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라카미 하루키
나는 사실, 하루키를 그렇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고, 해서 그의 작품을 모조리 읽은 것도 아닌데, 별처럼 빛나는 작가들 중에서도 하루키의 인터뷰가 제일 궁금했다고 하면, 지리적 근접성이 아니라, 심리적 근접성 때문이 아닐까 한다. 기라성 같은 작가들 중에서도 웬지 모르게 하루키와 가깝다고 느끼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몇 살 때 작가가 되셨나요? 작가가 되었을 때 놀라셨나요?
무라카미 제가 스물아홉살 때 작가가 되었지요. 물론 놀랐어요. 하지만 곧 익숙해지더군요. (115쪽)
사실, 이런 류의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예컨대, 공부 열심히 안 하는데 전교 1등이라거나, 피부과 안 다니는데도 타고난 피부미인이라거나, 아니면 작가가 될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스물 아홉에 갑자기 쓰기 시작해 전 세계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거나.
하지만, 이런 문장이 있어 다시 하루키가 좋아진다.
무라카미 저는 지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오만하지도 않아요. 저는 제 책을 읽는 독자들과 같은 종류의 사람입니다. 재즈 클럽을 운영하면서 칵테일도 만들고 샌드위치도 만들었지요. 작가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어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지요. 그건 일종의 하늘이 준 재능이랍니다. 그래서 아주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114쪽)
하늘이 준 재능이므로, 자신은 겸손해야 된다는 하루키의 말. 이러한 깨달음 자체가 이미 하늘이 준 재능 아닌가 싶다.
지금도 제 글쓰기의 이상은 챈들러와 도스토예프스키를 한 권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게 제 목표랍니다. (120쪽)
내가 아는 챈들러는 [프렌즈]의 챈들러 뿐이라, 알라딘에서 챈들러를 찾아보았고, 이이는 레이먼드 챈들러인 듯 하다. 훌륭한 작품이 많으나, 읽어본 작품은 아직, 없다.
우리는 마음속에 제정신인 부분과 제정신이 아닌 부분이 함께 있어요. 이 두 부분을 타협해가면서 사는 거지요. 이게 제 신념입니다. 저는 글을 쓸 때 특히 제 마음의 제정신이 아닌 부분을 잘 볼 수 있어요. 아니, 제정신이 아니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군요. 오히려 비일상적인, 비현실적인 부분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127쪽)
‘비일상적인, 비현실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제정신이 아닌 부분’이 더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 마음 속 깊은 곳, 제정신이 아닌 부분이 말하게 하는 것, 제정신이 아닌 부분이 말하는 것을 듣는 것, 그런 것이 문학이 아닌가 싶다. 제정신인 부분과 제정신이 아닌 부분의 타협이 얼마나 절묘한가, 두 부분이 얼마나 조화로운가, 이 쪽에서 저 쪽으로 얼마나 유연하게 뻗어가느냐가 결국은 위대한 작품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해 준다. 옆집, 줄기차게 짖어대는 미친X소리여도 안 될테고, 5학년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뻔한 이야기라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을테니 말이다.
2. 움베르트 에코
성장소설은 대개 어느 정도 감정적이고 성적인 교육도 포함합니다. 당신의 소설 전체에서 성적인 장면이 묘사된 것은 딱 두 군데뿐입니다. 하나는 『장미의 이름』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바우돌리노』에서입니다.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에코 성에 대해서 쓰는 것보다는 직접 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네요. (42쪽)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류의 사람이다. 보통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만큼 어마어마하게 똑똑하고, 감히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좋지만, 이런 방식, 이런 톤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 나는 이런 사람을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캐릭터이기는 하다.
요즘 제일 큰 즐거움은 무엇인가요?
에코 밤에 소설을 읽는 거예요. 가톨릭 배교자로서 제 머릿속에는 아직도 낮에 소설을 읽는 것은 지나치게 쾌락을 좇는 것이라고 말해주는 가느다란 목소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답니다. 그래서 낮은 주로 에세이나 어려운 작업을 위한 시간이랍니다. (45쪽)
예전에 ‘양파’에 대한 TV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양파의 효능 및 효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 프로그램에 의하면 양파만 먹으면 성인병 대부분을 예방할 수 있다는 거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양파는 물에 삶거나, 불에 볶아도 영양소 대부분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 제일 반가웠던 건, 그 때는 ‘양파가 아주 저렴했다’는 것이다. 몸에 좋고, 조리하기도 쉽고, 구하기도 쉬운데 가격까지 싸다. 거의 ‘신의 선물’ 수준이다. 몸에 좋고, 조리하기 쉽고, 구하기 쉽고, 가격이 저렴한 ‘양파’라니.
