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복의 랑데부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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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이 작품의 문학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작품만 가지고 이야기했다는 전제 하에 쓴다.

 

일단 개인적으로 나의 경우는 독자로서 작품을 읽을 때, 구성 상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해 그 당사자에게 대상의 상실을 통해 아픔을 준다는 그 구조를 상당히 싫어한다. 사적 복수를 하는 것 그 자체도 경우에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남발하는 것은 실제 사회는 물론이고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도 그리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으로 푸아로와 같은 탐정이 등장하는 크리스티의 세계에서도 사적 복수에 대해서는 아주 드물게 손을 들어주는 태도를 취한다.

 

이 소설의 경우는 주인공인 조니 마 입장에서 중요한 사건의 용의자가 5명인 셈인데, 5명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설령 5명을 다 죽여도 4명은 억울하게 죽게 된다. 그런데 심지어 그 5명이 아니라 5명에게 중요한 사람을 차례차례 죽이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심지어 당한 사람은 내가 복수를 당했는지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편지까지 받았으나 한참 동안 부인할 정도였고 두 번째 사건의 경우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게다가 용의자 5명은 전부 남자이고, 주인공이 타깃으로 삼은 5명은 전부 여자인데 이쯤 되면 그저 이 사람에게 내재된 살인 욕망을 형상화하기 위한 앞서 일어난 사건을 명분이자 동력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해서 불쾌해진다. 아무래도 완력이나 이런 저런 수단을 쓸 때 같은 남자끼리 붙는 것보다 실제로도 훨씬 편할 테니까 살인 성공률(?)이 올라갈 것 아닌가. 아마도 주인공은 남성성에 대한 열등감으로 감히 같은 남자하고는 붙지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 사람의 남성성에 스크래치를 내고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다고 외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건지.

 

소설 속 사건이 주인공 조니 마의 욕망을 형상화한건지, 아니면 이 소설 자체가 작가의 특정한 욕망을 형상화한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기까지 가면 너무 억측이겠지.

 

상복의 랑데부를 쓴 코넬 울리치는 환상의 여자를 쓴 윌리엄 아이리쉬와 동일 인물이다. 환상의 여자도 정교한 트릭보다는 낭만적인 배경이 인상 깊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그 소설도 미스터리하기는 한데,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동서미스터리북스에 들어갈 만한 소설인데,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누군가는 딴지를 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추리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 상복의 랑데부는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범인도 피해자도 특정된 상황에 수법은 미남계에 의존하는 데다가 그렇게 콧대 높은 여인들이 그 미남계에 훌러덩 잘도 넘어간다. 그 여인들의 가족에게 경고하는 형사 자체도 무능할 뿐더러 경고를 받는 사람들도 피해자나 용의자를 포함한 피해자 가족이나 할 것 없이 고집불통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렇게 쉽게 쉽게 살인이 일어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감이 들 리가 없다. 다 읽고 나면 그저 작가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기는 하지만.

 

별 한 개 주려다가 하나를 올린 것은 두 번째 이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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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의 귀환 동서 미스터리 북스 53
아더 코난 도일 지음, 조용만, 조민영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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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읽어도 재미있는 셜록 홈즈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주석 달린 셜록 홈즈를 보면서 이제 홈즈는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기적으로 홈즈를 읽게 되니 역시 클래식은 영원한 법이다.


