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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복의 랑데부 ㅣ 동서 미스터리 북스 54
코넬 울릿치 지음, 김종휘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평점 :
품절
평점은 주관적인 것이니까 이 작품의 문학성에 대해 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작품만 가지고 이야기했다는 전제 하에 쓴다.
일단 개인적으로 나의 경우는 독자로서 작품을 읽을 때, 구성 상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가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해 그 당사자에게 대상의 상실을 통해 아픔을 준다는 그 구조를 상당히 싫어한다. 사적 복수를 하는 것 그 자체도 경우에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카타르시스의 효과가 있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남발하는 것은 실제 사회는 물론이고 소설이라는 가상의 세계에서도 그리 바람직하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으로 푸아로와 같은 탐정이 등장하는 크리스티의 세계에서도 사적 복수에 대해서는 아주 드물게 손을 들어주는 태도를 취한다.
이 소설의 경우는 주인공인 조니 마 입장에서 중요한 사건의 용의자가 5명인 셈인데, 그 5명 중 한 명이 범인이기에 설령 5명을 다 죽여도 4명은 억울하게 죽게 된다. 그런데 심지어 그 5명이 아니라 5명에게 중요한 사람을 차례차례 죽이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심지어 당한 사람은 내가 복수를 당했는지도 명확히 인지하지 못한다. 첫 번째 사건의 경우 편지까지 받았으나 한참 동안 부인할 정도였고 두 번째 사건의 경우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게다가 용의자 5명은 전부 남자이고, 주인공이 타깃으로 삼은 5명은 전부 여자인데 이쯤 되면 그저 이 사람에게 내재된 살인 욕망을 형상화하기 위한 앞서 일어난 사건을 명분이자 동력의 수단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해서 불쾌해진다. 아무래도 완력이나 이런 저런 수단을 쓸 때 같은 남자끼리 붙는 것보다 실제로도 훨씬 편할 테니까 살인 성공률(?)이 올라갈 것 아닌가. 아마도 주인공은 남성성에 대한 열등감으로 감히 같은 남자하고는 붙지도 못하면서 주변 사람을 죽임으로써 그 사람의 남성성에 스크래치를 내고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다고 외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건지.
소설 속 사건이 주인공 조니 마의 욕망을 형상화한건지, 아니면 이 소설 자체가 작가의 특정한 욕망을 형상화한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여기까지 가면 너무 억측이겠지.
상복의 랑데부를 쓴 코넬 울리치는 환상의 여자를 쓴 윌리엄 아이리쉬와 동일 인물이다. 환상의 여자도 정교한 트릭보다는 낭만적인 배경이 인상 깊은 소설이다. 그러니까 그 소설도 미스터리하기는 한데,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동서미스터리북스에 들어갈 만한 소설인데, 본격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누군가는 딴지를 걸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그 정도면 추리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소설, 상복의 랑데부는 추리 소설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범인도 피해자도 특정된 상황에 수법은 미남계에 의존하는 데다가 그렇게 콧대 높은 여인들이 그 미남계에 훌러덩 잘도 넘어간다. 그 여인들의 가족에게 경고하는 형사 자체도 무능할 뿐더러 경고를 받는 사람들도 피해자나 용의자를 포함한 피해자 가족이나 할 것 없이 고집불통에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렇게 쉽게 쉽게 살인이 일어나니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긴장감이 들 리가 없다. 다 읽고 나면 그저 작가가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모든 작가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기는 하지만.
별 한 개 주려다가 하나를 올린 것은 두 번째 이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