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yoonta > 트로츠키의 사상 (박노자)

                        트로츠키 사상.

1) 트로츠키 생애: 1879년 – 유대계 평민 출신의 지주 가정에서 태어남. 유대계지만 가정에서는 Yiddish 대신에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 사용 – “러시아화된 유대인”. 여동생인 Olga – 볼셰비키당의 주요 지도자 중의 한 명인 Lev Kamenev과 결혼 – “혼맥을 통한 밀접한 관계”. 1896년 – 노동 운동에의 입문, 1900-1902년 – 시베리아 귀양과 도망, 해외 망명 (원래 이름 – Bronstein; Trotsky는 위조된 여권에서 찍힌 이름). 1902년부터 런던에서 러시아 사민당 기관지인 Iskra 편집에 참여, Plekhanov 등 “구파”와 대립 관계에 돌입. 개방적인 사생활 – 첫 부인 (Sokolovskaya)와 이혼하여 두 번째 부인 (Sedova)를 맞이한 뒤에도 첫 부인과 매우 친근한 친구 관계 유지했음. 1903년 러시아 사민당 분당 (分黨) 사태 때에 – 처음에 레닌의 비민주성에 격분하여 멘셰비키에 가담했지만 그 뒤에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대 노선”에 실망하여 1904-1917년간 “독립적인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해왔음 – 억압적인 규율을 不忍하는 정치적인 성질. 1905년 – 러시아에서 인기 있는 사회주의 신문 발행인 및 논객이 됐으며 “직접 민주주의” 기관인 페테르부르그 소비예트의 지도자가 됨. 소비에트 – 제정 러시아 정부가 빌린 외국 차관 (외채)를 갚을 필요 없다는 선언을 하여 국제적인 “명성”을 얻음. 1906년 – 체포, 공판, 귀양. 1907년 – 다시 한번 도망해서 런던으로 탈출했음. 소비에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트로츠키의 무산계급 집권론 – 총파업과 “무산자들의 연대”를 “반란”보다 훨씬 더 강조했음: “The main weapon of the Soviet was a political strike of the masses. The power of the strike lies in disorganizing the power of the government. The greater the “anarchy” created by a strike, the nearer its victory. This is true only where “anarchy” is not being created by anarchic actions. The class that puts into motion, day in and day out, the industrial apparatus and the governmental apparatus; the class that is able, by a sudden stoppage of work, to paralyze both industry and government, must be organized enough not to fall the first victim of the very “anarchy” it has created. The more effective the disorganization of government caused by a strike, the more the strike organization is compelled to assume governmental functions.
The Council of Workmen’s Delegates introduces a free press. It organizes street patrols to secure the safety of the citizens. It takes over, to a greater or less extent, the post office, the telegraph, and the railroads. It makes an effort to introduce the eight hour workday. Paralyzing the autocratic government by a strike, it brings its own democratic order into the life of the working city population” 소비에트 – 다수의 동의를 바탕으로 하는 “대안적인 非권력적인 권력”.
1907-1914 – 런던에서 빈으로 이동하여 주로 빈에서 살면서 오스트리아 사민당의 활동에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했음. 독립적인 사회주의적 신문 <프라우다> 발행 (나중에 볼셰비키당 기관지가 그 이름을 “도용”했다고 트로츠키는 매우 격분했음). 많은 문제에 있어서는 볼셰비키들과 충동했음. 1912년 - <Kievskaya Mysl’>의 종군 기자로서 발칸 전쟁을 취재하여 발칸지역의 사회, 정치적 발전, 현대 전쟁의 문제 등을 깊이 연구했음.
1914-1917 –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지에서 반전 활동을 하다가 결국 1917년2월 부르주아 혁명 이후로 러시아로 돌아감. “개량주의적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도적인 soft line – 전쟁에 대한 반대를 굳게 하면서 제2차인터네서널의 완전한 파탄을 면하게 하려고 노력했음 – 레닌보다 예컨대 국제감각이 다소 예리하고 조금 더 “원대한” 구상을 지닌 듯함 –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우려해서 “주류 사민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으려고 노력했음.
1917년 – 여름에 볼셰비키들에게 합류하여 1917년10월 혁명을 사실상 주도했음. 혁명 이후에 – 멘셰비키 등 온건 사회주의자들과의 “연합 정권” 구상을 반대했음 – 레닌과 마찬가지로 보다 급진적인 혁명을 지향함.
1918년3월까지 트로츠키 – 외무부 장관 (외무 인민 위원) – 독일과의 강화의 문제에 있어서는 역시 미래 지향적인 중도적 입장을 취했음 – 독일제국과의 협정을 맺음으로서 소비에트 정권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고 일단 독일과의 협상에서 시간 끌기 하고 독일 병사 사이의 혁명적 선전에 중점을 두자 – 즉, 독일에서의 혁명에 주력하자는 입장 –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의 가장 “국제주의적” 접근. 그런데 독일에서의 혁명이 늦어져 결국 레닌의 제안대로 강화 협정을 맺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 강화 협정은 볼셰비키들의 국내 혁명적 명분을 크게 실추시키고 좌파 사회혁명당 등의 농촌의 혁명 세력들과의 유대 관계를 파괴하게 했음 – 트로츠키의 반대는 이유가 있었음. 
1918년3월-1920년간 – 赤軍 (적군 – 소비에트 공화국의 국군) 지휘자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트로츠키 – 적군의 “정규군化” – 구 제정정권 군 장교 재임명 (배신 시 원칙상 전 가족 총살 내지 수용소로의 체포), 징병제, 사병들에 대한 군재판, 탈영 등 범죄 시 총살. 트로츠키 – “민주적인 노동자 권력”의 이상을 저버리지 않았겠지만 정규군인 백군 (白軍 – 반동군)이나 제국주의 열강의 간섭군과의 전투에서 “비대칭적 전투”로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통감하여 “현실과의 타협”을 한 셈임. 실제 “군인”으로서의 트로츠키 – 나름대로의 “중도 노선” - 1920년의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폴란드 영토로의 진입 등 “혁명의 수출” 시도를 반대했음 (결국, 1920년8월에 바르샤바 정복의 시도가 좌절됨 – 트로츠키 의견이 맞았음). 그런데 1920-21년에 트로츠키가 “노조의 국가기관화”와 “노동의 군사화” – 노동자의 직장 이동 권리 박탈 및 국가 기관에 의한 무제한적 징발, 전직의 가능성 – 를 주장하여 특히 노동자 출신의 공산당 중간, 고급 간부로부터 많은 원망을 샀음 (“노동자 반대파”). 이 “노동 군사화” 제안은 군대, 철도 책임자로서의, 즉 고급관료로서의 트로츠키 입장을 반영했음. 트로츠키는 “노동자의 국가에서 노동자가 국가의 명령을 미워할 이유가 없으며 국가를 두려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근거 없는 낙관을 보여주었음 – 근대 지상주의적인 볼셰비키들의 “국가/권력 집중의 숭배” – 볼셰비즘의 공동된 문제. 
- 1922년 – 레닌이 치명적인 병환을 앓고 있는 데에, 총서기관이 된 스탈린과 볼셰비키들의 “정통적 지도자”인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트로츠키의 집권 시도를 우려하여 “삼두 마차”로서 “반트로츠키 블록”을 만들었음. 1922년 후반부 – 소수 민족들을 다루는 스탈린의 비민주성을 목격한 레닌이 스탈린이 지휘하는 당 관료의 잠재적 반동성에 위기 의식을 느껴 트로츠키와는 급속히 가까워졌음. 1923년부터 – 스탈린/지노비예프 등이 트로츠키와 가까운 관료들을 좌천시키는 등 트로츠키와 “권력형 암투”를 노골적으로 벌임 – 이 과정에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허구성이 드러남 (라코브스키 주영국 대사로의 좌천 등).
- 1923년10월8일 –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당내 민주주의의 실종”을 극론함 – 지역 서기관들이 중앙으로부터 임명되는 시스템을 “당의 관료화”의 원천으로 생각함 – 그 후 1927년까지 “합법적인 당 민주주의 반대파”로 기능해온 것. 1923-25 – 반대파가 그 의견을 <프라우다> 등에서 발표하여 공개적인 논쟁을 할 수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지는 게임”이었음 – 각종의 당 대회, 회의에서 대표자의 선출부터 이미 위로부터 임명된 서기의 선출에 의거했기 때문에 “당 중앙”을 반대하는 어떤 의견도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없었음. 트로츠키 입장 – 보다 급속한 공업 경제 건설 (“총동원”을 주장하지 않았음), “일국 사회주의” 불가능성과 세계 혁명 지향 노선 등 – 많은 면에서 옳았다 해도 이미 국가의 관료 기구가 된 당에서는 권력이 뒷받침해주지 않는 어떤 입장도 “힘”을 얻지 못했음. 트로츠키 입장의 치명적 약점 – 그가 “당내 민주주의의 부활”을 주장했지만 “당외 민주주의” (예컨대 같은 사회주의적 계통의 멘셰비키 등의 합법적 활동 허용)에 대해 무관심했음 – “볼셰비키 국가”에 대한 맹신의 지속. 1926년 – 계속 강화돼 가는 스탈린의 권력이 눌린 지노비예프/카메네프가 트로츠키 편에 옮기지만 1927년부터 스탈린이 반대파에 대해 비밀 경찰의 탄압을 이용하기 시작했음. 1927년 – 많은 반대파들이 당적 박탈. 1928년 초기 – 트로츠키가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로 귀양가야 함 – 사실상 스탈린의 “무제한 독재”의 시초.
- 1929-1940 – 트로츠키의 해외 망명 생활 –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 멕시코 – 처음에는 소련 주도의 코민테른과 “경쟁”하려 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코민테른이 파시즘의 독일에서의 집권을 방지하지 못하고 나서는 1938년에 “제4차 인터네서널”을 결성했다. 문제 – “리더” 중심의 중앙 집권적 구조로 인해서 그 트로츠키주의적 분파들이 계속 분당 과정을 겪어 작은 섹트 (종파)로 나누어짐 – 극단적 “수령주의”와 교조주의. 가장 큰 분열의 원인 – “입장주의” (entrism)의 문제 – “고립을 피하기 위해서” 현실적으로 대중적인 노동자 정치를 펴고 있는 사민당/공산당에 의견그룹으로서 입당할 필요가 있는가? 이외에는 스탈린주의 국가들을 “타락된 노동자 국가”로 봐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분열의 가장 큰 이론적인 기제이었음.

