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이번에 참 큰 결심-_-;을 나름했습니다.

지금까지 뭔가 '읽어야 하는 것'들에 매진해서 빡빡한 삶을 살아왔다고 한다면,

이제 '읽고 싶은 것'을 쫌 읽어야 하겠다고, '공부하고 싶은 것'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래서 하던 세미나도 하나 쉬고(물론 대신 세개가 늘었지만 -_-;;; 영어, 일어, 그리고 국제정치학.... ㅡ.,ㅡ; )

본격적으로 제가 관심을 갖고 있는 '주체' 쪽을 디벼보려고 합니다.

 

항상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세미나를 하는 등 했는데, 그런짓(?) 쫌 그만하고, 그냥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디벼보려고 합니다.

맨땅에 헤딩해 본지가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요. 
 

우선 좋은 길잡이가 될만한 책으로는
 

윤호녕 외, <주체 개념 비판>, 서울대출판부, 1999 (데리다, 라캉, 알튀세, 푸코)

어느 정도는 친숙한 4사상가이지만, 이것을 '주체'로 풀어낸 부분이 역시 흥미롭네요.

 

지젝, <까다로운 주체>, 이성민, b, 2005.

한국에서 '빵'처럼 팔려나가는 지젝...

 

이외에 '주체'관련 읽어볼 만한 책 추천해주세요 ^^ 우선은 이 둘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음.. 제 관심사는, '주체'란 무엇일까.. 입니다.. 애매모호한데, 이 개념 자체가 성립가능할까라는 의문.

이는 정치, 도덕 등과 관련해서도 의문이고, 계몽, 소통 등과도 관련해서 의문입니다.

 

이를 어떻게든 뚫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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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d 2007-07-07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푸코는 『성의 역사(Histoire de la sexualité)』 1권과 2권 사이에서 일종의 '전회'라 이름할 노선 수정을 하고 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주체 문제로의 전회', '미학적[이라 이름할 수 있는] 자기-관리의 윤리학으로의 전회' 혹은 '자기의 테크놀로지 문제로의 전회' 등으로 불리는 논의를 구성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수정된 국역본도 나와 있는 『성의 역사』 2, 3권 외에도, 푸코의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의 하나인 『주체의 해석학(L'herméneutique du sujet)』의 일독을 권하는 바인데, 이 책을 통해 이러한 '전회'의 주제와 관련된 푸코의 보다 생생한 논의를 만날 수 있다 (이 역시 얼마 전에 번역된 것으로 알고 있다)>> (길가던 자가 우연히 양쪽 서재를 연차적으로 보다가...)
http://blog.aladdin.co.kr/sinthome/1384762

기인 2007-07-07 0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고맙습니당~~
근데 번역이 어떤지 잘 모르겠네요. 아무 리뷰도 없어서 ^^; 전공자가 하셨으니까 믿고 그것도 읽어볼께요 ㅎ 안 그래도 최근에 이정우 선생님 푸코 관련 글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고요. '주체화'라는 것.. ㅎ

바라 2007-07-11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주제의 경우 강영안 교수의 '주체는 죽었는가', 김상봉 교수의 '서로 주체성의 이념', '자기의식과 존재사유' 정도가 생각나네요. 데카르트부터 시작해서 칸트, 헤겔의 독일관념론로 이어지는 근대철학사에서의 주체 개념을 보기에는 위의 책들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네요. 위의 두 책들은 또 현대프랑스철학을 많이 참조하는 책들이니까 벵상 데콩브의 '동일자와 타자'나 김형효 교수의 '구조주의의 사유 체계와 사상' 같은 입문서를 추가로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물론 '까다로운 주체'에 나오는 발리바르, 랑시에르, 바디우, 버틀러 같은 비교적 최근의(?) 사람들은 나오지 않지만요;; 이미 읽어보신 책들도 있을 거 같지만 제목을 '문의'라고 다셨길래 주제넘은 참견을 해봅니다 쿨럭;; 아 또 하나 얼마전에 구해보고 싶었지만 도서관에서는 열람만 가능해서 실패한 Who comes after the subject? / edited by Eduardo Cadava, Peter Connor, Jean-Luc Nancy, New York : Routledge, 1991도 좋을 것 같네요. 저자들이 정말 쟁쟁하네요. 다음은 목차입니다.
Another experience of the question, or experiencing the question other-wise / Sylviane Agacinski -- On a finally objectless subject / Alain Badiou -- Citizen subject / Etienne Balibar -- Who? / Maurice Blanchot -- The Freudian subject, from politics to ethics / Mikkel Borch-Jacobsen -- Voice of conscience and call of being / Jean-François Courtine -- A philosophical concept ... / Giles Deleuze -- "Eating well," or the calculation of the subject : an interview with Jacques Derrida / Jacques Derrida -- Apropos of the "Critique of the subject" and of the critique of this critique / Vincent Descombes -- Being and the living / Didier Franck -- Who comes after the subject? / Gérard Granel -- The critique of the subject / Michel Henry. Love between us / Luce Irigaray -- Descartes entrapped / Sarah Kofman -- The response of Ulysses / Philippe Lacoue-Labarthe -- Philosophy and awakening / Emmanuel Levinas -- Sensus communis : the subject in statu nascendi / Jean-François Lyotard -- L'interloqué / Jean-Luc Marion -- After what / Jacques Ranci'ere.

