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선 이라는 저자의 이름을 내가 처음 접한 것은 일간지의 한 칼럼이었다. 평소에 읽으면서 아~ 톡톡 튀는 저자의 글솜씨에 매력을 느끼던 도중, 이름을 정확하게 확인하고 각인하게 된 것은 의외의 계기였다. 지금은 내용이 정확히 기억 나지 않지만, 어떤 독자의 고민 상담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답을 내어 놓은 글이었는데, 다 읽고 난 후 가장 첫번째로 떠오른 느낌은 '불쾌함' 이었다. 그렇다면 왜일까, 그 내용이 얼토당토하지 않아서? 전혀 아니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고민이라서? 그것도 아니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시 그 독자의 고민은, 그 당시에 나도 가지고 있던 고민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독자의 개인적인 사정에 내가 마치 내 일인 것처럼 이입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보니 임경선의 글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는지도 모르겠다. 당시 썩 유쾌하지 못했던 내 감정과는 관계없이 임경선의 조언은, 옳았다. 그것은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내가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수긍은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내가 기분이 나빴던 것은 왜일까?
얼마 전에 유명한 스타 강사가 논문 표절 의혹으로 한동안 홍역을 치룬 일이 있었다. 나는 그 사건의 전후를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그녀는 한 동안 그 일 때문에 쉴 수 밖에 없었고, 얼마 전 복귀하면서 한 인터뷰를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본인 나름대로 억울한 면도, 속상한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무심히 읽어나가던 도중, 내 눈이 멈춘 부분이 있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쉬다 보니 아무래도 개인적인 시간이 많아졌는데, 자신이 강연을 한참 하고 다닐 무렵, 자신에 대해 누군가가 SNS에 남긴 글을 보게 되었다고. '김미경 강신주 법륜스님 이 세사람은 나에게 폭력적인 사람이라고, 어른 흉내를 내며 꾸짖기만 한다고, 나다운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차라리 무관심이 낫다'고. 그동안 내가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고 싸잡았구나, 또 다른 숲을 보는 충격에 며칠간 고민했다고. 법정 스님 말대로 글쓰고 말하는 일 모두 업보를 쌓는 일이라며 앞으로 자신은 소수의 생각과 상처를 존중하는 법을 찾겠다고. 그 대목을 보고 알았다. 아, 공감이 실려 있지 않은(혹은, 듣는 이가 공감을 느끼지 못하는) 충고는 마음만 다치게 하는구나. 나 또한 이런 실수를 누군가에게 했을 것이고, 내가 이유도 모르게 누군가의 충고를 듣고 머리로는 그게 옳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가슴으로는 반발을 했던 것이 이 때문이로구나.
아마도 나는 칼럼을 읽으면서 아무런 애정이나 공감없(다고 내 주관적으로 느껴지)는 조언 때문에 상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문제는 작가가 아니라 그 당시 나에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일들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게 여러모로 망설여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은 기쁘게도(?) 작가에 대한 내 선입견을 깨는 계기가 되었다. 칼럼과 이 책 사이, 몇 년의 세월이 흐르며 아마도 작가 나름대로 터득한 지혜가 있었던 걸까. 날카롭게 충고를 하면서도, 그 충고의 사이사이에 따뜻한 조언과,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비슷한 자기 계발서류에 상처받았던 적이 있다면, 이 책은 분명히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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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로 살다 보면 '괜찮은 워킹우먼+나쁜 아내'의 시기가 있을 수도 있고 '보통 워킹우먼+보통 엄마+불량 아내'로 조합된 시기도 있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직장생활과 자녀 양육 및 살림을 완벽하게 해낼 수는 없다.
일하는 여자들은 '일이냐, 결혼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딜레마에서 스스로를 해방시켜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양쪽의 가치를 다 가질 수 있다. 단, 완벽주의자 기질만 과감히 버린다면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라고 푸념하지만, 가격대비 양질의 호텔을 비교하고 현지에서의 가장 효율적인 동선을 과제처럼 연구하는 그녀들은 이미 아무 생각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다. 그 모진 상사의 말대로 몸과 마음의 건강관리 모두가 '커리어 관리'의 불가결한 일부다. 남이 나를 챙겨주기를 기대하기 전에 내가 나를 먼저 챙겨야 하는 곳이 직장이다.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만났을 때는 거부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자책할 필요도 없었다. 단, 그 상황에서 한 발짝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삼키고'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신의 야속한 장난처럼 보이는 사건에 맞닥뜨릴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그 상황에서 또 다른 새로운 길이 보이는 법이다. 불안감과 초조함을 이겨낸 뒤 찾아오는 변화된 인생의 항로에는 새로운 발견과 선물이 있다는 것을 믿어도 좋다.
남자들은 선의로든 악의로든 주변의 워킹우먼을 직장에서의 딸, 아내, 누이, 여동생으로 보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여자를 자신들이 보호해줘야 하는 약자로 생각하는 우월적 사고가, 약자인 여자들과의 경쟁을 거부하는 심리가 깔려 있다. 여성성이 가지는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독립적이고 능력 있는 워킹우먼이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그들에 맞추어 역할설정을 하는 것보다 내가 스스로의 위치를 독창적으로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남녀간 연애처럼 때로는 적당히 둔감해지는 것이 회사와의 관계를 오래 유지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여자들은 연애에도 직장일에도 너무 예민하게 올인하는 탓에 스스로 에너지를 소진시키는 우를 범한다.
