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라면 힐러리처럼 - 꿈을 품은 모든 여자가 세상의 중심에 우뚝 서는 법
이지성 지음 / 다산북스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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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읽고 마이리뷰를 쓴 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이다. 그 때 나는 20대 초반, 지금 나는 20대 후반이다. 오랜만에 책장 정리를 하다가 그 당시 얼마나 감동적으로 읽었던지,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았더도 그 충격만큼은 기억이 나서 책을 뽑아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이 책을 읽고 막연히 두근거렸던 것 같다. 그리고 6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마음 한 쪽 구석이 싸해 온다. 안타까워서. 내가 이 책을 일주일에 한 번씩만 읽었더라면, 나와 있는 구절 하나하나를 머리에 새겼더라면, 지금 좀 더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명문대이기는 하지만 최상위대학은 아니었고, 집안이 좋았던 것도 아니며, 타고난 재능보다 후천적 노력으로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 된 힐러리. 그 후천적 노력은 그녀의 20대에 폭발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지금까지의 커리어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내 지난 6년이 너무나 아까웠다.

 

하지만 몇 가지는 아직도 나에게 유효하다. 직업을 가지고, 전문가가 되고, 신중하게 투자하고, 작은 이익을 소중하게 여기라는 것. 돈을 버는 여자가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 위기의 순간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마음의 수평을 지키고 하던 일을 계속 할 것. 누군가의 공격에 어쩔 줄 몰라하거나 도망치지 말고, 노련한 권투선수처럼 웃는 얼굴로 맞받아치라는 것. 적극적인 노력으로 좋은 멘토의 멘티가 되라는 것. 책을 많이 읽되, 강렬한 영감과 지적 자극을 주는 철학, 사회학 위주의 어려운 책을 읽으라는 것.

 

존 스튜어트 밀 식 권장도서

논어 맹자 순자 노자 장자 열자 묵자 손자 한비자 사기본기 사기열전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뤼시스 크리티아스 알키비아데스 프로타고라스 국가 티마이오스 소피스테스 정치가 필레보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영혼에 관하여 범주론 명제론 소피스트적 논박

키케로: 의무론 최고선악론 노년에 관하여 우정에 관하여

데카르트: 성찰 방법서설

 

대학 4년의 평균 학점이 2.2인 저자와 같은 사람도 TV와 인터넷을 끊고 책을 읽기 시작한 지 10년이 채 안 되어 동기 중 유일하게 TV에 나올 정도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는 부분은 나에게 동기 부여가 되었다.

 

그리고 글쓰기 노하우.

1. 작게 시작하라.

2. 양으로 승부하라.

3. 정기적으로 글을 써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라.

4. 자신의 생각을, 발로 뛰어서 쓰라.

5. 글쓰기 자료 수첩을 만들어라.

 

실행에 옮겼지만 미약한 부분도, 아직 실행에 미처 옮기지 못한 부분도 있다. 이 책을 좀 더 일찍 가슴에 새겼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우연히 책장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책을 다시 읽어내려가며 너우 늦지는 않았다는 반가움이 동시에 드는 가운데, 최근 방향을 잡지 못하고 휘청하고 있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된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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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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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 원인

 

 

I. 사랑결핍

 우리의 '에고'나 자아상은 바람이 새는 풍선과 같아, 늘 외부의 사랑이라는 헬륨을 집어넣어 주어야 하고, 무시라는 아주 작은 바늘에 취약하기 짝이 없다. 동료 한 사람이 인사를 건성으로 하기만 해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런 답이 없기만 해도 우리 기분은 시커멓게 멍들어버린다. 누가 우리 이름을 기억해주고 과일 바구니라도 보내주면 갑자기 인생이란 살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환희에 젖는다. 따라서 물질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관점에서도 우리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자리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자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지 결정하며, 결과적으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지 아니면 자신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는지 결정한다. 이 자리는 우리에게 전례 없는 중요성을 가지게 된 일용품, 즉 사랑을 얻는 열쇠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자신의 인격을 신뢰할 수도 없고 그 인격을 따라 살 수도 없다.

