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후회되는 한 가지 - 우리 시대 명사 50인이 지난날에 보내는 솔직한 연서
김정운.엄홍길.안성기.박경철.공병호.조영남.김창완.정민.승효상.김형경.이지성.김홍신.조수미 / 위즈덤경향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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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

아버지의 건강검진_박경철
'그때 만약 병원에 모시고 갔더라면 어땠을까?' 당시 의술로는 어차피 진단이나 치료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변명은 값싼 위로에 불과한 것이다. 가족에겐 가족의 안위가 걸린 문제가 가장 중요한 일이고, 나는 그 순간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말 걸지 못한 것_이윤택
지금 환갑의 나이에 이르러서도 그때 그 순간을 되새기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후회가 된다. 그래도 내 첫사랑인데 어떻게 말 한 번 걸어보지도 못한 채 그냥 흐르는 시간 속에 떠나보내야 했단 말인가.

왜 깨끗한 껌을 골랐을까_김운경
왜 나는 그 청년이 펼쳐놓았던 더러운 껌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껌을 골랐을까. 찢겨져 안 팔리는 껌을 고를 생각은 왜 못했을까! 생각할수록 못나고 어리석게 살아온 나였다. 나는 갑자기 울적해지며 후회하기 시작했다. 다시 내게 삶이 주어진다면 꼭 더러운 껌을 고르리라.

단풍 든 암자의 그 모시잎떡_구효서
검거선풍이 일던 때라 색출 대상 스님들은 대부분 미리 잠적해버리고 없었다. 높은 산을 오르내렸으나 번번이 허탕을 쳤고 아침을 맞았다. 피로한 병사의 눈에도 가을 단풍은 눈부셨다. 법당을 수색하고 밖으로 나서는 우리에게 공양주 보살이 모시잎떡을 내밀었다.
"배고플 텐데 이거라도 좀."
밥솥에 쪘는지 갈매빛 떡에 밥알이 듬성듬성 묻어 있었다. 스님 잡으러 온 군인한테 떡이라니! 외면하고 돌아서면 그만일 것을, 나는 보살에게 면박을 주고 말았다.
후회한다. 사과는커녕 이제껏 후회하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나는 인정했다. 이제껏 후회하지 않은 게 아니라, 후회를 억눌러왔다는 것을. 그때는 군인의 신분이었고 나 개인에게 허용된 자유가 없었으며 따라서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았다면서.
그러나,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면 나치스 친위대 장교 아이히만과 태평양전쟁 전범들의 변명까지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인류와 평화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게 그들의 죄라면, 나의 죄는 후회하지 못한 것이다.

이혼_조영남
그 당시 가정을 박차고 나온 건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까지 저버릴 정도로 그 당시 내 사랑은 그리 절절하지 않았다. 용서를 빌고 다시 가정을 지키겠다는 맹약을 했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기엔 나의 치기와 자만이 너무 컸다.
지난 수십 년간 나는 그날에 맞춰 케이크를 사들고 일찍 귀가해본 적이 없다. 삼십 대의 한가운데를 보내고 있는 두 아들에게 아버지 조영남은 빵점짜리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내 주변의 선후배들이 수십 년 동안 가족을 건사하면서 아들딸을 결혼시키고, 부부가 해외여행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 은근히 부럽고 화가 난다. '네가 가정을 버리고 이룬 것이 도대체 뭐냐?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셰르파 도르지의 죽음_엄홍길
2008년 5월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한 뒤 산에서 숨진 셰르파들과 그들의 남겨진 가족 그리고 오지마을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짓고 있다. 히말라야 자락에 사는 네팔 아이들이 공부할 기회조차 없는 것이 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셰르파 도르지의 죽음은 내 인생에서 후회되는 일이다. 그러나 그 후회가 나의 삶을 바꿔놓았다.

스물한 살의 결혼_손숙
결혼은 꿈이 아니었다. 혹독한 현실이었으며 그 현실을 이겨나갈 아무런 준비 없이 나는 덜컥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그 시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 나이에 덜컥 결혼이라니......너무 일찍 어른이 되는 바람에 아름다운 시절을 놓쳐버린 것만 같다.
결혼은 조금 더 나이를 먹은 다음, 그 나이에 할 일들을 어느 정도 이룬 다음, 죽도록 사랑하는 남다 말고(그 남자는 그냥 가슴속에 남겨두고), 친구처럼 편안하고 따뜻한 남자 만나서 인생을 걸 만큼 큰 기대는 하지 말고 그렇게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삶이 무엇인지는 삶의 뒤편에서 봐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반드시 앞을 향해 살아나가야 한다.
키르케고르

청춘은 청춘에게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
조지 버나드 쇼

고려대로 가주세요_김정운
"어디로 갈까요?" 택시기사는 내게 물었다. 택시 문을 여는 그 순간까지도 나는 결정하지 못했다. 어디든 말해야 했다. "안암동 고려대학교로 가주세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한마디다.
재수를 했던 나는 두 군데에 지원했다. 연세대학교 공과대학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원래 난 이과였다. 건축과에 가고 싶었다. 그런 내가 고려대 문과대학을 지원할 생각이 든 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여파였다.
그리고 겨우 1년 다니고 제적당했다. 기세등등하던 전두환 정권은 학생들을 닥치는 대로 제적시켰다. 가까운 친구들은 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했다. 난 죽어도 그쪽 체질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제국주의'에 유학갈 수도 없고, '매판자본'의 대기업에 취직할 수도 없었다. 결국 마르크스 심리학을 공부한다는 핑계로 진보적 학자들이 몰려 있던 베를린 자유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너무나 자존심 상하던 '보따리장사' 시절을 거쳐 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체질이 아니었듯, 교수도 내 체질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살면서 한 번도 누구에게 배울 마음도 없었고,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던 내가 누군가를 가르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힘들었다.
심리학적으로 인간의 '후회'는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주체적으로 선택한 삶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르기 때문이다. '후회 없는 삶'은 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는 노예에게나 가능한 삶이다.
난 격조 있는 건축가가 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격정적으로 살았던 내 젊은 날을 무척 사랑한다. 또한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날들도 너무나 기대가 된다. 그러나 그날, 그 택시 안에서 어디로 갈 거냐고 다시 묻는다면 숨도 안 쉬고 '신촌'으로 간다고 할 것이다.

저울의 한쪽 편에 세계를 실어놓고
다른 한쪽 편에 나의 어머니를 실어놓는다면,
세계의 편이 훨씬 가벼울 것이다.
랑구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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