회사에서 인정받는 것은 인간성을 평가받는 것과 다르다. 부하직원에게는 인간성 좋은 상사보다 유능한 상사가 필요하다. 상사가 조직 내에서 파워를 가지고 있어서 타 부서에 지지 않는 것이 싫은 소리 안 하는 상사보다 훨씬 도움이 된다. 부하직원이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지시하기가 계면쩍어서 본인이 그냥 알아서 해치우는 것도 이런 착한 여자 상사들의 공통된 습성이다. 과거 사원 시절에 혼자 일을 다 끌어안고 끙끙대던 습성이 남아 있어서 부하직원들에게 일을 과감히 맡기는 것이 무척 서툴다. 자신이 맡은 일을 더욱 잘해내기 위해서는 필요에 따라 부하직원들이 가진 저마다의 능력을 주저없이 적시에 빌리고, 그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협조를 뽑아내기 위해 그들에게 과감히 일을 맡겨야 한다.
피고용자 마인드란 '어차피 내가 노력해봤자 남 잘되게 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지 않도록 몸을 사리는 습성이다. 하지만 그렇게 몸을 아껴봤자 잠시 몸만 편할 뿐 긴 안목에서 보면 자기능력을 계발할 기회를 스스로 놓치는 셈이다. 당장은 하찮아 보이더라도 자신이 낸 실적 하나가 회사의 목표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있는지를 안다면 더욱 일할 맛이 날 것이고 부과된 업무 외에도 추가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짜내서 효과를 배가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고민의 근원은 그녀가 자신의 출근복을 '패션'으로 간주한다는 데에 있다. 패션은 자기 표현이며 성인인 이상 남들이 이래라 저래라 하기 힘든 사적인 영역이다. 하지만 몸담고 있는 회사가 패션의 독창성과 자유를 독려하는 패션관련 회사가 아닌 바에야 그것은 패션이 아니라 '차림새'의 문제가 된다. 기본적으로 스타일의 80퍼센트는 그 직장과 업종의 요구에 맞춰주는 것이 좋다. 80퍼센트는 조직 내 조화를 고려하고 20퍼센트는 그 조화를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창의적인 개성을 발휘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남녀 막론하고 옷차림새와 외모는 일을 대하는 그 사람의 태도를 드러낸다. 즉, '일을 잘할 것처럼 보이는 외모'도 필요한 것이다.
조직생활은 이렇게 같은 회사에 다닌다는 것 말고는 거의 공통점이 없을 법한 사람들이 좁은 공간에 모여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야만 하는 엄청난 감정노동을 동반한다.
첫째,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생각은 애당초 접어라. 눈 질끈 감고 내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할 생각도 하지 말고 사랑받을 생각도 하지 말자. 피를 나눈 가족이나 십년지기 친구들과도 오해와 갈등을 겪는데 하물며 공통점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여러 사람들과 서로 진정으로 이해하고 보듬어주기가 어디 쉬울까?
둘째, 회사 내 인간관계의 스트레스에 대한 대가도 월급 안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해라. 인간관계에 대한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는 당연한 것이고 직급이 올라간다고 해서 반드시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 직급과 환경에 맞는 새로운 인간관계 스트레스가 기다리고 있다고 보면 무방하다.
셋째, 회사라는 조직체는 자선단체가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이기적인 행동을 취한다. 그리고 여기서 이기적이라 함은 그로서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매우 이성적인 행동임을 뜻하기도 한다. 고로 권선징악의 단순한 룰에 따라 증오해야 할 대상을 정해놓고 누군가를 미워하며 스스로의 감정을 소모시키는 것은 괜한 낭비다. 차라리 무관심하자.
넷째, 미운 사람은 잊으려고 애써야 하지만, 반대로 나를 도와준 사람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결국엔 평생에 걸쳐 나를 지속적으로 도와줄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방어적이면서도 공격적인 사내정치는 상사와 우호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상사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이라면 동료나 후배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도 쉬울 것이다. 상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상사의 입장을 이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부하 직원에게 자신이 어떤 상사로 비춰질지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상사보다 낫다고 확신하게 되는 이유는 뭘까? 상사의 한 가지 약점을 발견하고 그것만으로 상사의 모든 점을 과소평가하기 때문이다. 상사가 '약한' 특정 업무에 우연히 내가 '강하면' 자신이 그렇게 잘나 보일 수가 없다. 그런 일이 몇 번 생기면 그때부터는 아예 상사를 무능력자로 낙인 찍어버리는 것이다.
