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저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
듬성듬성한 백발에 희뿌연 긴 턱수염을 가진 일흔 살 노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벤저민 버튼은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산다. 그에게는 시간이 거꾸로 간다. 호호백발 노인에서 믿음직스러운 장년으로, 활기 넘치는 청년의 때를 거쳐 종잡을 수 없는 청소년기를 보낸다. 어린이가 되고, 아기가 된다. 달콤한 잠, 소멸의 시간으로 빠져드는 아기에 대한 묘사는 죽음에 대한 그것과 유사하다.
그는 조금 전에 마신 우유가 차가웠는지 따뜻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분명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기 침대와 낯익은 나나가 있을 뿐 그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배가 고프면 울었고, 그게 전부였다. 낮과 밤이 흐르고 숨을 쉬웠다. 그 위로 그의 귀에 간신히 들리는 웅얼거림과 간신히 식별되는 냄새와 빛과 어둠이 있었다.
모든 것이 어두워졌고 그가 누운 하얀 아기 침대와 위에서 움직이던 희미한 얼굴들, 따뜻하고 달콤한 우유향이 그의 뇌리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89쪽)
죽음이 다가오는 찰나, 그 순간에 대한 묘사로는 『스토너』를 빼놓을 수 없다. 집에는 이 책 밖에 없어서, 조금만 인용해 보면 이렇다.
『Stoner』
It hardly mattered to him that the book was forgotten and that it served no use; and the question of its worth at any time seemed almost trivial. He did not have the illusion that he would find himself there, in that fading print; and yet, he knew, a small part of him that he could not deny was there, and would be there. ...
The fingers loosened, and the book they had held moved slowly and then swiftly across the still body and fell into the silence of the room. (288쪽)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인생을 받아들이는 태도와 크게 관련이 있다고 본다. 욕심이 많은 사람, 탐욕적인 사람들이 삶에 대한 애착 또한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용감하게 죽기 바라는 사노 요코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발랄하고 명랑하다.
남은 날이 2년이라고 했을 때, 다케에몬은 내 형편없는 마작을 자주 상대해 주었다.
다케에몬에게 2년보다 더 살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더니 “멍청아, 안 죽는 거야?”하고 웃었다. 그 후로는 마작을 하자고 불러도 오지 않았다. 그때 암은 폭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해 주세요, 여러분. (35쪽)
지금이 인생 중 가장 행복하다.
일흔은 죽기에 딱 적당한 나이다.
미련 따윈 없다. 일을 싫어하니 반드시 하고 싶은 일도 당연히 없다. 어린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을 때 괴롭지 않도록 호스피스도 예약해두었다.
집 안이 난장판인 것은 알아서 처리해주면 좋겠다. (63쪽)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핑계로 친구를 불러 마작을 두는 사람, 2년보다 더 살게 될 거라는 의사에게 “큰일 났어요. 돈이 다 떨어졌어요.”라고 말하는 사람, 지금이 죽기 딱 적당한 나이라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사노 요코다.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전혀 새로운 일, 인생의 다른 경험과 달리 그 느낌과 감각에 대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경험인 죽음이 다가왔을 때, 자신에게 다가올 때, 자신과 가까운 사람이 죽음에 스러지는 모습을 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녀는 다르다. 어린 시절, 동생 둘과 오빠의 죽음을 목격해서일까. 사노 요코에게 죽음은 자연법칙 그대로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다.’(198쪽, 옮긴이의 말)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는 기독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또 다른 세계를 믿는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 전의 무기력한 삶이다. 스스로의 몸도 가눌 수 없는 희망 없는 상태, 질병으로 인한 고통, 무력한 육체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들의 시선. 그것이 진정 내가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다지도 기분 나쁜 두통은 처음이다. 바늘 1000개를 다발로 만들어서 뇌를 찌르고 끊임없이 흔들어대는 느낌이었다. 두통약을 먹어도 전혀 듣지 않았다. 두통은 2년 반 동안 한순간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에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머릿속이 울렸다.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도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몸의 왼쪽이 저려왔다. 그 때문에 나는 다리를 절뚝거렸다. 꼬집어도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았다. 손가락을 만지면 얼음물에서 갓 꺼낸 듯이 차가웠다. .... 그런데 이번에는 몸의 왼쪽이 아니라 앞쪽이 저려왔다. 얼굴을 꼬집어도 아프지 않았고, 입 부근은 치과에서 마취를 한 것만 같았다. 덤으로 침까지 나왔다. 입이 새의 부리처럼 앞으로 늘어나는 느낌이었다. (124쪽)
이토록 명랑하고 씩씩한 사노 요코도 이 엄청난 고통 앞에서는 도대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그녀는 잘 생긴 의사 아카와씨가 진료해주는 호스피스에 들어간다. 친절한 간호사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죽음을 앞두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삶을 사는,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헤어진다.
내가 웃었다고, 그녀를 보고, 그녀를 읽고 웃었다고 그녀가 나를 싫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오히려 그녀는 내가 웃기를 바랬을 거라 믿는다.
사는 건 뭐고, 죽는 건 뭘까. 인생은 뭐고, 죽음이란 또 뭘까. 이 심각한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수 있게. 하하호호가 아니라, 크크크큭 웃으면서 할 수 있게 해줬다.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