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블 - 악의 역사 1, 고대로부터 원시 기독교까지 악의 인격화
제프리 버튼 러셀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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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본질은 감정을 가진 존재,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를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다루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고통이다. 악은 정신을 통해 즉각 파악되고, 감정에 의해 곧바로 감지되며, 고의로 가해진 고통으로 느껴진다. 악이 존재한다는 데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치 않다. -13쪽

악을 이해하려면 개인에게 행해진 어떤 사건을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닥친 악을 즉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 친구나 이웃들에게 아니면 개인적인 친분이 전혀 없는 사람들에게 행해진 악을 감정적으로나마 직접 경험한다. 악이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16-17쪽

전통적으로 '자연발생적 악'과 '도덕적 악'을 구분하기도 한다. 자연발생적 악이란 토네이도나 암과 같은 '신 또는 자연의 파괴적인 행위'를 말하고, 도덕적 악은 인간의 의지나 여타 지능을 가진 존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나 진지하게 신이라는 개념을 숙고해보면, 그러한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왜냐하면 신이란 다른 감정을 지닌 존재에 고난을 짊어지우는 감정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23쪽

"아브락사스는 신성하고도 저주스러운 말을 하는데 거기에는 삶과 죽음이 동시에 들어있다. 아브락사스는 진실과 거짓, 선과 악, 빛과 어둠을 같은 말과 같은 행동으로 낳는다. 그래서 아브락사스는 끔찍하다"
(융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가지 설법> ) -34쪽

악은 왜, 어떻게 인격화되는가? 가장 기본적인 답은 이렇다. 즉, 악을 외부로부터 우리에게로 침입해 들어오는 고의적인 악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격화된다는 설명이다. -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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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럼 누가? - 철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10
김주일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3월
절판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희랍의 나라들은 다신교 전통에 서 있었다.
...중략...
희랍에 단일한 신이 없었다고는 하나 나라를 수호하는 대표적인 신들은 있었다. 아테네라는 이름의 유래가 아테나 여신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아테나 여신은 아테네에서 주로 섬기는 신이다.
...중략...
신화상으로도 포세이돈과 아테네 여신이 이 나라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고, 올리브를 선물한 아테나 여신의 승리로 끝나 이 나라는 아테네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60-61쪽

희랍의 다신교와 기독교와 기독교의 일신교는 섬기는 신의 숫자에서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섬김의 형태에서도 차이가 났다. 기독교는 유태인들의 민족 신앙인 유대교에서 유럽인의 보편 종교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신의 존재를 증명해야만 할 필요가 생겼다. 전래의 문화 전통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신앙 체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신이 새삼스런 증명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천신 만고 끝에 로마의 국교가 되었지만 게르만 족의 대이동과 로마의 멸망으로 유럽의 주인이 바뀌면서 다시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이민족에게 기독교의 신을 신앙의 대상으로 납득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이유말고도, 여럿이 아닌 단 하나의 신은 추상적이라 설득의 과정이 추가로 더 필요한 측면도 있다. 반면에 희랍의 다신교는 오랜 문화 전통이었고, 신의 수가 교리에 의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이해 능력이 발전하면서 자연스레 신의 수가 불어났고 인간의 이해에 부응했기 때문에 신이 심각한 증명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62-63쪽

신화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공동체의 누군가가 신을 모독하는 경건하지 못한 행위를 하면 그 공동체 전체가 몰살될 수 있다. 새로운 해석은 위험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해석은 불경이다. 전통의 방식만이 옳다고 믿는 경직된 상태, 그것이 당시 아테네 배심원들의 심정이었다. -80-81쪽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술이 아무 여과 장치 없이 젊은이들에게 공개될 경우, 경거망동하는 젊은이들이 기성의 권위에 도전하고 조롱하는 장난 도구로 대화술을 악용할 소지가 많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에서 대화법을 배울 수 있는 나이를 30세 이상으로 제한하기도 한다. -100쪽