트로츠키 인생의 가장 큰 모순 – 한편으로는 권력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늘 권력에 반발해왔지만 또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국가”와 “당”의 권력을 물신화/절대화시킴 – 자신을 죽인 소련 국가를 끝내 “타락된 노동자 국가”라고 옹호해왔음. 근대주의적 정치인의 특징 – 특정 이데올로기/정당을 “역사의 논리를 전개시키는 주체”, 거의 헤겔의 “신의 의지의 실행자”로 보는 입장. 결국, 1923년 이후의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적 투쟁이 대단히 “온건”했다 – 그는 끝내 “반스탈린 혁명”을 주장하지 않았다.

2) 트로츠키 사상의 요점:
- “지속 혁명” (permanent revolution) – 1905년의 부르주아 혁명 이후에 개발해왔음 – 후진국에 있어서는 부르주아들은 민주혁명조차 이루어낼 수 없기에 미완의 민주혁명 바로 뒤에 무산계급이 주도하는 지속적인 사회주의 혁명이 이어져야 함. 왜 혁명이 후진국에서 일어나는가? 트로츠키의 대답은 “복합적이며 불균형한 발전의 법칙” (law of combined and uneven development) – 발전 수준이 고르지 않은 나라들이 같은 역사적인 세계적 과정 (예컨대 세계대전)으로 휘말리는 와중에서 “약한 고리” (국가 권력이 역하거나 부패한 후진국)가 먼저 터질 수 있다는 논리:
“The first and most general explanation is: Russia is a backward country, but only a part of world economy, only an element of the capitalist world system. In this sense Lenin solved the enigma of the Russian Revolution with the lapidary formula, “The chain broke at its weakest link.”
A crude illustration: the Great War, the result of the contradictions of world imperialism, drew into its maelstrom countries of different stages of development, but made the same claims on all the participants. It is clear that the burdens of the war would be particularly intolerable for the most backward countries. Russia was the first to be compelled to leave the field. But to tear itself away from the war, the Russian people had to overthrow the ruling classes. In this way the chain of war broke at its weakest link.
Still, war is not a catastrophe coming from outside like an earthquake, but, as old Clausewitz said, the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 In the last war, the main tendencies of the imperialistic system of “peace” time only expressed themselves more crudely. The higher the general forces of production, the tenser the competition on the world markets, the sharper the antagonisms and the madder the race for armaments, so much the more difficult it became for the weaker participants. That is precisely why the backward countries assumed the first places in the succession of collapse. The chain of world capitalism always tends to break at its weakest link.” – 국가간의 경쟁과 전쟁 등이 멈추어지지 않는 상황에서는 “약한 고리”들이 계속 생겨날 것이라는 예상. 한 국가 안에서의 “불균형 발전”도 마찬가지 (재벌과 중소 기업 사이의 괴리): “While peasant agriculture often remained at the level of the seventeenth century, Russia's industry, if not in scope, at least in type, reached the level of progressive countries and in some respects rushed ahead of them. It suffices to say that gigantic enterprises, with over a thousand workers each, employed in the United States less than 18 per cent of the total number of industrial workers. In Russia it was over 41%. This fact is hard to reconcile with the conventional conception of the economic backwardness of Russia. It does not on the other hand, refute this backwardness, but dialectically complements it.
The same contradictory character was shown by the class structure of the country. The finance capital of Europe industrialised Russian economy at an accelerated tempo. The industrial bourgeoisie forthwith assumed a large scale capitalistic and anti-popular character. The foreign stock-holders moreover, lived outside of the country. The workers, on the other hand, were naturally Russians. Against a numerically weak Russian bourgeoisie, which had no national roots, there stood confronting it a relatively strong proletariat with strong roots in the depths of the people”
러시아의 “복합형 발전”이라는 과정 속에서 외연이 강해도 국내적 민중과의 연결이 약해 강력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러시아 부르주아들이 결국 전제 정권이 물러나는 대로 무산계급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는 논리 – 후진국의 국가의존 외세의존형 자본계급의 약점을 매우 정확하게 꿰뚫어봄. 그러기에 무산계급에 의한 “지속 혁명”이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In accordance with its immediate tasks, the Russian Revolution is a bourgeois revolution. But the Russian bourgeoisie is anti-revolutionary. The victory of the Revolution is therefore possible only as a victory of the proletariat. But the victorious proletariat will not stop at the programme of bourgeois democracy: it will go on to the programme of socialism. The Russian Revolution will become the first stage of the Socialist world revolution” (<In Defence of October>, Denmark, 1932).

