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절반쯤 왔을 때 깨닫게 되는 것들
리처드 J. 라이더 & 데이비드 A. 샤피로 지음, 김정홍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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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의 위대한 심리학자 칼 융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라.

"인생의 아침 프로그램에 따라 인생의 오후를 살 수는 없다. 아침에는 위대했던 것들이 오후에는 보잘 것 없어지고, 아침에 진리였던 것이 오후에는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의 유명한 교육자이자 심리학자인 알프레드 아들러는 독창성이야말로 행복하고 충만한 라이프스타일을 유지시키는 필수요소라고 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그가 만든 신조어 '라이프스타일'은 이제 거의 '독창성'의 반대 개념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 라이프스타일이란 쇼핑센터에서 사들이는 물건, 즉 행복을 위해 꼭 필요한 물건처럼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공자에서 틀에 넣고 찍어낸 보편적이고 표준화된 행복에 만족할 수 있을까?

 

직장 동료를 만나도, 친구를 만나도 어제와 똑같은 이야기,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말만 주고받는다. LA 다저스의 4번 타자가 병살타를 친 이야기, 어느 유명 스타가 이혼한 이야기, 인기 드라마 주인공들의 패션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 정작 '너'와 '나'의 이야기는 빠져 있다. 대화의 탈을 쓴 이 무수한 잡담은 각자가 짊어진 가방을 더 무겁게 할 뿐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마이클 아가일은 행복의 심리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질적으로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삶의 조건은 인간관계, 일, 여가, 이 세 가지로 요약된다. 이 세 분야에서 만족의 경지에 이르는 데 있어 절대적 혹은 상대적 부는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융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인생의 절반, 즉 30대 중반을 넘긴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삶을 종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었다. 그들이 병들게 된 것은 현존하는 종교들이 선사하는 깨우침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적인 세계관과 인생관을 되찾지 못한 환자들 가운데 온전히 치유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지닌 것이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하는 일이다. 일은 그 자체로도 즐거울 뿐 아니라 그것이 쌓여 점차 우리 존재를 완성하는 기쁨의 근원이 된다."

 

삶에 대한 메시지 하나라도 붙잡으려면 오히려 삶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은 오직 살아봐야만 풀 수 있는 수수꼐끼로 가득 차 있다. "삶이 무엇인지는 삶의 뒤편에서 봐야만 알 수 있다. 하지만 삶은 반드시 앞을 향해 살아나가야 한다."라고 했던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사실 도구의 수명과 직업의 수명이 같아지는 현상은 늘 있어 왔다. 물레의 달인은 방직기의 등장과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맷돌을 만들던 사람은 믹서가 발명되면서 실직자가 되었다. 만일 당신이 어느 특정한 도구로 경력을 쌓아왔다면 당신은 그 도구의 만수무강을 기도해야 할 것이다. 결국 도구가 아닌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렇다면 '몸에 지니고 다닐 수 있는' 당신의 재능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현재 당신이 어디서 어떤 일을 하건-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아니면 자기 집 지하 작업실이든-당신의 주인은 오직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의 유일한 고용주는 바로 당신 자신이며,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사업체다. 그리고 여느 회사와 마찬가지로 성장과 발전을 위해 종합적인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병이나 깡통, 신문 따위를 재활용할 수 있는데, '나'라고 재활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직업세계라는 이 변덕스런 바닥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자신을 재활용할 준비를 해야 한다. 즉, 가지고 있는 가방들을 다시 꾸려야 한다는 것이다. 설령 당신의 직업이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만큼 안정적이라 할지라도 생존을 위해서는 삶과 일을 다시 꾸리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무엇이든 숙달되는 순간부터 싫증을 느끼기 때문이다.

 

중년을 어떻게 묘사하든 인생의 절반 무렵은 매우 중요한 시기이며 짐을 가볍게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시기에 접어든 사람들은 다들 이렇게 자문한다.

"지금쯤은 그래도 뭔가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면 적어도 내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가 하는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그동안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인생에는 미리 설치된 무대도 전환점도, 그리고 예측 가능한 중년의 위기 같은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개 예기치 않는 사고나 개인적인 경험, 경제 상황, 그리고 살고 있는 시대의 결과물이라는 얘기다. 사람들은 이렇듯 자연스럽게 목적과 성공의 매 단계를 드나들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삶의 한계와 가능성을 좀 더 요령껏 받아들이는 일뿐이다.

