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사이버과시족'에 관한 기사가 어제 경향신문의 기획기사였는데(요즘 가장 다이내믹한 신문이다), 생각을 더 보태서 옮겨놓을까 하다가 일단은 자료로서 스크랩해놓는다. 그냥은 멋쩍으니까 나대로의 '과시'를 덧붙이자면 '인정'과 '인정투쟁'에 관한 책들을 이 참에 읽어보시라는 것. 그게 <정신현상학>에서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으로까지 이어지면 과시란 것도 전혀 만만하지 않은 것이 되겠지만.

 

 

 

 

경향신문(06. 11. 09)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이버 과시족’

직장인 김모씨(26)는 외식할 때 카메라가 없으면 안절부절못한다. 멋진 분위기의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디지털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게 생활화됐기 때문이다. 누구나 흔히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나 체인점 음식은 사진을 찍어 올리지 않는다. 조금은 특별하고, 남들과 다른 자신의 선택을 과시할 수 있는 음식만 찍는다. 주말에 좋은 식당을 찾아 음식을 먹고 일요일 저녁이면 간단한 작업을 거쳐 블로그에 올린다.

월요일이면 친구들은 김씨의 블로그를 찾아 “맛있겠다” “어디냐? 가격대를 가르쳐달라”고 리플을 단다. 김씨는 “음식을 앞에 두고 사진을 찍을 때면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지만, 리플을 통해 나만의 가치있는 선택을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신(神)에 의한 인정을 중시하던 중세식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신을 인정할 수 있다는 근대 철학의 자신감 넘치는 출발점이었다. 이어 프랑스 철학자 메느 드 비랑은 데카르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나는 의욕적이다, 고로 존재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데카르트나 비랑의 선언을 패러디해 21세기 한국의 인터넷 세상을 묘사해보면 어떨까. “나는 과시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사이버 스페이스의 유목민들은 이 광대한 공간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주저함이 없다. 부모, 형제, 가장 친한 친구에게도 채 꺼내지 못한 얘기를 얼굴도 모르는 인터넷 저편의 네티즌에게 건넨다. 그러나 단순히 자신의 사생활을 미주알고주알 드러내는 게 중요한 건 아니다. 현대인들은 타인의 비루한 일상을 꼼꼼히 챙길 만큼 한가하지 않다. 남들과 똑같아서는 자신을 드러낼 수 없다. 남들과 조금은 다른 자신의 특별한 취향을 드러내기. 드러내는 사람이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독특한 것이 결국은 사람의 이목을 끈다.

세계 최대의 동영상 공유 커뮤니티 유튜브는 1억건, 한국 최대인 판도라TV에는 85만건의 동영상이 하루에 올라온다. 그 중 네티즌의 이목을 끄는 건 극소수다. 오프라인에서 마주쳤다면 ‘미친놈’ 소릴 듣기 딱 좋은 황당한 퍼포먼스 정도가 돼야 네티즌들은 환호한다. 전세계를 돌며 우스꽝스러운 막춤을 춰서 인기를 얻은 미국 청년도 있고, 인기 가요에 맞춘 어설픈 립싱크로 인기인이 된 한국 청년도 있다.

블로그도 마찬가지다. 프로페셔널을 뺨치는 아마추어들이 예민하게 갈고 닦은 취향의 집적물을 전시한다. 방대한 DVD나 CD컬렉터들이 남들에게는 없는 리스트를 자부하면서 내밀고, 대중 앞에 내놓기 쑥스러워 골방에서 그려냈던 그림을 광활한 네트 갤러리에 전시한다.

유치하다고 해도 좋고, 어설프다고 해도 좋다. 다만 이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그 취향을 인정받아 좋은 사람으로 여겨지고픈 당연한 욕망의 발로다. 공자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내지 않으면, 이 또한 군자가 아닌가”하고 말했다지만, 이는 사람은 누구나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점을 돌려서 말한 데 불과하다. 새로운 세대의 족속들의 손에는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도구가 쥐여졌다. 최신형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빠른 통신망을 탄 채, 우리는 우리를 드러냄으로써 타인의 시선을 갈망한다. 외로우니까, 나 하나만으로는 외로우니까.(백승찬 기자)

06. 11. 10.

P.S. 마지막에 '외로우니까'란 멘트는 감상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저널리스틱한 것이지만 문제를 축소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인정'은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면서 존립/존재에 관한 문제이기에 그러하다. 그러한 인정투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애니멀'이다...