변함없는 악법을 운용하는 나라가 불안정한 좋은 법을 운용하는 나라보다 낫습니다. 절도를 갖춘 무지가 자유분방한 명민함보다 유익합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보다는 한층 평범한 사람들이 나랏일을 더 훌륭하게 꾸려나갑니다. 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법보다 더 현명해 보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투키디데스 <펠레폰네소스 전쟁사> 3권 37장, 클레온의 말 中)-129쪽

dura lex, sed lex
(quod quidem perquam durum est, sed ita scripta est)
(그것이 나쁜 것이긴 하지만, 법에 그렇게 되어 있다)
(도미누스 울피아누스의 말, 3세기 로마법학자)-130쪽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일단 지켜야 하며, 악법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널리 홍보하여 정당한 입법절차에 따라서 그 악법을 개정하여야 한다.
(오다카 도모오, <법철학>,1937년)-146쪽

흥미로운 것은 이 말(악법도 법이다)이 1980년대에 부쩍 많이 인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군국주의 시대와 군부 독재 시절에 똑같이 '악법도 법이다'가 강조되고 소크라테스가 오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하여간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이 말이 대중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일까? 1960년대 이후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고 학교에서 배웠는데, 교과서에 명시적으로 없으니 어떻게 된 일인가? 아마 이것은 오다카의 책과 우리의 교과서에 적힌 내용이 그런 오해를 방조 내지는 조장했고, 이를 학교에서 수업하는 선생들이 적극적으로 '그렇다'고 연결지어 설명했으며, 언론이 이를 확대, 재생산했으리라고 보는 것이 적절한 해석이리라. -150-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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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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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이 책을 냈다, 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주목받게 되어있었다. 그는 크게 본다. 크게 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글을 많이 쓰고 세상의 변화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06년 그는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그런데 디지로그가 뭔데? 눈치 빠른 이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두 단어의 합성어다. 디지털 + 아날로그.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분명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요소들이다. 흑과 백 사이에는 수많은 무채색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회색이라고 쉽게 칭하더라도 다 같은 회색은 아니다. 회색이라고 말하더라도 내가 지칭하는 회색과 네가 지칭하는 회색은 다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회색이 존재할 수 있을까.

  흔히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할 때 전자시계와 바늘시계를 예로 든다. 전자시계는 열 두시 점심시간을 가리킬 때, "12:00:00"라고 표시하지만, 바늘시계는 숫자 12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가 바늘 시계를 보고 12시라고 말을 할 때 바늘이 정확히 숫자 12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략 12자에 근접해있으면 12시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초침은 여전히 돌아간다. 디지털은 정확하고, 아날로그는 부정확하다. 디지털은 기계적이고 아날로그는 인간적이다. 디지털은 삭막하고 아날로그는 부드럽다. 등등의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들.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그 개념들을 조합한 것이다. 사회는 언젠가부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이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시대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변화를 창조해내는 사람은 시대를 이끌어간다. 디지털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의 변화 중 하나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선 뭐가 개발되었다느니 이제 우리는 어떤 집에서 살게 된다느니 하며 불과 몇년전에 SF영화 속에서 봤던 미래사회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SF 영화를 찍기 위해 우리가 상상해내는 모든 것은 곧 현실화된다.

  워크맨을 들고 다닌지 그다지 오래된 거 같지 않은데, 씨디플레이어가 나오고, 테잎은 사라지고 씨디로 음악을 들었다. LP를 말하는 사람은 이미 뒤떨어진 인간이다. LP는 입에 올릴 수 조차 없다. 이젠 CD를 구입해 음악을 듣는 것도 뒤떨어진 인간 취급받는다. 인터넷에 접속해 MP3를 다운받고 쬐그만 목걸이형 엠피쓰리 기계를 차고 다니며 음악을 듣는다. 아직 까지 엠피쓰리를 쓰지 않는 나는 뒤떨어진 인간?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고, 핸드폰과 엠피쓰리, 카메라, 캠코더가 조합된 제품이 나오고, 무거운 종이 사전 대신 국어, 영어, 중국어,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짬뽕해낸 전자사전이 나온다. 것도 모자라 전자사전에 스케쥴 관리 기능과 엠피쓰리까지 첨가했다. 녹음도 된다. 오늘 산 컴퓨터는 불과 일년 후면 고물이다.

