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소설 속 문장같은 기막힌 문장을 구사하는 정혜윤의 책이 그렇다.

독서 에세이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가 내가 읽은 그녀의 첫 번째 책이고, 페이퍼를 쓰진 못 했지만 『침대와 책』도 재미있게 읽었다.

 

 

 

 

 

 

제목부터 흥미로운 이 책, 『사생활의 천재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은 이렇다.

우리에게 있는 유일한 인생, 그것은 우리의 일상이다. - 카프카

매스컴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성공한 사람들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성공요인을 가지고 있다. 머리가 좋거나,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 (이전에는 이 두 가지 행운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나, 요즘엔 '돈이 많거나,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의 행운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끈기와 열정이 있거나. 그들만의 노하우로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이루고, 사람들은 그들을 보며 환호한다. 물론 보고 배울 점이 많다.

하지만, 정작 우리에게 힘이 되는 건 '어려운 상황을 이겨낸'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하께서도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난관을 여러 번 이겨내셨던 것을 기억하라.), 바로 지금, 지금 현재 '어렵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인지 모른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나의 안전과 행복을 확인하는 것처럼 잔인한 것도 없지만, 아무도 모르게 사람들은 그러기 마련이다. 아니, 나는 종종 그럴 때가 있다.

1. 자기 삶의 천재가 되는 것에 대해서 - 박수용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소몰이꾼이 되어 시골장을 전전하던 한 아이는 밤마다 이 장, 저장을 옮겨 다닌다. 밤새도록 소 두 세 마리와 함께 산을 넘고 고갯길을 걸어가며, 그는 시장의 시간과 오솔길의 시간, 인간의 규칙과 자연의 규칙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는 후에 야생 시베리아 호랑이를 따라 숲을 헤메고, 한 해의 절반을 영하 30도의 나무 위나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린다. (53쪽)

세계에서 한 시간도 기록되어 있지 않던 야생의 시베리아 호랑이를 1,000시간 가까이 영상으로 기록한 7편의 감동 다큐멘터리로 프랑스 쥘 베른 영화제 관객상, 블라디보스토크 국제 영화제 특별상 'AMBA'를 수상했으며, 『시베리아의 위대한 영혼』을 출간한 박수용 자연 다큐멘터리 감독의 이야기이다. (81쪽)

 

 그때 나는 사슴 뼈를 보면서 숲과 사슴의 역사를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살아생전 지녔을 사슴의 감성과 살아있을 동안의 투쟁과 생애 마지막 순간의 고뇌를 느꼈습니다. 그 뼈를 보면서, 숲 속에 자신의 역사를 외로운 유적처럼 뼈로 남겨놓은 한 생명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나는 이런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것, 매일매일 불행하다가 어느 한 순간 찬란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 나는 뼈 한 조각을 보면서 보람이란 것을 어떤 핵심적인 것, 본질적인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50쪽)

시베리아 호랑이를 찾아 숲을 헤멘다. 땅굴 속에서 호랑이를 기다린다.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초등학교 4, 5학년 때, 걸었던 밤길을 생각한다. 시끄러운 시장의 시간, 조용한 오솔길의 시간, 시장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규칙, 스스로 움직이는 자연의 규칙.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인생 전체가 중요하다는’ 그의 말은 오랫동안 큰 울림이 되었다.

나 역시 한 열흘쯤은 초연하다가도 한 사흘쯤 가슴이 아픕니다. 비트에서 너무나 그리워했던 삶이지만 도시에 돌아오면 그 삶은 나를 또 슬프게 합니다. 자연 다큐를 하면서 나는 제작비 문제로 고생했고 같이 일하는 동료를 잃기도 했고 겨우 제작비를 타내면 ‘추후 타사와 5년 동안 방송 행위 금지’ 같은 이상한 서약서를 요구받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 때 오솔길의 긴 흐름들, 비트에서 지낸 시간들, 호랑이와 함께 지낸 시간들을 생각합니다. 눈 내린 아침 전나무 끝에 매달린 아침 햇살을 생각합니다. 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더 큰 것이 있다. 더 큰 것이 있다. 사소한 것들은 잊힌다. 그 오솔길의 끝에.’ (68-9쪽)

 

2. 자기를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 변영주 영화감독

변영주 감독은 다큐멘터리 영화 「낮은 목소리」,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밀애」, 「발레교습소」, 「20세기를 기억하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방법」, 「화차」등의 작품을 만들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 「낮은 목소리」의 주인공 강덕경 할머니에게서 시작된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나자 돈이 딱 떨어졌습니다. 문제는 강덕경 할머니가 일 년 반을 살았다는 겁니다. 마지막 6개월은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할머니가 응급실에 실려갈 때마다 복잡한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죽어도 안도, 살아도 안도였습니다. 인간이 이래도 되나 반, 다행이다 반. 그런 심정이었습니다. 저는 정말 돈이 없었던 겁니다. .... 그래서 도망치듯 시나리오를 한 편 썼습니다. 시놉시스를 재밌어하는 제작자들이 있으면 미팅을 갖는 시네마트가 있는데, 저는 도망치듯 그곳에 갔고 정확히 3일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너, 나 안 지키고 딴 데 가서 딴 일 하는구나. 나 확 죽어버린다.' 꼭 이러고 돌아가신 듯했습니다. 「해운대 엘레지」의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함께 있자고."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부터 내가 이상해진 것 같았습니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91-2쪽)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어두운 기억들을 영화로 만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강덕경 할머니. 변영주는 강덕경 할머니를 만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영화 작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돈이 없는 거다. 할머니를 계속해서 돌볼만한 돈이 떨어진거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할머니가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하루에도 열 두 번씩 교차되는 가운데, 그녀는 그만 할머니의 손을 먼저 놓아 버린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그 때부터 방황은 시작된다. 자신을 학대하고, 원망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이젠 자신의 내면을 다독이는 시간을 가져야만 한다. 자기를 용서하고, 다시 자신을 사랑하고, 용기를 내라고 말하고, 그리고 다시 시작한다.

도시의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 큰 소리, 시끄러운 소리들. 그 소리들에 답하지 않는다. 그 소리들을 가만히 가라앉힌다.

그리고 듣는다.

숲의 소리, 자연의 소리, 조용한 소리, 내면의 소리, 작은 소리.

내 안의 침묵이 끝내 자기 자리를 찾았을 때, 그 소리는 들리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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