첫째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서’를 폭풍흡입할 때였다. 최신의 교육이론으로 무장한 갖가지 알록달록 육아서들 사이에서 옥석을 가리느라 분주했던 때, 여러 권의 육아서를 간파한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결론은 ‘책읽기’다.
물론, 나는 “그래, 책 많이 읽어야돼. 그래야~~“라고 말하는 엄마들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책에는 효과 같은 게 없습니다. ‘이제야 되돌아보니 효과가 있었구나’라고 알 뿐입니다. 그 때 그 책이 자신에게 이러저러한 의미가 있었음을 수십 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입니다... 책을 읽어야 생각이 깊어진다는 말은 생각하지 말기로 합시다. 책을 읽는다고 훌륭해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독서라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니까요. 그보다는 어렸을 때 “역시 이것”이라 할 만큼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한 권을 만나는 일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141쪽)
책을 읽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즐거움’을 배제한 독서를 나는 생각할 수 없다. 가끔은 어려운 책도 읽어야하고, 답답한 현실을 고발하는 책들 또한 읽어야한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책을 읽어야하고, 작심삼일의 흐트러진 마음을 붙잡아줄 책들 또한 가끔은 필요하다. 하지만, ‘즐거움’ 그 자체를 위한 책읽기를 포기한다면, 책읽기가 수많은 의무 중의 하나로 변질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주장하는, 엄마들이 말하는 ‘독서 교육’에서 가장빨리, 가장 멀리 도망치는 일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책읽기의 즐거움은 그렇다치고.
육아서 독파의 결과가 ‘책읽기’라는 결론은 꽤나 흥미로웠다. 책읽기는 아이의 정서발달에도 최고의 효과를 내고, 아이들에게 무엇보다도 강력한 심리적 안정감을 준다. 어휘량을 늘이는 데도 최적의 방법이다.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엄마의 특별한 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무릎에 아이를 앉히고,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주기만’ 하면 된다. 아이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일정부분 ‘제 몫’이다. 지금은, 엄마인 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 곁에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면 된다는 거였다.
그리고, 에코는 말한다. 요즘은 가장 큰 즐거움은 ‘밤에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말이다. 에코와 나는 알고 있는 게 다르고(하늘땅 별땅), 가지고 있는 게 다르고(너무 다르고), 사회적 영향력면에서는 비교할 필요조차 없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세계적인 석학, 5만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도 저명한 에코에게 근자의 가장 큰 즐거움인 ’밤에 소설을 읽는 것‘은, 한국의 평범한 전업주부인 나에게도 가능한 일이라는 거다.
많은 책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많은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훈련이 요구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밤에 소설’을 읽는 거다. 좋아하는 소설, 좋아하는 소설가의 소설을 그렇게 읽는 거다.
근래에 나는 너무 행복한 밤을 보내고 있다. 이 자리를 빌어, 나에게 즐거운 밤을 선사해 주신 김중혁 작가님께 감사의 인사를 살포시 전한다. 작가님, 땡큐~
3. 오르한 파묵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 글을 쓰십니까?
파묵 남은 생이 짧아지면서 그런 질문을 더 자주 스스로에게 하게 돼요. (중략) 세월이 너무 빨리 바뀌니 오늘날의 책은 100년 후에는 아마 잊힐 겁니다. 극소수만 읽힐 거예요. 200년 후에는 요즘 쓰인 책 중 다섯 권 정도만 살아남겠지요. 내가 그 다섯 권 중에 들어갈 책을 쓰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하지만 그 점이 글쓰기의 의미인가? 200년 후에 읽힐지에 대해서 내가 걱정해야 하는가? 삶에 대해 더 신경을 써야하는 것이 아닐까? 내 책이 미래에 읽힐 거라는 위안이 필요한가? 이런 생각을 늘 하면서 계속 글을 써나가지요.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답니다. 제 책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믿음이 이 삶을 즐겁게 지내기 위해 제가 갖고 있는 유일한 위안이에요. (97쪽)
말로는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묘한 분위기의 책 『검은 책』은 재미있었지만, 조금 어려워,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놈의 대출기간 때문에 끝까지 읽지 못 했다. 오르한 파묵, 작가의 이름을 컴퓨터 화면에 띄워놓고 보니, 그 책이 다시 읽고 싶어졌다. 『검은 책』이라.