  디지로그는 이러한 디지털 사회 속에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옛 아날로그 감성을 조합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현대와 과거의 조합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미래와 과거의 조합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어령은 이 책 속에서 우리의 옛 것을 예로 들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떡, 비빔밥, 나물, 젓가락, 숟가락 등등을 언급하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세계 다른 나라보다 더더욱 디지로그에 적합한 나라임을 강조한다. 디지털 최강국에 아날로그적 감성까지 지녔으니 디지로그 시대의 최강자가 될 것이라는 결론?.

  "숟가락은 주로 국문을 떠먹는 것으로 음에 속하는 것이고, 젓가락은 양에 속하는 것으로 고체형 마른 식품을 집는데 사용된다. 건식에 편중되어 있는 서양의 식기가 접시 위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습식 문화의 한국 식기는 종기 뚝배기 사발 등 움푹 팬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같은 동북 아시아권 가운데서도 '음양 조화'의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 것이 바로 한국 문화라고 할 수 있다." (P62)  

  "정보가 샌다" "정보를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물과 같은 액체로 생각한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다 대던 농경시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정보를 캔다" "정보를 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무슨 석탄이나 노다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산업시대인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가 환하다" "정보에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빛이다. 만화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구를 그려놓듯 에디슨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정보를 맡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짐승이 지나간 채취를 통해 추적하던 원시적 감각의 산물이다. 정보는 이렇게 수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잠재의시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지식 정보의 새로운 기술을 옛 패러다임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다.
정보기술을 새 패러다임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속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 (p130-131)

  이 책에서 이어령이 주장하는 바는 너무나 설득력있고 자세하여 정말 믿어야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뭔가 의심스럽다. 아니 의심스럽다기 보다 일부러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모두 무릎을 탁 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너무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의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정말 그렇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것은 모두 다가올 새 시대에 너무나 적합하고 딱 떨어지는 것이라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디지로그 시대의 최강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하고 질문을 던져봤을 때, 책 속에서 보여지는 우리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멀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 책에서 너무나 많은 예를 통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 책을 한번 읽고는 고개는 끄덕일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는 어렵다. 매우 쉽게 쓰여진 책이라 빠르게 가볍게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진지하게 읽어나가야만 하는 책이다. 하나 하나의 장 속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하라. 질문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봐라. 그가 내다보는 우리의 미래는 밝고 희망적이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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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저령선생의 이화여대에서 강의할때 제자들이 그러는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은 예전부터 하신 말씀이라는데요.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거죠.
추천.

마늘빵 2006-05-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게 중앙일보 연재됐던걸 묶은 책이라 하네요. 디지로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한거 같고, 정식으로 책으로 내면서 '선언'이라고 이름을 붙인거 같아요. 추천 감사함다.

nada 2006-05-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흥미롭긴 한데 아프락사스님 말씀처럼 조금 갸우뚱하네요. 그럼 정보를 긁어오는 사람들은 정겨운 등 긁어줌 문화의 향수를 느끼는 걸까요? 정보를 퍼오는 사람들은 돌아가며 서로의 뒷간을 퍼주던 품앗이 문화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네요. 잘은 모르지만.. 철학도 그렇고 시대를 읽는다는 것도 그렇고 어느 정도 끼워맞추기가 있는 것 같아요.^^

마늘빵 2006-05-0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좀 너무 우리식의 어거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하지만요. 어쨌든 이어령의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은 알아줘야돼요. 젊은 세대보다 디지털에 대해 더 잘 알아요. 제가 모르는 것도 수두룩하게 등장하더만요.
 
도마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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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에 대한 몇몇 주변인들의 극찬으로 요시모토 바나나 전작주의자가 되겠노라 마음먹으며 지금까지 출간된 그녀의 몇몇 소설들을 한꺼번에 사들였던 적이 있다. 불과 두 달 전쯤의 일이었던가. 책에 대한 욕심은 많아가지고 이것저것 또 신작도서들을 주워담다보니 그녀의 책들이 자꾸만 뒤로 밀리고 밀리고 하여 결국 몇권 읽지 못했다. 지금껏 읽은 그녀의 책은 <불륜과 남미> <몸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하드 보일드 하드럭> 그리고 이번에 읽은 <도마뱀> 까지 네 권. 아직 <키친> <하치의 마지막 연인> <암리타> <허니문> <티티새> <하얀 강 밤배> 이렇게 6권이 남아있다. 지금까지는 굿.