기인 2007-07-14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옷 감사합니다. :) 계획 세우는데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아요 ㅎㅎ
우선은 쫌 쉬고요 ^^
 
이름 없는 독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추리소설을 안 읽은지 10년은 넘은 것 같다. 미야베 미유키에 대해 하도 좋은 평들이 많아서 집어들었는데, 정말 꽤 괜찮다.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는데, '미스테리'라는 장르에 포함될 것 같기는 하다.

주된 서사는 범죄와 관련된 것이기는 하지만, 결국 작가가 파고드는 이야기는 인간 안에 있는 '독'의 문제이다. 이것을 토양오염, 새집증후군 등과 맞물려서 잘 그려내고 있다.

혼외정사로 태어난 재벌집 딸과 결혼. 가정 내에 문제도 없고, 돈도 많고, 회사 경영권에도 참여하지 않는 조건, 무조건적으로 딸을 사랑하는 재벌 회장 등..

이처럼 일상적인 고뇌를 배제시키는 장치 덕분에, 초점화자인 스기무라의 '착한' 시선이 투명하게 그려진다. 그가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는 것. 사회 구조적 차원에서의 노력이 아니라, 자기가 있는 곳에서 '억울한' 사람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는 면모.

착하다. 어쩌면 착하기만 한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나마 착하기라도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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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7-03 1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유키도 보시네요.^^

전호인 2007-07-0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산을 둘러싼 알력다툼이 주요 내용 같은 데 맞나요?

기인 2007-07-04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넵 ^^ ㅎㅎ 주위 사람들이 괜찮다고 해서 봤는데, 진짜 꽤 괜찮네요 ^^
전호인님/ ㅋ 아닌데요 ^^; 한번 보세요. 정말 괜찮아요~ 제가 그냥 메모만 해서 내용도 잘 요약 안 됬는데, 기존 '추리소설'이라는 관념을 깨서 좋았어요 ㅎ

heine 2007-07-0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방범> 다 읽고 이 책 보려고 했는데, 일단 미뤄 두고 있음. <모방범>도 훌륭해! 강츄. 참 나 <판타스틱> 7월호 샀어!

기인 2007-07-0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샀어요 ㅎㅎ 저는 <이유> 읽고 있는 중 ^^
 
군주론 - 개역판 까치글방 86
니콜로 마키아벨리, 강정인 외 옮김 / 까치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1 들어가며 -마키아벨리와 저작

모든 저작이 그렇지만, 특히 이 저작은 이 글이 쓰여진 배경에 대한 주의가 요청된다.  마키아벨리가 공직생활에서 추방된 후 칩거해서 저술. 당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됨. 필사본으로 읽혀지다가 마키아벨리 사후 출간되었고, 교황처에서 금서로 됨.

이러한 상황 속에서 헌정사의 마지막 부분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위대하신 전하께서 그 높은 곳에서 어쩌다 여기 이 낮은 곳에 눈을 돌리시면, 제가 엄청나고 잔혹한 불운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부당한 학대를 겪고 있는가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10)


전체 글이나 헌정사의 맥락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 표나는 일탈. 헌정사의 마지막이었기 때문일까, 마키아벨리는 어떤 면모를 드러낸다. 섣부르게, ‘진심’이나 ‘가면’과 같은 어휘로 재단하지 말자.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책의 체제 검토 후에 들어나게 될지도 모른다.

 

1.2 이 책의 의의

일반적으로 이 책의 의의는 ‘정치가 종교적 규율이나 전통적인 윤리적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야 함’을 역설하여 근대 현실주의 정치사상을 최초 주장하였다는 데에 있다.