P.S.2. '인터넷 나르시시즘'에 대한 문화학자의 진단을 덧붙인다. 같은 기획기사의 하나이다.

경향신문(06. 11. 09) 소통·공유·행복 ‘인터넷 나르시시즘’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르키소스’라는 미소년 이야기가 있다. 그는 어느 날 숲으로 사냥을 하러 갔는데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몸에 반해 먹지도 않고 자기 얼굴만 보다 말라 죽은 후 한 떨기 수선화가 되었다. 19세기 말 독일의 정신과 의사 네케는 나르키소스의 신화를 차용해서 리비도의 대상이 자신이 되는 심리상태를 ‘나르시시즘’으로 명명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 말이다.

 

 

 

 

신화 속 나르키소스의 이야기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자기 과시에 몰입하는 네티즌들의 원형 서사 같아 보인다. 나르키소스의 옹달샘이 자기도취의 거울이었다면 네티즌들에게 그것은 바로 ‘블로그’ 혹은 ‘미니홈피’쯤 될 것이다. 나르키소스가 멋진 자신의 얼굴을 옹달샘에 비추듯,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만든 멋진 콘텐츠를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자신이 만든 특이하고 맛깔난 음식 정보를 블로그에 올리는 ‘가정주부들’.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직접 찍어 미니 홈피에 올려놓은 ‘셀카족들’. 취미가 유사한 익명의 네티즌들에게 자신만의 고유한 정보를 제공하며 즐거워하는 네티즌들. 이들이 우리 시대 인터넷 나르시시즘의 주인공들이다.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의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익명의 네티즌들과 공유하길 원하는 이들은 자생적인 공간에서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고 유통, 소비하는 ‘생비자들’(prosumers)이다.

디지털 시대 콘텐츠 생비자들은 근대적, 물리적 공간에서의 자기도취자들과는 다른 욕망을 꿈꾼다. 온몸을 명품으로 치장한 ‘사모님들’이나 고소득 전문직에 종사하며 주말에 고급 사교파티를 즐기는 ‘문화귀족들’의 자기과시는 오로지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다. 일반 서민들이 이들을 재수 없게 보는 것도 타인과의 소통과 공유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소통과 공유를 원칙으로 한다. 맛있는 해물 떡볶이, 내가 만든 가구, 알콩달콩한 우리가족 이야기, 이 모든 정보는 내가 잘났다는 과시이기에 앞서, 익명의 네티즌들과 소통의 기쁨을 공유하려는 소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아무리 자기만족을 위해 만든 콘텐츠라 해도, 타인의 관심을 이끌어내는 이른바 ‘댓글의 행복’이 없으면 인터넷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터넷에서 자기과시는 하나의 게임이다. 마치 고대 원시 부족사회에서 행해졌던 ‘포틀래취’(potlatch) 선물 게임처럼, 콘텐츠를 만드는 것은 도전과 응수를 위한 반복적인 게임이다. 내가 맛있는 ‘해물 떡볶이’를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 누군가가 더 맛있어 보이는 ‘치즈 떡볶이’로 응수하고, 다시 나는 최고로 맛있어 보이는 ‘카레 떡볶이’로 도전하는 게임 말이다. 게임의 장에 참여한 유저들의 도전과 응수는 배타적, 폐쇄적 나르시시즘이 아니라 개방적, 다방향적 나르시시즘이다.

오로지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다른 유저들과 소통하기 위해 고통과 헌신을 감내하는 것은 블로그가 주는 일상의 행복과 천상의 기쁨 때문이다. 어느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제공한 ‘해피해피 라이프’라는 네티즌 참여 코너의 사례처럼, 아기자기한 콘텐츠를 생산하는 유저들의 나르시시즘은 탈권위적이면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벗어나 있다.