  그녀의 소설은 사소한 일상에 대해 포근히 감싸주는 무언가가 있다. 지치고 상처받고 아프고 쓰라리고 넋이 나간 그 순간에, 누군가 나를 도와줬으면 좋겠는, 나에게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줬음 하고 바랄 즈음에, 살며시 나의 상처를 아픔을 어루만져주고 포근히 안아준다. 지금까지 읽은 네 권의 책 모두 그러했고, 아직 읽지 않은 여섯권의 책도 그와 비슷한 구도와 형식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녀의 소설들이 다 그렇듯 <도마뱀> 역시 몇 편의 짧은 소설들이 묶여져 한 권의 책으로 나왔다. '신혼부부' '도마뱀' '나선' '김치꿈' '피와 물' '오카와바타 기담' 이라는 여섯편의 짧은 소설들. 이 소설들은 모두 1990년에서 93년 사이에 그녀가 각각 다른 매체를 통해 발표한 소설들로 비슷한 소재와 메세지를 담고 있어 한권으로 묶여졌다.

  지치고 지루하고 상처받은 일상 속에 내던져진 개인에 대한 치유와 보듬음. 모두 다 다른 소재와 줄거리를 담고 있지만 여섯편의 소설은 배다른 형제의 관계를 맺고 있다. 각각의 소설은 모두 쓰러질 듯한 상처받은 개인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그들이 누군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고 다시 삶의 희망을 갖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녀의 소설은 마치 상처받은 영혼에 대한 치유의 주술과 같다. 영혼을 달래준다. 그리고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다시 일어설수있도록.

  때로는 비정상적이게 보이는, 우리와 달라 보이는 개인을 설정해놓기도 하지만, 결국 소설 속 주인공과 우리는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지루한 일상이 기다리는 가정으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남자도, 동성애와 그룹섹스에 자신의 몸을 내던져 육체를 탐닉한 그녀도 결국 우리와 다르지 않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은 상처받은 영혼이다. 종류는 다를지언정 누구나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며 때로는 그 상처를 부정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소설 속의 그들과 우리를 '다르다'고 규정지어버리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다르지 않다. 그들도 우리도 상처받기는 마찬가지다. 그리고 상처를 치유하기를 원하고 다시 궤도위에 올라서기를 희망한다.

  그녀는 사건을 터뜨리고 줄거리를 진행시키기보다 정지된 화면 속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소설을 진행시킨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는 추상화를 보는 것처럼 알 수 없는 이미지를 만들고 한 장 두 장 그림을 넘긴다. 끝까지 그림이 다 넘어가고 나면  나는 한층 나아진 나의 편안한 마음과 안식을 얻는다.

  그녀의 소설은 중독성이 강하다. 내 마음을 꿰뚫어보며 가슴을 어루만져주고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준다. 그래서 자꾸 찾게 된다. 처음의 상처는 치유됐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나는 또다른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기 때문에. 그 다음에는 또 어떤 이야기 속에서 나를 발견할지 기대된다. 다음 작품은 어떤 것을 선택해볼까. 이야기를 모른 채 남아있는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무작위로 선택하는 것도 또다른 재미.

   한 마디  :  아직 안읽은 많은 책들 중에 <도마뱀>을 선택한 것은 최근 봤던 영화 <도마뱀>과 혹시 연관이 있을까 해서였다. 아니었다. 내용이 달랐다. 영화 속의 그 내용은 그녀의 소설 <도마뱀>과는 달랐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 속에서 같음을 발견했다. 영화 <도마뱀>도, 소설 <도마뱀>도, 한 상처받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었다. 혹시 소설 속 내용을 영화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갖고 봤고 그 기대를 저버리긴 했지만 영화와 소설 속에서 나름대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어 더 좋았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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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6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빌려봐야지.

마늘빵 2006-05-06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kleinsusun 2006-05-07 0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바나나의 전작주의자 아프락사스님!^^
예전에 <도마뱀> 읽었었는데 생각이 안나네요. 5~6년 전에 읽었는데.....
바나나 소설은 NP 빼고 다 좋은거 같아요. NP....저한텐 거부감이 느껴지는 소설이었어요.