 

 

II. 속물근성

 이 말은 처음에는 높은 지위를 갖지 못한 사람을 가리켰으나, 곧 근대적인 의미, 즉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상대방에게 높은 지위가 없으면 불쾌해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을 속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을 경멸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는 것, 즉 그 사람의 조롱받아 마땅한 매우 유감스러운 차별행위를 묘사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분명해졌다. 속물의 독특한 특징은 단순히 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인간의 가치를 똑같이 본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다보면 결국은 두려움이 모든 일의 근원이라는 느낌이 든다. 자신의 자리에 확신을 가지는 사람은 남들을 경시하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지 않는다. 오만 뒤에는 공포가 숨어 있다. 괴로운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만이 남에게 당신은 나를 상대할 만한 인물이 못 된다는 느낌을 심어주려고 기를 쓴다. 젊은 시절에 속물근성에 분개했다고 해서 그 뒤에 점차 스스로 속물이 되어가지 말란 법도 없다. 거만한 사람에게 무시를 당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얻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기 때문이다(어떤 사람들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를 좋아하는 것도 싫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 두드러지는 집단의 속물근성은 모든 사람을 사회적 야심의 방향으로 유도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런 야심을 못마땅해하다가도, 어느새 그것이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하게 확실한 수단인양 쫓아다니게 된다.

 

 

III. 기대

 내년도 작년과 똑같을 것(똑같이 나쁠 것)이라고 예상하던 순환론적인 낡은 세계관은 사라지고, 인류는 매년 완벽한 상태를 향해 진보한다는 세계관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이런 인상적인 물질적 발전이 닉슨의 소비에트 연설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현상을 수반한다는 곤혹스러운 사실은 그렇게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현상이란 서구의 보통 시민에게 지위로 인한 불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어들었지만,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고 외려 늘어나기까지 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이야말로 불안과 울화의 원천이다. 불평등이 사회의 일반 법칙일 때는 아무리 불평등한 측면이라도 사람들 눈길을 끌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대체로 평등해지면 약간의 차이라도 눈에 띄고 만다. 그래서 풍요롭게 살아가는 민주사회의 구성원이 종종 묘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평온하고 느긋한 환경에서도 삶에 대한 혐오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발전한 사회는 역사적으로 볼 때 전보다 높아진 소득을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를 더 부유하게 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과를 놓고 볼 때 우리를 더 궁핍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무제한의 기대를 갖게 하여 우리가 원하는 것과 얻을 수 있는 것, 우리의 현재의 모습과 달라졌을 수도 있는 모습 사이에 늘 간격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적은 것을 기대하면 적은 것으로 행복할 수도 있다. 반면 모든 것을 기대하도록 학습을 받으면 많은 것을 가지고도 비참할 수 있다. 우리는 조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 대가는 우리가 현재의 모습과 달라질 수 있는데도 실제로는 달라지지 못하는 데서 오는 끊임없는 불안이다.

 

 

IV. 능력주의

 

 첫 번째 이야기: 빈자가 아니라 부자가 쓸모있다

 과거의 경제 이론에서 부자는 한정된 재물인 국부에서 너무 많은 몫을 챙겨간다고 비난을 받았다. 스미스는 "막대한 재산"을 가진 사람을 "사회의 해충으로, 괴물로, 작은 물고기를 모두 삼켜버리는 큰 물고기"로 보고 싶은 유혹이 생기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부는 한정된 것이 아니다. 부는 기업가와 상인의 노력과 야심을 통하여 늘어날 수 있다. 큰 물고기는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기는커녕 돈을 소비하고 일자리를 제공하여 그들을 돕는다. 큰 물고기가 오만하고 상스러울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악덕은 시장의 작용을 통해 미덕으로 바뀐다. 스미스는 이 점을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구적을 통해 설명해놓았다. "그들은 이기심과 탐욕을 타고났지만, 그들은 오직 자신의 편리만 추구하지만, 그들이 고용하는 사람들의 노동으로부터 그들이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의 만족뿐이지만, 결국 부자들은 모든 개선의 산물을 빈자들과 나누어 가진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마치 땅을 모든 사람이 균등하게 나누어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생활필수품을 고르게 분배하며, 그 결과 의도와 관계없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고 종의 증식 수단을 제공한다."

