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사실 영화로 먼저 접했다.

 

구찌의 수석 디자이너의 감독 데뷔작,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배우 콜린 퍼스, 그리고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역시 영국 출신의 니콜라스 홀트 때문에 궁금하기도 했다.

 

평론가들의 평은 콜린 퍼스가 생애 최고의 연기를 보였다는 것. 평론가가 아닌 그저 관객에 불과한 내 눈에도 콜린 퍼스의 연기는 훌륭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매튜 구드의 연기도 훌륭했다는 점. 그리고 어바웃 어 보이에서 그저 똘망똘망하고 귀여웠던 소년 니콜라스 홀트의 성인 모습이 반가웠고, 엑스맨 시리즈에서는 알지 못했던 깊이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는 것. 그리고 톰 포드는 의외로 이 작품을 잘 연출해냈다는 점.

 

그래서 원작 소설이 더더욱 기대가 되었다. 사실 원작 소설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영화는 늘 비교 대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뗄레야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 더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은 동성연애자이며, 작가 또한 동성연애자로 주인공을 작가 자신과 같은 해에 출생한 것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누가 보아도 작가 자신의 분신이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출신의 감독 또한 동성연애자이고, 그 때문에 이 작품에 강하게 끌렸다고 한다.

 

이 작품은 영화를 먼저 보고, 다음에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내가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가장 잘 이 작품을 즐기게 된 것 같다.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사용했기 떄문에 소설만 읽어서는 집중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단조롭거나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영화는 시각적으로 훨씬 풍성하기 떄문에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텀을 길게 두지 말고 보면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들이 머릿속으로 그려지면서 소설 속 이야기들을 더 깊이 있게 음미할 수 있다.

 

현재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동성연애자에 대한 차별은 오죽했을까, 또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도 마음껏 내색하지 못하는 슬픔은 어느 정도였을까. 단 하루 동안 이 남자의 삶을 통해서 이 사람의 인생 전체를, 아니 그 일부만이라도 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책을 읽기 전에 들었던 이 의문은 책을 다 읽고 난 지금, '프랙탈'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했다.

 

프랙탈. 임의의 한 부분이 전체와 닮은 도형을 뜻하는 말로, 우리 주변에서는 눈송이나 나무 껍질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단 하루 동안 이 남자의 의식을 찬찬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이 남자의 상실을, 절망을,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에게 연민을, 공감을, 위로를 보내고 싶어졌다면 지나친 생각일까.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이해하는데 하루만으로 부족하다면 평생이 주어져도 모자란 것 아닌가.

 

 그리고 이제 조지 주위에는 온통 남녀들이다. 매일 고속도로라는 컨베이어벨트를 통해 이 공장에 공급되는 재료인 남녀들. 가공되어서 포장되고 시장에 놓일 남녀들이 조지를 향애 다가오고 온갖 방향에서 조지의 앞길을 지나간다. 흑인, 멕시코인, 유대인, 일본인, 중국인, 라틴아메리카인, 슬라브인, 노르딕인, 금발에 비해서 검은 머리가 압도적으로 많다. 학생들은 강의 시간표에 맞춰 종종걸음을 치거나, 이성을 꼬드기며 느릿느릿 걷거나, 열띤 토론을 하면서 한가롭게 걷거나, 혼자서 입을 다물고 걷는다. 걸음은 달라도 모두가 지친 표정으로 책을 들고 있다.

 학생들은 무슨 생각으로 여기에 왔을까? 공식적인 대답은 물론 있다. 앞날을 준비하기 위해서. 그래서 직업과 안정을 얻고, 아이들을 키워서 그 아이들이 앞날을 준비하게 하고, 그래서 아이들이 직업과 안정을 얻게 한다. 그러나 직업 선택에 대한 갖가지 조언들, 가령, 대학교 팸플릿에서 확실한 기술을 배우는 약학과 같은 학과들이나 취업 기회가 많은 여러 전자 계통 학과들을 수입이 좋은 학과로 꼬집어 말하는 것 같은 조언들에도 불구하고, 정말 놀랍게도 아직 시나 소설이나 희곡을 쓰겠다는 학생이 꽤 많다! 이들은 수면 부족으로 멍한 채, 수업과 파트타임 일과 결혼 생활 사이사이 짧은 빈 시간에 글을 휘갈긴다. 수술실에서 걸레질을 하거나, 우체국에서 우편물을 분류하거나, 아기의 입에 젖병을 물리거나, 햄버거를 굽는 동안, 이들의 머릿속은 단어들로 어지럽다. 그리고 반드시 해야 하는 일에 예속된 상태 한가운데 어디에서, 광기는 속삭인다. 경험을 쌓으라고. 무엇을? '경이를!' 지옥에서 한 철을 보내고, 밤으로의 긴 여로에 오르고, 지혜의 일곱 기둥을 지나고, 공허의 선명한 빛을 찾고....... 이런 학생들 중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있을까? 아, 물론이다. 최소한 한 명. 많아야 두세 명. 이 수천 명 중에서.

