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번주 금요일엔 방학식
금요일, 토요일은 교회 여름 성경학교라 아이들은 이틀 내내 저녁까지 교회에서 지내고, 다음주부터는 방학. 성수기의 도래다.
2.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성수기 전주, 바야흐로 육아서를 읽어줄 때가 됐다. 방방 뛰는 아롱이, 할 일 많아 혼자 바쁜 딸롱이, 이해의 시간이 필요하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일단 제목을 보고 생각한다. 무슨 내용일까.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겠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안아 주겠다.
다시 아이를 키운다면, 더 많이 이해해 주겠다.
아이들은 금방 쑥쑥 자란다.
아이를 키우는 기간은 생각보다 짧다.
아이를 키우는 소중한 시간을 맘껏 누려라.
일단 이런 내용일거라 추측한다. 이런 내용이라 하더라도, 크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저자는 나보다 인생의 경험이 많으시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시간들을 지나 오셨다. 지금 내가 힘들게, 가끔은 지겹게 여기는 육아의 시간들이 사실은 보석처럼 값진 시간이라는 건, 나보다는 저자에게 더 실감날 수도 있다. 아기띠를 메고 알록달록 기저귀가방을 들고 걸어가는 고등학생 외모의 엄마들을 보며 내가 그렇듯이.
3. 예상은 적중할 듯 했지만, 아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단락.
‘자녀에게 올인하지 마라.’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젊은 부모들에게 당부한다. 심리적으로, 시간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걸 자식에게 몽땅 쏟아붓지 말라고. (80쪽)
전업주부 생활 10년 후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셔서 그런가. 처음부터 강하게 나가신다. 자식에게 올인하지 마라. 그 다음도 만만치 않다.
‘아이는 손님처럼‘
아이를 손님으로 생각하면 가장 좋은 일. 드디어, 어느 날 손님이 떠나 버린다는 사실이다. 한편으로 후련하고, 한편으로 서운하지만 무사히 떠나보냈다는 데서 오는 흡족함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무엇보다 손님을 치르는 기간 내내 나 역시 마음수업을 많이 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 뿌듯하다. 아이도 결국 그렇게 떠나 버릴 사람이다. 아니 떠나보내야 하는 사람이다. (93-4쪽)
두 가지 제안 다 내가 평소에 ‘지론’으로 삼는 육아원칙 아닌 육아원칙이다. 우리 집 애들을 남의 집 애들처럼 대하자.
다른 집 아이들도 그렇겠지만, 우리집 아이들도 남매끼리 곧잘 싸운다.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최선을 다해서, 열씸히 싸워요.”
그렇다. 얼마나 열씸히 싸우는지, 치고 받고, 물고 뜯고, 발로 차고 손으로 밀고, 아무튼 열심히 싸운다. 다른 집도 다들 그렇다지만, 그런 모습을 가까이서 볼라치면 금방 부글부글 끓어 오르기 마련이다. 누나에게 까불까불 깝죽대는 아롱이 잘못이 75%, 지우개 가루만큼도 동생에게 양보 못 하겠다는 답답한 성정의 딸롱이 잘못이 20%, 그리고 날씨 탓 5%다. 말리다, 말리다 보니, 이젠 내게도 내성이 생겼나. 이렇게 말한다.
“(성의 없이) 어, 왜? 왜 그래? 뭐? 왜? 하지 마. **이, 하지 마. ##이, 하지 마.”
남의 집 애들에게 이야기하듯, 지나가는 모르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하듯 타이른다. 그러면, 꼭지가 확 돌아 애들 싸움 말리다 내가 애들과 싸우게 되는 비상상태는 피할 수 있게 된다.
저자는 말한다. 자녀에게 올인하지 마라. 아이를 손님처럼 대해라. 저자는 전업주부 생활을 하는 동안 아이들에게 좋은 엄마, 놀아주는 엄마, 올인한 엄마였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열심히 노는 애가 공부도 잘 한다고. 하지만.
