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 기억하시나요? 아 이 촌스러운 영화 포스터하곤. 1998년에 나온 작품인데 고작 기껏해야 이제 8년지났구만 딱 나 스무살 때 나온 영화. 8년 이란 시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거 같은데, 내 나이 스무살과 스물여덟살, 어리버리 꾸질꾸질하던 대학 신입생과 직장인 2년차, 한 겨울에 스킨 로션도 바르지 않던 놈과 에센스까지 꼬박꼬박 바르고도 별 티도 안나는 놈. 8년 이란 시간은 바로 이런 차이. 그리고 저 촌스러운 포스터와 8년전의 이성재와 심은하의 모습이란. 8년 참 무섭고나.



* 심은하 맞아?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심은하의 이미지와 너무나도 다른 천방지축 덜렁이 춘희.

  스무살에 저 영화 무지 재밌게, 또 감동적으로 봤더랬다. 그래서 아마도 작년이지 인터넷 쇼핑하다가 <미술관 옆 동물원> 디비디 나왔다는 소리 듣고 바로 질러버렸던게. 그리고 사놓고는 안봤더랬지. 갑자기 보고 싶어져서 꺼냈다. 스무살에 봤을 때의 재밌음과 감동은 이제 재밌음과 유치함으로 바뀌었다. 그때는 이 영화가 왜 이리 마음을 울렸던지.

  스물 여섯 되도록 좋아하는 남자 앞에 가서 나 너 좋아해, 이런 말 조차 못하는 춘희와 이미 다른 여자가 들어와 살고 있는 옛 애인의 집에 뻔뻔하게 들어와 사는 스물 일곱의 군인 철수. 어쩜 이름도 이렇게 딱 자기 모습대로야. 촌스럽고 꾸미지도 않고 너무나 솔직한 면모만 보여주는 춘희와 뻔뻔하고 마구 들이대는 무대뽀 철수. 그리고 이름은 귀엽고 이쁘지만 도도하고 냉정한 철수의 옛 애인 다혜. 아 이 영화의 가장 미스 캐스팅 다혜. 송선미다. 지금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하는 송선미의 연기는 아주 맛깔난 주연급 조연이지만, 흐흐 이 영화에서의 송선미는 정말이지 너무 딱딱하고 어색한 연기에 어울리지 않는 짧은 단발머리에 조신한 척 하는 캐릭터. 아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 송선미는 철수의 옛 애인이기도 하지만 춘희의 소설 속 여자이기도.

  영화 <집으로>의 이정향 감독의 첫 작품이었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이정향 감독이 시나리오에 당선됐고, 그것을 영화화하는데 본인이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고. 진실 혹은 거짓. 영화는 남녀의 기본적인 사랑 패턴을 밟아간다. 사랑하지만 육체를 허락할 수 없는 여자, 육체없이는 사랑도 불가능하다는 남자. 좋아하지만 다가섬이 너무 힘든 여자, 좋아하면 상대가 날 좋아하지 않아도 들이미는 남자. 전형적인 여자와 남자의 사랑방식 아닌가. '전형적인'이 아니고 '전통적인'이라고 해야하나.

  영화는 많은 사랑에 관한 명대사를 남겼다. 

"사랑이란 게 처음부터 풍덩 빠져 버리는 건 줄만 알았지. 이렇게 서서히 물들어 가는 것인 줄은 몰랐어."
"넌 결국 그녀를 사랑했다기 보단 사랑에 빠진 네 감정을 사랑했던 거지" 
"넌 남을 배려해서가 아냐 단지 자신이 상처 받을까봐 그게 두려워서 일부러 안타까운 짝사랑을 하는 척 즐기고있어"
"넌 사랑을 언제나 머리속으로만 해. 그게 다라고 여기고 자기 생각에만 빠져 있으니까 언제나 그 모양인거야 "


  철수  "넌 너 이외의 사람들이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가는지 생각해본 적 있어?"
  춘희 "요즘 사람들의 사랑은 같은 음악을 들어도 각자 이어폰을 끼고 듣는 것 같아.
             왠지 뭔가 자기가 갖고 있는걸 다 내주지 않는..."

 
   그래. 스무살에 이 영화가 감동으로 다가왔던 것은, 내가 철수와 춘희와 대화 속의 어느 누군가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육체없이 정신으로 가능하다 생각했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그녀를 놓아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진짜 사랑일 수도 있을거라 믿었으며, 사랑은 친구처럼 왔다 서서히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믿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주위에서 맴맴 돌다 그녀가 눈치챘는지 어쨌는지 모르고, 혼자 또 아 날 좋아하지 않는건가, 생각하며 쉽게 포기하곤 했던 그 시절의 나를 떠올린다.

  이정향 감독은 사랑을 머리로만 가능하다고 믿는, 또 섹스를 통해서만 사랑이 가능하다고 믿는, 양쪽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서로 다른 쪽 뺨을 보여줌으로써 제 모습을 찾도록 해준다. 천방지축 날뛰고 맛난 음식 앞에서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머리는 감지도 않고 제대로 씻지도 않는 춘희의 일상적인 모습에서, 너무나 솔직한 모습에서, 철수는 사랑을 느끼고, 내가 너보다 이 침대에서 더 많이 잤어, 섹스가 어쩌구저쩌구 대놓고 이야기하는 철수의 노골적이지만, 때로는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 건네는 그런 모습에서 춘희는 철수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랑에 정답은 없다. 사랑은 불현듯 갑작스레 내 마음 속에 자리잡기도, 주변에서 오래동안 함께 지내던 털털한 이성친구의 모습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정신이고 육체고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고, 또 무엇이 필수이고, 무엇이 필수가 아닌지 그런 논쟁은 무의미하다. 사랑에 빠지는 사람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가능한 법. 단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만의 사랑법으로 상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미술관을 가려고 하는 여자, 동물원을 가려고 하는 남자, 둘은 서로 싸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미술관을 가려했던 여자는 그를 만나기 위해 동물원으로, 동물원에 가려고 했던 남자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미술관에 와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서로가 서로의 영역으로 살며시 발을 한짝 들여놨을 때 사랑은 불현듯 다가온다.  시일이 또 한참 지난 뒤에 꺼내어 다시 보고픈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春) 2006-11-18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 기억하고 말고요. 저도 보고 싶을 것 같아서 DVD까지 갖추고 있답니다. ^^;
이 영화 덕에 로라 피지(Laura Fygi)가 유명해졌고, 서영은도 이 영화에 삽입된 노래를 불렀죠. 이성재 이 영화에서 참 좋았는데...

마늘빵 2006-11-18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두 디비디 있어요! ^^ 엇 로라 피지는 전 모르는데. -_- 검색해봐야지.

독주가 2007-09-29 0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은하와 동물원을 무지 좋아하는 저게, 무척이나 고마웠던 영화. 전 송선미와 안성기씨의 이야기가 더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