 

칼 융은 우리가 40대나 50대 혹은 그 이상이 되면 자신의 삶이 균형을 잃었다는 생각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어느 특정 분야에만 시간을 쏟아 붓고 나머지 분야는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면 이제 '미지의 자아'를 발견해야 할 떄가 된 것이다.

 

삶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행복을 찾아 움켜쥐는 것부터가 애초에 글러먹은 시도일 뿐이다. 행복은 붙잡자마자 시들기 때문이다. 사실 가방을 다시 꾸리는 작업도 그렇다. 그것은 당신이 계속해서 탐험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베이스캠프 같다. 그것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당신 안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17세기 철학자 베네딕트 스피노자는 중년에 가방을 다시 꾸리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우선 흔히 사람들이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들 즉, 부와 명예 그리고 오감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 쏟았던 자신의 노력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스피노자는 이러한 것들이 매력은 있지만 결코 진정한 행복은 주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 커다란 발견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행복이나 불행은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의 물질에 의해 결정된다."

순간의 매력이나 일시적인 가치를 사랑한다면 행복 또한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좀 더 지속적인 가치를 사랑한다면 행복 또한 좀 더 오래갈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다시 꾸린 내 가방 속에는 철학 공부에 대한 열망에 다시 불을 비피는 것도 들어 있었다. 그 공부에 몰두하다 보니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다행스럽게도(또 놀랍게도)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래서 책을 마지막으로 손보고 있는 지금은 프리랜서 작가 일을그만두고 철학박사 학위를 따겠다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는 중이다. 대학원과 그 안에 기다리고 있는 온갖 도전이 눈앞에 어렴풋이 떠오른다. 동급생들보다 거의 스무 살은 더 나이 먹었을 누군가의 모습이. 길을 잃을까 두렵지 않으냐고? 물론 두렵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두려운 것은 이 기회를 그냥 보내버리고 난 뒤 남은 생애 동안 내내 그 기회를 잡았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워하며 살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만약 학위를 딴다면 그 학위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지 아직은 모른다. 솔직히 첫 학기를 잘 통과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다가올 변화에 가슴 떨리고 앞으로의 여행에 내 모든 열정을 쏟아 부을 거라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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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미친놈 - 세상을 유혹하는 크리에이터 박서원의 미친 발상법과 독한 실행력
박서원 지음 / 센추리원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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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히 재미있고 쉽게 읽힌다.

 

크리에이티브가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느껴지기도 하고,

수많은 국내외의 작품을 보면서,

아, 참 이 사람의, 소위 말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어디까지 뻗어 있는 것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이 책을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재벌 아버지를 두었지만, 흔히 말하는 경영 수업을 듣지 않는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받았고, 현재는 아버지 기업의 계열사 대표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자신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기로 되었다는 기사가 나오고 나서, 해당 계열사의 주가가 올랐다고 한다. 그만큼 아버지와 독립하여 그의 능력이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리라.

 

뚜껑에 커피의 특징을 극대화했던 카페라떼 시리즈, 바리스타 시리즈는 내가 편의점에서 보면서도 어, 아이디어 좋네? 하고 생각했던 디자인이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광고와 프로젝트를 보면서 아마도 이 사람은 타고난 감각과 열정, 흥미와 정성을 가장 잘 조합해낸 사람이지 아닐까 싶었다.

 

광고를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한 번쯤은 읽어봐야 할 책일 것 같고, 광고가 아니더라도 크리에이티브한 능력이 필수적인 모든 직업을 꿈꾸는 사람들도 한 번쯤은 볼만한 책인 것 같다. 일단 쉽고, 눈에 쏙쏙 들어온다. 마치 그가 만든 광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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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 (스페셜 에디션 한정판)
하야마 아마리 지음, 장은주 옮김 / 예담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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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끔은 '아무런 열정도 설렘도 없는'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경우가 있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거나 음악, 미술, 춤, 게임 같은 것들에 그다지 흥미를 못 느끼다 보니 그저 책상 앞에 안장 공부만 하는 그 지루한 시간을 비교적 덤덤히 이어갈 수 있는 것이다. 불러내는 친구도 없고 별다른 유혹거리도 없이 나는 그냥 입시를 위해 공부를 해나갈 수 있었다.