무엇을 ‘최초’로 하였기 때문에, 이 책이 고전이 되었고, 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소리는 쓸데없다. 적어도 나의 관심은 구체적인 곳에 있을 것이다. 한 권의 저작이지만, 그 저작이 드러내는 마키아벨리라는 인간, 그 마키아벨리라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 이를 매개하는 ‘사상’, 즉 책. 책은, 적어도 저자와 독자에게만은, 자아와 세계를 매개한다. 자아의 세계화, 세계의 자아화. 글쓰기...

또 이 책을 읽는 목적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기원을 따라감으로서, 그 기원 자체를 폭로하여 근본적으로 사유해보는데 있을 것이다. 고전을 읽는다는 것의 의미.

 

2. 마키아벨리, 또는 주체없는 주체성.

앞서 ‘근대 현실주의 정치사상 최초 주장’했다는 데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이 글에서 마키아벨리는 정치의 ‘주체’는 ‘군주’를 매개로 한 국가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근대’ ‘현실주의’ ‘정치사상’이라는 세가지 키워드로 집약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근대/주체’라는 것은 이 주체의 행위에 따라서, 즉 군주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부국강병’ 할 수 있다는 것1)을 의미한다. 마지막 부분에서 마키아벨리가 강조하듯이 ‘운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수도 있지만, 인간이 해야될 것을 해야하고 이로 ‘운명’을 방비할 수 있다는 생각, 즉 ‘주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군주가 전적으로 새로운 공국을 다스리는데 부딪히는 어려움은 그가 가진 능력에 의해 좌우된다. (39)

나는 본래 세상일이란 운명과 신에 의해서 다스려지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은 이를 통제할 수 없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해왔고, 여전히 그렇게 생각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그들은 그것에 대해서 인간은 어떠한 해결책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사에 땀을 흘리며 애써 노력해보았자 소용없으며, 운명이 지배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 않기 위해서 나는 운명이란 우리 활동의 반만 주재할 뿐이며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의 통제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에 이끌린다. (170~171)


이런 조심스러운 표현. 비록 번역문에 의지하기는 했지만, 이 표현에 마키아벨리는 매우 민감하다. 그 외 ‘현실주의’ ‘정치사상’이라는 키워드로 마키아벨리가 설명되는 이유는 굳이 설명할 필요 없다.

그러면 이제, 이 저작은 그러면 이 ‘주체’ 즉 군주가 대결해야 하는 환경의 요소가 무엇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이는 것이 목표가 된다. 우선은 ‘군주’의 종류가 있고, 4장에서 군주-가신, 군주-제후의 관계, 5장 군주에게 지배당했었나 자유로운 공화국이었나 등등의 여로 ‘환경’적 요소에 따른 주체의 대결방안에 대해서 서술한다. 이는 분명 ‘현실’을 단순화, 추상화한 것이지만, 이는 ‘이론화’의 필수적인 결과이다. 군주에게 필요한 매뉴얼은 필히 이론이다.


어떻게 군주국을 통치하고 유지할 수 있는가 -12p

특히 “새로 형성된 군주국” 14p


이렇게 1부(11장까지)는 상이한 종류의 군주국의 번역과 쇠퇴의 이유에 대해서 서술한다. 군주국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 등을 보여준다. 그리고 2부(12장부터)에서는 군주국을 공격하거나 방어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방법을 서술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마키아벨리는 전쟁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전제 한 후에 군주의 ‘직업’은 전쟁이라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전쟁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당신에게 불리하게 지연되는 것 (28p)

군주는 전쟁, 전술 및 훈련을 제외하고는 그 밖의 다른 어떤 일이든 목표로 삼거나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또 몰두해서도 안된다. 전쟁은 군주의 직업이다. (102p)


이러한 사상은 두 가지 방향에서 접근가능하다. 우선 첫째로, 당대의 역사는 ‘정말로’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는 것. 그런데, 이 ‘역사’가 ‘정말로’ 전쟁을 피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라는 것은, 마키아벨리의 앞서의 전제 ‘주체’의 결정가능성과는 어느정도 위배된다. 그렇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마키아벨리의 ‘주체’관에 있어서 세계는 전쟁을 피할 수 없기도 한다. 여기에 모순이 있다.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우선 ‘주체’ 즉 ‘군주’라는 것이 하나가 아니라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당대 이탈리아만 살펴보더라도 많은 공국들로 갈려져 여러 ‘주체’들이 서로의 이기심으로 충돌하고 있었고, 자신을 ‘주체’로 생각하고 있었다. 앞서 보았듯이, ‘주체’는 자신 이외를 자신에 대해서 ‘환경’으로 정립한다. 그러할 때 해결책은, 힘 뿐이다. 내가 환경이 되느냐, 주체가 되느냐의 문제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이다.