그라나다 TV판 셜록 홈즈를 다 보았는데, 수많은 홈즈 중에서도 가장 홈즈다웠다는 제레미 브렛의 시리즈에서 이 책에 실린 에피소드가 상당수 영상화되었다. 드라마도 몰입해서 봤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때의 느낌이 다시 떠올라 좋았다. 참고로 동서미스터리북스 시리즈에서 셜록 홈즈의 모험이나 바스커빌의 개의 표지 사진은 이 드라마의 사진이다. BBC에서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홈즈도 물론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 원작에 충실했다는 점에서는 제레미 브렛판에 한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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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과 선 동서 미스터리 북스 52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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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은 몇 년 전 다른 출판사의 버전으로 읽은 적이 있다. 그때도 감탄하며 봤는데, 지금 확인해보니 별점을 짜게 주었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높게 평가하는 책이 있고 더 낮게 평가하는 책이 있는데, 높게 평가하는 경우는 책의 진가를 그 당시 내가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나의 개인적인 변화와 책 읽기가 합쳐지며 새로운 독서의 즐거움이 생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이 책에는 마스모토 세이초의 점과 선, 제로의 초점 두 소설이 실려 있고 가격은 몇 년 전 그 책보다 더 저렴하다. 가성비 쪽으로도 여기가 나은 셈인데, 꼭 가성비 때문만도 아니고 번역도 개인적으로는 이 쪽이 더 나은 것 같다. 번역의 질의 문제가 아니라 몇 년 전에 읽은 책은 2012년에 나왔고, 이 책은 2002년에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2002년보다 초판은 더 일찍 나왔을 것 같다. , 번역에 있어서 최소 10년에서 그 이상의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러다보니 옛스러운 표현이 좀 더 많아서 오히려 점과 선이 처음 나왔을 때의 일본 모습과 더 어울린다는 느낌이다.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가 읽는 순간 마치 내가 그 시간과 공간에 가서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추리 소설 중 어떤 소설은 자꾸 내가 튕겨져 나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트릭은 완벽한데 내가 그 소설 속에서 등장 인물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소설은 소설, 나는 나 이렇게 느껴지는 경우가 꽤 있다. 이 경우 아무리 트릭이 완벽해도 개인적으로는 좋은 인상을 가지기는 어려웠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비교적 범인이 누구인지 빨리 짐작할 수 있어도 그것과는 상관없이 소설 끝까지 흥미진진했다. 사실 이 소설은 후대에 등장하는 미야베 미유키 등 이른바 사회파 추리소설가들의 원류(源流)라고 볼 수 있는데 소설 마지막 편지에서 이 사건과 핵심적인 관계가 있는 사람이 어떤 자리에 가 있는지를 보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한 인간이, 아니 두 인간이 그저 도구로 사용되어 버린 상황에서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마지막 자살은 누가 봐도 반성이 아닌데 마치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들의 행위를 미화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남녀의 자살, 그 자살이 알고 보니 타살, 다시 두 남녀의 자살로 이어지는 구성도 굉장하다.

함께 실린 제로의 초점은 함께 실린 점과 선 만큼은 아니지만 소설 하나로만은 아쉬웠던 독자에게는 충분히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다. 소설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인상깊었던 한 구절이 있다.

 

아까스미라는 곳은 이 해변에서 약 4킬로쯤 북으로 들어간 해안입니다. 그곳은 매우 높은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요. , , 아주머니는 한국의 해금강(海金剛)이라는 곳을 아시는지요?”

, 이름만은 들었어요. 그런데 아주 높은 낭떠러지라고 하더군요.”

그렇지요, 그 해금강과 똑같은 곳이 이 부근의 해안에 있습니다. 이름도 노또 금강(能登金剛)이라고 부르고 있지요.”

 

