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로그 digilog - 선언편
이어령 지음 / 생각의나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이어령이 책을 냈다, 는 그 자체만으로도 이 책은 주목받게 되어있었다. 그는 크게 본다. 크게 본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하고 책을 많이 읽고 생각을 많이 하고 글을 많이 쓰고 세상의 변화에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2006년 그는 디지로그를 선언했다. 그런데 디지로그가 뭔데? 눈치 빠른 이라면 금방 떠올릴 수 있는 두 단어의 합성어다. 디지털 + 아날로그.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분명 정반대의 성격을 지닌 요소들이다. 흑과 백 사이에는 수많은 무채색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회색이라고 쉽게 칭하더라도 다 같은 회색은 아니다. 회색이라고 말하더라도 내가 지칭하는 회색과 네가 지칭하는 회색은 다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이에도 무수히 많은 회색이 존재할 수 있을까.

  흔히 디지털과 아날로그를 비교할 때 전자시계와 바늘시계를 예로 든다. 전자시계는 열 두시 점심시간을 가리킬 때, "12:00:00"라고 표시하지만, 바늘시계는 숫자 12를 가리킨다. 그러나 그 누구도 우리가 바늘 시계를 보고 12시라고 말을 할 때 바늘이 정확히 숫자 12에 도달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략 12자에 근접해있으면 12시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초침은 여전히 돌아간다. 디지털은 정확하고, 아날로그는 부정확하다. 디지털은 기계적이고 아날로그는 인간적이다. 디지털은 삭막하고 아날로그는 부드럽다. 등등의 디지털과 아날로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들.

  이어령이 말하는 디지로그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인식하고 있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그 개념들을 조합한 것이다. 사회는 언젠가부터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사람들은 이 변화를 감당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자는 시대의 저편으로 물러나고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고 변화를 창조해내는 사람은 시대를 이끌어간다. 디지털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의 변화 중 하나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에선 뭐가 개발되었다느니 이제 우리는 어떤 집에서 살게 된다느니 하며 불과 몇년전에 SF영화 속에서 봤던 미래사회가 현실로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SF 영화를 찍기 위해 우리가 상상해내는 모든 것은 곧 현실화된다.

  워크맨을 들고 다닌지 그다지 오래된 거 같지 않은데, 씨디플레이어가 나오고, 테잎은 사라지고 씨디로 음악을 들었다. LP를 말하는 사람은 이미 뒤떨어진 인간이다. LP는 입에 올릴 수 조차 없다. 이젠 CD를 구입해 음악을 듣는 것도 뒤떨어진 인간 취급받는다. 인터넷에 접속해 MP3를 다운받고 쬐그만 목걸이형 엠피쓰리 기계를 차고 다니며 음악을 듣는다. 아직 까지 엠피쓰리를 쓰지 않는 나는 뒤떨어진 인간?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고, 핸드폰과 엠피쓰리, 카메라, 캠코더가 조합된 제품이 나오고, 무거운 종이 사전 대신 국어, 영어, 중국어,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을 짬뽕해낸 전자사전이 나온다. 것도 모자라 전자사전에 스케쥴 관리 기능과 엠피쓰리까지 첨가했다. 녹음도 된다. 오늘 산 컴퓨터는 불과 일년 후면 고물이다.

  디지로그는 이러한 디지털 사회 속에 인간적이고 다정다감한 옛 아날로그 감성을 조합시키는 것을 일컫는다. 현대와 과거의 조합이라고나 할까. 아니면 미래와 과거의 조합이라고 해도 되겠다. 이어령은 이 책 속에서 우리의 옛 것을 예로 들면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조화를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의 전통 떡, 비빔밥, 나물, 젓가락, 숟가락 등등을 언급하며 아날로그적 감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나라는 특히 세계 다른 나라보다 더더욱 디지로그에 적합한 나라임을 강조한다. 디지털 최강국에 아날로그적 감성까지 지녔으니 디지로그 시대의 최강자가 될 것이라는 결론?.