 이제 그 학생들 속에서 조지는 현기증 같은 것을 느낀다. 아, 세상에. 이 학생들이 모두 어떻게 될까? 무슨 기회가 있을까? 지금 당장 가망이 없다고 소리쳐서 쫓아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조지는 그럴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어이없고 부적절하게, 자신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조지 자신이 학생들에게 희망의 상징이기 떄문이다. 희망은 잘못이 아니다. 정말이다. 조지는 다만 거리에서 진짜 다이아몬드를 5달러에 파는 사람과 같을 뿐이다. 바삐 지나가는 대다수는 감히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을 테니, 다이아몬드를 살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대체 이게 몇 년 전 이야기이지? 어떻게 수십 년 전, 저 멀리 떨어진 나라의 이야기가 현재 한국의 상황과 이렇게 흡사하단 말인가? 우리나라가 일본보다는 10년이 늦고 미국보다는 20년이 늦는다는 이야기를 내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적이 있다. 아마도 그 이야기가 돌았던 시절은 우리 나라가 경제 규모로는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니까, 저 숫자는 기술이나 경제 지표를 의미하는 게 아니었을까, 현재 기준으로는 상황이 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적 분위기나 의식 수준은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다. 그렇다면 저 숫자가 실제로는 더 클 수도 있고. 이것 뿐 아니다. 대학 교수라는 주인공의 직업 특성상, 당시의 대학 모습과 학생들에 대한 묘사가 상당수 등장하는데 놀랄 정도로 지금의 우리나라와 비슷하다. 똑같은 대학생이라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가 도드라지는데, 이 부분은 읽으면서 재미있었다. 내가 아직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생각이 나기도 하고.

 

짙은 색의 단정한 옷, 흰 셔츠와 넥타이(강의실 안의 유일한 넥타이)는 젊은 남학생들의 공격적으로 남성적인 캐주얼웨어와 확연히 구별된다. 남학생들 대부분은 운동화와 흰 울 양말, 추울 때는 청바지, 더울 떄는 반바지(허벅지를 가리는 버뮤다팬트로, 더 짧은 반바지는 강의실에 어울리지 않는다) 차림이다. (중략) 공부하는 학생에서 한순간에도 공사장 인부나 싸움하는 갱으로 변할 것 같은 모습이다. 남학생은 여학생에 비하면 지저분한 어린아이로 보인다. 여학생들은 모두 십대 시절의 칠푼바지나 헐렁한 셔츠, 위로 부풀린 헤어스타일에서 벗어났기 떄문이다. 여학생들은 벌써 성숙한 여인의 분위기를 풍기며, 아주 고상한 파티에 참석하는 차림새로 강의에 들어온다.

 

소설이 영화화되면서 내용이 약간씩 바뀐 게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아마도 결말 부분일 것이겠지만, 그것 이외에도 중간 중간 눈에 띄는 변화가 있다. 20대 시절 이 소설을 접하고 수십 년간 그 감동을 잊지 않았으며, 자신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감독의 말을 생각해 보면, 아마도 이 작품 속 조지를, 감독 자신과 동일시했던 것 같다. 그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소설 속 조지의 몇몇 대사들이 영화에서는 바뀌었는데, 그 기준은 감독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한다.

 

"아니, 환각이라고 말할 만한 효과는 없어. 처음에는 멀미가 나더군. 심하지는 않았어. 그래도 좀 무섭긴 했어. 지킬 박사가 처음으로 약을 먹었을 때도 무서웠겠지. 그런 느낌이었어. 그러다가 색이 아주 밝게 두드러져 보였어. '사람들이 왜 저 색을 못 알아보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야. 식당 테이블에 어떤 여자 지갑이 놓여 잇었는데, 그 빨간색이 지금도 눈에 선해. 신문에 난 스캔들 기사처럼 생생했어. 사람들 얼굴은 캐리커처로 보였어. 무슨 말인가 하면, 그 사람 성격이 확 드러나 보이고, 아주 단순해지고 선명해졌어. 몹시 잘난 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 그대로 자기 몸이 아프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고, 싸움만 바라는 사람도 잇어. 무엇에도 화내거나 공격적이지 않기 떄문에 그저 아름답기만 한 사람도 몇 명 보여. 이런 사람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아, 모든 것이 점점 삼차원이 돼. 커튼이 아주 무거워 보이지. 조각품처럼 보이기도 해. 나뭇결은 꺼끌꺼끌해보이고, 꽃과 식물도 아주 생생해져. 보랏빛 화분 하나는 지금도 눈에 선해. 움직이지는 않지만, 분명 움직일 듯 보여. 움직이지 않고 똬리를 틀고 있는 뱀 같아. ......그러다가 사물이 완전히 본모습을 드러내지. 방의 벽들과 주위 모든 것이 숨을 쉬고, 나뭇결이 액체처럼 흐르기 시작하지. ......그러다가 그런 모습은 서서히 다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가. 숙취는 없어. 약효가 사라진 뒤에는 괜찮아."