- 국가와 노동자 민주주의 문제. 문제 – 만약 후진적인 국가의 무산계급을 지도한다는 공산당 그 자체가 억압적인 국가의 골간이 된다면? 여기에서는 “민주주의”가 견제 장치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노동자의 직접적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트로츠키는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원칙상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요구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국가의 틀 안에서라면 노동자들의 생산 통제 참여는 “계급간의 협력” 그 이상이 못되고 어차피 부르주아에 의해서 견제 받아 잘 실행될 수 없다고 내다봤음. 즉, 트로츠키에게는 노동자의 생산 통제에서의 참여는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첫 단계”, 즉 “국가 권력의 문제”로서만 의미 있음. 비록 부르주아 국가라는 한계가 있어도 생산 민주주의 그 자체의 잠재력을 트로츠키는 과소평가함:
“What state regime corresponds to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It is obvious that the power is not yet in the hands of the proletariat, otherwise we would have not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but the control of production by the workers’ state as an introduction to a regime of state production on the foundations of nationalization. What we are talking about is workers’ control under the capitalist regime, under the power of the bourgeoisie. However, a bourgeoisie that feels it is firmly in the saddle will never tolerate dual power in its enterprises. workers’ control consequently, can be carried out only under the condition of an abrupt change in the relationship of forces unfavorable to the bourgeoisie and its state. Control can be imposed only by force upon the bourgeoisie, by a proletariat on the road to the moment of taking power from them, and then also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Thus the regime of workers’ control, a provisional transitional regime by its very essence, can correspond only to the period of the convulsing of the bourgeois state, the proletarian offensive, and the failing back of the bourgeoisie, that is, to the period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the fullest sense of the word.
If the bourgeois is already no longer the master, that is, not entirely the master, in his factory, then it follows that he is also no longer completely the master in his state. This means that to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factories corresponds the regime of dual power in the state.
This correspondence, however, should not be understood mechanically, that is, not as meaning that dual power in the enterprises and dual power in the state are born on one and the same day. An advanced regime of dual power, as one of the highly probable stages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in every country, can develop in different countries in different ways, from differing elements. Thus, for example, in certain circumstances (a deep and persevering economic crisis, a strong state of organization of the workers in the enterprises, a relatively weak revolutionary party, a relatively strong state keeping a vigorous fascism in reserve, etc.)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can come considerably ahead of developed political dual power in a country” (<Workers’ Control of Production>, 1931).
트로츠키는 주로 “부르주아 국가 파괴의 단계”에서의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평소”에 노동자들이 공장 운영 위원회에서 직접적 민주주의의 경험을 쌓는 데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경멸적이었음 (“계급간의 협조”) 그리고 “노동자의 국가”가 되면 일단 “노동자의 국가에 의한 국유화”가 모든 문제들을 해결할 것처럼 예상함 – “노동자 국가”의 물신화, “노동자 국가” 안에서의 모순 관계를 보지 못하는, 비변증법적 사고.

국가의 위험성을 과소평가한다는 반론에 대해서 트로츠키의 반박: “With the exception of one country, state power throughout the world is in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It is in this, and only in this,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proletariat, the danger of state power lies. The proletariat’s historical task is to wrest this most powerful instrument of oppression from the hands of the bourgeoisie. The Communists do not deny the difficulties, the dangers that are connected with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But can this lessen by one iota the necessity to seize power? If the whole proletariat were carried by an irresistible force to the conquest of power, or if it had already conquered it, one could, strictly speaking, understand this or that warning of the syndicalists. Lenin, as is known, warned in his testament against the abuse of revolutionary power. The struggle against the distortions of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has been conducted by the Opposition since its inception and without the need of borrowing from the arsenal of anarchism.
But in the bourgeois countries, the misfortune lies in the fac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the proletariat does not understand as it should the dangers of the bourgeois state. By the manner in which they treat the question, the syndicalists, unwittingly of course, contribute to the passive conciliation of the workers with the capitalist state. When the syndicalists keep drumming into the workers, who are oppressed by the bourgeois state, their warnings about the dangers of a proletarian state, they play a purely reactionary role. The bourgeois will readily repeat to the workers: “Do not touch the state because it is a snare full of dangers to you.” The Communist will say to the workers: “The difficulties and dangers with which the proletariat is confronted the day after the conquest of power – we will learn to overcome them on the basis of experience. But at the present time, the most menacing dangers lie in the fact that our class enemy holds the reins of power in its hands and directs it against us.” (<The Errors in Principle of Syndicalism>, 1929)
국가 위험성에 대한 몰이해는 자본주의 국가의 개량주의자들에게 더 강하며, 소련 안에서는 국가의 관료화에 대해서는 좌파 반대파가 잘 투쟁하고 있다는 것은 이 반박의 논지. 문제 – “좌파 반대파의 투쟁”은 실제로 승산이 없었으며 트로츠키 예상과 달리 스탈린의 독재 국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 “국가의 위험성”을 기존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나 반체제 운동 (공산주의 운동) 등에서나 동질적인 것으로 봐야 하지 않나? 그런데, 트로츠키는 이와 같은 시각에 끝내 동의하지 않았음.

-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서: “Dissertations upon “the dictatorship of the bureaucracy over the proletariat” without a much deeper analysis, that is, without a clear explanation of the social roots and the class limits of bureaucratic domination, boil down merely to high-faluting democratic phrases so extremely popular among the Mensheviks. One need not doubt that the overwhelming majority of Soviet workers are dissatisfied with the bureaucracy and that a considerable section, by no means the worst, hates it. However, it is not simply due to repression that this dissatisfaction does not assume violent mass forms; the workers fear that they will clear the field for the class enemy if they overthrow the bureaucracy. The interrelations between the bureaucracy and the class are really much more complex than they appear to be to the frothy “democrats.” The Soviet workers would have settled accounts with the despotism of the apparatus had other perspectives opened before them, had the Western horizon flamed not with the brown color of fascism but with the red of revolution. So long as this does not happen, the proletariat with clenched teeth bears (“tolerates”) the bureaucracy and, in this sense, recognizes it as the bearer of the proletarian dictatorship. In a heart to heart conversation, no Soviet worker would be sparing of strong words addressed to the Stalinist bureaucracy. But not a single one of them would admit that the counterrevolution has already taken place. The proletariat is the spine of the Soviet state. But insofar as the function of governing is concentrated in the hands of an irresponsible bureaucracy, we have before us an obviously sick state. Can it be cured? Will not further attempts at cures mean a fruitless expenditure of precious time? The question is badly put. By cures we understand not all sorts of artificial measures separate and apart from the world revolutionary movement but a further struggle under the banner of Marxism. Merciless criticism of the Stalinist bureaucracy, training the cadres of the new International, resurrecting the fighting capacity of the world proletarian vanguard – this is the essence of the “cure.” It coincides with the fundamental direction of historical progress” (<The Class Nature of the Soviet State>, 1933)

트로츠키가 소련 관료계급이 아직도 “지배계급”이 되지 못했다고 보고 그들의 “사회적 기생성”을 폭로해도 그들을 과거의 부르주아와의 동질의 존재로 파악하지 않았음. 즉 “타락된 노동자 국가” 논리. 사실,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국가의 부활이 두려워서 관료적인 타락을 견디는” 형태는 아니었음. 새로운 국민 국가에서의 사회적 진출의 기회에 많은 노동자들이 신흥 국가에 대한 충성을 느꼈음 – 매우 빠른 사회 진출의 가능성. 1941-45년의 소독 전쟁 이후 – 새로운 국가는 막강한 국민주의적 이데올로기까지 만들어낼 수 있었음. “국가에 의한 대중의 포섭” – 트로츠키가 역시 놓친 부분.

