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남겨진 자가 유명을 달리한 사람에게 해야 할 마지막 의무다. 반면 조문의 행위는 관 뚜껑을 닫고 장례를 치르는 행위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우리가 관 뚜껑을 닫으며 조문하려는 것은, 죽은 자들의 사인이 명백해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세월호 비극을 가능하게 했던 자본주의의 냉정한 논리와 그것을 비호하는 정권에 무기력을 느껴 세월호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빨리 뇌리에서 잊으려는 무의식적인 자기 보호 본능 때문인가. 사인이 명확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죽은 자보다는 살아 있는 자의 자기 보호 본능이 작동한 것이라면, 결단코 장례도 조문도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일이다. (195쪽)
그러나 10시 18분 해경 100t급 경비정인 123정 부정장 김종인은 어선들을 향해 확성기를 틀었다. “어선들 철수해, 어선들 철수하라고!” 빵빵 기적을 울리며 어선들이 세월호에 다가가는 것을 막았다. 그럼에도 어선들을 세월호에 “이물(배의 앞부분)을 그냥 무조건 들이대고” 승개들을 “끄집어냈”다. 뱃머리가 세월호 난간에 걸려 함께 빨려들어갈 뻔한 위기도 넘기면서 수십 명의 목숨을 구했다.
10시 30분쯤까지 50여 척의 어선이 현장에 도착해 대기했다. 당시 해역 수온은 12.6도. 최악의 경우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은 채 바다에 떠 있기만 해도 최대 6시간까지 버틸 수 있었다. 공중에 떠 있는 항공기 703호와 헬기 3대가 표류하는 승객들을 추적할 수 있었다.
구조할 시간도, 구조할 세력도 부족하지 않았다.
<한겨레 21, 1105호, 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