 

 두 번째 이야기: 지위에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경제적인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속이나 다른 유리한 조건 없이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둔 개인은 과거 아버지에게서 돈과 저택을 물려받았던 귀족은 결코 경험할 수 없었던 개인적 정당성의 요소를 확보했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 실패는 과거에 삶의 모든 기회를 박탈당했던 농민은 다행스럽게도 겪을 필요가 없었던 수치감과 연결되었다. 훌륭하고, 똑똑하고, 유능한데도 왜 여전히 가난한가 하는 문제는 새로운 능력주의 시대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 사람들이 답을 해야 하는(자기 자신과 남들에게) 더 모질고 괴로운 문제가 되었다.

 

 세 번째 이야기: 가난한 사람들은 죄가 많고 부패했으며 어리석음 때문에 가난한 것이다

 능력주의 사회의 비옥한 귀퉁이에서 움트는 더 가혹한 의견들에 따르면, 사회적 위계는 단계마다 거기에 속한 사람의 자질을 엄격하게 반영한다고도 한다. 따라서 훌륭한 사람들이 성공하고 게으름뱅이가 실패할 조건은 이미 굳어져 있는 셈이고, 결국 자선, 복지, 재분배 장치, 단순한 동정의 필요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리 비천하다 해도 자신에게 모든 기회가 열려 있음을 안다......만일 되풀이하여 '바보'라는 낙인이 찍히면 허세를 부릴 수가 없다......이제는 자신이 열등한 지위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과거와는 달리 기회를 박탈당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열등하기 때문에 말이다."

 능력주의 체제에서는 가난이라는 고통에 수치라는 모욕까지 더해지게 된다.

 

 

V. 불확실성

 

 불안은 현대의 야망의 하녀다. 생계를 유지하고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려면 적어도 다섯 가지 예측 불가능한 요인이 뜻대로 따라주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회적 위계 내에서 자신이 바라는 자리를 얻거나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되기도 한다.

 

 (1) 변덕스러운 재능

 지위가 성취에 의존한다면 성공에 일반적으로 필요한 것은 재능과 그 재능을 믿을 만하게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활동에서 재능은 우리 마음대로 부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재능은 한 동안 우리 손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아무 말도 없이 사라져 그간의 성공마저 물거품으로 만들곤 한다. 우리는 최고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전면에 내세울 수 없다. 우리는 가끔씩만 재능을 보여줄 뿐, 평소에는 그런 재능의 소유자답지 못하게 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리의 성취의 많은 부분은 외적인 힘이 준 선물처럼 보일 수도 있다.

 

 (2) 운

 우리의 지위의 문제를 우연적 요소들에 맡긴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합리적 통제라는 관념에 완전히 물들어, '불운'이 실패를 설명하는 그럴듯한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을 폐기해버린 세상에 산다는 것은 더 힘든 일이다.

 

 (3) 고용주

 삶의 조건의 예측 불가능성은 우리의 지위 문제가 고용주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대부분의 사업체가 피라미드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피고용자로 이루어진 넓은 밑변은 관리자들로 이루어진 좁은 꼭짓점에 굴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보상을 받고 누가 뒤처지느냐 하는 문제는 작업장을 억압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요인이 되며, 이런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불안이 자라나게 된다. 조직의 피라미드를 성공적으로 기어 올라가는 등반가는 자신이 맡은 일에서 최고라기보다는, 문명화된 삶에서는 지침을 얻기 힘든 여러 가지 음침한 정치적 기술에 가장 숙달된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젠가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적과 함께 살아야 하고, 언제 원수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친구와 함께 살아야 한다."

 "세상은 장점 자체보다는 장점의 표시에 보답을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것보다는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

 

 (4) 고용주의 이익

 고용의 안정성은 조직 내의 정치만이 아니라 회사가 시장에서 계속 이윤을 내는 능력에도 달려 있다. 많은 노동자들이 치열한 경쟁으로 인해 녹아내리는 부빙(浮氷) 위에 서 있는 듯한 불안감을 느낀다. 그것은 회사가 이윤을 개선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빠른 방법이 언제나 피고용자 숫자를 대폭 줄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세계 경제