훗날 사회에 나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세상에는 그런 식으로 '공부만' 잘했던 사람이 꽤 많다. 자기가 뭘 좋아하고 뭘 잘 하는지도 모른 채 고속열차처럼 학창시절을 내다리다가 어느 날 '툭'하고 세상에 내던져진 그런 사람들 말이다.

얼마나 황당한지 모른다. 학교에서야 정말 잘나갔지만 사회는 공부와는 전혀 다른 것드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사회에서 필요한 것, 예컨대 '관계의 기술' 같은 것들은 책으로 공부한다고 해서 쉽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어릴 대 친구들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는 '몸의 습관'과도 같은 것들이다.

그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사회에 나가서야 비로소 학교 때는 보이지 않던 '의지의 인간'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버릇처럼 '난 기필코 이 일을 꼭 해내고야 말 테야!'라고 외치며 살아간다.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절실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고교 3학년, 그저 오빠가 다녔던 대학에 진학하겠다는 막연한 생각만으로 공부를 했던 나에게 그런 '가슴 떨리는 꿈'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그것도 아주 큰 문제.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건 아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죄일 것이다.

 

"평생 이 일을 하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게 있다면 그건 '사람은 결국 혼자'라는 거야. 낮 동안에는 그걸 인식할 겨를이 없지만, 밤이 되면 절실히 와 닿게 마련이지. 미녀들의 웃음이나 고급스러운 분위기, 값비싼 양주는 소품에 불과해. 능숙한 서비스도 역시 소품이야. 정말 중요한 건 마음의 메아리인 것 같아."

 

"가족이란 건 말이야,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질긴 끈 같은 걸로 단단히 연결돼 있어야 해. 안 그러면 엉망이 돼 버리거든. 가족이든 친구든 자기 주변 사람들을 소홀히 여기면 결국 인생이란 게 비극으로 치닫게 돼."

 

호스티스들은 저마다 화려하게 살기 위해, 아이를 키우기 위해, 해외 유학을 가기 위해, 혹은 자기 가게를 열기 위해 대부분 투잡으로 일을 한다. 나 역시 낮엔 파견사원, 밤엔 호스티스로 일하고 있지만, 치카처럼 목적과 수단을 동시에 수행하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두 가지 일 모두 '라스베이거스에서의 화려한 마지막'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솔직히 라스베이거스 행 역시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한시적이다. 나에게 그 다음은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힘은 1년짜리 시한부 에너지인 셈이다.

하지만 치카는 그렇지 않다. 늘 활기차고 에너지 넘치는 그녀의 힘은 연극이라는 인생의 목적과 호스티스라는 수단을 동시에 추구하는 데에서 나오고 있다. 바닷가의 아름다운 음악 카페를 꿈꾸는 레이나의 힘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 무대'를 가진 사람 특유의 자신감과 지속적인 당당함, 그런 것들이 나에게는 없다. 외톨이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무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외톨이인 것이다.

사람들은 긴 학창시절 동안 참 많은 것을 배운다. 수없이 시험을 치르고 성적을 올리고 많은 공부를 한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 직장을 구하고 열심히 일을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도 대부분 인생의 수단을 갖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 다음'은 가르쳐 주지 않고, 또 그럴 수도 없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이란 건 어쩌면 투명한 막에 가려진 일상인지도 모른다. 그 투명 막을 뚫고 들어가기 전까지는 미치도록 무섭지만, 정작 그 안으로 들어가면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또 하나의 평범한 세계가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불과 15분 전만 해도 내가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건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생각해도 놀라우리만치 급속도로 익숙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어떤 포즈는 15분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하기란 너무 괴로운 일이다. 휴식 시간이 끝나도 다시 포즈를 취했을 때도 여전히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세상에 만만한 일은 없구나.'

 

'같은 시간, 같은 포즈, 같은 표정의 나를 보고 있는데 그리는 사람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내가 알고 있는 나는 하나뿐이지만, 남들이 보는 나는 천차만별이었다. 사실 그림 속의 나는 '나'이면서 또한 내가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나와 남이 느끼는 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늘 내가 알고 있는 느낌과 나의 기준대로 이해받길 원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왜 아무도 날 이해해 주지 않을까?'하고 의기소침해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들의 작품을 보면서 생각과 느낌은 십인십색, 사람의 숫자만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나와 똑같은 느낌을 요구하거나 이해해 달라는 것은 무리이고 어리광이며, 오만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나에 대한 남들의 느낌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바꿀 수 있을 뿐이다.