갑자기 등장한 해금강에 이게 뭔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작가는 1944년 징집되었고 이듬해 한국에서 패전을 맞았다고 한다. 그때의 경험 때문에 상당수 작품에서 한국 지명이 등장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어령 평론가가 강하게 비난했던 임화와 관련한 소설을 쓰기도 했다고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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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는 죽어야 한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51
니콜라스 블레이크 지음, 현재훈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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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수는 죽어야 한다의 작가는 니콜라스 블레이크라고 한다. 이 이름은 필명이다. 본명은 세실 데이-루이스이다. 이 독특한 성()과 연결시킨 하나의 곁가지 이야기. 그 유명한 배우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이 작가의 아들이다. 최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3회 수상자이자 연기로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의 이 대단한 배우는 현재 잠정적으로 은퇴한 상태인데, 그 당시 나는 은퇴한 배우의 뉴스를 접하면서 슬하에 자식들을 키우고 스스로의 생활을 죽을 때까지 영위할 만큼 충분히 돈을 벌었구나라는 다소 속물적인(?) 생각을 했다. 그야말로 FIRE 족인 셈인데, 이 대단한 배우의 아버지는 아들만큼 본업으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필명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으로 찾아보면 글을 써서 발표할 때에 사용하는, 본명이 아닌 이름, 이라고 되어 있는데 니콜라스 블레이크는 원래 자기 본명인 세실 데이-루이스로 시를 쓰는 영국의 계관시인이다. 여기서부터 헷갈릴 수 있는데, 영국에서 손꼽히는 시인인 세실 데이-루이스가 시만 써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 니콜라스 블레이크라는 이름으로 추리 소설을 써서 가족을 부양했다는 것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 부분은 세 가지. 그래도 그냥 시인이 아니라 계관시인인데도 시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려웠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과 의외로 니콜라스 블레이크의 책이 잘 팔려서 자녀들을 잘 키워냈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추리 소설을 쓰면서 굳이필명을 썼다는 것.

필명으로 추리 소설을 쓰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식으로 하자면 본캐와 구별되는 부캐인 셈인데, 본캐는 명예는 최고지만 돈은 되지 않는 계관시인, 부캐는 잘 팔리는 추리 소설 작가 이렇게 스스로 구별한 게 아닌가 싶다. 이 둘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가장의 책임감과 시인으로서의 책임감 양쪽에서 고민했을 작가가 그려지기도 하고.

이 소설은 필릭스 레인이라는 추리소설 작가가 차사고로 아들을 잃고 복수하기 위해 범인을 추적하는 내용이다. 이 작가의 본명은 프랭크 케언즈라고 하며, 시작부터 작가의 일기로 시작되는데, 우연히 범인의 정체에 다가간 작가가 살인계획을 짜는데 일기에 그 내용이 담겨 있다. 접근이 다소 독특한데, 읽을수록 아무래도 작가가 작정하고 쓴 추리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작정하지 않고 대충 쓴 작가야 세상에 없겠지만, 주인공이 필명을 가지고 있는 추리 소설 작가이며,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아들이라는 점이 자꾸 작가 개인사에 접근하고 싶어지게 만든다. 추리 소설로서의 재미는... 독특하기는 하지만, 훌륭하지는 않다, 이 정도? 이런 소설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소설로는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과 살짝 비슷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당연히 크리스티 쪽이 뛰어난 것이고, 그래도 이 소설은 나름의 재미는 있지만, 계관시인이라는 작가의 본캐 때문인지 추리 소설 특유의 치고나가는 느낌이 덜하기는 하다. 일기라는 형식을 가져온 것도 결국 작가의 자아를 완전히 내려놓지 못하고 어정쩡한 상태였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고, 그 때문인지 일기가 끝나고 후반부에 탐정이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소설이 기우뚱하게 살짝 무너졌다는 느낌도 들고.

함께 실린 스미스 어네스트 브래머의 브룩밴드장의 비극은 맹인 작가라는 캐릭터나 결말도 깔끔했지만 구성이 다소 빈약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이 작가의 최고 소설이 이 소설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옮긴이에 따르면 나는 자신을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 작품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이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이력에 대해 알려진 게 없는 것 같다. 그의 출세작은 The wallet of Kai Lung 이라는, 이야기꾼인 중국 사람 Kai Lung 이 주인공으로 한 시대 전의 중국을 무대로 삼아 아라비안 나이트식 우화를 엮은 것이라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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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시간으로 동서 미스터리 북스 5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안동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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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0시간으로, 포켓에 호밀을 두 소설이 함께 실려 있다. 둘 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기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묶은 이유는 모르겠다. 0시간으로는 배틀 총경이 나오고, 포켓에 호밀을 에는 마플 여사가 나오는데, 배틀 총경이 나오는 소설로만 묶는 게 나았을 것 같다. 물론 마플이나 푸아로에 비해 배틀 총경의 매력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맞다. 마플과 푸아로는 드라마화 되었지만 배틀 총경의 경우에는 내가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0시간으로라는 소설은 영국에서 마플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로 드라마화되었다. 즉 탐정 역할을 마플 여사가 했다는 뜻인데 작가인 크리스티가 살아있다면 섭섭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작가도 어느 정도는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리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틀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에르큘 포아로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지 모르겠군.”