 회사와 종업원들의 생존은 경제 전체의 성적 때문에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경제 환경의 진정한 위협에 대한 반응으로는 히스테리보다 지속적인 불안이 더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실패에 대한 생각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은 성공을 해야만 세상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웃어줄만한 확실한 이유가 없으면 좀처럼 웃어주지 않는 법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든버러, 1776)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저녁을 먹게 되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이나 빵가게 주인이 자비로운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의 인간성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해야 한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사이에 어떤 동지애가 이룩된다 해도, 노동자가 어떤 선의를 보여주고 아무리 오랜 세월 일에 헌신한다 해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지위가 평생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 그 지위가 자신의 성과와 자신이 속한 조직의 경제적 성공에 의존한다는 것, 따라서 자신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 감정적인 수준에서 변함없이 갈망하는 바와는 달리 결코 그 자체로 목적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늘 불안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용의 이런 불안정이 문제가 되는 것은 돈 때문만은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일을 기준으로 남들이 우리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질문에 우리가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우리를 대접하는 방식을 결정한다. 이것은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맨 처음에 대답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대하여 당당하게 대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은 경제학자가 그리는 그래프의 상승과 하강에 달려 있으며, 시장에서 벌어지는 경쟁에 달려 있으며, 운과 영감의 변덕에 달려 있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우리의 요구에는 변함이 없어, 유아 시절과 비교해봐도 줄어든 것 없이 꾸준하고 집요하다. 그래서 우리의 요구와 세상의 불확실한 조건 사이의 불균형은 지위에 대한 불안을 끈질게 들쑤시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불안의 해법

 

 

I. 철학

 철학은 외부의 의견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 새로운 요소를 도입한다. 상자를 하나 떠올리면 좋을 것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른 사람들의 인식은 모두 이 상자에 먼저 들어가서 평가를 받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참이면 더 강한 힘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만일 거짓이면,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하고 털어버리는 것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해도 주지 못하고 사라져버린다. 철학자들은 이 상자를 '이성'이라고 불렀다. 철학은 성공과 실패의 위계를 완전히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판단 과정을 재구성할 뿐이다. 따라서 철학은 주류의 가치 체계에서는 어떤 사람이 부당하게 모욕을 당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부당하게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철학은 불안도 종류에 따라 쓸모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불안 때문에 잠 못 이루며 성공을 거둔 불면증 환자들이 오래전부터 강조해왔듯이 생존에 가장 적합한 사람은 불안에 떠는 사람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인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물질적인 면에서 보자면, 공동체로부터 무시당할 경우 신체적으로 불편하고 위험할 수 있다. 심리적인 면에서 보자면,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을 경우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유지할 수 없다. 철학적인 접근방법의 장점은 심리적인 면에서 드러난다. 누가 우리에게 반대하거나 우리를 무시할 때마다 상처를 입는 대신 먼저 그 사람의 그런 행동이 정당한지 검토해보게 되기 때문이다. 비난 가운데도 오직 진실한 비난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흔들어놓을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의 인정을 바라며 자학하는 습관을 버리고 그들의 의견이 과연 귀를 기울일 만한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사랑을 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에 존경할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무작위 집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II. 예술

 

 비극

 나의 실패를 다른 사람들이 차가운 눈길로 바라보며 가혹하게 해석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는다면 일에서 실패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비극작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실패에 평소보다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면, 그것은 그 작품을 통해 실패의 유래를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더 많이 아는 것은 곧 더 많이 이해하고 용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의도와 결과 사이의 비틀린 관계를 만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신문에서 단순히 실패의 이야기의 뼈대만 읽었을 경우라면 가지게 되었을 무관심한 태도, 또는 적의에 찬 태도를 버리게 된다. 비극은 실패나 패배에 대한 단순화된 관점을 버리게 하고, 우리 본성의 풍토병과 같은 우둔과 일탈을 너그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희극