 

"뭐든 그렇겠지만 일류니 고급이니 하는 말은 늘 조심해야 해. 본질을 꿰뚫기가 어려워지거든. 출세니 성공이니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만의 잣대를 갖는 거라고 생각해. 세상은 온통 허울 좋은 포장지로 덮여 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기만의 눈과 잣대만 갖고 있다면, 그 사람은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고 비로소 '자기 인생'을 살 수 있을 거야. 그게 살아가는 즐거움 아닐까?"

 

아마 클럽 사와의 마담도 그랬을 것이다. 내가 뭐든지 곧이곧대로 흡수할 수 밖에 없는 신출내기였기에 일일이 호스티스의 마음가짐과 교양 있는 태도를 가르쳐 주고 또 귀엽게 봐주었겠지.

나는 사람들한테는 '가르쳐 주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래서 '무지'가 의외로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난 늘 혼자였지만 외롭다는 생각은 별로 안 해봤어. 혼자서 그림 그리고 생각에 잠기는 그 시간이 좋았거든. 늙어 죽을 때까지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살고 싶었어. 하지만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다 보면 오히려 내가 가고 싶어 하는 뱡향이 뿌옇게 흐려지곤 했어. 그래서 자꾸 나도 모르게 무리에서 떨어져 지내게 되더라. 적어도 혼자서 나를 만나는 그 시간만큼은 내 믿음을 확신할 수 있었거든. 뭐랄까, 인생의 목적은 늘 분명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 뭘 해야 할지, 그런 목표는 약간 희미했었다는 생각이 들어. 네가 라스베이거스라는 선명한 목표를 가진 것처럼 이제 나도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를 정해야 할 것 같아."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미나코는 방향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다고 했다.반대로 나는 눈앞의 목표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삶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바다는 목적이나 목표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한 항해를 할 수 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범선은 타륜으로써 방향을 잡지만, 돛과 노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미나코와 나는 각각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요즘 여자애들은 서른만 넘으면 나이 들었다고 한숨을 푹푹 쉰다며? 웃기지 말라고 해. 인생은 더러게 길어. 꽤 살았구나, 해도 아직 한창 남은 게 인생이야. 이 일 저 일 다 해보고 남편 자식 다 떠나보낸 뒤에도 계속 살아가야 할 만큼 길지. 100미터 경주인 줄 알고 전력질주하다 보면 큰코다쳐. 아직 달려야 할 거리가 무지무지하게 많이 남았는데, 시작부터 힘 다 쏟으면 어쩔 거야? 내가 너희들한테 딱 한마디만 해줄게. 60 넘어서고 자기를 즐겁게 해줄 수 있는 게 뭔지 잘 찾아봐. 그걸 지금부터 슬슬 준비하란 말이야."

 

"샴, 이 정도 실력이면 직접 가게를 차려도 되겠는 걸? 청소나 주방보조로 남기엔 너무 아까운 실력이야."

"사실 처음엔 그런 꿈으로 일본에 왔어.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만으로도 인도에 있을 때보다 훨씬 보수를 많이 받거든. 그러다 보니 자꾸 나 스스로 계획을 미루게 되더란 말이지. 고향에 있을 때 나한테 요리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적의 행군을 막으려면 술과 고기를 베풀어라.' 그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알 것 같아. 평생의 꿈을 가로막는 건 시련이 아니라 안정인 것 같아. 현재의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그저 그런 삶으로 끝나겠지. 그래서 오늘 이 만찬을 계기로 다시 나의 오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어."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끝없이 안정적인 생활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결국 자멸해 버린 나로서는 샴의 이야기가 쓰디쓴 약처럼 느껴졌다.

 

"초보 카레이서들은 매순간 가속페달을 있는 힘껏 밟으려고만 한대. 하지만 노련한 카레이서는 가속페달보다는 브레이크를 더 잘 쓴다는 거야. 브레이크를 안 쓰면 차가 커브 길에서 전복되거나 엔진 과열로 폭발할 수 있어. 너를 결승선까지 데려다 주는 건 네 몸뿐이야. 몸을 홀대하면 결국 몸이 너를 거부하게 될 거야."