트로츠키 사상의 장점: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의 복합성을 정확하게 파악한 부분, 혁명의 이상에 충실해온 부분. 단점 – “국가/당 등 유사 국가적 조직의 내재적 위험성”에 다소 무감각하고 특히 소련의 국가/당을 끝까지 물신화했음 – 대중의 민주적 자율성의 문제를 잘 간파하지 못했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전출처 : yoonta > 레닌의 사상 (박노자)

레닌의 사상:

1) 레닌의 생애:
- 가정적 배경 – 외조부 – Aleksander Dmitrievich Blank – 유대계/스웨덴계의 부유한 의사, 정교회로 개종하여 경찰의관으로서 출세, 귀족 신분까지 부여 받았음. 외조부의 부인: 부유한 독일계 상인 가정의 출신 (Groschopf 가문). Blank가는 Kokushkino 라는 농장을 보유했으며, 거기에서 1861년의 농노제 혁파 이전까지 농노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레닌 – 자신이 세습적인 귀족이라는 사실을 적어도 제정 러시아 시절에 숨기려 하지 않았음 – 각종 신청서 등에서 “세습적 귀족”이라고 사인했음. 레닌 아버지 쪽 – 비교적으로 미미한 가문 (농노 출신의 수공업자). 그러나 레닌의 아버지 Ilya Nikolaevich Ulyanov – 교육관료계에서 자수성가하여 일선 교사에서 Simbirsk도(道) 교육감까지 올랐음. 아버지의 品等 – “국가자문관” (State Councillor) – 군대에서의 장군급과 같은 수준. 1886년에 아버지가 죽은 뒤에 가정은 유가족 연금과 Kokushkino농장의 소작료로만 경제 문제 해결. 레닌의 아버지 – “개명 관료” – 아이들을 평등하게 대해주고 가정 잡지 발행해주고 각자에게 자신의 방을 주고, 집안에서 외국어 사용을 장려했음. 레닌 – 늘 학급 우수생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대단한 자신감을 과시했음 – 가정에서 “천재”로 인정됨. 레닌을 “모범생”에서 “혁명가”로 바꾼 경험 – 형 Aleksander의 사형 집행 (1887년) – 황제 암살 음모 혐의. 레닌의 형 – 비상한 정직함과 용기를 보임 (끝까지 반성문 작성을 거부하여 감형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했음). 레닌 – 이 기회에 “영웅주의적 투쟁의 한계” 통감, “대중 노선”을 택했음. 형의 사형 집행 이후 – 레닌이 경찰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어 Kazan대학교로부터의 제적 등 각종의 처벌에 시달렸음. 정상적인 대학생이 될 수 없었으며 상트페테르부르그 황립대학고 법학부 “원격 학생” 신분으로 겨우 졸업했음. 주로 독습에 의존했음 – 가장 애호하는 작가 – Chernyshevsky “무엇을 할 것인가?” – 자기 희생적 “혁명적 전위”의 타입을 보여주었음. “민중 노선”이 돼도 레닌은 끝내 그의 형과 같은 “인민주의자”들의 영웅주의를 완전히 포기하지 않은 듯함 – “수단과 방법을 가릴 일 없는 혁명 전위” 강조 – Vladimir Voitinsky와의 대화에서 1905년에 “혁명을 하얀 장갑을 끼고 할 수 없다. 우리에게 가끔가다 몹쓸 짓을 할 수 있는 이들도 바로 몹쓸 짓을 할 수 있다는 이유로 필요하다”. 일종의 “혁명 엘리트 현실주의”.
- 레닌과 Krupskaya 결혼 – “운동권 방식의 결합” – 같이 마르크스주의 노동 운동에 종사해온 부인이 남편과 운동을 함께 하게 됨 – 그런데 외형은 “동지적 결합”이었지만 실제로는 “내조”형에 가까웠음 – 남편의 원고 작업 등 도와주는 일이 주종을 이룸. 1909년 이후 레닌 – Inessa Armand – Krupskaya의 “삼각형 관계” – 세 사람 다 동의했으며 “부르주아적 가족 이상의 타파”와 “혁명적 동지애” 차원에서 문제 삼지 않았음 – 일부일처제 타파의 성공적인 사례.
- 레닌의 재정적인 상황 – 개인 재정과 당 운영비 철저하게 분리했음 – “깔끔한 재정 운영”. 개인 재정 – 어머니 재산에서 나오는 이자 소득 + “당으로부터 주이지는 활동비” (최대한 350스위스 프랑크 – 숙련공 월급보다 다소 높음). 레닌 – “철저한 근대인” – 일체 영수증 등 늘 전부 다 보관했음, 가계부 작성. 당 운영비 – 1905-1907년간 – “은행털이”로 얻어지는 소득 – 1907년7월26일 Tiflis에서의 은행 마차 “털이”가 제일 유명했음 (3명 사망). 이외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출신의 “물주”들의 도움 – Savva Morozov (1905년 자살, 그 유서에 의해 그 재산이 Gor’ky를 통해 볼셰비키당에 귀속됐음) 등. 당 운영비 관리 때문에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사이의 분쟁 결과 - 1910녀부터 3명의 독일 사민당 지도자 (Zetkin, Kautsky, Mehring)가 러시아 사민주의 운동 활동비 최고 관리자로 임명됐음. 레닌 – 재정 등의 문제에 있어서는 Kausky와 V.Adler 등 독일, 오스트리아 동지로부터 많은 후원을 받아왔음 – 그 만큼 그들과의 궁극적인 단절은 마음 아픈 일이었음.
- 레닌과 1905년 혁명 – 레닌이 무장 반란 (“무산 계급과 농민계급이 주도할 민주 혁명”)을 조직할 길을 모색하고 있었음. 1905년 – 레닌 – “민주혁명에 있어서의 사민주의자들의 두 개의 전략” 집필, 무장 혁명 준비 지향. 레닌의 급진 노선 – 당에 인기를 끌었음. 1906년말 – 당원의 수는 거의 15만 명을 넘었음. 그 당시의 러시아에서는 제정 정권의 폭정보다는, 많은 희생을 요구하는 무장 투쟁이라 하더라도 차라리 “차악”으로 여겨질 만한 분위기는 팽배했음 – 레닌 급진주의의 “현실적인 근거”.  레닌의 “무장 폭동 노선” – “도시 게릴라전”을 총체적인 무장 반란의 “준비 단계” 내지 ‘보조적인 작전’으로 인식했음. <게릴라전에 대해서> (1906년9월) – 라트비아 사민주의자들의 무장 폭력 노선을 다음과 같이 “모범”으로 제시했음:
“The Lettish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a section of the Russian Social-Democratic Labour Party) regularly issues its paper in 30,000 copies. The announcement columns publish lists of spies whom it is the duty of every decent person to exterminate. People who assist the police are proclaimed “enemies of the revolution”, liable to execution and, moreover, to confiscation of property. The public is instructed to give money to the Social-Democratic Party only against signed and stamped receipt. In the Party’s latest report, showing a total income of 48,000 rubles for the year, there figures a sum of 5,600 rubles contributed by the Libau branch for arms which was obtained by expropriation” (http://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06/gw/index.htm) 민족 모순들과 계급모순이 중첩된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탐정 박살” 등의 잔혹성은 불가피했는지도 모르지만, 과연 현재의 지배계급의 왜곡된 도덕관과 질적으로 다른 생명 존중 위주의 사회주의적인 도덕관이 있는지에 대해 한번 진지하게 물어보게끔 하기도 함.  