 프로이트는 계속해서 농담을 통하여 위험한 메시지가 "농담의 형태가 아니라면 결코 듣지 않을 사람의 귀에도 들어가게 할 수 있다.....[그래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비판할 때 농담을 특별히 애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높은 자리에 있다고 해서 모두 희극적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중요한 외과 수술을 하는 의사를 조롱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술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서 거만하게 의학적 은어로 부인과 딸들을 으르는 의사는 조롱할 수 있다.우리는 정당화할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것은 조롱한다. 유머는 높은 지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는 데 유용한 도구일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잏하고 조절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만화가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면 당황하거나 창피해 할 수 있는 상황이나 감정에서 웃음을 끌어낸다. 우리는 그런 유머를 보고 들으면서 세상에는 나만큼이나 질투심 많고 사회적으로 허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처럼 돈 문제 때문에 고민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처럼 멀쩡한 표정을 짓지만 속으로는 약간 맛이 간 상태인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안심한다. 또 나처럼 고통받는 이웃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은 마음도 생긴다. 마음이 상냥한 만화가들은 지위로 인한 우리의 근심을 보고 우리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놀린다. 그들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는 전제 하에 우리를 비판한다. 그들의 교묘한 솜씨 덕분에 우리는 마음을 열고 웃음을 터뜨리며 우리 자신에 대한 씁쓸한 진실을 받아들인다. 만일 그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를 비난했다면, 우리는 분노하거나 상처를 입고 움츠러들었을지도 모른다.

 

 

III. 정치

 

 사회마다 각기 특정한 종류의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보편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높은 지위를 얻을 수 있는 기술이나 자질이 다른 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거나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높은 지위를 결정하는 요인들이 계속 바뀌면서, 자연스럽게 지위에 대한 불안을 촉발하는 요인들도 바뀌어간다. 인생은 하나의 불안을 다른 불안으로 대체하고, 하나의 욕망을 다른 욕망으로 대체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불안을 극복하거나 욕망을 채우려고 노력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노력은 하더라도 우리의 목표들이 약속하는 수준의 불안 해소와 평안에 이를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직업이 주는 매력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 직업에 포함된 많은 것이 편집되고 오직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만 강조되기 때문이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한다고 해서 지위와 관련된 이상 때문에 생기는 불편이 기적적으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정치적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기후 위성으로 기상 상태의 위기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늘 문제를 막아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거기에 접근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유용한 것을 가르쳐준다. 그 결과 피해의식, 수동적 태도, 혼란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욕심을 내보자면, 이해는 사회의 이상들을 바꾸거나 그것과 씨름해보는 첫단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것만으로도 죽마를 신고 다니는 사람들을 아무런 회의 없이 무조건 숭배하고 존경하는 경향이 조금이라도 줄어든 세계를 만드는 데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될 것이다.

 

 

IV. 기독교

 

 기독교적인 죽음의 경고memento mori의 훌륭한 전통 안에 자리 잡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세속적인 것보다 영적인 것을, 휘스트와 저녁 파티보다 진실과 사랑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만일 톨스토이가 우리의 관심의 대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죽음의 힘을 잘 이해했다면, 그것은 그가 이 중편을 쓰기 불과 몇 년 전에 자신의 유한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그 맥락에서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한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톨스토이는 죽음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을 살핀 기록인 <참회록>에서 <전쟁과 평화>와 <안나 카레니나>로 세계적인 명성과 부를 얻은 뒤인 쉰한 살 때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가치나 신의 가치를 따라 산 것이 아니라 "사회" 의 가치를 따라 살았으며, 이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강해지고, 유명해지고, 중요해지고, 부유해지고자 하는 불안한 욕망을 품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속한 사교계에서는 "야망, 권력에 대한 집착, 선망, 호색, 오만, 분노, 복수를 존중했다." 그러나 죽음을 생각하자 이전의 야망들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생겼다. "'그래, 사마라에 땅 6000데샤티나, 말 300마리가 있다 치자.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그래, 고골이나 푸슈킨이나 셰익스피어나 몰리에르보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보다 더 유명해진다고 치자.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그의 의문을 가라앉힌 답은 신이었고, 톨스토이는 여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살게 된다. 우리 자신의 유한성을 생각하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죽음, 특히 우리가 큰 열등감과 질투를 느끼게 되는 업적을 쌓은 사람의 죽음을 생각하는 것도 지위로 인한 불안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잊히고 무시당하는 존재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아무리 강하고 존경받는 존재라 하더라도, 우리는 모두가 결국은 가장 민주적인 물질, 즉 먼지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폐허는 세속적 권력이라는 불안정한 보답을 얻으려고 마음의 평화를 포기하는 어리석음에 대하여 말한다. 낡은 돌들을 보다 보면 성취에 대한, 또는 성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안이 누그러드는 것을 느끼게 된다. 다른 사람들 눈ㅇ로 보기에 성공하지 못했다 한들, 우리를 기리는 기념비나 행렬이 없다 한들, 얼마 전 모임에서 아무도 우리를 보고 웃음을 짓지 않았다 한들,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어차피 모든 것은 사라질 운명이며, 시간이 지나면 뉴질랜드인이 우리의 대로와 사무실의 폐허를 스케치하고 있을 것이다. 영원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우리를 흥분시키는 것들 가운데 중요하다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광대한 풍경 역시 폐허와 마찬가지로 불안을 다독여주는 효과가 있다. 폐허가 무한한 시간의 대표자이듯이 이런 풍경 역시 무한한 공간의 대표자로, 거기에 비추어보면 우리의 허약하고 수명도 짧은 몸은 나방이나 거미와 마찬가지로 보잘것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광대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사회적 위계 내에서 우리가 하찮다는 느낌은 모든 인간이 우주 안에서 하찮다는 느낌 안에 포섭되면서 마음에 위로를 얻게 된다. 누가 우리보다 몇 밀리미터 더 큰가 하는 관심은 우리보다 10억배 큰 것들, 우리가 감동을 받아 무한, 영원, 또는 단순하게 또 어쩌면 가장 유용하게 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힘에 대한 경외감에 밀려나게 된다. 머리가 둔하고 재능이 없고 미미한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며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따라서 신의 창조물이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명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 예수의 중심적인 주장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사람들 사이의 표면적 차이 너머를 보면서, 보편적인 진리에 초점을 맞추라고 한다. 이 진리를 바탕으로 공동체와 친족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이 귀중하다는 인식을 회복할 수 있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그런 인식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과 태도를 조성할 수 있을 때,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어둡게 보지 않는다.