물론 유저들이 만든 콘텐츠가 모두 사심 없는 것은 아니다. 네티즌들의 시선을 모으기 위해 특정 연예인들을 조롱하고 희화화한다거나 아니면 스스로 연예인이 되고 싶어 댓글 자작극을 벌이는 현상들도 일어난다. 인터넷 자기과시 행동이 지나칠 경우 오직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려 인터넷 감옥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어떤 정치인들은 애초부터 진정한 정보 소통에는 관심이 없고, 의정활동을 위한 홍보 도구로 사용하기도 한다. 블로그에 올려놓은 사적인 정보들이나 미니홈피의 ‘디카놀이’ ‘일촌 놀이’들이 사이버 커뮤니티를 지극히 개인화하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도피하려는 정치적 불감증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인터넷에서 자신을 뽐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직하고 열정적이다. 자신이 만들어 낸 자생적 콘텐츠는 무기력증에 빠진 가정주부들에게 생활의 활력소를 준다. 이제 부엌과 거실은 가사노동의 현장에서 풋풋하고 따근따근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스튜디오로 전환된다. 인터넷 나르시시즘이 가정주부들에게는 가사의 불평등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자기 최면술일 수도 있지만, 가사의 반란을 꿈꾸는 쾌락의 에너지일 수도 있다.

소비 자본주의 시대 상품화된 나르시시즘은 결핍에 대한 편집 증세를 보인다. ‘명품중독’과 같은 상품 나르시시즘의 욕구는 끝이 없다. 소통과 공유를 위한 인터넷 유저들의 대중 나르시시즘은 비록 폭력과 집착의 위험성을 갖고 있지만, 타인에 대한 에로스의 열망을 담고 있다. 자신이 만든 정보를 미치도록 소통하고 공유하고 싶은 에로스적 욕망, 물질적 보상은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인터넷 나르시시즘은 행복하다.(이동연/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전통예술원 한국예술학)

(*)하지만 이 '행복'은 쾌락원칙의 경제 안에 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 아닌가? 그 경제를 넘어선, 주이상스 곧 향략으로서의 나르시시즘은 때로 인생을 망치고 거덜낸다. '자기도취'의 이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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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장에 5만원이 남은 절체절명의 위기 (월세 35만원에 사는터라 더욱)여서 훈련소를 다녀온 이후, 동네방네 과외를 구하러다녔다.

학부때부터 부모님께서 학비이외에는 일절 나에게 투자(?)를 안 하셨던더라, 과외를 꾸준히 하기는 했는데 석사과정부터는 '최소한으로 벌고 최소한 쓰자'라는 좌우명 같은 것을 실천하다보니까 연구보조나 장학금으로 그런대로 괜찮게 살고는 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시 과외시장 -_-; 이라는 엄혹한 곳에 뛰어든 셈. 집 근처에도 전단지를 붙이고, 고향(?)근처에는 고향친구들 ㅋㅋ이 전단지를 붙여줘서 전화도 오고 그랬는데, 이렇게 전단지 붙여서 하는 것은 거의 성사되지 못한다. 아빠 친구분 딸과 그 친구분의 친구, 뭐 이렇게 알음알음으로 과외를 시작한 셈.

그런데 어제는 숙모가 전화와서 숙모 아시는 분 아들 논술과외를 해달라고 해서, 이런저런 조건을 말했다. 조금 후에 전화와서 숙모꼐서 하시는 말씀.

기인아, 너 되게 조금 받는 거라던데. 왜 이렇게 조금 받느냐고 물어보더라.

당황;; 그냥 충분히 받는 것 같은데요. ^^;;;

어쨌든, 이 과외시장이라는 것이 양극화되고, 이 과외 또한 과시소비 비슷한 양상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 내 노동력의 가치를 알수 있는 수단은 소문과 매겨져있는 가격표 뿐.

특정 계층의 특정물품은 비쌀수록 이것의 수요가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나듯이. 과외 시장 또한 그런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셈.

과외 5개 들어왔는데, 상담을 하고는 이 학생은 언어/논술 과외가 필요한 게 아니고, 자기 공부시간을 많이 가져야 하며 지금은 영수에 집중할 때.. 뭐 이런 소리로 3개 과외는 안 하겠다고 했다. 사실 맞는말이었지만, 학부모 입장에서는 조금 황당하기도 했을 터.

언어/논술 과외해달라고 불렀더니, 한시간동안 한다는 이야기가, 과외 학원 많이 보낸다고 되는게 아니고, 영수가 중요하고 등등 이야기만 하고 간다니.

사실 과외를 완전히 노동력 판매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반은 재미로 -_-; 또 책임감도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이지만. 학부모 입장은 또 다르다.

정말, 과외를 많이 시키고 학원을 많이 보내야, 심리적 안정을 하는 것이고, 그 심리적 안정을 대가로 지불을 하는 느낌도 분명 있다. 그런낌새가 보이면 더 냉혹하게 말을 하는 편이지만...