2) 1890-1900년대의 독일 사민주의: 현실과 사상의 괴리. 현실 – 체제에의 포섭이 돼감. 사상 – Kautsky – “중소 기업의 경쟁에서의 소멸, 전체 경제가 하나의 커다란 기업 되기” – 독점화 경향 이론을 극단적으로 설명했음. 역시 현실에의 안주의 반영 – 사회주의의 도래를 거의 “자연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했음 – “不可逆의 사회, 경제적 경향”. 그것보다 훨씬 더 현실 순응주의로 나아간 것은 Bernstein – 노동가치론의 전면적인 부정, 상품의 가치를 “원가 + 이윤 마진”으로만 이해하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부정했음. Bernstein – 긍정적인 측면이라면 “민주주의”를 ‘무산 계급의 독재” 달성의 수단이라기보다는 노동 운동의 “목표”로 설정한 것 – 즉 사회주의를 “전면적인, 포괄적인 민주주의의 사회”로 이해한 것. 급진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 있었던 이론가 – Hilferding - <금융자본론> (1910) –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유착론, 금융자본과 국가 권력의 일체화 경향 – 자국의 금융자본을 위해 무리한 식민지 획득을 마다하지 않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무력 갈등 가능성의 제고 –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종말을 고하지 않아도 정치적으로 세계 전쟁이라는 통로를 통해 망할 수 있는 것이다”. 레닌 – Kautsky를 일종의 “스승”으로 받들면서도 혁명에 있어서의 “주관적인 요인”, 즉 전위정당의 조직력과 전투성을 훨씬 더 강조하는 등 “개량주의자”들과 노골적인 강등을 빚지 않으면서도 유럽 사민주의의 “급진파”를 이루었다. 또 한 가지 특징 – 서구 중심주의의 일정한 타파 – 비서구 민중의 혁명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 - (1908) – 중국이 “중세적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 근대적 혁명 운동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예견했음: “In China, too, the revolutionary movement against the medieval order has made itself felt with particular force in recent months. True, nothing definite can yet be said about the present movement’—there is such scanty information about it and such a spate of reports about revolts in various parts of the country. But there can be no doubt about the vigorous growth of the “new spirit” and the “European currents” that are stirring in China, especially since the Russo-Japanese war; and consequently, the old-style Chinese revolts will inevitably develop into a conscious democratic movement.” 그리고 “아시아 혁명”이 러시아 혁명의 핵심적인 우군 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간파했음: “The Russian revolution has a great international ally both in Europe and   in Asia, but, at the same time, and for that very reason, it has not only a national, not only a Russian, but also an international enemy” “세계 혁명”의 구도를, “유럽”의 한계를 넘어서 구체화했음.   
3) 제1차세계 대전 – 사민주의 사상의 전환점 – 레닌 - <자본주의 최후 단계로서의 제국주의> (1916) – 제국주의를 “경제결정론적” 입장에서 이해함:
“If it were necessary to give the briefest possible definition of imperialism we should have to say that imperialism is the monopoly stage of capitalism. Such a definition would include what is most important, for, on the one hand, finance capital is the bank capital of a few very big monopolist banks, merged with the capital of the monopolist associations of industrialists; and, on the other hand, the division of the world is the transition from a colonial policy which has extended without hindrance to territories unseized by any capitalist power, to a colonial policy of monopolist possession of the territory of the world, which has been completely divided up.
(…) We must give a definition of imperialism that will include the following five of its basic features:
(1) the concentration of production and capital has developed to such a high stage that it has created monopolies which play a decisive role in economic life; (2) the merging of bank capital with industrial capital, and the creation, on the basis of this “finance capital”, of a financial oligarchy; (3) the export of capital as distinguished from the export of commodities acquires exceptional importance; (4) the formation of international monopolist capitalist associations which share the world among themselves, and (5) the territorial division of the whole world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is completed. Imperialism is capitalism at that stage of development at which the dominance of monopolies and finance capital is established; in   which the export of capital has acquired pronounced importance; in which the division of the world among the international trusts has begun, in which the division of all territories of the globe among the biggest capitalist powers has been completed”
즉, 레닌이 제국주의를 단순히 “생산, 자본의 집중화,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결합, 자본의 수출, 국제적 독점 자본의 형성, 주요 자본주의 열강 사이의 지구 나누어먹기” 식으로 이해함. 기본적으로 맞는데, 빠진 부분은 근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Kautsky가 레닌에게 반론을 제기했듯이, 아직 “자본주의의 최후 단계”까지 가지 못하는 후진적 열강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도 이미 침략주의적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함  - 1910년, “한일합방” 그 당시의 일본도 마찬가지, 아직도 중공업마저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했음. 여기에서 침략의 엔진 – (사회의 모든 계급들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보유하는 근대 국가. 근대 국가가 먼저 성립되어 자본가 계급을 탄생시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후진 국가에서 (특히 1868년 이후의 일본), 대외 침략의 시작은 근대 국가 탄생의 시점과 같음 (일본 – 1873년 오키나와 병합, 1876년 강화 조약 강요). 근대 국가의 대외 침략 – 물론 자본가 계급을 위해주는 측면이 강하지만 그걸로만 설명되지 않음 (일본 산업 자본의 본격적인 한반도 투자 - 1920년대 후반기부터). 성공적인 침략 – 국가의 “정통성 확립”, 승리 의식을 통한 “민족 만들기” – 일본에서의 “민족/국민 만들기”에서의 청-일, 러-일 전쟁에서의 승리의 역할. 레닌 – 근대 관료국가의 자율적인 역할 과소 평가, 그리고 총체적으로는 민중에 대한 국가의 포획력, “민족주의적” 주술의 힘을 과소평가했음. 결국 – 본인이 1917년 이후에 만든 “혁명적인” 근대 국가가 일반적인 국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락하는 과정에서는 필요한 조치를 거의 취하지 못하고 혁명의 퇴락을 막지 못했음.

4) 레닌의 반군사주의 (anti-militarism) 특징 – 군인들의 “혁명화”에 중점을 둠 – 어떻게 해서 병영에서 혁명적인 선전, 선동을 할 수 있는가 (1907: “Anti-Militarist Propaganda and Young Socialist Workers’ Leagues”).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레닌은 어느 “추상적인 평화주의자”보다도 근대적 전쟁의 사회, 경제적인 배경을 철저하게 파헤치고 있었다. 레닌 – 군수 복합체 (아직은 그 용어는 없었지만 그 뜻임)가 정치에 깊이 개입하여 사실상 “돈벌이로서의 전쟁”을 주도하고 있다고 봤다: “Armaments are considered a national matter, a matter of patriotism; it is presumed that everyone maintains strict secrecy. But the shipyards, the ordnance, dynamite and small-arms factories are international enterprises, in which the capitalists of the various countries work together in duping and fleecing the public of the various countries, and   making ships and guns alike for Britain against Italy, and for Italy against Britain.
An ingenious capitalist set-up! Civilisation, law and order, culture, peace—and hundreds of millions of rubles being plundered by capitalist businessmen and swindlers in ship building, dynamite manufacture, etc.!
Britain is a member of the Triple Entente, which is hostile to the Triple Alliance. Italy is a member of the Triple Alliance. The well-known firm of Vickers (Britain) has branches in Italy. The shareholders and directors of this firm (through the venal press and through venal parliamentary “figures”, Conservative and Liberal alike) incite Britain against Italy, and vice versa. And profit is taken both from the workers of Britain and those of Italy; the people are fleeced in both countries.
Conservative and Liberal Cabinet Ministers and Members of Parliament are almost all shareholders in these firms. They work hand in glove. The son of the “great” Liberal Minister, Gladstone, is a director of the Armstrong concern. Rear-Admiral Bacon, the celebrated naval specialist and a high official at the Admiralty, has been appointed to a post at an ordnance works in Coventry at a salary of £7,000 (over 60,000 rubles). The salary of the British Prime Minister is £5,000 (about 45,000 rubles)” (“Armaments and Capitalism”, 1913).
미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에 대해서는 레닌은 “일본과의 태평양 지역을 둘러싼 전쟁의 준비 작전”, “상비군 증강을 위한 전략”, “민주적인 구호는 오로지 기만일뿐”이라고 매우 정확하게 꿰뚫었다: “On the question of America entering the war I shall say this. People argue that America is a democracy, America   has the White House. I say: slavery was abolished there half a century ago. The anti-slave war ended in 1865. Since then multimillionaires have mushroomed. They have the whole of America in their financial grip. They are making ready to subdue Mexico and will inevitably come to war with Japan over a carve-up of the Pacific. This war has been brewing for several decades. All literature speaks about it. America’s real aim in entering the war is to prepare for this future war with Japan. The American people do enjoy considerable freedom and it is difficult to conceive them standing for compulsory military service, for the setting up of an army pursuing any aims of conquest a struggle with Japan, for instance. The Americans have the example of Europe to show them what this leads to. The American capitalists have stepped into this war in order to have an excuse, behind a smoke-screen of lofty ideals championing the rights of small nations, for building up a strong standing army” (“War and Revolution”, May 1917)
전쟁에 대한 철저한 사회, 경제적인 분석이 가해지는 한편, 혁명적이지 않는 평화 운동을 역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관계”와 연결시켜 분석한다. 레닌에 의하면 “주류 평화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민주적인 평화 체계”는 기만일뿐, 자본주의가 남아 있으면 전쟁들이 불가피함. 그래서 전쟁 와중에서는 그가 “평화 진영”을 세 가지로 분류함:
“In the realistic politics of the capitalist countries, three kinds of peace sympathies can be seen:
(1) The more enlightened millionaires wish an early peace because they are afraid of revolutions. They have soberly and correctly described any “democratic” peace (without annexations, but with limited armaments, etc.) as Utopian under capitalism.
This philistine Utopia is being advocated by the opportunists, the adherents of Kautsky, and the like.
(2) The unenlightened masses of the people (the petty bourgeois, semi-proletarians, part of the workers, etc.) whose desire for peace is very vague, are thereby expressing a growing protest against the war and a growing but as yet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
(3) The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the enlightened advance guard of the proletariat, are attentively studying the sentiments of the masses, utilising the latter’s growing striving for peace, not in order to bolster the vulgar utopias of a “democratic” peace under capitalism, not in order to encourage hopes being placed in the philanthropists, he authorities, and the bourgeoisie., but to bring clarity into vague revolutionary sentiments, to enlighten the masses with a thousand facts of pre-war politics; basing that work on the experience of the masses and on their sentiments, they are out to prove systematically, steadfastly and unswervingly the need for mass revolutionary action against the bourgeoisie and the governments of their respective countries as the only road towards democracy and socialism” (1915, “Bourgeois Philanthropists and Revolutionary Social-Democracy”)
“주류 평화주의”의 유토피아적인 성격에 대한 레닌의 지적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  “폭력 혁명”을 지향하지 않는 반자본주의적인 평화 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레닌이 무관심했다. 그에게는 “영구적인 평화”로의 유일한 길은 “세계 전쟁을 계급간의 내전으로” 바꾸는 일이었음.  

