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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평점 :
1. 바람난 아버지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인데,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은 밝히지 않는 게 좋겠다. 아주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진 여가수, 지금은 예순에 가까운 이 여가수가 자신의 가정사에 대해 말하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나이 사십에 바람을 피워 가정을 버렸다. 아버지를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다. 그런데 내 나이가 아버지 나이쯤에 이르자, 그 때의 아버지가 조금 이해되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30대 초반이었다. 바람을 피웠다는 그녀의 아버지보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는 그녀의 말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고 간 아버지가 이해되다니,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싶었다. 이제 내 나이도 얼추 그 근방에 가까워지는 찰나, 이젠 나도 그 아버지가 이해되고 아버지를 이해하는 그 여가수도 이해된다.
그 아버지, 아니 그 남자가 이해된다. 그건 그 남자의 행동이 박수 받고, 환영받고, 케익 자르고, 촛불 켜고, 폭죽 터뜨릴 일은 아니지만, 그도 역시 연약한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 것, 그것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잘했다는 게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한다는 거다. 만약, 그렇게 못 하겠다면, 계속해서 그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정죄한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필립 로스가 이렇게 말한다더라.
이 사악한 새끼들! 삐치기만 잘하는 씨발놈들! 할 줄 아는 게 비난밖에 없는 이 조그만 똥 덩어리들! 내가 달랐고, 일을 다르게 처리했다면 모든 게 달라졌을까? 그는 자문해 보았다. 지금보다 덜 쓸쓸할까? 물론 그렇겠지! 하지만 이게 내가 한 짓이야! 나는 일흔하나야. 나는 이런 인간이 된 거야. 이게 내가 여기 오기까지 한 일이고, 더 할 말은 없어! (102쪽)
(두 번째 줄 ‘씨발놈들’ 밑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어, 그 단어의 철자 혹은 표현이 올바르지 않다고 말해준다. 나도 어쩔 수 없다. 번역자가 쓴 표현 그대로다. 빨간 줄은 운명이다.)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해 아들들은 분노한다. 문제는, 계속 분노한다는 데 있다. 청년이었을 때는 너무 젊고 분노가 강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 했고, 시간이 지나서는 나이가 들어 분노가 강해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 했다. (98쪽) 가정을 버린 아버지, 자신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아들들의 분노는 지속된다. 계속된다. 멈추지 않는다.
외려 그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들이 지금까지도 집요하고 또 진지하게 격분하면서 그를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그의 일을 그렇게 처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이 자기들의 일을 자기들 식대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변함없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자세는 그럼 용서받을 만한 것인가? 아니면 그 결과가 덜 해로운가? 그는 이혼을 하여 가족을 깬 미국 남자 수백만 명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고 그가 그들의 어머니를 때렸는가? 그들을 때렸는가? 그들의 어머니를 부양하지 못했는가, 아니면 그들을 부양하지 못했는가? (99쪽)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고 그들을 도왔지만, 그들을 떠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어머니와 헤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일생 동안 아들들에게 탄핵받아온 일흔 하나의 이 남자는 말한다. 변함없이 용서하지 않겠다는 너희들의 자세는 용서받을 만한 것이냐? 그 결과가 덜 해로운 것이냐?
2. 가장 훌륭한 아내를 가장 엉망인 아내와 바꾸어 버리는 것
피비는 침대 옆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창백하고 어여쁜 젊은 여자는 외모는 부드러웠지만 침착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목소리도 변함이 없었다. (43쪽)
아들들을 버리고, 가정을 떠나 새로 맞이한 두 번째 아내 피비는 말 그대로 훌륭한 사람이었다. 완벽한 여자가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그녀는 완벽한 아내였다. 죽음의 문턱까지 끌려갔던 이 남자는 현명하고 용감한 그녀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멈출 수 없는 힘 때문에, 멈춰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이 남자는 피비를 버린다. 오십대의 자신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새로운 한 여자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그는, 모든 걸 알아버린 아내와 이혼하게 된다.
