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하기 전에 패배한 것을 깨닫고 있으면서도 어쨌든 시작하고, 그것이 무엇이든 끝까지 해내는 것이 바로 용기 있는 모습이란다. - P213

무지개 색깔 중 어떤 피부색을 하고 있건 한 인간이 평등하게 대접받을 수 있는 곳이 한 군데 있다면 거긴 바로 법정일 거야. 하지만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원한을 배심원석까지 갖고 가기마련이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넌 일상생활에서 백인들이 흑인들을 속이는 걸 매일매일 보게 될 거다. 하지만 네게말해 주고 싶은 게 있구나. 이 말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흑인을 속이는 백인은, 그 백인이 누구이건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건 아무리 명문 출신이건 쓰레기 같은 인간이야 - P208

, 이 문제를 조용히 무마시킨다면 내가 그 애를 길러 온방식을 간단하게 부정하는 것이 돼. 때론 부모로서 완전히실패했다고 생각할 때도 있지만 그 애들한테 있는 것이라곤내가 전부네. 젬은 다른 누군가를 쳐다보기 전에 나를 먼저쳐다본다네. 나도 그 애를 똑바로 쳐다볼 수 있도록 살려고노력해 왔고...... 이런 식으로 뭔가 묵인한다면, 솔직히 말해난 그 애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어. 그리고 그렇게 마주보지 못하는 날, 나는 그 애를 잃는 것임을 잘 알고 있고, 그애와 스카웃을 잃고 싶지 않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곤그 애들뿐이니까」 - P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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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탐구의 생산성은 언어의 발생을 ‘나‘, 초월적 의식, 나아가 신화적이기는 매한가지인 심신적인 자아를 통해 파악하는 현대 문화의지배적 전통을 거부하면서 주체, ‘나‘, 의식과 같은것이 어떻게언표와 일치할수있는가, 어떻게 언어의 순수한 발생과 일치할수있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는 데서 나온다. - P207

나치 관료 제도의 은어로 ‘최종적 해결‘에 가담한 사람들이 ‘Geheimnistriäiger‘, 즉 비밀을 지닌자라고 불렸다면 ‘이슬람교도‘는 절대적으로 증언 불가능한,
생명 권력의 보이지 않는 은신처 [보관함]인 셈이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비어있기 때문이며, 즉 ‘이슬람교도‘가 ‘volkloserRaum‘, 곧 사람이 없는 공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수용소 - P230

의 심장부에 있는 이 사람이 없는 공간‘은 모든 삶을 그 자체와 갈라놓음으로써 시민이 비아리아인 혈통의 ‘국가의 일원‘
Staatsangehörige‘이 되고, 비아리아인이 유대인이 되고, 유대인이유형수가 되고,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추방된 유대인들이 자기를 잃고 ‘이슬람교도‘가 되는, 즉 벌거벗은 삶, 특정 불가능하고증언 불가능한 삶이 되는 지점을 나타내는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아우슈비츠에 대해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할 때 보다 신중해야 한다. 만약 그들이 증인은 자기가하는 모든 말을 어떤식으로든 말함의불가능성이라는 시험에 맡길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아우슈비츠가 고유한 사건이었다는 의미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면 그것은 옳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고유함을 말함의 불가능성에 결부시킴으로써 아우슈비츠를 절대적으로 언어와 단절된 현실로 바꾸어버리는 것이라면, 만약 (이슬람교도‘의 경우에 있어서는 증언의 핵심인) 말함의 불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의 이음매를떨어뜨리는 것이라면 그들은 무의식적으로 나치의 제스처를반복하는 셈이다. 즉 그들은 통치의 비밀 arcanum imperi과의 은밀한연대 속에 있는 것이다. - P231

사이의 원초적 관계에 의존한다. 증인 자격은 그가 말할 수 없음의 이름으로만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 말해 그/그녀의 주체됨에 있다. - P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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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아우슈비츠는 본래적 시간성의 돌이킬 수 없는 위기, 그러한 이접의 양단간에 ‘결단을 내릴 가능성자체의 돌이킬 수 없는 위기의 징조이다. 수용소라고하는 절대상황은 모든 근원적 시간성의 가능성의 종말, 말하자면 공간속에서의 고유한 위치(즉 ‘거기에)의 시간적 토대의 종말이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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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는 죽음의 수용소이기 이전에 오늘날 사유되지 않은채로 남아 있는 어떤 실험, 유대인이 ‘이슬람교도‘로 화하고 인간이 비인간으로화하는, 삶과 죽음 너머의 실험이 일어난 장소이다. - P79