이래저래 복잡한 시장이다. 노동력을 판매하는 사람은 구매자에게 손해가 갈테니 판매하기 싫다고 하고, 노동력을 구매하는 사람은 왜 이리 적게 받느냐고 하고. 뭐 이것도 따지고 보면 장기적인 이득을 얻기 위한 플랜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쩝.

어쨌든 지금 하고 있는 2명의 과외도 2달 정도 해서 성적을 올리고는 그만둘 예정이다. 친우는 기생해서 1년을 살라고도 하지만 -_-; 2달 가르치면 솔직히 언어영역은 가르칠 것도 없다. 애들한테 도움도 안되고..

학부때 한 선배는 우스개 소리로 과외 하러 갈때마다 부르주아 착취 투쟁 전선으로 간다하면서 가고는 했다. 이 노동력 판매 행위는 판매자 입장에서 구매자를 착취하는 것으로 생각될 정도라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착취에 반대하니, 그냥저냥 힘들게 살 수 밖에.

그렇지만, 그럼 2달 후에는 다시 또 과외를 구해야 하다니.. 비정규직은 괴로워 참.

"왜 이렇게 조금 받아요?"는 역시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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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6-11-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리다매" 입니다..라고 답변하세요..^^

물만두 2006-11-09 18: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심냉장곱니다 하세요^^

기인 2006-11-09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피님/ ㅋㅋ 최대한 적게 일해야 되서;;; ㅋ 박리다매 웃깁니다 ㅎㅎ
물만두님/ 켜켜; 어쨌든 너는 그 정도 가격이냐? 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지요. 다음부터는 더 많이 받으려고요 쩝 =.=;
 

바람구두님의 페이퍼에 쓰신바 대로, '가장 적게 일하고, 많이 돈을 버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의 목표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적게 일하고'의 부분에는 별반 강조가 없고 '많이 버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이 많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적게 일하고, 쓸만큼만 벌기'이다. 물론 이 '쓸만큼'이라는 것은 막연하나, 옷을 거의 안 사입고, 책도 최대한 빌려보고, 그렇지만 먹고 싶은 것은 그래도 먹어주는 만큼. 이랄까;;

어짜피 일년에 대여섯번 술마시고, 주종도 맥주나 소주이고, 내가 내는 경우도 거의 없는 나로서는, 진짜 먹는 것에 대부분의 돈을 쓴다.

이제 결혼도 생각해야 되고, 저축한게 없으니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인생 불안한 것도 사실이지만, '학생'이라고 아직도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인지, 돈을 많이 벌수록 그만큼 '학생'에서 멀어진다는 생각도 분명 있다.

그러니, 나는 항상 돈을 최소한으로 벌기 위해 노력(?)한다. 국문과 박사과정생이라는 신분은, 특히 논술이 강화된 현 사교육계에서 큰 유혹을 받기 쉽다. 그래도 묵묵히, 나는 이제 한달 먹을만큼 벌었으니 이제 먹으러간다(?)라는 식의 태도. 이것을 나는 유지하고 있었고, 유지하기도 쉬웠다.

나는 충분히 먹고, 충분히 읽고, 충분히 자는 거 이상 원하는게 없기 때문에. (물론 애인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포함 ^^ ) 그런데 이 '충분히 먹고, 읽고, 자는 것'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하기 힘든 것이다. 충분히 자지 못하거나, 충분히 읽지 못하게 되는 것. 돈을 적게 벌던 때보다 덜 자거나 덜 읽어야 한다. 내 경우는 물론 덜 읽게 된다. -_-; (그리고 사실 충분히 먹지도 못한다. 충분히 먹는 것 1주일만 하면... 5kg는 찔것이다. 과장이 아니고. 난 왜이리 늦은밤이 되면 기름진 음식들이 눈앞에 떠다니는지 원... 내 소원은 충분히 먹고, 읽고, 자는 것. 그 중 제일 못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먹는 것. 흑.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 ㅜㅠ)

그래도 역시, 결혼도 생각하고,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돈이 전혀 없게 되니, '저축'이라는 것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제 한달 벌어 한달 살기에는 '보장' 되어 있는 최소한의 페이도 없기 때문에 막막하다. 그래서 저축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과감히! 정말 과감히, 한달에 20만원씩 2년동안 모아보기로 했다. 남들이 보면 웃을 결정이지만, 나로서는 부담되는 결정이기도 하다. 아으, 결코 '저축'만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건만. 돈이 돈을 벌게 하는 저축, 이 또한 불노소득인 것을.