그가 선택한 여자는 자신이 소유한 생물적 특성으로 그의 생존 본능에 노골적인 우위를 점한 사람이었다.(118쪽) 전적으로 에로티시즘의 영역에서만 대담함을 드러내는 사람이었고, 그와의 사이에서 에로틱한 모든 것을 한계까지 밀어붙이는 재능을, 오로지 그 재능만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130쪽)
이번의 그의 아내 ―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었다 ― 는 피비와는 전혀 닮은 데가 없었으며, 비상시에는 외려 위험 요소에 가까웠다. 물론 수술하는 날 아침에도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지 못했다. 그녀는 이동용 침대 옆에서 따라오면서 두 손을 비틀며 울더니 마침내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어쩌라고?”
그녀는 젊고 미숙했다. 따라서 뭔가 다른 말을 하려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남편이 살아나지 못하면 자기는 어떻게 되는 거냐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한 번에 하나씩 하자고.” 그가 아내에게 말했다. “우선 날 좀 죽게 해줘. 그런 다음에 내가 가서 당신이 견디도록 도와줄 테니까.” (50쪽)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 그래서 그는 인생 말년을 이렇게 혼자 지내고 있다. 두 번째 결혼에서 얻은 딸 낸시,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엄마를 버리고, 자신의 가정을 내던지고 떠나간 아빠를 아직도 살뜰히 보살피는 소중하고 예쁜 딸, 낸시. 낸시 밖에는 아무도 없다. 그 소중한 낸시도 자신의 삶에, 일에, 아이들에 치여 그 삶이 곤궁하다 보니, 그는 외롭다. 더 외롭다.
이 소설을 읽어가는 중에 여러 번, 아주 여러 번, 나는 내 안의 유혹, “고것 참 쌤통이다!”라고 말하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했다. 나는 사실과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택했고, 사랑이 식어버린 이전의 여자들을 버렸다. 자신에게 행복과 안락함을 주던 가정을 버렸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렸다. 나는 그에게, “메롱!”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을 여러 번, 억눌러야 했다. 나는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는 사랑을 선택했고, 그리고는 혼자가 되었다. 그는 욕망을 선택했고, 그리고는 외로웠다. 결국에는 그렇게 살게 된 거다.
3. 유혹이 가능한 나이
젊음에 대한 그의 찬사와 동경을 이해한다. 열 일곱과 열 여덟, 열아홉과 스물, 스물 하나와 스물 둘, 스물 셋과 스물 넷의 싱그러움은, 활기는, 생명력은 이미 그것이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절망에 다름 아니다.
그녀는 그에게서 불과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엉덩이에 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몸은 땀으로 축축했다. 완벽하게 균형이 잡힌 아주 작은 생물체였다. (136쪽)
새로운 여자를 만날 기대를 가지고 그림 교실을 열었지만, 자신 또래의 과부에게서는 도저히 만족하지 못 하는 이 남자. 욕망의 화신. 욕정의 구현체. 욕망 그 자체. 뜨거운 이 남자는 이십대 후반의 그녀에게 도전한다. 이전에는 그가 괜찮다고 생각하는 여자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던 걸 기억(166쪽)하면서 말이다. 결과는...
그녀는 전화하지 않았다. 산책을 나가서도 그녀를 다시 보지 못했다. 다른 널빤지 길을 따라 조깅을 하기로 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로써 마지막으로 크게 한 방 터뜨려보겠다는 그의 갈망은 꺾여버린 것이다. (140쪽)
자신이 늙어간다는 것, 이제는 육체적으로 아무런 매력을 발산할 수 없다는 것, 이제는 죽음이 더 가깝다는 것을, 기분 좋게, 무리 없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늙어간다는 것, 거울 속의 자신이 예전 같지 않다는 사실에 유쾌해 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 해도, 부인하려해도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누구나 속수무책이고, 누구나 두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이기는 건 결국, 시간뿐이다.
신은 허구라고 믿는 그가 유일하게 믿는 것, 그의 유일한 위로. 뼈.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뼈가 말한다. (177쪽)
그의 어머니는 여든에 죽었고, 아버지는 아흔에 죽었다. 그는 소리 내어 말했다. “저는 일흔하나예요. 당신네 아들이 일흔하나라고요.” “좋구나, 네가 살아 있구나.” 그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