누군가를 위해 글을 쓰는가. 파묵은 자신의 책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믿음이, 자신에게 위안이 된다고 말했다. 자신의 책이 미래에 영향을 미칠 거라는 믿음이 있다면, 맞다. 글쓰기는 외로운 일이 아닐테고, 어쩌면 그렇게 많이 힘든 일도 아닐 것이다. 외로운 글쓰기란, 힘든 글쓰기란 내가 하는 지금의 이 일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르고 하는 글쓰기이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모르고서 계속되는 글쓰기. 그런 글쓰기가 외로운 글쓰기, 힘든 글쓰기 일테다.
4. 레이먼드 카버
카버 ... 삶이 제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지요. 언제나 엄청나게 많은 좌절감에 직면해야 했어요. 예를 들면, 글을 쓰고 싶은데 글을 쓸 시간도 장소도 없다는 것 등이지요. 밖에 나가 차에 앉아서 무릎 위에 공책을 놓고 글을 쓰려고 애썼죠. 이때는 제 아이들이 사춘기일 때였어요. 이십 대 말이나 삼십 대 초였을 때였죠. 우리는 여전히 가난했고, 언제나 한 발만 내딛으면 파산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323쪽)
작가라는 이름이 주는 아우라, 소설가라는 이름이 내뿜는 광채와는 상관 없이, 글을 쓰고, 지우고, 소설을 완성하고, 아니, 소설을 쓸 수 없어 단편이나 시를 써가면서 삶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은, 이미 그것만으로도 하나의 소설과 같다. 모든 소설의 결말이 해피엔딩일 수 없고,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를 시키고 아이를 달래가며 써내려간 소설이 모두 [해리포터]가 될 수 없듯이, 지난한 삶의 결국이 행복이 아닐수도 있고, 내가 가진 하얀색 도화지에 파스텔 분홍만 칠하겠다고 고집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게 삶이고, 그런게 인생일테다.
당신의 이야기들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를 바라십니까? 당신의 작품이 누군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카버 소설이나 희곡, 시집 한 권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대한 생각이나 자신에 관한 생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시대는 - 그런 시대가 설혹 있었다 해도 - 이미 지나가 버렸어요. 특정한 삶을 사는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소설을 쓰면 어떤 분야의 삶을 전보다 약간 더 이해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저 자신에 관한 한 예술의 역할은 딱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 소설은 뭔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소설은 단지 그것에서 얻는 강렬한 즐거움 때문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뭔가 지속적이고 오래가고 그 자체로 아름다운 어떤 것을 읽는 데서 오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지요.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계속해서 불타오르는 이런 불꽃을 쏘아 올리는 어떤 것이랍니다. (348쪽)
추천사 이야기를 해야겠다. 추천사를 쓸려면 이 정도는 써주세요. 추천사를 쓸려면 요렇게 써주세요.
나름대로 정의하자면, 소설가란 자신이 되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말하겠다. 소설가란 지금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이야기다. 소설 쓰기에 영적인 요소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소설가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소설을 쓴다. 결국 그는 매일 소설을 쓰게 될 텐데, 그러자면 건강과 체력은 필수적이다. ... 그러므로 한 권 이상의 책을 펴낸 소설가에게 재능에 대해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그들에게 재능은 이미 오래전에, 한 권의 책으로 소진돼버렸으니까. 재능은 데뷔할 때만 필요하다. 그다음에는 체력이 필요할 뿐이다. (7쪽)
그 위대한 이름들을 처음 볼 뿐 아니라, 그들의 위대한 작품 역시 처음 보는 이름이 수두룩했지만, 그래도 이 책은 다시 한 번 읽고 싶은 책이다. 다시 읽기 전에 파리 리뷰 인터뷰 2가 나오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