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겐 철학이 있습니까?
박이문 지음 / 미다스북스 / 2006년 4월
구판절판


방황은 인간의 운명이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는 물질과는 달리 싫건 좋건 자신의 행동, 자신의 삶을 선택해야만 하는 자유를 갖고 태어났다.
선택은 언제나 가치의 선택이고, 모든 가치 선택은 궁극적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내게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나에게 있어서 어떠한 삶이 인간으로서 가장 의미 있는 삶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 가운데의 최선의 대답이 선택으로 나타난다. -15쪽

윤리적이란 자신의 생물학적 욕구를 희생하면서 남을 생각하는 마음씨이다. 수치심은 윤리적 결함 즉 내가 생물학적 나의 욕망을 초월해서 남의 아픔과 기쁨을 생각하지 않는 즉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생물체로서만 존재하는 자기에 대한 반성적 의식이다. -31쪽

생명에 대한 애착은 곧 죽음에 대한 거부이다. 왜 죽음을 끝까지 거부하는가? 죽음이 생명의 불가피한 조건이라면, 이러한 조건이 자연, 우주의 움직일 수 없는 질서이며 법칙이라면, 죽음의 거부는 우주질서의 거부이며, 우주 질서와 법칙의 거부만큼 불합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덧없는 삶을 악착같이 좀 더 살아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부조리하고 어리석으며, 생명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치사하다.
하지만 우리의 어리석고 부조리한 태도와 치사한 집착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삶과 죽음이 논리가 아닌 것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논리가 아니라 본능의 영역에 속하며, 삶에 대한 우리의 집착 즉 죽음에 대한 우리의 거부감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의 안건이다. -37쪽

죽어서 떠난 이의 텅 빈 자리가 허전하다. 한 생명의 죽음은 그가 애써 살아오면서 닦아 놓은 모든 것을 허망하게 한다. 죽은 후에 내가 살아오고 닦아 놓은 모든 것이 혹시 살아남은 이들에게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내 자신에게는 전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의식을 전제하지 않는 의미를 생각할 수 없다면 나의 의식의 완전한 소멸을 뜻하는 나의 죽음은 나로부터 모든 의미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39쪽

혼자됨이 생명체의 객관적 존재조건을 지칭한다면 고독은 그러한 혼자된 존재조건의 주관적 체험을 가리킨다. 체험은 발달된 반성적 의식을 전제하며, 오직 인간만이 그러한 의식을 갖춘 동물이다. 인간만이 자신의 혼자됨이라는 존재조건을 '고독한' 것으로 체험할 수 있다. 어떠한 동물의 세계에도 고독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독'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해당될 수 있는 말이다. 인간만이 고독할 수 있는 동물이다. 고독이 혼자됨에 대한 인간의 반성적 의식상태를 말하지만 혼자됨에 대한 그러한 반성적 의식이 곧 고독이라는 의식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다. -45쪽

고독은 자신의 곤경에 대한 남들의 사회적 무관심 속에 놓여있는 개인적 혹은 집단적 인간의 상황이며, 고독감은 한 인간 혹은 한 인간 집단이 그러한 상황에서 혼자만으로 감당해야하는 고립감, 쓸쓸함, 아픔의 의식이다. 고독은 내가 참여하고 싶은 사회 즉 인간 공동체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남들과 인간으로서 공유하고자 하는 삶의 축제로부터 사회저으로 소외, 제거된 상황, 그리고 그러한 상황이 빚어내는 인간적 아픔이다. -47쪽

자살찬양은커녕 자살을 부정해야하는 다른 이유로 자살행위가 생명일반 특히 인간 생명의 가치를 부정함을 함의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자살행위가 자살자 본인의 생명의 가치만이 아니라 모든 가치의 부정을 의미한다고 하는 이유는 가치의 전제조건인 인간의 의식의 부정 내지는 소멸을 함의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역시 살아남기를 원하고, 어떤 경험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제 3자들 즉 사회의 이유가 될 수 있어도 자살자 본인에게는 전혀 설득력이 없다. 가치의 부정 혹은 의미의 부재를 따지는 행위 자체는 살아 있는 자들의 문제일뿐이지 자살한 본인 자신에게는 전혀 무의미하다. -55쪽

'가짜'에는 '사기'라는 의도가 은폐된다. 그것은 자신의 부당한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포장된 복제품이다. 나나 다른 모든 이들이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서로 다 같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내 목에 걸린 아름다운 진주 목걸이, 성형수술로 아름다워진 코, 눈, 입등은 가짜가 아니라 일종의 화장이며 장식이다. 나의 상품이 복제품이라는 것을 나나 남들이 모두 알고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내가 팔고 남이 샀다면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그냥 복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이태원에서 매매되는 복제품 가운데 많은 것들은 '가짜'가 아닌 그냥 복제품이다. 복제품이 원본이 아니라 복제품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이 공개적으로 밝혀진 것이라면 그것은 가짜가 아니라 진짜와 같은 뛰어난 복제품일 따름이다. 복제품이 어떤 이유에서이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복제품이 아니라 원본인양 행세를 할 때 비로소 가짜라는 범주에 속한다. '가짜'는 어떤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고자 하는 비도덕적 동기를 함축한 특정한 종류의 복제품을 지칭한다. 복제품이 원본보다 질적으로 더 뛰어날 수도 있지만, 가짜와 진짜의 차이는 그런 물리적 및 기술적 속성과는 상관없이 복제품을 제조하고 소유하고 유통시키는 의도에 있다. -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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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2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이문 교수님은 저의 중학시절 독서신문에서 이분의 글을 접한 후
평생 독자가 되었답니다.

마늘빵 2006-11-21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뒤늦게 접했지만 주요 저서들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
생각하는 삶에 대한 글들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