레닌 – 제1차세계 대전의 참극을 목도하면서 새로운 “계급간의 내전”을 이미 이론적으로 구상한다. 그에게는 장기적인 내전이란 성공적인 혁명의 불가피한 결과다. 사회주의가 먼저 한 나라에서 승리할 경우, 이 나라는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의로운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레닌으로서는 “역사의 당연한 논리” – 대량적인 군사적 폭력의 지속을 통한 “해방의 역사의 전개”를 예상한다:
“Civil war is just as much a war as any other. He who accepts the class struggle cannot fail to accept civil wars, which in every class society are the natural, and under certain conditions inevitable, continuation, development and intensification of the class struggle. That has been confirmed by every great revolution. To repudiate   civil war, or to forget about it, is to fall into extreme opportunism and renounce the socialist revolution.
(…) The victory of socialism in one country does not at one stroke eliminate all wars in general. On the contrary, it presupposes wars. The development of capitalism proceeds extremely unevenly in different countries. It cannot be otherwise under commodity production. From this it follows irrefutably that socialism cannot achieve victory simultaneously in all countries. It will achieve victory first in one or several countries, while the others will for some time remain bourgeois or pre-bourgeois. This is bound to create not only friction, but a direct attempt on the part of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to crush the socialist state’s victorious proletariat. In such cases, a war on our part would be a legitimate and just war. It would be a war for socialism, for the liberation of other nations from the bourgeoisie. Engels was perfectly right when, in his letter to Kautsky of September 12, 1882, he clearly stated that it was possible for already victorious socialism to wage “defensive wars”. What he had in mind was defense of the victorious proletariat against the bourgeoisie of other countries.
Only after we have overthrown, finally vanquished and expropriated the bourgeoisie of the whole world, and not merely in one country, will wars become impossible. And from a scientific point of view it would be utterly wrong—and utterly unrevolutionary—for us to evade or gloss over the most important things: crushing the resistance of the bourgeoisie—the most difficult task, and one demanding the greatest amount of fighting, in the transition to socialism. The “social” parsons and opportunists are always ready to build dreams of future peaceful socialism. But the very thing that distinguishes them from revolutionary Social-Democrats is that they refuse to think about and reflect on the fierce class struggle and class wars needed to achieve that beautiful future”.  (1916, “The Military Programme of the Proletarian Revolution”). 즉,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격렬한 내전의 절대적인 필요성”을 이미 설파하는 것임.

집권 이후의 레닌 – 1917년12월20일 – 비밀경찰 (ChK) 창설, 1920년 – 중앙 및 지방 비밀경찰은 약 3만 명에 가까운 요원을 확보했음; 1918년5월에는 전국적인 징병제 부활 (그전에는 “노동자 민병대”들은 혁명의 기둥이었음) – 약 5만 명의 구 제정 러시아 군대의 장교들을 동원 내지 초빙하여 이 새로운 군대의 “기간병”으로 삼았음. 1924년까지는 공산당의 “정치 위원” (Komissar)은 장교를 감시해야 했지만 그 후에는 군대는 다시 한 번 “장교 권력 일원주의”로 귀결됐음. 졸병들의 80% - 농민 출신. 농민은 – “무산계급 독재 국가”에서 아예 법적으로까지 평등권을 누리지 못했음 – 도심지역에서 중앙 소비에트 대표 1사람을 2만5천 명이 뽑았지만 지방 (농촌 지대)에서는 12만5천 명이 뽑았음 – 법제화된 차별대우. 대신에 군복무를 마친 농민에 대해서는 국가는 각종의 혜택을 부여했음 (대학교 입학 우선권 등) – “準노동자” 신분 – 군 복무는 “입신출세의 디딤돌”로 인식되게 됐음 – 초기 소비에트 러시아 대다수 제도권 남성의 공통 경험. 사회의 군사화와 당의 군사화 - 1919년에 50만 명의 전체 공산당 당원 중에서는 약 절반은 군복무를 여러 형태로 하고 있었음. 군 복무 – 농민들을 위해 “입당 – 출세”의 첩경. 결국, 레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던 내전의 결과 – 철저하게 군사적으로 조직된 “총동원 사회”.

레닌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평가 – 한편으로는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에 대한 탁월한 급진적인 분석.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근대 자본주의의 모순의 극복 방안으로서 레닌이 제안한 것은 단순히 근대적 “총동원 전쟁”의 “혁명적” 연장에 불과했음 – 근대 자본주의적 수단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극복하겠다는 입장의 모순성. 레닌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만성”을 폭로한 것은 상당부분 타당하지만 그에게는 노동계급의 자율성에 대한 충분한 이해는 없었으며 “사회주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자각은 매우 희박했다. 결국 1917년10월 혁명 이후에 그와 그의 당이 사실상 중앙집권적인 전시 국가 자본주의적 체계를 확대, 심화시켜 부활시킨 것은 – 결코 우연이 아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Snowcat in Paris 파리의 스노우캣
권윤주 지음 / 안그라픽스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파리 여행을 위해서 살만한 책은 아니다. 30분이면 독파할 수 있는 책이며, 들어있는 내용은 파리의 카페문화 체험기 뿐.

이 또한 단편적인 인상을 그려놓은데 불과하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매지 2007-05-09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 여행을 목적으로 한다면 너무 가볍죠.
그냥 오며가며 간단히 읽기엔 편하더군요 ㅎ

기인 2007-05-09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 근데 돈은 넘 아까워요 ㅜㅠ

전호인 2007-05-0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리여행을 한 적이 있답니다. 좋은 정보가 될 듯 싶네요

기인 2007-05-10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 저도 갈 예정인데, 걱정이네요 ㅎㅎ

marine 2007-05-1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 쓴소리가 반갑군요^^
 

<드팀전님과 santa님의 글을 받았습니다 ^^>

오늘은 꽤나 우울해서, 우울모드 일때의 이런 설문에 대한 답임을 고려해주세요 ^^;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아니요. 서두에도 밝혔듯 우울합니다. 우울의 원인은 뭐랄까. 이론과 실천의 문제라 할까요 ^^;

독서 좋아하시는 지요?