그 벨기에인 할아버지, 몸집 작은 이상한 사람 말입니까?”

몸집 작은 이상한 사람이라니, 그는 독사와 표범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사나이야. 물이 흐르듯 연설할 때는 말이지. 그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그의 독점 무대가 될 텐데.”

p. 184

 

이 소설은 작가가 스스로 베스트 10에 꼽았던 소설이고, 독자들도 좋아한 소설이라 매력적인 이야기라서 제작진도 드라마화 하고 싶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범죄가 처음 시작하는 부분은 마플 여사가 등장하는 카리브해의 비밀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0시간으로, 원제는 Towards Zero 로 다른 출판사에서는 0시를 향하여 라고 번역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더 게임: 0시를 향하여 라는 드라마도 최근에 방영되었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상당부분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그 드라마를 본 것이 아니기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일까? 소설의 시작을 보자.

 

나는 잘 씌어진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네. 하지만 대부분 첫 부분이 나쁘지! 모두 살인으로 시작되거든.

그러나 살인이란 종말에 와서 이루어져야 하네. 이야기는 그 훨씬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지.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 전부터 어떤 사람들을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장소로 이끌어 가며 그 요인과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네.”

p. 14

 

그러니까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플롯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크리스티의 생각이 등장인물인 트리브스의 대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책의 맨 앞에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로버트 그레이브즈라는 사람에게 이 소설을 읽으며 날카로운 비판력을 발휘해 달라는 말을 썼는데, 거장의 뿌듯함과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의도가 드러나는 대사도 나온다.

 

그렇지, 이 시간에도 살인의 막이 열리려 하고 있다. 만일 내가 유혈과 범죄의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면, 먼저 난로 앞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는 한 노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0시간으로 다가가는 노인이니까. 0시간으로.......’

p.16

 

 

두 번째로 실린 포켓에 호밀을 이라는 소설은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소설의 반쯤 되어서야 늦게 등장한다. 이 소설 또한 시작하기 전 첫 단편들을 책으로 펴낼 기회를 준 블루스 잉글럼 씨에게 바친다는 말이 있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단편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집은 마플이 처음 등장하는 화요일 클럽의 살인으로 기억하는데, 첫 단편집은 한참 전에 이미 나온 푸아로 사건집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인물에 대한 묘사가 냉철하다. 오히려 처음 이 책을 황금가지 판으로 접했을 때보다 지금 읽으면서 작가의 통찰에 놀라는 부분이 더 많았다.

 

미스 마플은 패트리시어를 이 집에 있게 하는 것이 어쩐지 가엾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이처럼 호화스러운 장식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올굵은 천으로 지은 스포츠 옷차림으로 말이나 개를 상대하는 전원 생활 쪽이 훨씬 어울리리라고 여겨졌다.

세인트 메리 미드 언저리에서는 어린 말의 경매 시장이 가끔 열리는데, 그때에도 이 젊은 부인과 같은 타입의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미스 마플은 이 굉장한 저택 안에 틀어박혀 어딘지 불행한 그림자가 엿보이는 부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p.386

 

고아들은 다 그렇지요. 그래서 예의범절을 대강 배워 알게 한 다음 하녀로 내보냈어요. 그런데 참아내지 못하고 거기서 뛰쳐나와 술집에 일자리를 구했지요. 그 나이의 아이들이란 모두 그런 생활을 그리워한답니다. 자유롭고 화려한 생활이라고 여기는 거지요.”

나는 그녀를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만, 가엾은 아이였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지요. 아데노이드가 있어서 얼굴은 여드름투성이고 지능 발달도 굉장히 뒤떨어져 있어요. 그 애 자신은 줄곧 남자친구를 바라고 있었지만 남자들은 전혀 상대해 주지 않았으며, 같은 또래 아이들로부터 늘 이용만 당하는 어리석은 아이였지요.”