마늘빵 2006-05-07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는 아직 안샀는데 수선님이 그러시니깐 더 궁금해지는데요? 있는거 다 보고 그것두 사야겠어요.

구름의무게 2006-05-07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나나 전작주의자지요. 여지껏 나온 책은 죄다 보았고, 흐뭇해 하고 있었는데, 거의 대부분 4년전쯤에 읽어서 내용이 가물가물. 그저 요시모토 바나나는 좋다!라는 기억밖에는 없어서, 언제고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

구름의무게 2006-05-07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는 np도 참 좋았는데 말입니다... ^^

마늘빵 2006-05-07 2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의 무게님 다 보셨군요! 꽤 많은데. 바나나 작품. 천천히 하나하나 음미해야지요. 너무 한꺼번에 이 사람 것만 읽으면 질려버릴거 같아서 섞어 읽는 중이에요.

mong 2006-05-12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주의 마이 리뷰 축하 드립니다 ^^

마늘빵 2006-05-12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몽님 제가 당선된거에요? 적립금이 들어왔는데 이주의 마이리뷰엔 이름이 없는데요? 어딜 보고 말씀하신건가요?

이매지 2006-05-13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메인에 있구만요^^ 축하드려요 ^^

울보 2006-05-1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마늘빵 2006-05-13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핫. ^^ 감사합니다. 정말 일년만에 된거 같아요. 마태님 말씀따라 일년에 한번만 주는건가.

오우아 2006-05-13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매번 읽어본다고 다짐 했는데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고 싶네요. 축하드려요^^

플레져 2006-05-13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아프락사스님, 굿 리뷰여요. 축하드립니다. 추천 꾹!

마늘빵 2006-05-1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다들 감사합니다. 명예의 전당에 아직 안나와있는데 어떻게들 알고 오시네요?

구름의무게 2006-05-13 2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이주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 메인화면에 떴어요.호호~

마늘빵 2006-05-13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름의 무게님 감사합니다. 얼껼에 당선이 됐네요. 일년에 한번 있는 행사인가 봅니다. ^^

비로그인 2006-05-13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인에서 아프락사스님 별명보고 바~로 들어왔어요^^ 추카드려욤~!

비로그인 2006-05-14 0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이제야 봤네요. 추천 한방 날리면서.당분간은 책값 걱정 없겠어요.

로쟈 2006-05-15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에 익은 이름이 떠 있어서 들어왔습니다. '전작주의자'로서의 본전은 뽑으시나 봅니다.^^

마늘빵 2006-05-15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핫. 로쟈님. 그러게말여요. 이건 기대하지 않은 리뷰였는데. 첫번째 것도, 두번째 것도 기대하지 않은 곳에서 당선의 기쁨을 주시는군요. ^^

Kitty 2006-05-15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추천! 서재의 달인 넘 섭섭해하지 마시어요~~ ^^
이주의 리뷰는 열 배의 기쁨! ^___^

stella.K 2006-05-1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비로그인 2006-05-15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인터라겐 2006-05-17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축하 드립니다....당근 추천 날립니다..

nada 2006-05-17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좋으시겠다.. 축하드립니당~

마늘빵 2006-05-1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키티님, 스텔라님, 나를 찾아서님, 인터라겐님, 양배추님. ^^ 아핫. 금새 추천수가 13이나. 감사해요~

2006-06-23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6-06-2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김점선도 리스트에는 올라와있으나 지금 밀린게 너무 많아 저는 나중에 돌아볼 듯 합니다. ^^ 김점선 화가의 팬이시군요!
 
