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몸 다이어트 설명서 - 완벽한 몸매를 평생 유지하기 위한 21세기 인체리셋프로그램 내몸 시리즈 2
마이클 로이젠.메멧 오즈 지음, 박용우 옮김 / 김영사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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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이제 60여일로 남았는데, 몸무게는 내 생의 절정기에 있다. (고3때와 별로 차이 나지 않는다...)  

이 책은 의학적으로, 왜 살이 찌는지(즉 왜 음식에 대한 욕망을 참지 못하는지), 살이 찌면 어떤 점이 나쁜지를 조목조목 따져주고 있다.  

말미에는 습관화 할 수 있는 운동 프로그램과 요리할 수 있는 레시피까지 첨부되어 있어서 편하다. 

이 책은 '몸짱' 만들기 류의 책이 아니라, '비만'이나 '과체중'을 어떻게 하면 '과격'하지 않고 '편안'하게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책이다.  

나처럼, 몸무게가 널뛰기를 하고, 몸무게의 절정기에 있는 분들께 추천. 책을 읽고 나니 몸도 마음도 어느정도는 가벼워진 것 같다. 

생각해보면, 먹는 것은 곧 나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들과, 내가 경험한 것들이 나인데. 이 경험 중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먹는 거다. 점심에 아버지가 해주신 김치찌게를 먹으며 그런 생각이 든다. 내 안을 통과시켜서, 자기화 하는 타자들. 이렇게 살고 있구나, 하고.  

잘 먹어야 겠다. 이 책을 보면, 무얼 먹어야 '잘' 먹을 수 있는지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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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9-02-09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요즘에 제 몸무게가 절정기에 있어서요..ㅠㅠ

기인 2009-02-09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ㅎㅎ 편하게 몸무게 줄이는데 좋은 것 같아요 :)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sortKey=depth&bbsId=D003&searchValue=&searchKey=&articleId=2249266&pageInde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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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9-02-0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했어요. ^^ 많이들 모르더라고요. -_- 다음에서 메인에 안띄운데다가, 접속도 잘 안된다 해서.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고 있다. 3번째 읽는 것 같다.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 무언가 가슴이 꽉 막힌 느낌이다. 여하튼, 예전 읽었던 내용은 기억나지 않고, 읽었던 상황만 기억이 난다. 서재에 예전 글이라도 있나 찾아봐야겠다. 이전보다는 물러서서 읽는 것 같다. 

개념을 운동하는 것으로 쓰고 있는 것이 흥미로운데,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우선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를 가져오고, 그와 함께 도시와 농촌의 부리 및 양자의 이해 대립을 가져온다." (198) 

영어본을 찾아보면 "The division of labour inside a nation leads at first to the separation of industrial and commercial from agricultural labour, and hence to the separation of town and country and to the conflict of their interests." (43) C.J. Arthur Ed., Karl Marx and Frederick Engles, The German Ideology Part One, New York: International Publishers, 1947.(revised edition 1970) 

어찌보면, "한 국민 내부에서의 분업은 산업 노동 및 상업 노동의 농업 노동으로부터의 분리이다"라는 규정식으로 쓰일 수 있는데, 이를 'leads at'이라고 쓴다. 이러한 '움직임'으로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것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사적 유물론' 자체의 패턴이다. '지금-여기'를 이해하기 위해 '과거', '기원'으로 돌아가려는 사고방식. 이의 전제는 A -> B로 변화했을 때, B를 이해하기 위해서 A를 해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A와 B가 질적으로 다를때, A를 보는 시각 속에 이미 연구자의 시선이 개입되어 있어, 여기서 A를 해부한 것의 '도구'가 다시 B를 선규정할 수 있다. 