나도 주체이고 상대도 주체일 수 있다는 것은, 바꿔말하면 나도 주체가 아니고 상대도 주체가 아닐 수 있다는 지점. 또는 나도 상대도, 주체이기도 하고 주체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율을 전적으로 반하는 명제. 우리는 여기서 ‘주체없는 주체성’으로, 상황에 따라서 분출되는 ‘주체성’의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마키아벨리에게는 이러한 개념이 없었다. 앞서 다시금 그의 ‘주체’에 대한 조심스러운 대목을 살펴보자.


나는 운명이란 우리 활동의 반만 주재할 뿐이며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의 통제에 맡겨져 있다는 생각에 이끌린다. (171)


‘이끌린다’라는 것, 흥미롭게도 이는 ‘주체’ 홀로, 또는 ‘환경’ 홀로의 문제라기 보다는, ‘주체’와 ‘환경’ 사이의 짜임의 영역이다. 그리고 앞서 헌정사의 말미에 마키아벨리가 드러냈던 자신의 참담한 처지에 대한 고백과, 이를 알아달라고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받치는 헌정사를 보자. 주체로서의 마키아벨리는 책을 쓰지만, 또다른 ‘주체’인 로렌초 데 메디치와 만나는 접점에서, 마키아벨리는 단지 자신을 다른 주체에 대해 또다른 ‘주체’로서 요청을 할 수 밖에 없다. 두 주체 간의 ‘짜임’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 그 미묘함이. 그 ‘이끌림’이 있다.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우리는 스스로를 ‘주체’라고 ‘주체적’으로 살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우리가 ‘주인’인 삶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주체’라는 것의 함정은, 내가 ‘주체’이면 나머지는 모두 내 앞에서 ‘비주체’로 적립되기 때문이다. 내가 ‘주체’이면서 동시에, 나 아닌 것도 ‘주체’일 수 있는 삶, 또는 그런 삶의 자세. 스스로에 대해 책임을 지면서도, 상대를 받아들일 수 있는, 내 안의 타자를 인식하면서도, 상대방의 타자도 알아볼 수 있는 것. 그것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 우리는 이를 마키아벨리를 본받아서 서로에게 ‘이끌림’이라고, ‘사랑’이라고 생각해본다.


3. 맹자와 마키아벨리...
이러한 ‘이끌림’ ‘사랑’을 맹자와 함께 생각해보자.


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찾아보시니,

양혜왕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맹자 `왕께서는 하필 이만을 말씀하십니까? 역시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인은 마음의 덕이요, 사랑의 이치(이치)며, 의는 마음의 지음(제)이요, 일의 마땅함(의)이다. 이 두 귀절은 이 장의 큰 뜻이니, 다음 글에 자세히 말하였는데, 뒤에는 이것을 많이 모방하였다.

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이롭게 할까 하시면,

대부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까 하며,

선비와 서인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 이익만을 취하면 나라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만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이요,

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이니,

만에서 천을 취하고, 천에서 백을 취하는 것은 적은 것이 아니지마는 진실로 의를 뒤로 하고 이를 앞세우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 맹자를 보자. 그에게는 나도 주체요 너도 주체이다. 왕이 이롭게 하고자 하면, 대부도 이롭게 하고자하고 선비와 서인들도 이롭고자 한다. 마키아벨리에게도 모두가 주체이지만, ‘정치’의 영역에서는 군주만이 주체이고, 그리고 군주만이 주체라는 것을 다른 이들은 모르게 ‘위장’해야만 한다고 결론이 난다.

‘정치’란 무엇일까. 현실사회에서 여러 이익집단들 간의 갈등을 조정해고 희소재화를 분배하는 것. 그렇지만 미시적인 인간과 인간의 관계맺음 또한 우리는 ‘정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럴때, 이 정치에서 서로를 주체로 인정한다는 것, 타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서로 ‘이끌림’. 오직 ‘인’과 ‘의’다, 라는 맹자의 말이 와 닿는다.