 

나는 꼬깃꼬깃한 5달러 지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지폐 속 링컨의 얼굴도 꼬깃꼬깃 주름져 있었다. 갑자기 그가 내게 말을 건넬 것만 같다.

"승리를 축하한다, 아마리!"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왔을 이 5달러짜리 지폐가 갑자기 나를 뭉클하게 했다. 1년이라는 치열한 시간을 환전해서 여기까지 날아와 인생을 건 도박 끝에 5달러를 번 것이다.

'......그래, 이긴 거야. 달랑 5달러지만 난 이긴 거야!'

느닷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겼다! 인생 최대의 승부에서 승리한 거야!'

 

예정대로라면 나는 지금 통에 든 알약을 모조리 입 안으로 털어 넣어야 한다. 그럴 각오로 오늘 이 순간까지 내쳐 달려온 것이다. '기꺼이 죽겠다'라는 각오가 없었으면, 나는 지난 1년 중 단 하루도 온전히 살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계획했던 모든 일들을 완수했고, 목표했던 결승선까지 완주한 지금, 나에겐 최후의 선택만이 남았다.

'어째서 5달러를 땄을까?'

날고 긴다는 카지노의 딜러와 대결해서 몽땅 털리기는커녕 5달러를 땄다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솔직히 나는 완전히 잃거나 대박을 터뜨리는 것, 그 두 가지 경우의 수만 생각했었다.

불현듯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은 비긴 것이다. 하지만 너에게 5달러를 남겨 준다. 그러니 이제 다시 너의 게임을 시작하라.'

나는 그 5달러를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500달러도 아니고 5천 달러도 아니다. 달랑 5달러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큰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시 1년이 흘렀다. 서른 한 살.

나는 지금 오다이바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인텔리전트 빌딩 창가에 서 있다. 그 사이 나는 파이낸셜클래너 자격을 취득했고, 세상 물정 어두운 엄마까지도 이름을알고 있는 글로벌 회사에서 정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나는 지금도 가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6일을 떠올리곤 한다.

기나긴 인생에서 6일이라는 시간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 시간 동안 방바닥에 드러누워 만화책을 볼 수도 있고, 술에 취해 비틀거릴 수도 있으며,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자포자기하며 지낼 수도 있다. 예전의 나는 수많은 세월을 그렇게 휴지조각처럼 살았엇다. 남은 인생마저 계속 그럴 거라면 그냥 죽는 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나 자신에게 '라스베이거스에서 아낌없이 불태우고 죽으리라'는 주문을 걸었고, 매일매일 디데이를 향해 카운트다운을 가동했다. 그리고 그 마법은 통했다. 이제 나는 마법을 믿는다.

인생에서의 마법은 '끝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몸으로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알기 전까지 나는 '끝'을 의식하지 못했고, 그래서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기만 했었다. 하지만 D-365, D-364, D-363...... 카운트다운이 시작되면서부터 나는 치열하게 내달릴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 난폭한 방식의 자기개혁이었지만,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했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막의 판타지 공간에서 보냈던 20대의 마지막 6일이 나를 바꿔 버렸다.

나는 단 6일을 위해 1년을 살았고, 삶을 끝내기 위해 6일을 불태웠다. 그 끄트머리에서 '20대의 나'는 죽고 30대의 내가 다시 살아났다. 이제부터 맞이하게 될 수많은 '오늘들'은 나에게 늘 선물과도 같을 것이다. 나는 죽는 순간까지 '내일'이란 말을 쓰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나의 인생은 천금 같은 오늘의 연속일 테니까.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키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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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취미의 권유 - 무라카미 류의 비즈니스 잠언집
무라카미 류 지음, 유병선 옮김 / 부키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뭐지? 이 불편한 기분은?

 

