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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외국어라니 - 늘지 않아도 괜찮아 후회 따윈 없어
윌리엄 알렉산더 지음, 황정하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라고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이 책의 저자 윌리엄 알렉산더다. 나는 프랑스를 모른다. 하지만, 제목이 주는 기대감.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 50을 지나 60이 가까워지는 적지 않은(?) 나이. 배우려는 언어는 프랑스어. 나이 들어 프랑스어를 배운다는 건 어떤 걸까.
낭패였다. 그날 밤, 해가 뜨기도 전에 깼다. 이상했다. 간밤에 참새가 내 가슴에 알을 까고 그 새끼들이 둥지를 벗어나려 날갯짓하는 것 같았다. 목에 손가락 두 개를 대 보았다. 맥박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나는 의사인 앤을 깨웠다. 심장박동 수가 200번도 넘게 나왔다.
“심방잔떨림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응급실로 실려 가는 중이었고, 심전도 검사를 통해 심방잔떨림 상태가 확인되었다. 심방잔떨림은 심장 신경계에 일종의 혼선이 발생해서 심방이 정상 리듬에서 벗어나 불규칙하게 매우 빠르고 미세하게 떨리는 부정맥 질환의 일종이다. 잔떨림 자체가 나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심방에서 흘러나아 혈액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혈전 하나가 뇌에 도달하기라도 하면, 그대로 인생 작별이다. 응급실에서는 가장 먼저 내 팔에 정맥 항응고제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의사가 몇 가지 짧은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술을 많이 마셨나요? 아뇨. 마약은? 농담 말아요. 의사는 빤한 질문을 계속 이어 갔고, 나는 계속 머리를 흔들었다. 인내심이 바닥나기 시작했다. “아니라고요!” 드디어 의사가 물었다. “최근 특별히 스트레스 받는 일이 있나요?”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그게, 요즘 프랑스어를 배우고 있어요.” (88쪽)
땀을 뻘뻘 흘리며 프랑스어 화상 수업을 마친 그 날 밤, 저자는 심방잔떨림으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너무나 사랑하는 프랑스어, 잘하고 싶은 단 하나의 언어. 하지만 프랑스어를 말할 때마다 겪게 되는 심적 부담감, 스트레스 그리고 심방잔떨림.
프랑스어가 얼마나 배우기 어려운지에 대한 설명은 재미있다. 예를 들면, 숫자를 셀 때, 60까지는 10을 기반으로 하는 십진법을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20을 기반으로 하는 이십진법으로 전환한다는 건데(84쪽), 그래서 71은 ‘60 더하기 11’이고, 72는 ‘60 더하기 12’이지만, 80은 ‘4 곱하기 20’이고, 90은 ‘4 곱하기 20 더하기 10’이라는 거다. 하하하.
명사에 붙는 성이 제각각이어서, 각각 따로 외워야한다는 점도 그렇다. 여자 가슴은 남성형 명사이고 남자 턱수염은 여성형 명사다. 팔은 남성형, 다리는 여성형, 물은 여성형, 차는 남성형. 이런 식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프랑스어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나는, 프랑스어가 배우기 어렵다는 게 그렇게나 재미있다.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들은 명심하세요. 프랑스어는 그 어떤 언어보다 배우기 어렵답니다.
나이 들어 배우는 외국어에 대한 글을 읽노라니, 예전에 배웠던 제2외국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구텐 탁. 비 게트 에스 이넨? 당케 구트. 운트 이넨? 당케 아흐 구트. 일주일에 1시간씩 3년. 독일어는 여기까지. 부에노스 디에스. 일주일에 2시간 한 학기. 스페인어는 여기까지.
4개 혹은 5개를 바라는 게 아니다. 적어도 한 개의 외국어에 능통할 수 있다면. 아니, 능통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저자처럼 평생 애끓어하는 외국어가 하나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생 사랑하는, 언제나 배우고 싶은, 어떻게든 말하고 싶은 그런 외국어가 있다면...
The interesting thing about my Italian class is that nobody really needs to be there. There are twelve of us studying together, of all ages, from all over the world, and everybody has come to Rome for the same reason – to study Italian just because they feel like it. Not one of us can identify a single practical reason for being here. Nobody’s boss has said to anyone, “It is vital that you learn to speak Italian in order for us to conduct our business overseas.” Everybody, even the uptight German engineer, shares what I thought was my own personal motive : we all want to speak Italian because we love the way it makes us feel. (57)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엘리자베스 길버트와 그녀의 친구들에게는 그런 언어가 이탈리아어다. 인도계 미국인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작가 줌파 라히리도 2015년 이후로는 영어로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지. 그녀는 이탈리아어로만 읽고, 이탈리아어로만 쓴다.
그래서 이탈리아어? 이탈리아어는 교재가 많지 않지. 그리고 어디서 배우나요, 이탈리아어를. 야나님을 통해 알게 된 <실비아의 스페인어 멘토링>을 4회까지 들었다. Soy Antonio. Soy Silvia. 그래서 스페인어? 결정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호기롭게 일본어 교재를 구입하며 시작했던 일본어는 히라가나 넘어 가타가나에서 엎어졌다. 이젠 히라가나도 기억나지 않는...
오랜 시간 함께 한 외국어라면, 역시나 영어다. 가깝고도 먼 당신. 애증의 대상이며 그 모든 괴로운 밤의 원흉. 험버트만 롤리타를 갈망하는 게 아니다.
“영어,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영어를 사랑하는 50개의 이유와 영어를 미워하는 이유 40개를 뒤로 하고 제목을 다시 읽어 본다. 나이 들어 외국어라니. 불현듯 이 책의 저자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언어, 나이 들어 배우고 싶은 언어가 있다는 게. 사랑에 빠진 대상이 있다는 게. 그리고 그 언어가 그렇게 배우기 어렵다는 프랑스어라는 게.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