즉, 맑스, 엥겔스가 원시사회부터 추론해 낸 핵심적인 사적 유물론의 전제인 "도덕, 종교, 형이상학 및 그 밖의 이데올로기와 그에 상응하는 의식 형태들은 더 이상 자립성의 가상을 지니지 않는다. 그것들은 아무런 역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어떠한 [자립적] 발전도 하지 않는다.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과 자신들의 물질적 교류를 발전시키는 인간들이 이러한 자신들의 현실과 함께 또한 그들의 사유 및 그 사유의 산물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 (...) 현실적인, 살아 있는 개인들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며, 의식을 단지 그러한 개인들의 의식으로서만 간주한다." (202)를 논의했을때, 이는 원시사회에서, 또 어쩌면 고대사회까지 타당할지 모르지만, 분업과 '지식노동'에 종사하는 이들이 발생하고 그들 사이의 네트워킹과 담론의 '장'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담론들은 담론 내부의 질서에도 상당한 영향을 받으며 운동하기 시작한다. 처음의 관계가, 이제는 질적으로 다른 관계들과 배치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A -> B로 변화하였다고 해서, A가 B의 모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논의와 비교해 보면 흥미롭다. 윌리엄스는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식의 논법이 아니라 '전체'에 대한 욕망을 들어내고, '이미지'에서부터 시작한다. 윌리엄스를 더 읽어나가면서 비교해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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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박사과정이다. 석사 때는 2년 안에 석사논문이라는 과정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에 전전긍긍하며 '제도'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는 한편, 대문자 '문학'이란 무엇이고, 나는 왜 문학을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했었다. 그 숨겨진 욕망은 결국 '문학 연구'를 특수한 위치에 규정지으려는 욕망이며, 이는 곧 나라는 개인의 삶에 특수한 위상을 부여하려는 몸부림이었다. 

공익을 하면서, 국문과와 거리를 두면서 느꼈던 것, 또 '대중지성' 또는 '다중지성'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서 역사를 생생하게 살아내던 것을 보면서, 석사 때 나의 의문들이 사라졌다. 이 또한 '전위-민중/엘리트-대중'이라는 개념쌍 속에서 사고 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제 나는 국문학 연구나 나의 삶을 특권화시키려는 욕망을 많이 버렸다. 횟집하는 아저씨나 외교관이나 국문학을 하는 나나 모두 동일한 권리와 목소리로 삶을 살아낼 뿐이다. 문제는 자기 자리에서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겠다.

나는 우연히, 나의 기질과 관심상 국문학을 하는 것이며, 이를 잘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사회'에 즐거움이나 유익함을 주고 싶다. 이를 인정하게 되었다. 

조금 더 내 안을 들여다보면, 나는 문학 텍스트의 세밀한 분석보다는, 거대 담론을 논의하고 싶어한다. 나는 여러가지 언어를 잘 했으면 좋겠고, 이를 바탕으로 거대담론을 논의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다. 이제 박사를 복학하니 이러한 내 욕망들을 충족시키고, 더 펼치기 위해 공부해야 겠다. 

영어, 일어, 중국어로 연구나 텍스트를 무리없게 볼 수 있는 수준으로 만들고,  

서구 문학 이론에 대한 보다 넓은 지식과 이해, 그리고 한국 비평사에 대한 이해를 통해, 이 둘을 변증법적으로 결합시켜보는 것이 다음학기 목표다. 포스트 맑스주의에,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를 어렴풋이라도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앞서 말한것처럼 소시민적 의미(?)에서의 내 삶의 자세만을 되뇔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결혼과, 굶지 않고 살아내는 것, MB를 비롯한 부당한 억압에게 날을 세우는 것,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고 더 많은 즐거움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다. 

이만하면, 요즘 행복하다. 다른 사람들도 보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의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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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09-02-05 0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이 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좋을텐데요 :)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하고 같이 행복하자. 이렇게요 ^^

프레이야 2009-02-05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 공익 마치고 박사과정 복학하시는군요.^^ 축하드려요.
동반자와의 좋은일도 준비하고 계신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대문의 글에도 함께 행복하자고 하시네요.
좋은 생각, 소망,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기인 2009-02-05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고맙습니다 :) 혼자만 행복하면, 행복할 수 없는 것 같아요. ㅎㅎ 모두 오랜만이요 :)

2009-02-05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늘빵 2009-02-05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좋습니다. 숨 한번 크게 쉬고 한 발짝 앞으로. 결혼도, 박사공부도 축하합니다. 천천히 내디디세요.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저도, 발을 떼어야 할텐데...

기인 2009-02-0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넵 :) 감사합니다... 근데 1번이 제일 어렵다고요? ㅜㅠ 흑 선배들 다 그리 말씀하시던데.. 걱정이네요 >.<;; 이제 결혼 66일 남았습니다 ^^;

hnine 2009-02-0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반듯하시네요.
무얼 하시든 제대로 잘 해내실 것 같아요.

기인 2009-02-0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ㅎㅎ
근데 가끔 문학하기에는 너무 반듯하다는 말을 들어서 ㅜㅠ
그냥 저냥 사는 범생이죠 뭐.. >.<

2009-02-06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6 09: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8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2-09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9-02-10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인님의 컴백을 레이먼드 윌리언스를 통해서 알게되었네요.
오래전에 배우긴 했지만 그의 <장구한 혁명>을 읽어보진 않았지요.그의 제자라고 할 말한 스튜어트 홀은 제가 좋아라해요.^^ 결혼과 다이어트 모두 성공하시고...박사과정 순항하세요.