책을 읽는 내내 불쾌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정도로 유명한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이렇게 공감이 가지 않았던 적도 처음이다. 왜 이렇지? 뭐가 문제지? 아무리 생각을 해 보아도 답을 알 수가 없었는데, 읽고 나서 만 하루쯤 지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어느 한 분야에 정통한 사람은,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방법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그것을 고집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 느낌을 이 책에서 받았다. 책을 낼 정도의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사회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이 많고, 그렇다면 성공을 위한 자신만의 마스터 키가 무엇이라고 생각할 사람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유독 이 책에서 내가 불쾌함을 느꼈던 이유는 '본인의 분야도 아닌, 겪어보지도 못한 분야에 대해서 함부로 단정하는' 그 태도에 질렸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무라카미 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지만, 직장 생활을 오랫동안 하다가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지는 않아보인다. 즉, 월급쟁이 생활을 해 본 적이 없거나, 하더라도 길게 해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이 비즈니스 잠언집을 낸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좀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데, 책을 읽어보니 경영자를 초대하여 대담을 나누는 TV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다고 한다. 그래서 뭐? 그게 어쨌다고? 어떻게 그 단편적인 경험만 가지고 이런 책을 내는 대담함을 발휘할 수 있을까? 나는 비록 직업을 가지고 돈을 번 시간이 무라카미 류보다 훨씬 적겠지만, 최소한 월급쟁이의 생활이 어떤 것인지는 그 보다는 더 잘 안다고 생각된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은 사랑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이런 저런 연애 서적과 연애 고수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연애 안내서를 낸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진심으로 이 사람에게 우리나라 드라마 '미생'을 권해주고 싶다.

 

짤막짤막한 글의 모음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글이 너무 짧아서 차마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사라진다. 궤변이라도, 좀 길게 서술하였더라면 꼼꼼히 읽고 되풀이해서 읽고 싶은 마음이라도 들겠는데, 이 책은 성의마저 없어 보여 조금 화가 난다.

 

일단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취미의 권유'를 보면,

 

취미란 기본적으로 노인의 것이다. 너무나 좋아해서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몰두하게 만드는 뭔가가 있다면, 젊은이들은 그것을 취미로 하는 아마추어가 아니라 일로 삼는 프로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중략) 나는 취미가 없다. 소설을 쓰고, 영화와 쿠바 음반 제작도 하고, 전자메일 매거진을 편집하고 발행하지만 이는 모두 돈이 오가고, 계약서를 쓰고, 비평의 대상이 되는 '일'이다. (중략) 취미의 세계에는 자신을 위협하는 건 없지만 삶을 요동치게 만들 무언가를 맞닥뜨리거나 발견하게 해 주는 것도 없다. 가슴이 무너지는 실망도, 정신이 번쩍 나게 하는 환희나 흥분도 없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해냈을 때 얻을 수 있는 진정한 성취감과 충실감은 상당한 비용과 위험이 따르는 일 안에 있으며, 거기에는 늘 실의와 절망도 함꼐한다. 결국 우리는 '일'을 통해서만 이런 것들을 모두 경험할 수 있다.

하도 궤변이라 어디서부터 따져야할지 모르겠다. 일단 취미란 노인의 것이며, 젊은이들이 몰두하는 취미가 있다면 아마추어가 아니라 일로 삼는 프로가 되라는 말. 만약, 어떤 일에 푹 빠질 정도로 열광하지만 도저히 그것으로는 밥벌이를 할 만큼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그떄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실력을 늘리기는 힘들 것이고, 그럼 취미를 접어야 하나? 어쩌다 작가는 운이 좋게도 본인의 특기와 취미와 능력이 일치하여 취미를 일로 삼는 행운을 누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월급을 받으면서 일을 하는 사람들 중 정말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예전부터 꿈꿔왔기 떄문에 하고 있는 사람이 대체 몇이나 될까? 더구나 작가가 하고 있는 그 '일'이라는 것이, 소설을 쓰고, 영화와 음반을 제작하고, 전자메일 잡지를 만드는 그 '일'이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일과 무관한 '취미'가 없다면 존재할 수도 없는 직업 아닌가? 소설을 읽는 사람들 중에서 직업적인 이유로 소설을 읽는 사람과, 단순히 소설 읽는 게 즐거워서 읽는 사람과 그 비율을 비교해본다면 후자가 압도적일 것이다. 영화를 보는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영화와 관련된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쿠바 음반도, 전자메일 매거진도 마찬가지. 이 취미들을 할 때마다 성취감과 충실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기 떄문에, 일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환희와 흥분을 느끼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그들의 취미를 위하여 그들의 지갑을 열기 때문에 무라카미 류의 '일'이 존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집중해서 소설을 쓰고 나면 충만감과 성취감, 그리고 정신의 안식을 얻는다. 소설을 마친 뒤에는 휴양지를 찾아서 푹 쉬고 싶다거나 긴장에서 벗어나 풀어짐을 맛보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휴양지로 달려가는 것은 소설 집필 말고 일상의 번거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할 대이다. 긴장을 풀고 집중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실제 일에서 온오프(on-off)의 구별이 없다. 온 힘을 다하여 맡은 일을 타협없이 끝내겠다는 욕구는 있을지언정 얼른 대충 마치고 즐기고 싶다는 생각은 아예 들지 않는다. "충실하게 일을 하려면 일에서 벗어나 심신을 풀어 주는 오프의 시간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건 무능한 비즈니스 맨을 겨냥하여 상업주의가 퍼뜨리는 거짓말이다.