정신없이 일하는 여자들 중에는 일이 다 끝나고 나중에 가서야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닫는 뒷북치는 둔감한 이들도 있는데, 일일이 주변 사람들 신경 썼다가는 본인이 못 견딘다. 자신의 행동이 공정하고 떳떳하다면 이제는 유능해서 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목의 집중을 받는 만큼 부담도 커서 괴롭겠지만 앞서 나가는 사람은 늘 외롭고 고된 법이다. 다만 가끔은 자신의 언동이 경우에 어긋나지 않았는지, 다른 동료들에게 상처를 주고 있지 않았는지 객관적으로 반추해보는 것도 필요하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탓에 한동안은 괜스레 졌다는 패배의식과 창피함 때문에 고통을 느낄 것이다. 한 가지라도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벌어졌을 때 뭐든지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시키는 습관이 들면 곤란하다. 콤플렉스 타령이 현실을 위로하기 위한 진통제처럼 쓰이면 정작 자신이 제대로 극복해야 할 콤플렉스가 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보다 긴 안목으로 커리어플랜을 바라본다면 자학적인 비교가 의미 없을 뿐만 아니라 이왕 승진했다면 그것이 내가 친하게 지내던 동료인 것이 훨씬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사람 일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서 시간이 좀 더 지나면 어느덧 당신이 더 높은 직급에 올라 있을 수도 있고 한 때 질투 대상이었던 그녀가 이제는 현모양처가 되기를 선택해 경주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물론 더 높은 직급의 명함을 가진 사람이 이겼다거나 더 행복한 것은 아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수직적인 평가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니까.
한 번이라도 윗사람이 돼본 경험이 있으면 알 것이다. 아랫사람이 내게 싫은소리 하는 것을 듣는 심정을. 그리고 그게 맞는 말일수록 더욱 못마땅하다. 대부분의 평범한 윗사람들에게는 일이 조금 서툴더라도 자신의 가르침에 순순히 수긍하는 직원들이 훨씬 예쁜 법이다. 특히 3~5년차 대리쯤 되면 회사 돌아가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또 회사 어른들의 '구린' 것이 하나둘 눈에 띄는 시기라 '정의감'에 불타오르기 쉽다. 또한 부하직원을 처음 거느린 팀장이 되었을 땐 마찬가지로 내 밑의 직원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하에 자칫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팀을 보호하는 게 아니라 소영웅처럼 감정적인 선택과 행동을 함으로써 그 팀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여자 상사는 아직 상대적으로 소수이기 때문에 바꿔 말하면 그만큼 노력해서 그 자리에 오른 것. 그러다 보니 여자 상사들의 어깨엔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기 십상이다.
무조건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며 정면 돌진하는 것보다 서로 다른 일로 부딪치는 기회를 최소화하고 일 얘기만 한다든가, 반드시 다른 사람을 포함시켜 일을 진행하는 등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싫은 사람과의 교제로 마음고생 하느니 좋아하는 사람, 나를 성장시켜주는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의미 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책상정리를 잘하는 것처럼 실은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중간 중간 정리를 해나가며 살아간다. 어차피 포기해야 할 인간관계라면 눈 딱 감고 쓰레기통에 넣어버리자. 최소한 인간관계에 관한 한 완전한 회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20대에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일을 경험해보아햐 한다고 생각하는데 20대에 최선을 다해 노력해본 경험이 있어야 30대에 할 수 있는 일의 용량이 커지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의 치열했던 경험이 자신감으로 연결되어 경력이 쌓이면서 훨씬 더 나은 일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최소한 20대 중반 무렵까지는 쉽게 현재의 일을 포기한 채 바로 전직에 눈을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어느 정도 비중 있고 치열한 일을 나한테 맡겨줄 때까지 전직하지 않고 일단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30대 전직의 키포인트는 장기적 커리어 목표에 도움이 되는 실무경험을 쌓을 수 있느냐의 여부다. 같은 직종이라도 개개인의 책임과 권한이 더 커지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회사를 선택해서 도전해본다거나, 여태까지 일해온 분야에 좀더 깊이 있는 경험을 쌓을 수 있는 미래에 대한 능동적인 투자를 많이 하는 회사로의 전직이라면 생각해봄직하다. 20대의 전직은 자신을 맹렬하게 하드 트레이닝시켜 줄 수 있는 곳으로 일부러 뛰어들어가는 것이어야 하고, 30대의 전직은 장차 오랫동안 어떤 일을 하고 싶다는 비전에 따라 빠진 퍼즐조각을 끼워맞춰 완성해가는 것이어야 한다.
직장에서 작든 크든 성취해낸 일이 한 가지라도 있다면 혼자서 자축해보는 것도 좋다. 나의 경우 기쁜 일이 있을 때 귀갓길에 탐스러운 장미 한 다발을 사서 집에 장식해놓곤 했다. 영원히 존재하는 것보다 금방 없어지는 물건은 그 순간을 향유하는 정취가 있고, 또 꽃만큼 감정이 사치스러워지는 것도 없다.
긍정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우울증은 우리가 일해온 방식이나 살아온 방식을 재검토하고 궤도수정할 기회를 주는 선물과도 같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것은 일이나 인간관계에서 상당히 무리를 해왔다는 증거다. 나를 이해해주지 못하는 상사 밑에서 스트레스를 쌓아가면서 소모품처럼 일해왔다면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해도 괜찮은지,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정말 이 일인지, 신중히 심사숙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