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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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딜리팅‘ 의뢰를 원하십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구동치는 굳이 물건을 없애는 것보다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구동치는 두 개의 세계 모두에서 물건을 없애는 것을 풀 딜리팅 full deleting이라 불렀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로 물건을 옮기는 것을 하프 딜리팅 half deleting이라 불렀다. 물건을 그저 옮기는 것만으로 딜리팅이 가능한 것이다.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풀 딜리팅이든 하프 딜리팅이든 문제 될 게 없었다. (85쪽)

 

구동치는 딜리팅 전문 탐정이다. 죽은 사람들의 휴대전화기를 찾아 없애주고, 죽은 사람의 컴퓨터를 망가뜨리고, 죽은 사람의 일기장을 찾아서 갈기갈기 찢고 불태우는 일(84쪽)을 한다. 소설은 구동치의 의뢰자 중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면서 일어난 일들을 보여준다.

소설을 읽어나가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만약, 내가 생각해본다면, 난 어떤 물건의 딜리팅을 의뢰하게 될까?’였다. 일단, 이 노트북을 딜리팅 의뢰하겠다. 쓰단 만 글, 어디에다 대고 하는지 모르겠는 하소연 글, 내가 싦어하는 사람 명단 및 소소한 욕 등이 저장되어 있는 이 노트북. 노트북 딜리팅 의뢰. 그 다음으로는 곱슬머리 여드름투성이 중학교 시절 사진들 딜리팅 의뢰, 옷방 유아용의자 밑 쇼핑백 속에 00오빠가 보낸 편지꾸러미 딜리팅 의뢰, 휴대전화기는 2G라 딜리팅 하고 말것도 없고. 아, 참.

그리고보니, 진짜 딜리팅할 것들이 막 생각난다.

유통기한 확인조차 불가능한 냉동실 속 냉동식품들, 냉장고 속 시들시들 야채들, 각종 서랍 속 각종 물건들, 언제 쓸지 모르겠지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각종 물건들. 써놓고 보니, 이건 아니다 싶다. 이 책은 봄맞이 대청소와 정리 정돈에 대한 책이 아니다. 이 책은 딜리팅에 대한 책이다. 딜리팅 의뢰, 딜리팅 의뢰를 원하십니까.

2. 구동치는 김중혁? 

소설은 의뢰인이 죽은 후에야 일이 진행되는 딜리팅에 대한 것이고, 소설 초반 의뢰인 중 한 명이 죽게 된다. 어둡고 자칫 음산해지기 쉬운 분위기를 화~하게 해주는 건, 악어빌딩에 사는 사람들이다. 주변에서 흔히 만날 것 같지만, 실제로도 만나고 싶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 중에 제일은 역시 구동치다. 구동치에 대한 묘사 중 키에 대한 부분이 2번 정도 나오는데, 두 번 다 구동치가 보통 사람들보다 키가 무척이나 크다는 내용이다. 작가의 의도가 어떠하든 (그 의도일수도 있겠지만^^), 나는 구동치를 김중혁 작가님이라고 생각한다. 구동치는 김중혁이다.

남자는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을열자 비닐막 아래 있는 사진이 보였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사진을 문질렀다.

“그런데, 그냥 줄 수는 없지 않겠소?”

남자가 지갑 속에서 사진을 꺼내며 말했다.

“그냥 줄 수 없으면, 반으로 접어서 주십시오.”

구동치가 웃으며 말했다. (415쪽)

 

이 외에도 깨알 재미 에피소드가 수두룩 빽빽, 촘촘하지만, 일단 이 정도만 하기로 하고.

3. 빛나는 어록

킥킥거리며 읽어갔던 부분이다. 이 멋진 소설을 작가가 쓴 원문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내가 한국어에 이렇게도 능통하다는 것이, 무척이나 기쁘다.

“아 역시, 구 선생님이시네요. 멋진 말씀입니다. 예방이 의심보다 낫다. 제가 아이들에게 인성 교육을 할 때 그 말도 꼭 하겠습니다. 구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꼭 밝히겠고요.”

“아뇨, 뭐 그러실 것까진 없고요.”

“부담스러우시면, 제가 한 말로 하고 이렇게 고쳐도 되겠습니까?”

“어떻게요?”

“인자무적이요, 예방 우선이다. 어진 자에게는 적이 없고, 적의 공격을 예방하는 자에게는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뭐든지 인자무적이냐. 아주 지랄하고 자빠졌다.” (28쪽)

 

“사진 안 찍으시면 안 되냐고요.”

“뭐요?”

“사진 왜 잘 안 나오는지 모르죠?”

“무슨 소리예요?”

“사진이 왜 자꾸 이상하게 나오는지 모르죠? 얼굴이 별로니까 사진이 잘 안 나오는 거예요.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니까 일찌감치 포기하시라고요.” (168쪽)

 

4. 작품은 작가보다 위대하다.

소설가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부쩍 드는 요즘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는, 구동치=김중혁이라 생각할 때가 참 많았지만, 사실, 철물점 백기현도, 합기도관장 차철호도, 영민한 이영민도, 선배 형사 김인천도, 피시방 이빈일도, 셰프 박찬일도 모두 다 김중혁이다. 그들 모두는 김중혁의 자식이고, 김중혁의 인형이고, 김중혁의 작품이고, 그리고 모두 다 김중혁이다. (내 진심으로, 김작가님을 좋아하니까, 천일수는 일부러 빼주는 거지만, 만일 작가님이 ‘천일수도 나야.’, 그렇다고 하면, 뭐, 그것도 OK.)

그들은 모두 김중혁이고, 각자 백기현이고, 차철호고, 이영민이고, 김인천이고, 이빈일이고 그리고 박찬일이다.

어설픈 귀동냥으로 들은 얘기 하나. 김작가가 위대하지 않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어쨌든, 작품은 작가보다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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