걸어 다니는 시체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비참해지고전락해버렸지만 아직은 인간인 그러한 존재로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우선 항상 촉각을 곤두세우고 무엇이 각자 자신의불회귀점을 형성하는지 잘 알고 있어야 했다. 아무리 다급한 상황일지라도, 심지어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을지라도 결코 압제자에게 굴복하지 않을지점 말이다. 그것은, 누군가 이 지점을 넘어서는 대가로살아남았다면 그는 간신히 목숨을 부여잡고 있기는 하겠지만 그러한목숨은 이미 모든 의미를 상실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함을 뜻했다. 그것은 생존을 의미할 터이나 뭉개진 자존심이라도 가진생존이 아닌, 아무것도 없는 생존일 터였다(Bettelheim, 1960:157). - P84

수인을 ‘이슬람교도‘로 바꾸어 버리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모든 감각과 모든 내면적 의구심을 저버리는 것, 무슨일이 있어도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할 어떤 지점을 놓아버리는 것이었다. - P85

그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부끄러움이었다. 가스실로 보내질 인원에 대한 선별 작업이있고난후 그리고 지독한 폭력을 지켜보거나 묵묵히 감수해야만했을때면 어김없이 우리를 가라앉게 만들었던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
독일인들은 몰랐던 부끄러움, 의로운 사람이 다른 사람의 범죄를 보고 느끼는 부끄러움, 그와 같은 범죄가 존재하며 그것이 결국 기존의세계에 들어와 버렸다는 사실 앞에서 경험하는 부끄러움, 자신의 선한 의지는 너무도 미약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드러났고, 그러한 의지는 자신을 지키는 데 전혀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서경험하는수치심 말이다(Levi, 1986: 181~82). - P132

그때부터 어느 어렴풋한 시각 그 끔찍한 순간들이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것은 들어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그의 가슴속 심장을 태운다.
다시 한번 그는 다른 수인들의 얼굴을 본다. 새벽빛을 받아 푸르스름한 얼굴들, 온통 시멘트 먼지로 뒤덮여 잿빛인 얼굴들, 불안한 잠속에서 죽음으로 채색된 얼굴들 말이다. 밤에는 이를 갈고, 꿈도 꾸지 않고,
들어 있지도 않은 돌을 씹어댄다. "여기서 사라지게, 익사한사람들이여, 꺼지란말이네. 난어느누구의 자리도 빼앗지 않았네. 난 누구의 빵도훔친 적이 없네. 내 대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네. 정말 아무도 그대들의 세상으로 돌아가게. 내가 살아서 숨쉬고, 먹고 마시고 자고 입고 있는건 내 잘못이 아니라네" (Levi, 1988:581) - P136

죄책감을 느낄수 있어야만 우리는 인간일 수 있다. 객관적으로 보아 죄가 없을 때에도인간은 죄책감을 느낄수있어야만 한다(Bettelheim, 1979:296,313). - P141

우리는 아우슈비츠의 영원회귀를 바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사실 한 번도 중단된 적 없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항상미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 P152

따라서 부끄러움에서 나타나는 것은 바로 스스로에게 결박되어 있다는 사실, 자신을 저버리고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감추는 것이 철저하게 불가능하다는 사실, 자아가 그 자신에게 현전한다는 참을 수 없는사실이다. 벌거벗음이 부끄러운 것은 그것이 우리 존재의 노골성, 궁극적 친밀함intimacy의 노골성일 때이다. 그리고 우리 몸의 벌거벗음은정신에 대립하는 어떤 신체적인 것의 벌거벗음이 아니라 우리의 전존재의 벌거벗음, 너무나도 충실한, 너무나도 확실한 벌거벗음, 드러남이 가장 잔인한 벌거벗음, 그래서 도무지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벌거벗음이다. <도시의 불빛>에서 찰리 채플린이 삼키는 호루라기는그의 존재의 잔인한 현전이라는 치욕이 드러나게 해준다. 그것은 저유명한 채플린의 연미복이 간신히 감추어주는 현전의 분산된 기호들이 드러나도록 해주는 기록 장치 같은 것이다. 부끄러운 것은 우리의친밀함, 즉 우리의 우리 자신에게의 현전인 것이다. 그것이 드러내는것은 우리의무가 아니라 우리의 실존 전체이다. (……) 부끄러움이드러내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존재인 것이다(Levinas, 1982:87). - P158

혐오감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일방통행』의 한 아포리즘에서 간략하지만 적절한 분석을 제시하고있다. 벤야민에 따르면 혐오감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감정은 불쾌감을 일으키는 대상이 우리를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은자기 안에 있는 동물과 비슷한것이 자기를 알아보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의식이다"(Benjamin, 1979: 50). 혐오감을 경험하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혐오 대상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한편으로자신이 인식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혐오감을 경험하는 사람은 감당될 수 없는 타자성 속에서 자신을 인식한다. 즉 그는 어떤 절대적 탈주체화속에서 자신을 주체화하는 것이다. - P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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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은 생존자들에게는 유일한진실이고, 그러한 것으로서 절대 잊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진실은 그만큼 상상할 수 없는 것,
즉 진실을 구성하는 현실적 요소들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 P15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는 사실상 역사 인식 자체의 아포리아, 즉 사실과 진실 사이의 불일치, 입증과 이해 사이의 불일치인 것이다. - P15