도마뱀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옥희 옮김 / 민음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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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기다려. 지금 어느 나라 말을 사용하고 있는거지?"
알수가 없었던 것이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느 나라 말도 아니야. 당신과 나에게만 통하는 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모든 사람들 사이에 그런 말이 있지. 사실은 그런거야. 당신과 그 어떤 사람, 당신과 부인, 당신과 전에 함께 있던 여자, 당신과 아버지, 당신과 친구, 그런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단 한 종류의 말이"
<신혼부부> 中 -13쪽

"이렇게 전차를 타고 계속 많은 것들을 보고 있어. 끝이 없는 직선처럼 언제부턴가 계속 이러고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를 거야. 그들은 전차라는 것을 아침에 정기권을 보이고 개찰구를 빠져나가 밤에 원래의 역에 돌아오기 위한 안정된 상자라고 생각하지. 그렇지 않아?"
여자는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섭고 불안정해지고 말아."
나는 말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야. 모든 건 마음의 문제지. 만일 인생을 전차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돌아가야 할 집과 계속해야 할 일들을 전차라는 기능과 뒤섞지 않으면, 여기에 탄 사람들 거의 모두가 가방 속의 지갑에 들어 있는 돈만으로도 지금 곧 아주 먼 곳으로 갈 수도 있어."
<신혼부부> 中 -15쪽

"몸을 써서 밖을 향해 계속 표현하는 것보다도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밀어내지 않으면 갈증은 해소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어. 지금까지 나는 격렬하게 움직여서 간신히 자신을 지탱해 왔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생각했지."
<도마뱀> 中-33-34쪽

"또 만나줘요"
라고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아무래도 만지고 싶어서, 미칠 정도로 더 이상 어쩔 수가 없어서. 그녀의 손을 만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지요. 신이여.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손을 잡았다. 자연스럽든 부자연스럽든 상관없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 났다. 사실은 그랬다. 그럭저럭 서로 마음이 있는 두 사람이 있어 별 생각 없이 약속을 하고 밤이 되어 먹고 마시고,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오늘쯤 해도 된다고 서로가 암묵의 타협을 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저 만지고 싶어서, 키스를 하고 싶고 껴안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서 일방적으로든 아니든 눈물이 날 정도로 하고 싶어서, 지금 곧, 그 사람하고만, 그 사람이 아니면 싫다, 바로 그런 것이 사랑이었다. 생각이 났다.
"그래 또 만나"
<도마뱀> 中-34-35쪽

내 사랑은 네 사랑과 조금 달라.
예를 들면 네가 눈을 감았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주의 중심이 너에게 집중하지.
그러면 네 모습은 한 없이 작아지고 뒤에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지. 너를 중심으로 해서, 그것은 엄청난 가속으로 점점 퍼져가지. 내 과거의 모든 것,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 내가 쓴 모든 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모든 경치, 별자리, 아련히 푸른 지구가 보이는 암흑의 우주 공간까지.
대단해 대단해 하고 나는 내심 미칠 듯이 기뻐하고, 그리고 네가 눈을 뜬 순간 그것은 전부 사라져버리지. 다시 한번 생각해 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하지.
둘의 생각은 이처럼 전혀 다르지만 우리는 태고의 남녀야. 아담과 이브의 연정 모델이지. 사랑하는 사이인 남녀 중의 모든 여자에게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여러가지 버릇이, 모든 남자에게는 응시의 순간이 있어. 상대방을 서로 따라하며 영원히 이어지는 나선이지.
DNA처럼, 이 대우주처럼.
그때 신기하게 그녀가 내 쪽을 보고 웃으며, 대답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 정말로 아름다웠어. 난 정말 평생 잊지 않을 거야"
<나선> 中-67-68쪽

아마도 심한 질투란 거의 모든 경우에 본인과 상대방과의 관계성이 아니라 단순히 에너지가 약하다는 걸 드러내는 것이리라.
<김치꿈> 中-85-86쪽

"아, 본래 이런 게 장례식이란 거로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생전에 무슨 일이 있었더라도 모든 걸 잊고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가 애도하고 애석해하며 진심으로 슬퍼하고 명복을 빌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 태어나서 꿋꿋이 살아가다가 죽어가는 인생이라는 것이 너무 멋있어 보인다. 바로 몇 시간 전에 죽은 사람도 그 사람과 관계가 있는 사람들도 모두가 용서를 받은 상태다.
<오카와바타 기담> 中-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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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 2006-05-06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여태 안 읽었다는...^^; 읽어야하는데 다른 것들에 자꾸만 밀리고 밀려서 방학때나 읽어야겠내요.

마늘빵 2006-05-06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그렇게 밀리고 밀리다가 요번에 영화 <도마뱀> 때문에 생각나서 집어들었어요. 혹시 같은 내용인가 해서. 아니더라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