배고픈 시급 300원 노가다. 내일부터 저축합니다. 흑. 한달에 20만원씩 2년하면. 그래도 500만원 된다.

ㅋㅋㅋ 왠지 벌써 배부르고 등 따순 기분 -_-;;; 근데, 정말 한달에 20만원씩 초과로 꾸준히 벌어서 저축할 수 있으려나.. 원.. 5월에는 체코 10일 여행 계획인데 ㅡ,.ㅡ;;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든 나름 신난다. 나도 저축한다!!! ㅋㅋ

(헉 어찌 페이퍼의 끝이 요상하다. 처음에는 안티-저축 같은 기분으로 시작한 글이었건만. 역시 뭐든 시작할때는 신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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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6-11-07 0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축한다~얏호~ㅋㅋ 전 아직까지는 용돈받아먹고 살아서 용돈받으면 통장에 넣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쓰는데 귀찮아서 그런지 돈이 자꾸 쌓이더라구요. 오홍홍. 근데 돈 쌓이는거 보면 나중에는 아까워서 못 써요. (나만 그런가 -_-)

건우와 연우 2006-11-07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작이 반이니 벌써 이백만원은 넘게 저축한셈인가요...^^

Mephistopheles 2006-11-07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혹에 흔들리지 마시고 꼭 목적으로 삼으신 금액을 모으시길 바랍니다..^^

기인 2006-11-08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ㅋㅋ 그건 저축이 아니죠? ㅎㅎ 계획성 있게 저축한번 해보려고용;;
건우와 연우님/ 와, 그럼 이제 써야할때? ㅋㅋ
메피스토님/ 네; 공익 때의 추억(?)으로 저축을 성공리에 ㅋ
 

훈련소에서 겪었던 북핵사태는 나에게 역시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확신과 우울과 어찌보면 쁘띠-부르주아적이었던 나의 안온한 일상을 송두리째 깨부수었던 경험이었다. 학부 1학년때인가, 복학생 선배가 우리는 역사 속에 살고 있고, 그 도도한 흐름의 일부가 우리이고 또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아찔함 같은 것.

이번 알라딘 사태^^는 반면에 뭐랄까, 기분 좋은 훈훈함 같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따우님이 서재를 나가신 것 같은 사태도 벌어졌지만, 이를 계기로 알라딘의 노련한 서재주인들이 들고 일어서며, 불량 리뷰청소에 나서기 시작했다.

내 친우는 알라딘에서 서재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어차피 배부른 자들끼리의 Show-Off 같은 것, 이라고 했지만, 나는 꽤나 알라딘 서재의 따뜻함과 지적 자극이 맘에 들었다. 어찌보면 정말 친자본주의적인 공간인 이 '알라딘'에서 우리는 나름의 분절된 공간을 만들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까지 든다.

알라딘에서 서재 활성화를 위해 내건 경제적 보상을 악용하는 '무리'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적을 하고, 나름의 자정작용을 강구하는 노력을 서재인 그들이, 아니 우리들이 지키고 싶은 '서재'환경, 알라딘 마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야심찬 공통된 기반이 있다기 보다는, 자신이 쓴 글에 책임을 지는 것, 이라는 단순한 윤리적 문제일 터.

이것이 앞으로 어떻게 번져나갈 것인지, 알라딘 쪽에서의 대처는 어떠할지 더 지켜볼 문제이지만, 서재인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내고, 이것이 알라딘이라는 '조종자' 쪽에 반영이 되는 모습은, 뭔가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를 떠올르게도 하고, 내심 흥겹다. ㅋ 더 생각해보면 매우 소수의 서재인들이 서로 마실나가던 때는 '행정'이나 '제도'에 대한 토론이나 건의가 필요없었겠지만, 이제 '알라딘'이라는 공간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인원이 점점 늘어나 팽창하다보니 문제가 생기는 터, 여기에 이제 '제도'나 '행정'을 논할 필요가 생기는 것!

