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뒤, 발문의 처음 두 문장이다.


아날렉타analecta, 이것은 먹다 남은 음식, 즉 남은 것, 나아가서는 빠진 것을 보충하고, 가외로 얻은 종류를 가리키는 라틴어다. 이 전체 제목 아래 지금까지 의뢰할 적마다 써왔던 수필, 서평, 대담, 토론, 인터뷰 등을 선별해서 모아 발간하게 되었다. (289)



이 책 맨 앞에는 <한국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짧은 글이 있는데, 그 글에서 사사키 아타루는 지난 가을부터 한국 광장에서 보인 촛불 시민의 불굴의 의지와 긍지에 대해 칭찬한다. 곤란을 극복하는 능력, 용기가 부족하지 않았던 한국 국민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넘친다. 느껴진다. 허락된다면 친애하는 마음을 담아서, 2017 3 10일 한밤중에, 보내어진 편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글이 인상 깊었다.


이야기는 현대 최초로 대도시에서 대규모 화학병기 테러로 기록된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의 주동 단체인 옴진리교에 대한 서술로 시작된다. 내부자료를 통해 옴진리교 신자들은 자살하려 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이 죽는 순간과 이 세상이 멸망하는 순간을 일치시키려 했다. , 자신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그 한 점을 절대적인 향락’, ‘죽음의 향락’, ‘멸망의 향락으로서 욕망했다는 것이다. (81) 이것은 뿌리 깊은 인간의 욕망, 즉 내가 죽으니, 따라서 모두 죽어라. 깡그리 죽어라. 다른 사람들도 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의 저급한 발현을 뜻한다. 저자는 모두 죽는다에서 모두 죽어라로 비약하는 파멸에 이르는 이 욕동 Trieb, 즉 충동을 인간은 불교 특히 원시불교와 일신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방법으로 수렴해왔다고 정리한다.


저자는 부처의 회답을 윤회전생으로 본다. 즉 전생에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현세에 이런 저런 고민을 갖게 되었고, 내세가 있으니 현재의 삶 역시 자포자기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를 죽을 수 없는 고통으로 바꾸는 것. 개개인의 죽음을 고통스러운 삶의 연속으로 바꾸는 것. 개개인의 죽음을 절대적으로 상대화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개개인의 죽음을 초월한 절대적인 죽음을 마련해둡니다. 바로 참된 죽음입니다. 이 개개인의 죽음 그 자체인 연속되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완전히 탈출하고 벗어나는 것이 참된 죽음입니다. 그러면 더는 공포도 고통도 아니지요. 두 번 태어나지 않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이것을 해탈이나 열반, 니르바나라고 합니다. (93)



일신교 쪽은 오히려 더 간단하다. 죽음을 상대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진정한 죽음을 저편에 둔다. 죽음의 고통을 경멸한다. 최후의 심판이 실로 진정한 죽음이며 그것에 비하면 우리 개개인의 죽음은 하찮다고 말한다. 기독교도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구원이 없는 것인데, 최후의 심판 명부에 자신의 이름이 빠져있는 것이 그것이다. (95)


저자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인용해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고, 모든 사람이 나누는 절대적 경험, 죽음. 다른 모든 가능성을 무로 만들어버리는 가능성. 모든 불가능성의 가능성, 죽음. 하지만, 내가 죽었을 때, 내가 죽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것은 육신이 없는 이승의 타인들이다. 나는 죽어갈 뿐, 나는 내가 죽은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절대적인 비은폐성 Unverborgenheit=aletheia’ (숨어 있지 않은, 드러난, 들춰진, 나타난 혹은 밝혀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습니다. 저승은 없습니다. 이승 또한 없습니다. 죽음에는 피안도 차안도 없습니다. 우리는 죽어갑니다. 죽으러 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향해 가는 무한한, 끝없는 여정입니다. 어차피 죽는다거나 어차피 죽으니까 같은 부질없는 말에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러므로? 그런 말은 불필요합니다. 우리는 죽어갑니다. 무한히 이어진 죽음에 이르는 길을 갑니다. 죽음이 없는 양 그 길을 가는 중입니다. 자포자기의 심경으로서가 아니라 웃으면서 죽음을 대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117)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돈이나 미모, 명예 혹은 인기에 대한 집착에서는 벗어날 수 있겠지만, 존립 그 자체, 생명에 대한 집착은 죽는 그 순간까지 계속된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마지막 숨을 다해 나 죽기 싫어,를 외치는 (혹은 속으로 되뇌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가야할 때를 알고 스스로 곡기를 끊을 정도로 단련된 분들, 자연의 섭리를 자신에게까지 적용할 수 있는 분들은 정말 극소수다.


우리 중 누구도 스스로 선택하지 않고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지만, 이제 곧,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의 질문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삶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의문이다.


죽으면 모든 게 다 끝이다. 저승도 없고, 이승도 없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 참된 죽음에 이르기 위해 해탈에 도달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다. 이제 눈을 감으면 아버지 집에 영원히 살리라,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누구의 답이 맞는지는 눈을 감아봐야 알 것이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은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기에, 우리 모두 죽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신할 수 없다. 자신의 믿음과 신념에 따라 살 뿐이다. 죽은 후에야, 내가 죽은 후에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마지막은 역시나 저자가 추천하는 책들로 마무리되는데, ‘나의 소설관을 바꾼 책 세 권이라는 제목이 시선을 끈다.


사무엘 베케트 : 『말론, 죽다』

제임스 조이스 : 『율리시즈』

헨리 밀러 : 『남회귀선』

















제목은 3권이라는 데, 베케트는 3부작의 다른 2『몰로이』,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나 단편집 중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한 소설과 텍스트들』과 바꿀 수 있고, 조이스는 『피네건의 경야』와 밀러는 『마루시의 거상』과 바꿀 수 있다고 하니, 8권이 되는 셈이다. 몇 권은 검색이 되지 않는데, 번역된 제목이 다른 듯하기도 하고 내가 못 찾는 이유도 있다. 제목들이 한결같이 무겁고 장엄해서 좀 부담스럽기는 한데, 일단 책 제목과 표지는 한 번씩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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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5-24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 밀러가....남회귀선도 썼네요? 북회귀선만 알고 있었는데......

단발머리 2017-05-24 14: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오늘 알았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네요 ㅎ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