD까지 갖추고 있답니다. ^^;
이 영화 덕에 로라 피지(Laura Fygi)가 유명해졌고, 서영은도 이 영화에 삽입된 노래를 불렀죠. 이성재 이 영화에서 참 좋았는데...

마늘빵 2006-11-18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두 디비디 있어요! ^^ 엇 로라 피지는 전 모르는데. -_- 검색해봐야지.

독주가 2007-09-2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은하와 동물원을 무지 좋아하는 저게, 무척이나 고마웠던 영화. 전 송선미와 안성기씨의 이야기가 더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