독서도 독서 나름이겠지요 ^^; 제일 좋아하는 것은, 좋은 사람입니다. 독서보다는 좋은 사람이 좋지요.

그 이유를 물어 보아도 되겠지요?

짜증나는 책들도 많이 접해봤기 때문이고, 독서보다 '좋은 것' 또는 재미있는 것이 많기 때문입니다.

한 달에 책을 얼마나 읽나요?

10권 내외인 것 같습니다.

주로 읽는 책은 어떤 것인가요?

불만이지만, '읽어야 하는 책' 위주로 읽습니다. 전공이 국문학이다보니... 인문과학, 사회과학서적들을 문학작품보다 오히려 많이 읽는 것 같습니다. 주로 맑스주의 계열 쪽을 읽습니다.

당신은 책을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일순간이 고정되어 물질화 된 것.

당신은 독서를 한 마디로 무엇이라고 정의하나요?

소통하고자 하는 몸부림.

한국은 독서율이 상당히 낮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디와 비해서 낮은가요? 그럼 그 이유를 분석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통시적이나 공시적으로 말이에요. 예를 들어 그리스 로마나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독서율'이라는 게 높을 것입니다. 흠.. '10년전' 남한 보다도 높을 것 같은데요. 대중매체의 발전에 따라 낮아지기도 하겠지요. 이는 뭐, 일종의 '책의 확장'이라 할 수 있으니, '독서'의 정의를 물질화된 종이책이라고만 한다면, 이 종이책 말고도 다른 '책'들이 많이 생긴 것이 원인일 것 같습니다.

책을 하나만 추천 하시죠?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죠 ^^; (아 이 우울과 씨니컬함-_-; ) .

 

 

 

그 책을 추천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뭐; 이 책이 많이 팔리면, 제 살림살이가 조금이나마 나아지니까요;

만화책도 책이라고 여기시나요?

넵. 잡지'책'도 '책'이고 다 '책'이죠. 티비나 인터넷도 일종 책인것같습니다.

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문학을 더 많이 읽나요?

비문학을 더 많이 읽습니다. 권수로 따지면 문학이 더 많을 텐데, 시간으로 따지면 비문학이 더 '많이 읽'습니다.

판타지와 무협지는 "소비문학"이라는 장르로 분류됩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미는 차이로 인해 발생되겠지요. 판타지와 무협지를 '본격장르문학'이 아니라 '소비문학'으로 규정하는 것은, 다른 '순문학'에 대해 높은 가치 평가, 즉 '예술성/상업성'의 구획을 시도하는 것이라 봅니다. 그럼 굳이 '소비문학'이라는 생소한 정의가 필요할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예술문학/상품문학?

당신은 한 번이라도 책의 작가가 되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 '책'이라.. 문제집 한권, 문예지에 번역, 석사논문 ^^; 책을 쓰고 싶습니다.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떻던가요? 뭐.. 그닥 좋지많은 않습니다. 항상 더 열심히 할 껄.. 후회되니까요

좋아하는 작가가 있다면 누구입니까?

좋아하는 '작가'라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인데,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사람이라는 의미라면 꽤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책들의 저자로서의 작가라면요.. 글쎄요.. 고등학교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히라노 게이치로, 김동인을 좋아했습니다. 요즘 좋아하는 '작가'라고 한다면.. 글쎄요.. 완전 '요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학부때 박노자 선생을 좋아하는 '작가'로 생각했습니다. 또 그닥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김연수, 방현석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작가에게 한 말씀 하시죠?

박노자 선생님께. '실천적 지식인'을 넘어설 의향은 있으신지요? 저는 요즘 그게 고민입니다.

김연수 선생님께. 쓰고 읽고, 왜 하는 건지, 우문을 던져봐도 될지요?

방현석 선생님께. 연대와 소통. 궁극적 목표는 대화가능할까요?

 

우 이제 이 문답의 바톤을 넘기실 분들을 선택하세요. 5명 이상, 단 "아무나"는 안됩니다.

흠.. '바라님', '그늘사초님', 'kklpower님', '자명한 산책님', '나귀님' ㅎㅎ 아직 안 하신 것 같은 님들을 뽑았는데.. 이중 1~2분 하실 것 같네요 ^^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만두 2007-05-09 2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해에서 빨리 탈출하시와요.

Mephistopheles 2007-05-09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의 해피모드일때의 질의문답 또한 기대해봐도 될까요..^^

마늘빵 2007-05-09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시특강 많이 팔리길 바래요. ㅋㅋ

기인 2007-05-09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모두 감사합니다. ^^

antitheme 2007-05-09 2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울모드에서 빨리 벗어나시길...

프레이야 2007-05-10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시 특강! 무조건 강추합니다.
우울모드 잘 탈출하시기를...

기인 2007-05-10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ㅋ 뭐; 현대인의 질병인데요 ㅎㅎ

marine 2007-05-11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귀님이 저런 거 하면 참 좋을텐데... 아쉽네요

기인 2007-05-12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ㅋ
 
 전출처 : 로쟈 > 프랑스 대선과 한국 대선

다 아는 바이지만, 지난 6일 프랑스 대선에서 집권 우파의 사르코지 후보가 당선됐다. 반대로 사회당 후보이자 첫여성 대통령을 꿈꾸었던 루아얄 후보가 패배했다. 좌파 이론의 지주 역할을 해온 프랑스인지라 '현지'의 정치 지형과 선거 뒷얘기도 흥미를 끄는데, 이와 관련하여 레디앙에서 '프랑스통'이라고 할 우석훈 교수의 '관전평'을 옮겨놓는다(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6250).

레디앙(07. 05. 08) 우파의 승리가 아니라 '복수'

1.
프랑스 대선에서 사회당이 졌다. 정확히 말하면 루아얄 여사가 진 것인데, 어떻게 포장하든 좌파가 우파한테 졌다는 객관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회당을 지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래된 노조 간부출신이었던 뻬레고부아 총리가 권총자살한 이후로 사회당의 미셀 로까르니 하는 정치 엘리트들의 말장난이 싫기도 했지만, 동구의 몰락 이후로 몰락한 공산당에 간호부 출신의 노베르 위가 "코뮤날리즘(communalism. 공동체주의. 파리 코뮌을 상상해보자-편집자)은 인류에게 늘 필요한 것 아니냐"는 말을 들은 이후로 대체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그러나 막상 TV에서 토론하는 거 보면 공산당이든 아니면 녹색당이든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싹 가신다.

2.
루아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린다. 나는 루아얄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녀가 나름대로 선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정책이라는 눈으로만 보면 루아얄이 과연 좌파 후보인지 오락가락하기도 하는데,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보고도 놀란다고, 선거 내내 나는 노무현을 연상했다. 사실 남자와 여자라는 점과 전문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점들 - 이런게 중요한가? - 을 빼고 나면 두 사람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그들은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측으로 급회전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래도 정치인으로서의 루아얄은 나름대로 매력이 있다. 동거 가정 1세대로서 그녀의 사회적 진출 등 여러가지로 생각해볼 점이 많다.



그녀는 1차 결선투표도 사실 간당간당했고, 막판에 차이가 더 벌어졌지만, 대체적으로 출발시점에 비하면 선방한 셈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선방이 사회당의 과실은 아니다. 프랑스 신문들은, 나머지 좌파들이 표를 몰아줬음에도 불구하고, 선거에 진 사회당이 정치적 타격이 크게 받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장 총선이 문제라는 지적도 많다.

3.
사르코지의 승리는 여러 가지로 의미가 많다. 우파라고 다 같은 우파는 아닌데, 지스카르 데스탱 이후로 거의 30년만의 우파의 승리라는 말은 우리 입장에서 이해하기가 조금 복잡하다. 이 얘기는 45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드골이 집권하면서 자신은 좌파와 우파를 초월한다고 말을 했는데, 이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독특한 의미가 있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드골은 제 3세계 동맹국에 대한 강력한 지원을 하면서 서방세계 내에서 독립노선을 걸었고, 이런 일련의 입장을 드골주의라고 한다. 공화국연합(RPR)의 지금 시락 대통령이 이런 드골주의를 계승한다. 시락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성공한 드골주의자이다.