 

 

V. 보헤미아

 

 소로우는 한 사람에게 돈이 없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재규정하려고 했다. 그것은 부르주아적인 관점이 미묘하게 암시하는 것과는 달리, 반드시 인생의 게임에서 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돈이 없다는 것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에너지를 사업 말고 다른 활동에 쏟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에서 현금이 아닌 다른 것에서 부유해졌다는 뜻일 수도 있다. 소로우는 자신의 상태를 묘사하면서 가난한 생활이라는 말보다는 소박한 생활이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다. 이 말이 강요된 물질적 상황보다는 의식적으로 선택한 상황을 표현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의 성숙한 해결책은 우리가 다양한 사람들로부터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산업가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보헤미안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으며, 가족으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고 철학자로부터 인정받을 수도 있다. 누구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따른 자유로운 선택이다. 창피를 당할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어떤 집단의 판단 방식을 우리가 이해하고 존중하기 때문이다. 지위에 대한 불안은 결국 우리가 따르는 가치와 관련이 되는 경우에만 문제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철학, 예술, 정치, 기독교, 보헤미아는 지위의 위계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이 다섯 집단은 성공과 실패, 선과 악, 수치와 명예의 구분 자체는 유지하면서, 무엇이 각 항목에 속해야 하는지를 재규정하려 했다. 이들 덕분에 우리는 삶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는 하나 이상의 길, 판사나 약사의 길과는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위로와 확신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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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 - 마음을 움직이는 힘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1
한상복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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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솔직히 모르겠다. 이 책은 내가 읽어 본 자기계발서 중 가장 짜임새 있는 소설이며, 다른 우화형 자기계발서에 비해 오그라들거나 억지스러운 구성도 없다. 매끄럽고, 읽기 쉽고, 그러면서도 다 읽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결말을 궁금해가며 읽었다. 하지만... 아직 사회 생활 경험이 부단히 짧은 터일까. 배려가 중요한 것은 머리로도 알겠고, 수많은 명사들의 가르침을 통해서도 알겠다. 하지만, 정말 성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이 느껴지고, 와닿지가 않는 것은, 어쩌면 아직 자기 수양이 덜 된, 어린 내 탓인 것일까... 다만 이 책에서 이 한 구절은 마음에 아프도록 박혔다.

 

우리가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길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들 합니다.
첫 번째는 사색하는 길인데 이것은 가장 높은 길이죠.
두 번째는 모방으로 다가서는 방법인데 가장 쉽다고들 합니다.
마지막은 경험에 의한 것입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길이죠.