4. 결론과 소회

‘근대 현실주의 정치사상’의 비조인 마키아벨리를 통해서, 그 균열지점을 통해서 오히려 ‘주체’의 불가능성, 내지는 ‘주체’를 어떻게 사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현실주의 정치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도 주체고 너도 주체라는 것은 아닐 터이다. 나도 주체고 너도 주체이든 상관없이, ‘우선’은 ‘내’가 주체이고 ‘너’안의 ‘비주체’적인 부분을 자극하고 이끌어내어 ‘이득’을 얻어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결국 이것은 총을 들던 들지 않던, 전쟁이다. 마키아벨리가 전쟁은 어짜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은 이를 의미한다. 나도 주체이고 너도 주체일 때, 중요한 것은 힘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고 현실은 전쟁이다. 우리는 이를 ‘현실주의’라고 부른다.

이의 변혁가능성을 사유하는 것. 일상의 미시적인 공간에서부터, ‘다르게’ 생활하는 것. 궁극적으로는 거시-미시적으로 ‘현실’을 변혁하는 것. 행복을 사유하기. 사랑하기.

* 이러한 책읽기는, 내 현재 관심사를 반영한다. 계속 내가 가지고 있는 계몽-소통-주체의 문제와 더불어, 요즘은 내 일상적 관계맺음에서도 이러한 ‘계몽’적 태도를 내가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어떠한 일을 계기로 깨닫게 되었다. 타자를 다른 ‘주체’로 인정하기보다는 다른 사람 또한 ‘나’의 일부로 환원하였던 것. 내가 인간관계에 별 관심이 없고, 타인에 대해 알 시간에 책을 한 권 더 읽자고 생각하고 또 생활한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연대와 소통.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론으로 끝난다면, 이론은 유희일 뿐.

계몽을 넘어서, 소통으로....




1) 흥미로운 것은 마키아벨리와 맹자와의 비교이다. ꡔ맹자ꡕ에서 맹자는 양혜왕이 ‘리’ 즉 ‘부국강병’을 묻자, 왜 하필 ‘리’인가를 물으며, ‘인’과 ‘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벨리와 정면 배치된다고도 할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3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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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06-28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리뷰내요,..대학1학년때 읽었는데 완전히 세속적인 방식으로 즉 통치테크닉으로만 읽혔습니다.안그래도 이런 주체형성의 문제와 관련된 몇 개의 글을 읽고 다시 읽어야겠다란 마음이 들었는데..제게 시의적절한 리뷰네요.^^ 사족으로 붙이신 말도 중요한 지점이네요.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책은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라 2007-06-28 15: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이런 우연이.. 저도 요새 막 군주론이랑 마키아벨리의 가면 읽었었는데요 기인님 리뷰를 통해 보니 또 반갑네요^^ 둘 다 너무 천재 스타일이라 감탄과 함께 좌절을 팍팍 안겨주던... 알튀세르가 마키아벨리에게서 (억압적, 이데올로기적)국가장치의 이론, 인민의 편을 드는 계급투쟁의 이론을 발견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던데요. 워낙 미묘하고 섬세한 글이라 제대로 이해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기인님은 이미 읽으셨을 것 같기도 한데 나중에 같이 얘기들려주시면 좋겠네요~ 위에 쓰신 주체없는 주체성이란 말씀에 곰곰히 새겨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기인 2007-06-29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넹 ㅎㅎ 감사합니다. 그람시, 알튀세르의 마키아벨리 관해서도 정리해보고 싶은데..
항상 그렇듯이 일상에 쫓겨서 사느라... ㅜㅠ
쩝;; 이거 어떻게 쫌 해야 될텐데;;;
 

20대 절반, ‘6·25 터진 해’ 몰라





 
本紙·한국갤럽 조사… 30代는 37%가 몰라

20대의 절반 이상(53.2%)은 6·25전쟁이 몇 년도에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6·25전쟁 57주년을 맞아 전국 성인 100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전후(戰後)세대(20~40대)에게 ‘6·25전쟁이 언제 발발했는지 알고 있는가’란 질문을 던진 결과, ‘1950년’이란 정확한 응답은 61.8%였고 38.2%는 ‘모른다’고 대답했거나 연도를 잘못 답했다.

‘6·25전쟁의 성격’을 묻는 질문에는 ‘북한의 불법 남침’이라는 대답이 52.3%로 가장 많았다. 이는 2002년 갤럽조사(31.2%)보다 무려 21.2%포인트 높아진 수치다. 특히 대학생들의 경우 2002년 조사에서는 17.7%가 6·25를 북한의 남침이라고 대답했으나 이번 조사에서는 41.7%로 2배 이상 상승했다.

