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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잠깐 설웁다 ㅣ 문학동네 시인선 90
허은실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월
평점 :
<엄마 걱정>은 그런 시다. 차디찬 방에 찬밥처럼 담겨 이리저리 몸을 뒹굴이며
엄마를 기다리는 어떤 아이. 그 아이의 서글픈 마음이 눈앞에 보이는.
엄마 걱정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옛날하고 아주 먼 옛날, 천재
시인 기형도의 이름은 언뜻 들어봤지만, <질투는 나의 힘>이
그의 시인지 몰랐던 그 옛날, <엄마 걱정>이라는
시를 만나 가슴이 헛헛했다. 과거는 미화되고 기억은 왜곡되기에, 과거는
아름답게 기억되기 십상이지만, 가난은 얼마나 무거운 이름인가. 가난할
때 추위를 견디어야 하고, 가난할 때 보고 싶은 엄마를 만나기까지 한없는 기다림을 견뎌야 한다. 처음 읽었을 때는, 아이가 되었다.
추운 방에 누워 해석이 어려운 소리들을 해석하려는 그 아이가 되어 엄마를 기다렸다. 오지
않는 엄마, 돈 벌러 시장에 간 엄마,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두번째 읽었을 때는, 엄마가
되었다. 날은 어둑해지고 열무 삼십 단 판 돈으로 아이 먹일 것을 두 손 가득 들고서는 걸음을 재촉하는데,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진다. 아이에게 간다. 마음은 저만치 달려가는데, 다리는 천근만근 앞으로 나가지지 않는다. <엄마 걱정>은 나에게 그런 시다.
기형도는 사진으로 만났고, 허은실은
목소리로 만났다.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작가들이
초대될 때, 작가 프로필을 소개하는 순서가 있는데, 그 때
‘임자는 뉘시오?’라는 두 마디를 찰지게 발음해 주는 이가
허은실 시인이다. 목소리가 아주 맑고 청아해 나는 여러 번 그녀의 얼굴을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다. 시집으로 만난 그녀의 목소리는 내가 들었던 목소리와 많이 다르다.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시는 시인의 더 깊은 곳, 더
아픈 곳을 보여준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녀의 첫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중에서 나는
<이별하는 사람들의 가정식 백반>, <입덧>, <유전>이라는 시가 좋았다. 아, ‘~~ 꽃이 피었다’의
<치질>도 좋았는데, 제일 좋았던 시는 <둥긂은>이라는
시다.
둥긂은
허은실
아이 가진 여자는 둥글다 젖가슴은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
알은 둥글다 살구는 둥글다 살구의 씨는
둥글다 씨방은 둥
글다 밥알은 둥글다 별은 둥글다 물은
둥글다 ‘응’은 둥글다
그 밤 당신이 헤엄쳐 들어간 난자는 둥글다
멀리까지 굴러가기 위해
굴러가서 먹이기 위해
….
구르고 구르다가 모서리를 지우고
사람은 사랑이 된다
종내는 무덤의 둥긂으로
우리는 다른 씨앗이 된다
0이
된다
제 속을 다 파내버린 후에
다른 것을 퍼내는
누런 바가지
부엌 한구석에 엎디어 쉬고 있는 엉덩이는
둥글다
공룡알, 개구리알에서
시작되어 사람이 되고, 그리고 둥글게 안아 입 맞추고 안고 뒹굴며 사람이 사랑이 되어 간다. 마지막에는 둥그런 무덤 속에 가지런히 눕게 되고, 그리고 다른 씨앗이
되어 버리는데, 그렇게 처음의 둥긂은 다시 0이 된다. 동그라미 한 세상,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100년을 살았다던 할머니가 “인생 잠깐이야.”라고 했다던가. 100년도 눈깜짝할 새 그렇게 지나쳐 간다. 오늘이, 내일이 그렇게 간다.
즐겁고 기쁘고, 슬프고
억울하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쓸쓸하고 외로운 삶의 순간
순간을 그렇게 산다. 사랑이 시작되고 사랑이 흐르고 사랑이 저만치 간다. 그
순간의 어느 찰나에, 나는 잠깐 설웁다.
나는 잠깐 설웁다.
잠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