심판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즉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가해자가 피해자가 되어 버리는 회색 지대인 것처럼 보인다. 생존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 점이다. "이편이나저편이나가해자나 피해자] 인간적이지 않기는 똑같았다"같은 책, 232). "피해자나 가해자나 비열하기는 매한가지다. 수용소의 교훈은 비참속의 형제애이다"(Rousset; Levi, 1997.216 참조).
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거나 심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은아니다. "아이히만이 내 앞에 있었더라면 나는 그를 사형시켜버렸을 것이다"(같은 책, 144). "그들이 범죄를 저질렀다면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같은 책, 236). 중요한 점은 다만, 두가지 것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주제넘게 법이 이 문제를 다다루어서도 안된다는것이다. 진실에는비법률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실의 문제quaestio facti‘는 결코 ‘법의 문제 quaestio juris‘로 축소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생존자들이 우려하는 것이다. 즉 인간의 행동을 법 너머의 문제로 치부하고재판과는 철저히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 모든 것 말이다. "우리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져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될 수있다. 심지어 이유도 모른 채 말이다"(같은 책, 75). - P23

잘 아는 사실이지만, 법의 목표는 정의의 확립이 아니다.
그렇다고 진실의 입증이 목표인 것도 아니다. 법의 유일한 목표는 판결이며, 그것은 진실과 정의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 점은심지어 부당한 판결조차도 판결의 효력을 지니는 데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법의 궁극적 목적은 기판력判; res judicata)의 산출인바, 여기서는 진실과 정의가 있어야 할 자리를 판결이 차지하고 있어 그것에 거짓이 있건 불의가 있건 참인 것이 된다. 법은 이러한 잡종의 피조물에서 안식을 구하며, 그것에 대해 그것이 사실인지 규범인지 말하기란 불가능하다. 일단법은 기판력을 산출하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이다. - P24

그러므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선과 악 너머에 있는 것이아니라 이를테면 선과 악 앞에 있는 무책임과 ‘판결 불능‘mpotentiajudicandi (Levi, 1989: 60)의 영역이다. 레비의 윤리(학)의 장소는 우리가 익히 아는 윤리(학)의 영역이 아니다. 레비는, 니체 FriedrichNietzsche의 제스처와는 정반대의 제스처로, 윤리(학)를 그 영역 앞에 둔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유를 말할 수는 없지만 이 ‘앞‘이라는 것이 그 어떤 ‘너머‘보다 더 중요함을, ‘인간 이상의 인간overman
‘보다 ‘인간이하의 인간underman‘이 우리에게 더 문제가 될수밖에 없음을 감지한다. 이 악명 높은 무책임의 지대가 우리의제1옥인 바, 책임에 대한 어떠한 고백도 이 지대로부터 우리를벗어나게 하지 못하고 여기서 시시각각 아주 분명하게 말해지는 것은 "가공할,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악의 평범성"(Arendt, 1992:252)이라는 교훈이다. - P29

시대를 막론하고 자신이 무죄임에도불구하고 사법적 책임을 지겠다는 제스처는 고귀한 행위로 여겨졌다. 한편 상응하는 법적 결과들을 감수하지 않은 채 정치적또는 도덕적 책임을 지겠다는 것은 항상 힘 있는 자의 오만을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었다. - P33

. 아마도 모든 말모든 글은 이런 의미에서 증언으로서 태어난다. 그러므로 증언되는 것은 그때까지는 언어나 글일수없다. 그것은 아무도 증언할수없는어떤 것일수만있다.그리고 그것은 공백으로부터 생겨나는 소리, 고독한 이가 말하는 비언어, 언어가 그것에 응답하고언어가 그 속에서 태어나는 비언어이다. 아무도 증언하지 못한것의 본성에 대한, 이 비언어에 대한 성찰은 필연적이다. - P58

증언을 한다는 것은 언어를 그 자체의 무의미non-sense가 되게, 문자들(m-a-s-s-k-l-o, m-a-ti-s-k-1-o)의 순수한 비결정성이 되게 하는 것만으로는충분치 않다. 그러한 무의미한 소리가, 다시 한번, 전혀 다른이유에서 증언할수없는 무엇 또는 누구의 목소리가되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증언의 불가능성이, 인간의 언어를 구성하는이 ‘공백‘이 무너지면서 또 다른 증언의 불가능성에, 즉 언어를갖고 있지 못한 존재의 불가능성에 자리를 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언어가 증언되지 않은 것으로부터 옮겨놓는다고 믿는 흔적은 증언되지 않은 것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언어의 말이다. 말씀이 더 이상 태초에 있지 않을 때, 말씀이 다만 태초에서 벗어나타락할 때 다만 증언하기 위해 태어나는 말이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빛을 증거하는 무엇이었다." - 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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