사르코지는 대중운동연합(UMP)라는 정당을 이끈다. 이게 진짜 프랑스의 우파 정당이다. 그냥 생각하면 시락이 자신의 후계자로 사르코지를 지명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둘 사이는 정적 관계이다. 노선도 다르고, 가는 길도 다르다. 우파도 연정하지 않으면 집권할 수 없는 이런 구도에서 시락이 밀렸고, 사르코지는 그야말로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고 자기 힘으로 대선 후보에 오른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그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것이고, <르몽드>지의 편집진은 이것을 "우파의 복수"라고 부른다. 단순히 우파들이 좌파를 이긴 그런 의미만이 아니라 드골주의자들에게서 30년만에 권력을 찾아왔다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첫 번째 한 얘기 중의 하나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라는 것이다. 미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드골주의와의 결별이 사르코지의 당선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의미이다.

4.
미테랑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는 매력있는 사람이다. 가장 정확한 불어를 구사하고, 몇 분에 한 번 정도만 문법 실수가 나온다고 문법학자들의 연구 대상에 오르기도 했을 정도로 프랑스를 상징했던 정치인 중의 한 명이다. 그 이후로 좌파가 대선에서 이긴 적은 없다. 프랑스에서는 언제나 좌파가 절대수치에서 부족하다. 우파와 시락주의자가 분열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미테랑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로 절대로 우파는 분열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프랑스에서 좌파 대통령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는 조금 다르다. 지방정치가 우리나라처럼 지역색으로 호화찬란하게 도배된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연정이라는 것이 있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사회당이 카드를 내어주면서 다른 정당과 손을 잡을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식 여당에 해당하는 총리 자리는 대통령 집권에 실패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여지가 좀 열려 있다. 내 관찰에 의하면 프랑스는 대통령직보다도 총리가 누구인가가 진짜로 국정운영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5.
사르코지는 우파이면서 대표적인 강성이다. 이로 인해서 가장 타격을 받게 될 정치집단은 오히려 극우파들일 수 있다. 영역과 정책이 겹치기 때문이다. '68년의 종언'이라고 호기있게 사르코지가 치고 나가기는 했는데, 어떻게 될지는 총선까지 지켜봐야 알 수 있다. 하여간 현재로서는 독기가 단단히 올랐다.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도입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리 강화 등 대체적으로 극우파 정책들이 도입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미테랑은 물론이고 시락도 극우파는 아주 싫어했다. 미테랑 시절에 우파들이 총리를 먹고 파스쿠아라는 아주 강성 정치인이 내무부장관을 했던 적이 있었다. 무섭던 시절이었는데, 이젠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니 사방에서 곡소리가 날 것은 당연하다. 그래도 마냥 한 방향으로 가지만은 않을 것이다. 여러가지 견제장치들이 작동하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프랑스는 그 처절한 '민중'이라는 실체가 눈을 뜨고 버젓이 살아있다. 50%의 투표율을 기록할 수 없어서 투표에서는 지지만, 그래도 몸으로 정책을 막는 일 정도는 아직 할 정도의 정신과 기백은 남아있는 듯하다.

6.
프랑스 대선을 보다가 우리나라 정치판을 보면 심란하다. 프랑스에서는 우파가 대통령이 되고 좌파가 졌다고 대서특필하던 언론들이 갑자기 우리나라 얘기만 하면 진보와 보수라는 또 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이거 우습다. 프랑스식으로 살펴보면, 한나라당의 일부는 극우파에 가깝고, 그 안에 시락주의자들이나 일부 분파들이 열린우리당에 가깝다. 순전히 우파들끼리 나와서 서로 보수니 진보니 하는 것이 우리나라 모습이라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이미 권력에 깊이 물든 프랑스 사회당이 좌파 정당으로서는 민주노동당보다 더 선명할 정도이다. 좌우 대립의 구도로 간다면 민주노동당의 왼쪽에 또 다른 정당들이 '나래비'를 서 있는 게 당연한 것 같은데, 우리나라는 좀 다르다. 내 생각으로는 진보/보수라는 말장난하다가 이렇게 된 것 같기는 하다. 지금이라도 좌파들이 자신을 좌파라고 부를 수 있는... 이게 무슨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도 아니고, 때로 우습고 때로 서글프다.

7.
패배를 자꾸 경험하거나 자꾸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먼 나라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당장 사르코지를 히틀러나 무솔리니에 비교하거나 혹은 사르코지옹이라고 나폴레옹이라는 이름을 걸면서 깃발 들고 나선 프랑스의 젊은이들을 보면 가슴이 안쓰럽다.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당장 우리나라의 민주노동당을 보면 한숨이 푹푹 난다. 솔직히 민주노동당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국민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장 나부터 그렇다. 그래도 나름대로 선방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셈인데, 그야말로 마음이 안 좋기는 정말 안 좋다.

8.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들은 너무 모범생 같아 보인다. 한 쪽에서는 사생결단을 내리고, 수틀리면 "당 뽀갠다"고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경선'을 다짐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모범생 같아 보인다. 그렇다고 나라고 무슨 뾰족한 답이 있을 리 없으니 지켜보는 심정이 답답할 따름이다. 다당제가 제대로 정착해서 연정과 같은 고급스러운 메카니즘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좌파라면 경기들어서 손을 파르라니 떨 사람들이 당장 내 어머니, 내 아버지인데, 좌파의 깃발을 높이 들라는 되지도 않는 소리를 또 하고 있는 것도 우습다.

대선 시뮬레이션에서 한 번도 사르코지를 이기지 못했던 루아얄을 지켜보던 많은 프랑스 좌파들이 심정이 이와 비슷했을 것 같다. "뭐 좀 쌈박한 거 없어?" 그런데 그게 정책의 눈으로 보면 말처럼 쉽지가 않다. 정책에는 기술적인 검토와 대중적 지지라는 두 가지 요소가 동시에 필요한데, 이게 거의 마케팅에 버금가는 예술의 영역이라서 골방에서 죽어라고 계산해봐야 '변방의 북소리'에 불과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9.
그래도 아직은 시간이 많다. 이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면 좋겠다. 민주노동당이 대한민국 대선에서 승리한다... 국제적인 세계화의 흐름이 멈칫하고, 전세계적인 지형도가 바뀔 일이다. 이보다 더 확실하게 '다다익선 FTA'를 멈춰 세우고, 민중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일이 더 있겠는가?

꿈도 머리가 아파서 잘 못꿔진다. 우리나라의 좌파가 지금 그렇다. 현재로서는 민주노동당 외에는 대안이 없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당장 내 주위의 동료들만 보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뭔가 엑기스 하나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대선주자들이 모범생 같이 움직여서는 그런 엑기스가 생겨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프랑스는 프랑스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다. 현실로 돌아오면 더 머리가 아프다.

"좌파가 돼도 나라 안 망한다"고 지금부터 편지를 쓰라고 하면, 나도 한 50통 정도는 못 쓰는 글씨지만 쓸 생각이 있다. 뭐든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는데, 사실은 그래도 민주노동당이 대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누가 뭘 좀 제시해주면 좋겠다. 연말에 소주 마시면서 "우리나라는 안 된다"는 소리나 하고 있기 보다는 팔 아픈 정도는 감수할 생각이 있다.

하여간 루아얄에게는 사람들이 바라던 "뭔가"가 마지막 TV 토론 때까지도 결국 안 나왔다.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들에게는 "뭐"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뭣들"이 필요할 것이다. 이래서 말도 안되는 대 역전드라마가 종종 나오는 야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우석훈 / 성공회대 외래교수)

07. 05. 09.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짱꿀라 2007-05-09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도 언능 독서문답 써주소서. santa가 목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