기인 2009-02-10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ㅎㅎ :) 드팀전님 오랜만이요 ㅎㅎ

모네 2010-12-01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국문학과에 지원서를 넣게 되는데
글 잘 읽었습니다.
 

4. 사회의 이미지. 

이 부분은 감동적이었다. 윌리엄스의 스케일이나 혼자서 사유하고(는 듯 하고), 홀로 서술하는 것의 거대함이 1부 마지막에 와서, 종합된다. 

사회적 이미지, 즉 '조직을 설명하고 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시작한다. '탐구'라고 하기도 흥미로운데, 윌리엄스 1부의 서술은 이론적(추상적)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자료분석도 아닌 그 중간에 낑겨있는 듯한 느낌이다. 4장에서야 동의가 되기 시작하는 것도, 4장에서는 경제 결정론이나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왜 '전체'의 시야를 가져야 하는지를 논의하고 이것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기나긴 혁명"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시야"이다. 

윌리엄스는 이 장에서는 '역사에서 중요했던 사회의 일반적인 이미지들 몇 가지를 점검하고, 그것이 우리가 현재 관계들에 대해 갖는 생각에 미치는 영향을 검토하며, 사회 변화의 실제 과정에서 그들이 지니는 의미'를 따져보기로 한다. 

4.1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로 윌리엄스는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를 거론한다. 기존 개념으로 환원해보면, '왕정' '자본주의' '대중사회' '사회주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선 '절대적 질서'에 관해서는 이 사회의 목적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며, 여기서 사회 이미지는 개개인이 모두 해야 할 역할이 있는 단일한 유기체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이미지는 특히 영국에서 보존되었는데 (프랑스나 한국과 비교해볼만하다. 영국은 '무혈'인 '명예혁명'을 통해서 민주주의의 수립이 시작되었다) , 국민국가(영국)은 사회에 대하여, 현존하는 질서에서 출발하여 실제 개개인의 요구를 이에 종속시키는 방식의 사고방식을 강력하게 존속시켰다. (갑자기 케네디가 떠오른다.) 

이에 대해 두가지 방향의 도전이 있었는데 "규정된 질서가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활동들을 추구할 권리에 의해서, 보편적인 인간의 권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또 경제적 개인주의의 발흥으로 더욱 결정적인 사회적 이미지가 나왔다.  

이 경제적 개인주의에서는 사회를 확립된 질서로 생각하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하나의 시장'으로 생각한다. 이제는 왕이나 기존의 사회질서에서 출발하지 않고 생산과 교역활동에서 출발하게 되며, 점점 더 이러한 활동들이 다른 활동들의 판단 기준이 될 수 있는 사회의 본질적인 목적으로 간주된다. 여기서 사회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조건을 만들어내기 위해 존재했다. (174~175) 

후에 자본주의가 법인 조직의 자본주의 단계로 발달함에 따라 사회는 시장을 제공하는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조직 자체가 본질적으로 시장 조직이 되었다. 기존질서에서 출발했던 개인이라는 관념은 본질적으로 '내 위치와 그 의무'로 구성되었으나, 시장사회에서 개인이라는 관념은 우선 책임 있는 자유로운 동인으로서, 그리고 후에는 무엇인가 팔 것을 가진 사람으로 되었다. (175) 

물론 이러한 이미지는 실제 역사에서는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상호작용하기도 했다. 조직된 시장이 절대적인 질서가 되면서 시장과 절대적 질서가 실질적으로 융합할 수도 있다. 

또 사회주의에서는 '인류의 형제애' 이미지가 실제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 근본적으로 혼란스럽게 되었다. 

한편 개인의 권리의 주장에서 출발했던 개인주의는 개인을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권리를 더 강조했다. 모든 좋은 일은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고 모든 나쁜 일은 사회가 저지른다는 공식이 합리화되면서 사회적 사고에서 큰 폭으로 후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사회의 이미지는 이제 내재적으로 악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대중'의 개념을 만들어내었다. 이는 부분적으로는 절대적 질서의 개념을 새로운 방식으로 되풀이한 것이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중들'로서 엘리트들에 의해서 통치되고 조직되고 가르쳐며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시장의 개념을 되풀이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중들'은 참여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구와 선호도의 패턴을 표현함으로써-이는 새로운 시장 법치기앋-사회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엘리트들에게는 이것이 출발점이 된다. 이러한 대중사회는 본질적으로 몰개성적이다. 필연적으로 엘리트는 개인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고, 대중적 패턴의 평균적 수치와 일반화된 풍조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나와 내 가족은 현실적이고 나머지는 그냥 시스템이다. 이는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구분이 강화된다. 이러한 사회이미지는 사회와 인간을 분리해버렸다.  

