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식초 아가씨 ㅣ 호가스 셰익스피어 시리즈
앤 타일러 지음, 공경희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0월
평점 :
호가스의 셰익스피어 프로젝트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오늘날 가장 인기 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다시 쓰도록 후원하는 계획이다.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앤 타일러가 다시 썼다. 『식초 아가씨』.
식초 아가씨 케이트는 아주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친척들은 그녀를 곤란하게 하는 아이, 시무룩한 10대 소녀, 대학 생활 실패자(208쪽)로 기억했다. 그래서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케이트를 치워버리게 되었다고 좋아했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케이트는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아버지 닥터 버티스타의 점심 도시락을 준비하고, 제멋대로인 10대의 표본인 늦둥이 동생 버니를 돌본다. 교사 보조로 일하는 찰스빌리지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들과 학부모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하루 종일 아이들과 실랑이를 해야 한다.
제 몫을 톡톡히 해내는 기특한 큰딸 케이트에게 그녀의 아버지는 비자가 만료되어 러시아로 돌아가야 하는 자신의 연구원 표트르가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도록 그와 결혼하라고 부탁한다.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펄쩍 뛰며 반대했지만, 기다리는 가족도 없이 미래에 대한 아무런 보장도 없이 고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표트르의 사정이 딱하게 느껴진다. 어설픈 외국어지만 진심을 전하려는 표트르의 마음이 가상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표트르와의 결혼으로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 독립하게 되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 케이트는 그와 결혼하기로 한다. 하지만, 결혼식 당일, 닥터 버티스타 프로젝트의 전부였던 실험쥐들이 사라져 버리고, 케이트는 표트르와 결혼해야할 결정적인 이유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결혼을 강행한다.
실험실의 쥐들이 사라져버려 당황하고 화가 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결혼식을 올리고 나서 원래의 성격이 나오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표트르는 예전의 그가 아니다.
결혼식 이후 표트르는 노골적이게 독단적으로 굴었다. 마치 이제 결혼했으니 멋대로 그녀를 대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표트르는 그녀가 그놈의 열쇠를 찾아 준 게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혹은 먹을 것을 만들겠다고 제안하다니 얼마나 친절한지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272쪽)
표트르는 변했다. 수줍어하며 그녀 곁에 앉고, 그녀를 위해 새 수건과 칫솔을 준비하던 그 자상한 남자가 아니다. 자신의 실험쥐들을 찾기 위해 버니의 남자친구 에드워드의 집을 무단으로 침입하고, 에드워드를 제압해 실험쥐들을 구출해 내는데 거침없이 무력을 사용한다. 계속해서 그를 돕는 케이트에게 고맙다고 말하지 않고, 리우 부인에게 소리를 지른다.
남자친구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버니. 좀비처럼 얼빠져서 그를 쫓아다닌다며 케이트를 비난하고, 시민권을 얻기 위한 그들의 결혼을 조롱하고,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옷차림을 비웃는다. 그런 버니에게 케이트가 말한다.
“어떤 방식이든 네가 원하는 대로 네 남편을 대하도록 해. 하지만 그가 누가 됐든 그 사람이 가엾구나. 남자로 사는 것은 힘들어. 그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니? 남자들은 뭐든 고민을 숨겨야 된다고 생각해. 관리해야 된다고, 통제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진솔한 감정을 못 드러내지. 아프거나 간절하거나 슬픔에 휩싸여도, 상심하거나 고향이 그립거나 큰 죄책감에 시달려도, 뭔가 대실패를 할 순간이어도 – 그들은 ‘아, 난 괜찮아요. 모든 게 좋아요’라고 말하지. 생각해 보면 남자들은 여자들보다 훨씬 자유롭지 못해. 여자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면서 살아. 레이더가 – 육감이나 공감, 대인 관계라나 뭐라나 하는 게 – 완벽해지지. 여자들은 상황이 이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아는 반면, 남자들은 스포츠 경기와 전쟁, 명예와 성공에 몰두하지. 남자와 여자는 다른 두 나라에 있는 것과 비슷해! 난 네가 말하는 것처럼 ‘망가지지’ 않아. 난 그를 내 나라에 들어오게 하는 거야. 우리 둘이 본모습으로 지낼 수 있는 곳에서 그에게 자리를 주고 있는 거라고. 제발 버니, 우릴 좀 봐줘!” (308쪽)
지나가다가 케이트에게 한 마디.
케이트야. 남자라면 강해야 하고, 자신의 고민을 숨겨야 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고 설파하는 그런 문화는, 남자들이 여자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 남자들이 만들어내 허상이야. 오히려 여자들은 솔직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는 그런 남자들을 좋아해.
케이트야. 여자들은 아장아장 걸을 때부터 사람들의 감정을 살피며 살면서 레이더가 완벽해지지만 남자들은 다르다구? 그런 레이더는 여자들도 원하지 않아! 그런 레이더를 가져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유 때문에 여자들은 레이더를 가동시키면서 사는 거야. 남자로 사는 게 힘들지. 그래, 인생은 다 힘들어. 요즘에는 이 나라 국민으로 사는 것도 참 힘들다. 실망과 분노가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겨울바람 맞으며 광장에 6번을 나가고 평화의 상징 촛불이 거대한 분노의 횃불로 번져갔지만 우리는 이번 주 금요일 오후까지는 안심하지 못해, 안절부절 또 이 한 주를 보내야한단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 마음이 아프다.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된 건 참 기쁜 일이기는 한데. 너는 1장의 당당한 케이트가 아니구나. 정통 보수 말괄량이도 아니면서 너는, 길들여졌구나.
누구를 탓하겠니. 원작이 셰익스피어인데.
나도 널, 탓하지 않을게.
너까지 미워할 여력이 없어서 그래.
너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사람이 있어.
있어, 그런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