 

 

이 대목을 읽다가 열받아서 (실제로 하지는 않았지만 심정적으로는) 책을 던지고 싶었다. 대체 충실하게 일을 하기 위해서 일에서 벗어나 심신을 풀어 주는 오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어떻게 얼른 대충 마치는 것과 일대일로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에서 자신의 능력을 온전히 소진한 후, 다시 재충전하기 위해서 오프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직접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서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다른 소설가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한 글을 종종 보다보면, 소설가의 장점이자 단점이 소설을 쓰고 있지 않은 일상에서도 늘 소설로 연결할 수 있는 글감을 무의식적으로 찾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놀고 있는 것 같아도 사실 노는 것이 아니라는 글을 본 기억이 있고, 그와 비슷한 글들을 꽤 여러 편 보았다. 즉, 어딘가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아니라면, 자신의 작업실이 곧 집이고 집이 작업실이므로, 먹고 자고 일하는 공간이 늘 같기 때문에 on-off가 쉬운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주장을 비롯해 작가의 상당수의 이야기들은 전부 워커홀릭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회사의 경영자 입장에서 사원들에게 훈시하는 내용의 느낌이 든다. 이쯤 읽다 보면 드는 생각. 대체 이 사람의 소설은 어떤 내용일까? 이름만 들었을 뿐 한번도 읽어보지 못한 이 사람의 소설 속 인물들은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어떤 감정을 가지면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갈까?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한 작가의 인상이 달라진다면 기분 좋을 것 같지만, 달라지지 않는다면 나에게는 그저 무례하고 소통할 줄 모르는 중년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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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smedy06 2015-05-29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무라카미류의 글은 이 책이 처음인데 저만 공감이 안 되나 싶었습니다.. 소설도 읽어볼 예정인데 좀 나을런지..;

마고할미 2015-05-29 21:34   좋아요 1 | URL
제 기억이 맞다면 아마 저는 1~2권 정도 읽었던 것 같고요, 워낙 어릴 때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식으로 불쾌했던 기억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설은 젊을 때 쓴 소설이었던 것 같고, 현재 나이가 예순이 넘었더군요.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바뀐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성향이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연배의 무라카미 하루키가 청년같은 생각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심하게 대비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의 유사성 때문에 세 살 더 많은 무라카미 하루키와 종종 함께 언급이 되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는 비교가 힘든 대상이라고 봅니다. 하루키는 매년 노벨상 후보에 오르고 언젠가는 받을 것으로 예측되는 작가이고, 류의 위상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죠. 아무튼 저는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일부러 시간을 들이거나 돈을 들이며 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런 글을 공개적으로 책으로 펴내 쓴다는 것은 대중을 우롱하고 독자를 기만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요.
 