잔혹한 느낌이 드는군요.”

인생 자체가 잔혹한 것이니까요. 다만 이것은 말할 수 있겠지요. 세상이 글래디스 같은 아이를 다루는 방법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 말이에요. 그런 아이들은 영화 따위의 영향을 받아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오리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가지고 있답니다.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그 꿈에서 깨어날 날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요. 글래디스도 아마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크게 실망을 맛보았을 거예요. 그런 생활이 조금도 화려한 게 못되며 오히려 생활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알았겠지요. 그래서 다시 하녀로 돌아가고 싶어졌던 거예요.”

p.387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다. 본디 가난한 병원 간호사 생활 쪽이 훨씬 행복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자와 결혼하여 돈과 여가는 충분히 있지만, 그런 것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은 듯 보인다. 옷을 사고, 책을 읽고, 맛있는 것을 잔뜩 먹어도 그녀는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렉스가 죽은 날 밤 퍼시벌 부인은 전에 없이 생기 있고 발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의 가슴속에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악마가 깃들여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밤낮으로 둘러싸고 있는 죽은 권태의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p.418

 

"남자는 역시 재산을 목표로 삼는 걸까요?"

"그야 물론이지요. 당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세요?"

"우리 마을에 에리스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같은 목적으로 철물가게 딸인 마리언 베이츠와 결혼했어요. 마리언은 부잣집 딸이라 전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완전히 그에게 빠져 남자의 속셈을 일러주어도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래도 결과는 좋아서 지금은 부부 사이가 원만하답니다. 에리스나 제럴드 라이트 같은 타입의 젊은이는 가난한 집 아가씨와 연애 결혼을 했을 경우 불쾌한 성질이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생활이 고통스러워지면 마치 가난한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라는 듯 여자를 학대하기 시작해요. 그와 반대로 부잣집 사위가 되면 언제까지나 여자를 소중히 여기지요."

p.472

 

요즘 세상에 아이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복수를 꾀하려는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은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은 아이들 쪽이 훨씬 생각이 앞서 있어서 그런 터무니없는 명령은 들어주지 않거든요. 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놀라게 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요. 바로 이 점을 살인자가 잘 이용한 거예요.”

p.507

 

그렇다. 랜슬럿 포터스큐는 머리가 좋고 대담하다. 그런 만큼 또한 터무니없는 점도 있다. 어쩌면 목숨이 달아나게 될 위험도 예사로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다.’

해보겠습니다!”

경감은 힘주어 말했으나 다시 의혹의 구름이 자꾸 솟아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지요.”

그건 그래요. 하지만 추측이라도 일단 믿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여기지 않으세요?”

그렇고말고요, 그러니까 해보는 거지요. 그런 타입의 사나이는 지금까지도 가끔 다뤄 보았으니까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나도 역시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범죄자 타입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패트를 보고 그 사람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어요. 패트는 좋은 부인이에요. 하지만 언제나 불행한 결혼만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그렇지 않은가 하고 그 사나이를 관찰해 볼 생각이 들었지요.”

p. 512

 

이 마지막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결혼을 세 번 한 여성이 그 여성만 놓고 보면 호인(好人, good-natured person)이지만, 매번 불행한 결혼을 했다는 것. 즉 뒤집어 말하면 매번 같은 유형의 남자들에게 끌리고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 앞의 두 남편 또한 머리가 좋고, 대담한 사람들이었다고 마음 속으로 수긍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남편은 공군 조종사로 전쟁에서 사망했고, 두 번째 남편은 요즘 식으로 하면 경제 사범으로 자살했으니까. 터무니없고 목숨이 달아나게 될 위험도 무릅쓰는 남자에게 반복적으로 끌린다는 것은 패트의 특성이고, 그 특성을 토대로 패트의 현재 남편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추리한다는 것인데, 역시 마플 다운 추리이자 크리스티 다운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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