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시간으로 동서 미스터리 북스 50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안동림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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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0시간으로, 포켓에 호밀을 두 소설이 함께 실려 있다. 둘 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이기는 하지만 굳이 이렇게 묶은 이유는 모르겠다. 0시간으로는 배틀 총경이 나오고, 포켓에 호밀을 에는 마플 여사가 나오는데, 배틀 총경이 나오는 소설로만 묶는 게 나았을 것 같다. 물론 마플이나 푸아로에 비해 배틀 총경의 매력이 다소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맞다. 마플과 푸아로는 드라마화 되었지만 배틀 총경의 경우에는 내가 들어본 적이 없다. 심지어 0시간으로라는 소설은 영국에서 마플 시리즈의 한 에피소드로 드라마화되었다. 즉 탐정 역할을 마플 여사가 했다는 뜻인데 작가인 크리스티가 살아있다면 섭섭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작가도 어느 정도는 인정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리치가 고개를 끄덕이자 배틀은 턱을 쓰다듬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에르큘 포아로가 머리 속에 떠오르는지 모르겠군.”

그 벨기에인 할아버지, 몸집 작은 이상한 사람 말입니까?”

몸집 작은 이상한 사람이라니, 그는 독사와 표범을 합쳐 놓은 것 같은 사나이야. 물이 흐르듯 연설할 때는 말이지. 그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그의 독점 무대가 될 텐데.”

p. 184

 

이 소설은 작가가 스스로 베스트 10에 꼽았던 소설이고, 독자들도 좋아한 소설이라 매력적인 이야기라서 제작진도 드라마화 하고 싶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사실 범죄가 처음 시작하는 부분은 마플 여사가 등장하는 카리브해의 비밀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0시간으로, 원제는 Towards Zero 로 다른 출판사에서는 0시를 향하여 라고 번역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더 게임: 0시를 향하여 라는 드라마도 최근에 방영되었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아니지만 상당부분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든다. 그 드라마를 본 것이 아니기에 확신은 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왜 이런 제목이 붙은 것일까? 소설의 시작을 보자.

 

나는 잘 씌어진 미스터리 소설을 좋아하네. 하지만 대부분 첫 부분이 나쁘지! 모두 살인으로 시작되거든.

그러나 살인이란 종말에 와서 이루어져야 하네. 이야기는 그 훨씬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지. 경우에 따라서는 몇 년 전부터 어떤 사람들을 어느 날, 어느 때, 어느 장소로 이끌어 가며 그 요인과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네.”

p. 14

 

그러니까 기존의 소설과는 다른, 새로운 플롯의 소설을 쓰고 싶다는 크리스티의 생각이 등장인물인 트리브스의 대사로 나타나는 것이다. 책의 맨 앞에는 애거서 크리스티가 로버트 그레이브즈라는 사람에게 이 소설을 읽으며 날카로운 비판력을 발휘해 달라는 말을 썼는데, 거장의 뿌듯함과 자랑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드러난 것 같아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좀 더 직접적으로 의도가 드러나는 대사도 나온다.

 

그렇지, 이 시간에도 살인의 막이 열리려 하고 있다. 만일 내가 유혈과 범죄의 미스터리 소설을 쓴다면, 먼저 난로 앞에 앉아 편지를 읽고 있는 한 노인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거야.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0시간으로 다가가는 노인이니까. 0시간으로.......’

p.16

 

 

두 번째로 실린 포켓에 호밀을 이라는 소설은 마플이 등장하는 소설이지만, 소설의 반쯤 되어서야 늦게 등장한다. 이 소설 또한 시작하기 전 첫 단편들을 책으로 펴낼 기회를 준 블루스 잉글럼 씨에게 바친다는 말이 있는데, 아가사 크리스티의 단편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단편집은 마플이 처음 등장하는 화요일 클럽의 살인으로 기억하는데, 첫 단편집은 한참 전에 이미 나온 푸아로 사건집으로 알고 있다. 이 소설은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데, 인물에 대한 묘사가 냉철하다. 오히려 처음 이 책을 황금가지 판으로 접했을 때보다 지금 읽으면서 작가의 통찰에 놀라는 부분이 더 많았다.

 

미스 마플은 패트리시어를 이 집에 있게 하는 것이 어쩐지 가엾게 느껴져 견딜 수 없었다. 이 여자는 이처럼 호화스러운 장식 속에 둘러싸여 있는 것보다 올굵은 천으로 지은 스포츠 옷차림으로 말이나 개를 상대하는 전원 생활 쪽이 훨씬 어울리리라고 여겨졌다.

세인트 메리 미드 언저리에서는 어린 말의 경매 시장이 가끔 열리는데, 그때에도 이 젊은 부인과 같은 타입의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미스 마플은 이 굉장한 저택 안에 틀어박혀 어딘지 불행한 그림자가 엿보이는 부인에게 친근감을 느꼈다.

p.386

 

고아들은 다 그렇지요. 그래서 예의범절을 대강 배워 알게 한 다음 하녀로 내보냈어요. 그런데 참아내지 못하고 거기서 뛰쳐나와 술집에 일자리를 구했지요. 그 나이의 아이들이란 모두 그런 생활을 그리워한답니다. 자유롭고 화려한 생활이라고 여기는 거지요.”