북한의 전쟁 도발 가능성에 대한 질문에 2002년에는 ‘있다’는 응답이 32.8%에 그쳤으나 이번 조사에서 51.2%로 높아졌고, ‘없다’는 응답은 2002년 57.9%에서 이번에 45%로 줄어들어 한반도 내 전쟁 발발 위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만약 외국에 있을 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귀국하겠는가’란 질문에는 ‘귀국하겠다’(48.7%)와 ‘귀국하지 않겠다’(45%)는 응답률이 비슷했다. 노무현 대통령의 대(對)북한 정책에 대해선 ‘잘해왔다’(17.8%)에 비해 ‘잘해오지 못했다’(54.7%)가 훨씬 높았고 ‘보통이다’ 18.7%, ‘모름·무응답’ 8.8% 등이었다.

지난 23일 전화로 실시한 이 조사의 최대허용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다.





[최원석 기자 yuwhan29@chosun.com]




[홍영림 기자 ylhong@chosun.com]
 
 
 
* 한국전쟁이 아니라 '6.25'라는 것 자체가 그 급작스러움 등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근데 정말 역사에 대해 무지하게 만듬, 또는 역사에 무지해진다는 것은, 위험한 일 같아요..
우리 학문하는 목적 중 하나는 결국, '역사'를 재구하고 그 기억을 유통시키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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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07-06-25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곧 회갑을 맞을 나이가 되어 가는군요, 우리 세대까지만 알지 않을 까 해요.

파란여우 2007-06-25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지가 부끄러운것이 아니라 무지에 안주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지요.
위험함은 무지를 무지로 인식하지 못한다는데서 비롯되는 듯.^^

기인 2007-06-25 1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호인님/ 네.. 왜 역사가 중요한지, 친구들과 소통해야 할텐데요...
파란여우님/ 넵 :)
 

 

 

 

 

대중문화 읽기란 무엇일까, 왜 읽는 것일까를 다시금 고민해 봅니다. 대중문화 스터디 시작 전 그리고 시작 직후에는 알량한 이론에 기대고, 비대한 자의식으로 평가하고 재단하고 비판하는 것이, '비평가'로서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읽기'가 과연 소통될 수 있는 것일까라는 고민은 뒷전이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단지 자기만족이었을 뿐이 아닌가라고 반성합니다...

비평으로 재단하고, 폭로하고, 까발림으로서, 자신이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런 자기만족. 그리고 이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고, 나는 대중문화에 '심취'하여 '생각없는' '타자'들과는 다르다는 우위...

그렇다면, 다시 '계몽'이라는 구도로 넘어가게 되겠지요.. 그리고 결국 이 '계몽'이라는 것은 힘싸움일 것입니다. 그것이 '논리'로 밀어붙이는 것이든, 자신의 상징자본 등으로 은근히 분위기 조성하고 압박하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해야지, 지식인이지, 생각있는 사람이지..' 등으로요. 계몽이 제국주의와 같이 갔던 것은 역사적 우연성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필연적인 사상적 형태로 계몽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관객들이 좋아한 영화를, 왜 좋아하는 지, 이해하고 공감해보도록 하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더 '나은' 것을 발견하는 것, 또는 다른 사람들도 느끼고 있지만 '언어화'하지 못한 것들을 언어화 하는 것. 이를 통해 이 '나은 것'으로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것... 

이 또한 '계몽'이라 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 단어를 쓰기보다는, 관심과 이해, 그리고 소통 등의 말로 바꾸어 보고 싶습니다. 주의깊게 하는 말을 듣고, 그 속의 '미'를 찾아내는 일..

비평의 자리가, 이성의 자리가 점점 위태로운 시기, 이러한 소통에의 노력으로서의 비평이, 또 다른 소통의 매개인 예술을 보다 풍부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좌파'라는 정체성이, '소통할 수 없음', '오만함' 등으로 사람들에게 떠올려지는 이유를, 다시금 곱씹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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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22 08: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07-06-2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를 향해 하는 얘기는 분명 아닐텐데 (제 서재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으니!),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그동안 비슷한 행태로 죄지으며 살아온 사람에게 일침을 놓는 좋은 얘기군요. 계몽이면 마냥 좋게만 생각했더니 "제국주의의 필연적인 사상적 형태"라! 늘 주의하며 되세겨볼만한 말이군요.

기인 2007-06-2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 계몽을 완전히 포기할 수도 없겠지만, 계몽의 어두운 면들을, 그 상처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