  "숟가락은 주로 국문을 떠먹는 것으로 음에 속하는 것이고, 젓가락은 양에 속하는 것으로 고체형 마른 식품을 집는데 사용된다. 건식에 편중되어 있는 서양의 식기가 접시 위주로 되어 있는데 비해 습식 문화의 한국 식기는 종기 뚝배기 사발 등 움푹 팬 것들이 많다. 그러니까 같은 동북 아시아권 가운데서도 '음양 조화'의 문화를 가장 철저하게 생활화한 것이 바로 한국 문화라고 할 수 있다." (P62)  

  "정보가 샌다" "정보를 흘린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물과 같은 액체로 생각한 것이다. 물꼬를 자기 논에다 대던 농경시대적 개념이다. 그러나 "정보를 캔다" "정보를 묻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정보를 무슨 석탄이나 노다지 같은 것으로 알고 있는 산업시대인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정보가 환하다" "정보에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보는 액체도 고체도 아닌 빛이다. 만화에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전구를 그려놓듯 에디슨 시대의 유물인 것이다.
  "정보를 맡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추적할 때 짐승이 지나간 채취를 통해 추적하던 원시적 감각의 산물이다. 정보는 이렇게 수렵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잠재의시의 산물이기도 하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지식 정보의 새로운 기술을 옛 패러다임으로 읽고 있다는 증거다.
정보기술을 새 패러다임으로 비유하자면 그것은 액체도 고체도 아닌 '공기'라고 말할 수 있다. 공유는 해도 독점할 수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이다. 사용을 해도 없어지지 않고 순환하는 것 또한 공기의 속성이며 정보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가치'는 있어도 '가격'은 없는 것이 공기이며 지식정보다
. (p130-131)

  이 책에서 이어령이 주장하는 바는 너무나 설득력있고 자세하여 정말 믿어야 될 것만 같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뭔가 의심스럽다. 아니 의심스럽다기 보다 일부러 딴지를 걸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 모두 무릎을 탁 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너무 우리민족, 우리나라,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 지나친 나머지 우리의 모든 것을 미화시키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 정말 그렇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 것은 모두 다가올 새 시대에 너무나 적합하고 딱 떨어지는 것이라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디지로그 시대의 최강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정말?, 하고 질문을 던져봤을 때, 책 속에서 보여지는 우리의 환상은 우리의 현실과 너무 멀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이 책에서 너무나 많은 예를 통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이 책을 한번 읽고는 고개는 끄덕일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기는 어렵다. 매우 쉽게 쓰여진 책이라 빠르게 가볍게 쉽게 읽을 수 있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진지하게 읽어나가야만 하는 책이다. 하나 하나의 장 속에서 우리는 많은 생각의 나래를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의심하라. 질문을 던져라. 그리고 다시 한번 읽어봐라. 그가 내다보는 우리의 미래는 밝고 희망적이지만 정말 그럴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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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7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저령선생의 이화여대에서 강의할때 제자들이 그러는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합은 예전부터 하신 말씀이라는데요. 갑자기 나온 말이 아니라는 거죠.
추천.

마늘빵 2006-05-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게 중앙일보 연재됐던걸 묶은 책이라 하네요. 디지로그에 대한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한거 같고, 정식으로 책으로 내면서 '선언'이라고 이름을 붙인거 같아요. 추천 감사함다.

nada 2006-05-07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흥미롭긴 한데 아프락사스님 말씀처럼 조금 갸우뚱하네요. 그럼 정보를 긁어오는 사람들은 정겨운 등 긁어줌 문화의 향수를 느끼는 걸까요? 정보를 퍼오는 사람들은 돌아가며 서로의 뒷간을 퍼주던 품앗이 문화을 그리워하는 걸까요? 잘 모르겠네요. 잘은 모르지만.. 철학도 그렇고 시대를 읽는다는 것도 그렇고 어느 정도 끼워맞추기가 있는 것 같아요.^^

마늘빵 2006-05-07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좀 너무 우리식의 어거지가 있는 것 같아요. 그걸 만들어내는 것도 대단하지만요. 어쨌든 이어령의 시대의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은 알아줘야돼요. 젊은 세대보다 디지털에 대해 더 잘 알아요. 제가 모르는 것도 수두룩하게 등장하더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