이 어찌 재미있지 않을소냐! '알라딘'에 대한 '주체적' 이용. 그러니까 적극적 원용. ㅎㅎ

어쨌든 메피스토님, 마태우스님, 따우님, 조선인님, 파란 여우님(ㅎㅎ)의 분발, 그리고 아직 의견을 직접적으로 표하지 않은 여러 분들의 분발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지켜보고만 있지만;;; ㅋ 괜시리 즐겁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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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0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람구두님 본격적 합세. 여러 주장들과 논리적 근거들을 읽는 것. 즐거운 일이다. :)

기인 2006-11-07 0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의 단단한 감정이 실린 글도 잘 읽었다. ㅋ
아우 다채로운 목소리들이 교향곡처럼, 합창곡처럼, 서로의 목소리와 음색과 음정과 박자로 울려퍼지는 듯 하다. 알라딘 마을의 합창곡. 잼있다 :) ㅎㅎ

조선인 2006-11-07 0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핫, 아테네식 민주주의라니 지나치게 거창한데요? 제도속의 자정노력이라는 것엔 동의합니다만. 쿠흐흐흐

마태우스 2006-11-07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분들은 이곳이 특별한 곳이라는 자부심 속에서 살지요. 이곳을 아름답게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도 그런 이유구요...근데 전 이번 사태에서 한 게 없습니다. 일 다 된 다음에 숟가락만 얹었지요... 파수꾼 노릇을 하고 문제제기를 끊임없이 해주신 다른 분들에 비하면...부끄럽죠.

Mephistopheles 2006-11-07 0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저같은 양산박 앞을 지나가는 농부 1같은 존재는
합류시키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만두 2006-11-07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저 제 감정에 주체를 못하는 사람일뿐입니다 ㅜ.ㅜ 넘 부끄럽잖아요=3=3=3

건우와 연우 2006-11-07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켜보는게 즐거웠어요. 그치만 따우님이 나가신건 아직도 많이 서운하네요....

기인 2006-11-0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인님/ ㅋㅋ 뭐가 본격적인 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훈련소 다녀온 뒤 글쓰기가 귀찮아져 버렸어요 쿄쿄;;
마태우스님/ ㅎㅎ 대주주님께서!!!
메피스토님/ 아 그 농부1 정말 재밌고 멋있습니다 :)
물만두님/ 뭘요. 알라딘의 보물창고 서재!
건우와 연우님/ 네.. 따우님 다시 안 돌아오실까요?;;

기인 2006-11-12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 매너님 합세!
 
둥근 발작 창비시선 267
조말선 지음 / 창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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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놀이라는 것은 넓게 보면 모든 문학 작품에 해당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말놀이, 동음이의어나 발음이 유사한 말을 가지고 하는 장난은 예전부터 우리 문학 속에 유머와 해학으로 존재해 왔다. 조말선 시인의 이번 시집은 이러한 말놀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시를 구성해내간다. 말놀이 자체가 새로운 상상을 하게끔하는 원동력이 되는 거이다. <비스듬히>라는 다음 시를 보자.


사다리가 말한다

나무에 걸린 내 치마 좀 걷어줄래?


죽은 다리를 올라간다


내 머리통이 탐난다면 조샘해,

나는 삐걱거리는 그를 달랜다


내 다리로 걷고 싶다면 조심해,

그는 후들거리는 나를 달랜다


내 머리통을 달고 그가 말한다

이 치마는 내 다리에 더 어울려


네 개의 다리로 올라간다

사다리의 팔이 되려고 올라간다

사다리의 얼굴이 되려고 올라간다. (중략)


사다리는 死다리로 읽히며 또 四다리로 읽는 시인. 사다리를 ‘死다리’로 읽었을 때 화자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사다리를 오르며 四다리로 읽었을 때는 네 개의 다리를 생각하며 오른다. 이러한 말놀이를 통한 시쓰기는 시집 내내 반복되며, 새로운 시를 쓸 수 있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만나다와 맛나다를 반복 배치하며 혼동을 주는 <나는 나를 맛볼 수 없었다>, 편해했다와 편애했다를 교묘하게 바꾸어쓰는 <소파의 위치>, 맞는다와 막는다를 반복하는 <달맞이꽃>, 반복이 아닌 번복을 반복하는 <번복하는 오이디푸스나무>, ‘가공’의 두 가지 뜻 가공할 만한과 가공하다를 반복하는 <물고기>, 도마를 준비하고 뱀이 주 요리 재료인 ‘도마뱀요리’ <도마뱀>, 꽃병을 불치병이라고 말하는 <오이디푸스나무의 꽃>, ~마!라는 명령조의 반복과 ‘비’가 내리는 것이 겹쳐서 ‘마비’가 되어버리는 <마비> 등, 시인의 말장난은 때로는 기발하고, 때로는 의미심장하게 되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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