난 한 번도 자식에게 올인한 적이. 없다.
난 한 번도 내 자식이 나보다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책을 읽지 말았어야 하나, 이런 생각도 든다. 나는 이미 이렇게 살고 있구나. 자식에게 올인하지 않으면서, 아이를 손님 대하듯이 하면서. 이미 난 그렇게 살고 있구나. 너무 건성 건성 산건 아닌가. 급격하게 반성의 시간 찾아온다.
그러니 아이를 훌륭하게 키운다는 것은 바로 아이가 상냥하고, 인사성 바르고, 성실하고 정직하면서도 늘 당당하게 키우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당당하게 자란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든, 어떤 위치에 있든 결코 스스로를 찌질하게 산다고 비하하지 않는다. (87쪽)
아이를 어떻게 훌륭하게 키워야 하는지에 대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다. 친한 언니들과 이야기할 때, ‘내 눈에도 예쁘고, 다른 사람 눈에도 예쁘게 키우고 싶다’ 했는데, 그게 먼저가 아닌 것 같다. 제일 중요한 건, ‘아이가 행복한 것’ 같다. 어떨 때, 아이가 행복할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때, 아이는 행복해한다.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때.
내가 태어나서 가장 잘한 게 있다면 아이들 셋을 낳은 것, 그리고 마흔 넘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은 것 그 두 가지다. 살다 보면 때론 자괴감에 빠져 허우적댈 때도 많지만 그 때마다 난 스스로를 위로한다. 넌 그래도 두 가진 잘했잖아. (173쪽)
나도 스스로를 위로해야겠다. 난 좋은 엄마는 아닌데, 그래도 아이들을 낳았잖아. 내게 적성에 맞는 일을 찾는다면, 나도 잘한 일이 두 가지가 되는데. 나의 적성은 뭘까. 내가 잘 하는 일은 뭘까.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도 하지 않은 고민을 이제야 하고 있다. 내 적성은 뭘까.
4. 그냥, 그냥 하는 말이다.
나는 자유롭고 여유로운 박혜란 할머니의 육아관 많은 부분에 동감한다. 동물적 스킨십 부분이나, 아들과의 칼싸움 이야기 등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드는 생각은 이렇다.
저자가 며느리들에게 무한정으로 보내는 하트뿅뿅은 어쩌면 그녀들이 집에서 살림하기에는 아까운 재원들이기 때문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어떤 며느리는 자신의 아들보다 더 공부에 적성과 능력이 있고, 며느리 둘은 가족을 통틀어 제일 고학력자들이다. 저자는 그런 며느리들이 집에서 아이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는 건데, 30년 이상 여성 운동을 하고 계신 한 여성학자의 애정 어린 시선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녀가 생각지 않은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그녀의 며느리들이 의외로 ‘전업주부’ 체질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공부도 많이 했고, 직장 생활도 해 보았지만, 사실은 집안을 돌보고, 아이들과 함께 있는 것에 더 큰 행복을 느끼는, 말 그대로 ‘살림의 여왕’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다시 사회 생활을 해 보라는, 너의 능력을 살려 보라는 ‘시’어머니의 조언은, 너무 부담스럽다.
또 하나는, 그녀의 며느리들이 시댁에서 이렇게 존중받고, 말 그대로 호강하며 사는 것도 결국은 그녀들이 좋~~은 대학을 나와서이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모두 시댁에서 대접받는 건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녀들은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서 일했던 며느리들을 알아봐 주는 ‘시어머니’를 만났으니까. 그러니, 추석에 시댁에서 남자들이 설거지하고, 아이들 다 봐 주고, 며느리들은 시아버지와 카드 놀이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물론, 오버일 수도 있다. 내가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삐뚤어진 심성에, 자괴감에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이해해줘야 한다. 나는 사회적 약자, 제3의 성, 집에서 노는 사람, 돈 안 벌고 돈만 쓰는 사람. 난 아줌마다.
생각보다 결론이 우울하다. 마지막 문장 수정한다.
난 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