나는 그녀를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습니다만, 가엾은 아이였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정반대지요. 아데노이드가 있어서 얼굴은 여드름투성이고 지능 발달도 굉장히 뒤떨어져 있어요. 그 애 자신은 줄곧 남자친구를 바라고 있었지만 남자들은 전혀 상대해 주지 않았으며, 같은 또래 아이들로부터 늘 이용만 당하는 어리석은 아이였지요.”

잔혹한 느낌이 드는군요.”

인생 자체가 잔혹한 것이니까요. 다만 이것은 말할 수 있겠지요. 세상이 글래디스 같은 아이를 다루는 방법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 말이에요. 그런 아이들은 영화 따위의 영향을 받아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행운이 찾아오리라는 터무니없는 꿈을 가지고 있답니다.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그 꿈에서 깨어날 날이 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지요. 글래디스도 아마 술집이나 음식점에서 크게 실망을 맛보았을 거예요. 그런 생활이 조금도 화려한 게 못되며 오히려 생활고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알았겠지요. 그래서 다시 하녀로 돌아가고 싶어졌던 거예요.”

p.387

 

모든 일이 생각대로 되지 않는데 대한 불만의 빛이 짙게 떠올라 있다. 본디 가난한 병원 간호사 생활 쪽이 훨씬 행복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부자와 결혼하여 돈과 여가는 충분히 있지만, 그런 것으로 행복해지지는 않은 듯 보인다. 옷을 사고, 책을 읽고, 맛있는 것을 잔뜩 먹어도 그녀는 조금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렉스가 죽은 날 밤 퍼시벌 부인은 전에 없이 생기 있고 발랄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것은 결코 그녀의 가슴속에 사람의 죽음을 기뻐하는 악마가 깃들여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밤낮으로 둘러싸고 있는 죽은 권태의 세계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p.418

 

"남자는 역시 재산을 목표로 삼는 걸까요?"

"그야 물론이지요. 당신은 그렇게 여기지 않으세요?"

"우리 마을에 에리스라는 젊은이가 있는데, 같은 목적으로 철물가게 딸인 마리언 베이츠와 결혼했어요. 마리언은 부잣집 딸이라 전혀 세상 물정을 모르고 완전히 그에게 빠져 남자의 속셈을 일러주어도 도무지 들으려고 하지 않았지요. 그래도 결과는 좋아서 지금은 부부 사이가 원만하답니다. 에리스나 제럴드 라이트 같은 타입의 젊은이는 가난한 집 아가씨와 연애 결혼을 했을 경우 불쾌한 성질이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생활이 고통스러워지면 마치 가난한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라는 듯 여자를 학대하기 시작해요. 그와 반대로 부잣집 사위가 되면 언제까지나 여자를 소중히 여기지요."

p.472

 

요즘 세상에 아이들이 자라기를 기다려 복수를 꾀하려는 그런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은 믿을 수가 없어요. 요즘은 아이들 쪽이 훨씬 생각이 앞서 있어서 그런 터무니없는 명령은 들어주지 않거든요. 하지만 기회가 있으면 놀라게 하고 고통을 주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요. 바로 이 점을 살인자가 잘 이용한 거예요.”

p.507

 

그렇다. 랜슬럿 포터스큐는 머리가 좋고 대담하다. 그런 만큼 또한 터무니없는 점도 있다. 어쩌면 목숨이 달아나게 될 위험도 예사로 저지르고 있는지 모른다.’

해보겠습니다!”

경감은 힘주어 말했으나 다시 의혹의 구름이 자꾸 솟아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추측이지요.”

그건 그래요. 하지만 추측이라도 일단 믿어서 나쁠 것은 없다고 여기지 않으세요?”

그렇고말고요, 그러니까 해보는 거지요. 그런 타입의 사나이는 지금까지도 가끔 다뤄 보았으니까요.”

노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나도 역시 그래요. 그래서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범죄자 타입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니오, 이번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패트를 보고 그 사람의 일이 머리에 떠올랐어요. 패트는 좋은 부인이에요. 하지만 언제나 불행한 결혼만 하는 운명에 놓여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에도 역시 그렇지 않은가 하고 그 사나이를 관찰해 볼 생각이 들었지요.”

p. 512

 

이 마지막 부분은 특히 인상 깊었다. 결혼을 세 번 한 여성이 그 여성만 놓고 보면 호인(好人, good-natured person)이지만, 매번 불행한 결혼을 했다는 것. 즉 뒤집어 말하면 매번 같은 유형의 남자들에게 끌리고 결혼 생활을 한다는 것인데, 앞의 두 남편 또한 머리가 좋고, 대담한 사람들이었다고 마음 속으로 수긍을 하게 된다. 첫 번째 남편은 공군 조종사로 전쟁에서 사망했고, 두 번째 남편은 요즘 식으로 하면 경제 사범으로 자살했으니까. 터무니없고 목숨이 달아나게 될 위험도 무릅쓰는 남자에게 반복적으로 끌린다는 것은 패트의 특성이고, 그 특성을 토대로 패트의 현재 남편은 이런 사람일 것이다라고 추리한다는 것인데, 역시 마플 다운 추리이자 크리스티 다운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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