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입.트.페.를 만났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21쪽)
얼마나 오랫동안, 선의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질문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결국에는 남자도 차별받는다는 얼토당토없는 주장에, 순순히 대답해 왔던가. 공손하고 바른 태도로 임하려 애썼던가. 행복한 삶 정도를 바라는 게 아니라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릴 정도로 심각해진 ‘여성 혐오’ 현상 앞에서, 얼마나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애썼던가.
입.트.페.는 말한다.
당신에게는 대답할 의무가 없다.
이해는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것이다.
그 때 남성은 ‘내가 보기엔 아닌데’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야말로 가장 정확한 동시에 가장 의미가 없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아래라 생겨나는 불평등이라는 주제에서, 남성이라는 성별을 가진 채로는 영영 당사자가 될 수 없으니까요. 본인이 직접 느낄 수 없으니, 일부러 배우려고 노력하지 않은 한 혼자서는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볼 수 밖에 없는 문제는 자신은 볼 수 없다고 자기 입으로 밝혔음에도, 공신력을 얻는 쪽은 상대입니다. 내 경험의 정당성마저 남성이 결정하는 겁니다. (27쪽)
왜 이렇게 예민해? 별것도 아닌 거 가지고 그래? 왜 이렇게 극단적이야? 라고 말한다. 가해자, 힘 있는 사람들의 말이다. 이게 바로 다른 혐오발언보다 더 위험한 ‘뭘 또 이렇게까지’라는 생각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차별은, 공식적으로 비공식적으로, 구체적으로 조직적으로,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여성의 삶을 억압하며 지속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차별에 대한 여성의 ‘경험’은 쉽게 무시된다. ‘경험의 정당성’을 이런 차별을 경험해 보지 않은 남성이 결정하려 들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엔 아닌데. 그렇게 심하지는 않은데. 요즘 많이 나아졌잖아,는 모두 같은 말이다.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차별을 받는 집단에서만 나올 수 있다. (49쪽)
‘그렇게 똑같이 혐오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려면, 남성혐오가 생겨나기 이전에 그토록 만연했던 여성혐오에 대한 비판과 제재가 있어야 했고, 그것을 재밌다고 소비하거나 묵인 혹은 방관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 있어야 했고, 남성혐오 직전까지 여성들이 수없이 제기해온 온건하고 지적인 비판에 반응을 했어야 합니다. 여성이 더 나은 수를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남성이 ‘저급하고 의미 없는 수’에만 반응한 겁니다. (113쪽)
이 책의 저자 이민경은 대학에서 불문학과 사회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외대에서 통번역을 전공하고 있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전공과 상관없는 이런 훌륭한 책을 출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강남역 살인 사건이다. 그녀 스스로도 그 일 이후로 자신은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7쪽) 많은 여성들이, 특히 전체 여성들 중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여성들이, 남자들로부터 사회로부터 여성으로서 가장 높은 가치를 부여받는 2-30대 젊은 여성들이,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섰다. 여자이기 때문에 죽었다고, 당신이 바로 나라고... 포스트잇에 애도의 메시지를 붙이고, 함께 서고, 함께 울었다. 매순간 여성으로서의 삶, 인간으로서의 삶을 위협하는 공포와 두려움이 혼자만의 것 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한 개인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무지한 남자들의 말에 맞서다 각개전투에 지친 친구들을 보고 그녀는 책을 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원치 않는 대화는 애초에 끊어내고, 논쟁을 시작할 땐 기존의 흐름을 바꾸는 것으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무례한 말에 지고 싶지 않을 때 통쾌하게 한 방을 먹이고, 기꺼이 대답해주고 싶을 때엔 적절하고 멋진 대답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페미니즘 말하기 실전편’으로 말이다.(9쪽)
혐오를 혐오로 맞대응할 필요가 있는냐,는 물음에 그녀는 답한다.
여성이 더 나은 수를 생각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남성이 ‘저급하고 의미 없는 수’에만 반응한 겁니다. (113쪽)
여성을 향한 온갖 부당한 조롱에 그토록 오래 눈감아 왔으면서, 애초부터 만연했던 조롱의 대상이 자신이 되자마자 치를 떠는 모습이 사실 우습습니다. (114쪽)
지난 메갈리아 티셔츠 논쟁 앞에서, 힘없는 계약직 여자 성우가 ‘Girls Do Not Need A PRINCE’ 티셔츠 인증사진 하나 올렸다고 벌떼처럼 일어나 그녀를 직장에서 내쫓는, 왕자는 아닌 것이 확실한 찌질한 남성들의 단결된 힘 앞에서, 내놓았던 논평조차 취소하며 원치 않게 정체성이 폭로되어버린 어떤 정당의 실망스런 모습 앞에서, 나는 그냥 정희진의 글을 읽고 또 읽었다. (http://m.hani.co.kr/arti/society/women/754513.html)
정확하고 절제된 언어로 말하는 여성주의를 보고 싶다면 정희진을 봐라. 혐오를 혐오로 대응하지 않는 우아한 문체를 보고 싶다면 정희진을 봐라. 이민경이 있고 정희진이 있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가 있고 『페미니즘의 도전』이 있다.
2005년 출간된 『페미니즘의 도전』은 2013년판이 개정판이다. 2016년 7월, 독립출판사 봄알람에서 클라우딩 펀딩으로 4000만원이 모금되어 출판된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는 펀딩 참여 독자들과 독립 서점 판매만으로 초판 7000부가 모두 팔렸다. 8월 12일에 구입한 내가 가진 책은 2판 2쇄다. 각개전투의 지원군이 필요한 여성들과 여성이되 남성의 마인드로 살아가는 여성들, 열린 마음으로 여성의 처지를 이해하기 원하는 남성들에게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