 

4.2 

'우리가 물려받은 지배적인 사회 이미지'인 '절대적 질서, 조직된 시장, 엘리트와 대중, 권력 투쟁에서 표현되는 형제애'는 모두 사회를 정치(결정의 체제)와 경제(유지의 체제)라는 두 영역의 이해관계, 두 종류의 사고, 두 가지 해석의 사회관계로 환원시킨다. 지배 집단은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권력과 대체로 가까이 연관되어 있는 이 범주를 통해서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183-184) 

윌리엄스는 이어 사회주의의 가장 큰 오류를 '스스로를 자신이 반대하는 편의 용어로 한정한다는 것, 즉 인간적 질서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질서를 제안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하는데, 이 통찰에 동의한다.  

"대안적인 사회를 창조하기 위한 에너지를 충분히 생성하기 위해서는 좀더 넓은 견지에서 제안해야 한다. 이러한 연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치적,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면서도 인간적인 질서는 거의 바뀌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문제에 대한 좋은 예는 노동의 정의라는 문제이다. (...) 일과 노력의 관계는 특정한 사회 형태에 의해서 흐려지고,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한 일 혹은 '자발적인 사회적 목적'을 위해 한 일과 돈을 위해서 한 일을 구분한다. 이것이 단순히 임금노동을 기반으로 조직된 사회의 반영임을 알아차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이와 다른 사회관계라면 이에 근본적으로 도전해야 할 것이다. (...) 일과 삶의 통합, 그리고 우리가 일상적인 사회 조직에서 문화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활동들을 포함하는 것은 대안적인 사회 형태의 기본 조건이다. (...) '공적인' 것뿐만 아니라 '사적인' 것, '일'뿐만 아니라 '여가'까지 실질적인 이해관계의 실체가 사회적 목적이 된다. (...) 사회사상이란 일과 정치와 재산을 그 사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인 필요성에 의해 판단하는 인간적인 가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회주의의 도덕적 몰락은 바로 이렇듯 사회에 대한 낡은 이미지들과 타협했던 것, 대안적인 인간적 질서의 개념을 유지하고 규명하지 못했던 것과 정확히 비례한다."

이러한 윌리엄스의 논의는 네그리, 하트의 "디오니소스의 노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 형태 비판과 연결될 수 있다. 

 

 

윌리엄스는 결정의 체계(정치)와 유지의 체계(경제)에 뒤이어 두가지 관계를 덧붙인다.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로 표현된다.  

기존에 예술은 단지 경제적, 정치적 과정의 반영으로 격하되어 기생적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미학이라는 분리된 영역으로 이상화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창조적 요소는 그의 인성은 물론 사회의 뿌리이다. 그것은 예술에 한정되어서도 안 되고, 결정과 유지의 시스템에서 배제되어서도 안된다. 

결국 윌리엄스의 목표는 "사회에 관한 진실은 늘 예외적으로 복잡한 결정 체계, 의사소통과 학습체계, 그리고 유지의 체계와 생성, 양육 체계 사이의 실질적인 관계 속에서 발견되어야' 하며, '현실적으로는 결코 분리되지 않는 체계들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을 지어주며, 각 체계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고, 그들이 작동하고 경험되는 현실적인 조직의 역사적 가변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기존의 '경제결정론'등은 '경제'라는 체계 또는 '정치'라는 체계가 다른 체계를 규정하거나, '최종심급'이라는 개념으로 그 중요성을 강조해왔다면, 윌리엄스는 이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새로운 대안 세계를 '상상'하고 건설하는데 오류에 빠지게 했다는 것. 