서른에 꽃피다 - 대한민국 여성들의 멘토 남인숙의 서른 살 응원가
남인숙 지음 / 이랑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0대 여성에게 당당하게 속물이 되어라! 고 외쳤던 남인숙은 그 책으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중국에까지 번역되어 역시 비소설부문 베스트셀러에 올랐다고 한다. 아마도 그 책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그 동안 체면 때문에 당당하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까놓고 이야기하면 속물이라고 비판받았던 그 이야기들을 수면 위로 올려놓았다는 것이고, 실천 사항들은 구체적이며 어렵지 않았고, 읽기 쉬웠으며 독자들을 20대 여성으로 제한함으로써, 한정된 독자층에서 오히려 밀도 높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비법은, 아마도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0대를 위한 책이나 30대를 위한 책이나, 작가의 책에서 종종 등장하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을 들여다 보면, 작가의 20대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도 있었던 것 같고, 소위 '글쟁이'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늘 걱정하며 불안해했던 때가 아닌가 싶다. 그 시기를 겪고 나서 어느 정도 자신의 삶에서 궤도에 오른 상태에서 자신의 힘들었던 20대를 돌이키며 글을 썼기에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74년생인 이 작가의 출세작인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는 2004년에 세상에 나왔다. 작가가 태어난지 30년만의 일이다. 그 이후로 그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책을 여러 권 펴냈고, 그 중 일부는 중국에서 출판되어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으며, 내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중간중간 강연 활동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현재 우리나이로 마흔 두 살인 그녀. 즉 그녀의 커리어가 본격적으로 꽃피게 된 것은 그녀 인생 중 삽십대의 일인 것이다. 그녀의 책 여기 저기에서 얼핏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그녀는 꽤 결혼을 빨리 한 편이라고 했다. 따라서 그녀의 나이 서른 즈음에는 결혼, 출산이 끝나 있었을 것이고, 어느 정도 육아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기준이 생겼을 때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뭔가 미진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힘든 20대를 보내고 나서 쓴 20대 여성을 위한 글에서 무릎을 치고, 밑줄을 그을 정도였다면, 상대적으로 갖춰진 30대를 보낸 후 쓴 30대 여성을 위한 글에서는 기발함이나 재치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대부분의 내용이 20대 여성을 위한 그 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다. 읽으면서 으쌰으쌰하는 힘이 나고, 뚜렷이는 모르겠지만 왠지 격려가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구체적인 방향성을 잘 모르겠는 그런 느낌이다.

 

이 책이 나온 것은 2012년으로 우리나이로 그녀 나이가 서른 아홉일 때이다. 책 서문에서 그녀는 삼십대 여자의 삶을 위한 책을 써달라고 수차례 부탁받았으나 자신있게 제시할 수 있는 삼십대의 모델을 작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해 엄두를 못내었다고 적고 있다. 이 말, 삼십대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20대와는 다르게 내 인생에서 책임을 져야 하고, 어떤 결과물을 내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드는 압박감.

 

심하게 오바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런 압박감을 헤쳐 나오는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는 책의 내용이었다. 작가 나이 서른에, 작가는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고, 자기 이름으로 된 책도 여러 권 냈다. 그 유명한 20대 여성 시리즈 말고도, 이미 20대에 동화작가로서 여러 책을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나는 책 전문가도 아니고 그 당시 아이를 키워본 적도, 조카도 없어서 그녀의 책들이 얼마나 아이들과 그 아이들에게 책을 사 줄 수 있는 부모들에게 인기를 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20대에 자기 이름으로 책을 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왠만한 사람들은 하기 힘든 성취가 아닐까 싶다. 비록 그 책이 세상에 나온 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읽혔는지 안 읽혔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이 것은 절대로 그녀의 성취를 함부로 재단하는 게 아니다. 그녀의 책에서도 나왔듯이, 글을 써서 먹고 살겠다는 목표를 정한 후 그녀는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고 한다. 의지와 재능, 노력으로 지금의 그녀의 자리까지 온 것은 분명하지만, 서른에 대한 책을 쓰기에는 그녀는 적절한 작가는 아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 책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으려면, 최소한 결혼과 출산은 삼십대 후반에 했어야 했고, 본인의 커리어의 방향에 대해서도 서른 이전까지는 정하지 못해서 방황했던 사람이 써야 더 절절하지 않을까 싶다.

 

20대 여성을 위한 그 책들은 읽고 나서도 머릿속에 한참 떠나지 않는 내용들이 많았고, 한동안 그 내용들에 사로잡혀 멍했던 적도 있었고, 힘든 시기마다 각오를 다지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솔직히 이 책은 그 정도까지는 되기는 힘들 것 같다. 다만, 정말 힘든 시기, 내가 가고 있는 길에 대해 맞는 건지 불안할 때, 어느 정도의 위안과 길잡이 정도의 역할은 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책에서도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하루에 두시간 정도만 공부해도 10년 뒤면 박사 학위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민자이자 늦은 나이에 학업을 마치고 공직에 진출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일화도 등장한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나, 해서 좌절하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이것밖에 안 되나, 절망하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하던 때 이 구절을 읽으면 그래서 어쩌라고? 반문하고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바닥에 있는 시기를 지나면, 그래, 그래도 세상은 살만하지, 비록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별 거 아닐지라도 미래에는 다를 거야, 하는 기분이 들 때, 이런 구절들을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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