 

나 또한 매일매일 일기를 쓰며 내 자신을 반성하고 하루를 사색하였고, 동기와 선배들을 바라보며 모방함으로써 배웠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삶에 대해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있는 중이다. 세 가지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경험에 의한 것이라고 어디까지나 주관적이지만, 그렇게 생각해왔고, 실제로 나라는 사람은 고통을 겪으면서 뼈에 사무쳐가면서 성장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 합리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쉽고, 더 높은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부족하고 모자라 가장 고통스러운 길을 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이러한 내 자신을 반성하기보다는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 면서 내 스스로를, 좀 어처구니없지만, 대견스러워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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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청 - 마음을 얻는 지혜 위즈덤하우스 한국형 자기계발 시리즈 2
조신영 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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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즈덤 하우스의 자기계발 우화 시리즈입니다.

 

내용이 살짝 오글거리기도 하고, 이런 류의 책들의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소설적 구성은 다소 허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청력을 가지고도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들을 줄 몰랐던 사람이 실제로 병을 얻어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되면서 오히려 경청하는 법을 깨닫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뀐다는 이야기를 클래식을 매개로 하여 베토벤과 연결시킨 점,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악기를 만드는 과정에 녹여서 표현한 점은 꽤 탄탄하고 짜임새 있는 글을 위한 저자의 노력을 짐작하게 합니다. 후반부가 엉성하게 마무리된 점은 조금 아쉽지만요.

 

이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어른들보다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에게 오히려 더 큰 조언이 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의 강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객관적으로 조리있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이야기에 녹여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물을 어느정도 먹은 어른들보다 이제 곧 세상에 나올 어린 친구들에게 더 다가올 책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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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밥
토드 홉킨스 외 지음, 신윤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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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지침: 지쳤을때는 재충전하라. 두 번째 지침: 가족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다. 세 번째 지침: 투덜 대지말고 기도하라. 네 번째 지침: 배운 것은 전달하라. 다섯 번째 지침: 소비하지 말고 투자하라. 여섯 번째 지침: 삶의 지혜를 후대에 물려주라.

 

솔직히 오글거리긴 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갓 사회에 발을 내딛은 사람으로서 냉소적이 되어서인지는 모르겠는데 쉽게쉽게 읽히기는 했지만 한 때 넘쳐나던 우화 형식의 자기 계발서에 약간 지친 탓일까... 첫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지침은 와닿지만 짝수번째 지침들은 아직은 잘 모르겠다. 나이가 들면 달라질지도... 다만 태클은 절대 아니고 의문이었던 것이,

 

'누구에게나 고민거리는 있는 법이야. 밥 아저씨도 마찬가지일 테지. 다만 밥 아저씨는 그 문제를 잠시 접어두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관심을 갖고 도울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거야.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자기 문제에만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보다는, 남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돕는 편이 시간을 잘 활용하는 방법이라고 밥 아저씨는 믿고 있을 거야.'

 

라는 본문 중 내용이었다. 글쎄, 나는 나의 문제로 정신이 사납고 머리가 어지러울 때는 절대 다른 사람의 문제로 인해 고민하거나 생각할 여유를 내 주기가 쉽지 않았고 혹시나 정신없는 와중에 어설픈 조언으로 상대의 마음을 다칠까 두려워 최대한 말을 아끼고 고르거나, 그것이 힘들 정도로 느껴지면 아예 내가 힘들때는 누군가와 함께 고민을 하는 행위를 삼갈 정도였는데, 이 구절을 보니 이해가 살짝 되지 않았다. 개인의 차이인지, 아니면 전에 어느 책에서 읽은 것처럼, 이혼 수속을 밟고 있는 도중에도 회사에서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남자 사원과, 애인과의 관계가 꼬이자 회사에서 평소보다 약간 흐트러졌다는 여자 사원의 차이를 다룬 책처럼 남녀의 차이인지... 물론 그 구절을 읽는 동안에는 개인적인 특성을 이런 식으로 남녀의 차이로 일반화시켜서 문서화 시킨 작가의 부주의함에 좀 화가 나긴 했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남을 가르칠 때 가장 큰 깨달음을 얻는 속성이 있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쳤던 일이 남을 일깨워주는 와중에 불현듯 큰 깨달음으로 다가오곤 하는 것이다.

 

라는 이 문장에는 많지 않은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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