감동적이기는 한데, 한편으로는 역시, 그 '보여줌'을 제시해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사회를 분석하는 이러한 설명에서 강조해야 할 점은 바로 그것들이 성장의 용어이고, 전에도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정치, 경제, 미학, 심리학은 늘 부분적으로는 한때 경험된 상황에서 학습된 규칙의 체계이며, 그것이 단지 수정되지 않고 영속화된 상태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부분적으로는 제각각 새로운 상황을 탐색하고 반응하며 그것을 통제하고 변화시키려는 이해에 도달하고자 하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우리가 인간의 조직을 연구하는 데 연관성뿐만 아니라 가변성도 강조해왔다면, 바로 변화의 본질과 근원이라는 이 중대한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191) 

4.3 

윌리엄스는 역사는 대부분 정복에 의한 변화이지만, 이것이 결국 정치, 즉 결정의 체계가 다른 체계들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고 여러가지 다양한 결과를 낯는다고 한다. 결정의 체계는 현실 속의 물질적, 관습적 환경 속에서 작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변화는 일반적 변화의 전체적인 복합체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주장. 

이러한 주장은 옳은 주장이며, 전 '사회'변화를 어떤 체계(정치나 경제)가 아닌 여러가지 체계들의 상호작용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예를 들어 '증기기관'이 산업혁명의 발달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때, 그렇다면 증기기관을 가능케한 경제적 조건이나, 정치적 조건만을 따지고 여기서부터 다른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 증기기관이 가능케 한 창조적 학습의 배경 등등을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지적에도 유의미하다. 

"자본주의사회들도 비교할 만한 각각의 발전 단계들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사회들이며, 이 차이들에 대해서 가장 세련된 정치 경제학적 분석도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다른 체계인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체계. 그리고 삶의 생성과 육성이 기초한 관계들의 복합체로서 여러 면에서 매우 다양하고 특수한 체계"를 특권화시키지도 않는데, "교육의 형식과 내용이 현실을 결정하고 유지하는 체제에 의해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더러는 결정되기도 한다"는 정도의 주장이다. 또 "사상가와 예술가들은 관습적인 의미와 가치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의미와 가치들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창조자를 변화의 열쇠로 분리해내는 것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결정론에 사로잡혀 그들을 간과하느 것만큼이나 비현실적이다." 

그러면 이제 '전체'를 연구하는 것의 범위나 의의가 어느정도 잡히는 것 같다. 각 체계들의 상호작용과, 그 각 체계들을 특권화하여 다른 체계의 중요성을 억압하지 않는 것. 이를 통해 각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것. 그런데 앞서 인용했던 부분에서 '자본주의사회들'도 각기 다르다는 것도, 윌리엄스식으로 반박해보자면, 결국 이는 세계체제 속에서 '요소'들 사이의 관계가 아닌가. 하나의 '국민국가사회'라는 것도 다른 '국민국가사회'와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교류하며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즉 전체라면, 윌러스틴 같은 시야로 나아가야 되는 것은 아닌가. (*이 할아버지는 정말 짱이기는 한데, 언제 완결지으시려나... "제국"출간 이후로 또 이와 싸우시느라고 못 쓰고 계신 것인지... 역시 근대로 올수록 어렵기는 할터이지만, 이제는 완전 맑스다. 당신도 이제 80이라.. 이거 결국 내가 읽고 싶은 것은 20세기나 21세기인데;; ) 뒤에 목차를 보면 일국 영국을 대상으로 논의를 펴는데, 이 또한 '전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리는 다시 전체로서의 조직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조직은 존재하기도 하고 갱신되기도 한다는 뜻에서 적극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체제가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학습이 바꾸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바꾸고 바뀔 뿐이다." (195) 

이러한 언명은 bold하다. 이 또한 논증되어야 하는 부분인데, (그 후의 수많은 이데올로기론이나 특히 알튀세의 이데올로기론이나 '구조'등을 생각해보자. 이제 레비스트로스는 안 읽는다지만, 문화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보고 논의한 대표적인 논자가 아닌가. 얼마전에 레비스트로스 100세 생일이라고 해서 깜짝놀랐다. 생일축하!) 그냥 막 쓴다. 이 또한 윌리엄스 식으로 논의할 때, '사람'도 '요소'의 일부라고 볼 수 있지 않는가. 왜 '사람'이라는 것에 특권적 위치를 부여해야 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아마 이런 전제 때문일 것이다. 

"민주주의란 단순히 정치적 변화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개방적인 사회와, 실제의 기술과 커뮤니케이션에서 변화의 창조적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자유롭게 협조하는 개인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사실 이 전제부터 출발한다는 것도 참, 신기한 일이다. 

"현실적인 변화란 실제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점점 더 확대되고 강력해지는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의 수단들을 건설하는 변화였다. (...) 우리는 점점 더 새로운 변화를 목도하고 있는데, 이는 커뮤니케이션의 확대라는 단순한 사실과 그에 따른 확장된 문화 경험에 의한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1부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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