 

젊은 시절, 잠깐 약물을 복용하고 난 후의 느낌을 이야기하는 조지의 대사이다. 실제로 약물을 복용한 사람들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렇게 길게 구체적으로 쓰여진 글은 나는 처음 봤기에 흥미로웠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내용이 조금 바뀌었는데, 조지는 자신의 눈썹이 보기 싫어서 밀어버렸다는 이야기를 하며 제자인 케니에게 너는 그렇지 말라고 한다. 바로 감독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고. 감독이 얼마나 이 소설에, 소설 속 조지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 사람들이 침울하고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도 슬프다. 왜 자기 삶을 이렇게 살고 있을까? 물론 보수가 적다. 물론 경제적인 측면세어 큰 희망을 가질 수 없다. 물론 회사 중역들과 섞이는 축복을 즐길 수 없다. 그러나 아직 인생의 4분의 1밖에 살지 않은 학생들과 함께 있는 것이 위안이 되지 않나? 쓸모없는 소비재를 파는 데 도움을 주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조금이라도 만족스럽지 않나? 자신이 이 나라의 직업 중 절망적으로 타락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직업을 가진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나?

 확실히 이 우울한 교수들은 모르고 있다. 알려고 노력하면 좋을 텐데. 그러나 이 사람들은 스스로 이 직업을 택했고, 이 직업으로 살아야 한다. 속이고 거짓말하고 남을 등치는 법을 배웠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그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중년, 장사치, 야바위꾼 같은 다수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고도 얻은 것은, 인정 못 받고 메마르고 어려운 지식 뿐이다. 그렇다. 대중은 지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대중은 지식없어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제품과 실용적인 응용만 바란다. 대중은 말한다. 이 교수들은 한심하다고. 어떤 지식으로 돈을 벌 수 없다면, 그 지식을 왜 알아야 하나? 우울한 교수들은 그런 대중의 말에 어느 정도 동감하며, 자신이 약고 탐욕스럽지 못한 것을 남몰래 부끄러워한다.

 

아, 어쩌면 이렇게 요즘 현실과 다를게 없을까. 인류는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한다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조지는 지금 이 취기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아주 조야하게 말하면, 플라톤의 『대화』같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 그렇다. 그렇지만 『대화』같다는 말이 그럴싸하게 포장한 말은 아니다. 짐짓 겸손한 척하면서 실제로는 서로를 헐뜯는 대결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지루한 주제를 놓고 벌이는 논쟁도 아니다. 무엇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고, 얼마든지 주제를 바꿀 수 있다. 사실,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이 특별한 관계에 함꼐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조지의 생각으로는, 여자와는 결코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여자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는 남자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가능하면 대화 상대 사이에는, 가령 흑인과 백인의 대화 같은, 양극성이 있어야 한다. 대화 상대인 두 사람 사이에는 상반되는 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조지와 케니의 경우처럼, 연륜과 젊음 같은. 왜 상징적인 인물이 되어야 하나? 대화는 그 속성상 개인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대화는 상징적인 만나밍다. 대화에 있어서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편이 갈라지면 안 된다. 그러므로 대화에서는 무엇이라도 말할 수 있다. 굳은 자기주장이나 무시무시한 비밀이라도, 상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나 단순한 은유를 통해서 객관적인 말이 된다.

 조지는 이 모두를 케니에게 설명하고 싶다. 그러나 설명하기에는 너무 복잡하며, 자칫 케니가 이해 못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하다. 무엇보다 조지는 케니가 이해하기를 바라며, 케니가 이 대화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고 믿고 싶다.

 

이것 또한 일종의 상징인 것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은 아니지만, 고대 그리스 시절 동성애가 활발했으며, 그것은 사랑보다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존경이나 찬사와 같은 행위이고 상대의 지식을 내 것으로 전수받고 싶다는 뜻에서 출발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소설 속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사이이며, 여기까지 소설이 오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성적 기류가 흐르는 것이 분명하다. 소설 속에서는 조지, 또는 작가가 가지고 있는 이성애에 대한 혐오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종종 등장하는데, 그것마저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겠지. 이 둘은 대화를 하고 있고, 그러면서 조지가 떠올리는 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최고 학자였던 플라톤의 『대화』. 그리고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상대가 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도 그것을 직접 설명하기에는 망설여지는 것. 애인의 갑작스런 죽음 후 스스로 싱글맨이기를 자처하던 그가 조심스레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닥치는 종말. 어쩌면 우리 모두는 죽을 떄까지 싱글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늘 상대와의 진정한 소통을 갈망해야만 하는 존재일까, 하는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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