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유의 의무
어떤 관료
-김남주
일제 말기에 그는 면서기로 채용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근면했기 때문이다
미군정 시기에 그는 군주사로 승진했다
남달리 매사에 정직했기 때문이다
자유당 시절에 그는 도청과장이 되었다
남달리 매사에 성실했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확신하는 바이다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국가에는 충성을 국민에게는 봉사를 일념으로 삼아
근면하고 정직하게!
성실하고 공정하게! (64p)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한 것이다. (......) 그(아이히만)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 sheer thoughtlessness 였다. (74p)
김남주가 말한 면서기가 바로 아이히만이다. 그는 근면하고 정직하게 자신이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성실하고 공정하게 자신의 일을 처리한 아이히만을 보며, 저자는 묻는다. ‘근면이 최선인가’.
아렌트가 생각하기에 사유란 ‘타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무사유란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지요. 히틀러에게 받은 명령서에 서명하면서 아이히만은 그 명령을 수행했을 때 자신의 서명이 그 서명과 관련된 사람들에게 어떤 효과를 미치는지 ‘사유’했어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이 서명한 수용소 수감 명령서를 받았을 때 유대인들이 과연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지를 ‘사유’해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78p)
이런 아이히만의 철저한 무사유는 유대인들을 철저한 절망으로 이끈다. 사유하지 않음이 가져온 충격적인 결과다. 사유가 의무인 이유이기도 하다.
2. 소비사회의 유혹
이렇게 해서 백화점은 고가의 상품을 사는 사람과 그것을 동경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공간, 그래서 자본주의적 욕망을 훈련하는 최초의 원형적 공간으로 자리 잡아 갔습니다. (중략) 다시 말해 자본주의 논리에 철저히 복종해야겠다는 의지를 훈육하는 공간이 바로 백화점이란 것을 벤야민이 누구보다도 빠르고 예민하게 포착해 낸 것이지요. (134p)
난 백화점을 좋아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백화점에 자주 갔다. 특히, 딸애와 같이 간 적이 많은데, 위의 글을 읽어보니, 나는 인생의 중요한 가치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순간에 내 아이를 “자본주의 욕망을 훈련하는 최초의 원형적 공간”에 최초로 이끈 사람이었다. 벤야민은 ‘필요’가 아니라 ‘과시’를 위한 소비의 장소 ‘백화점’의 모습을 정확히 예언한 사람이다.
그의 이야기 중,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 구절이 하나 있다. 말해야 할지, 말하지 말아야 할지. 그의 주장에 의하면, 백화점에 가는 여성은 값을 흥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백화점에 가는 중산층 여성은 ‘자신이 이런 물건을 살 만한 여력’이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백화점에 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가격에 연연해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백화점에서도 가격을 흥정하지는 않지만, 깎아달라고 말한다. 처음 백화점에 갈 때만 해도, 백화점에서 창피하게 깎아달라고 해? 백화점은 정찰제야, 이렇게 말했지만, 다년간의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건, 백화점도 사람 봐 가며 적당히 가격을 깎아준다는 것이다. 원래 할인제품은 할인된 가격으로 나오기 때문에, 더 싸게 해줄 수 없다고 말하는 언니가 있는가 하면, 자연스레 5% 할인 추가로 해 드려요, 하고 말하는 언니도 있다. 신문 기사를 읽다보면, 가격이 어마어마한 명품 매장도 고객 봐 가며 5~10%씩 할인해 준다고 하니, 없어서 가격을 깎는 것은 아닌가 보다.
아, 이제 끝을 어떻게 내야 하나. 대략 난감.
1) 강신주를 알게 된 건 행운이다.
당장 쓸모가 없어 보여도 우리가 공부하고 책 읽고 감동받아 놓은 걸 하나하나 저장해 놓는 건 그 자체로도 흥미롭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이 우리를 보여 줍니다. (@좌절+열공, 174p) 흐뭇하다.
제자 백가의 귀환 시리즈 12권도 나오는대로 차근차근 읽어볼 예정이다. 도서관에서 도와주기를.
2) 백화점에 가고 싶다.
3. 사랑이란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란 감정이 과연 어느 경우에 발생하는지 숙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공동체, 하나의 언어 게임으로 닫혀진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사회,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 게임이 마주치는 공간에서 발생하는 것일까요? 당연히 사랑의 감정은 공동체에서 발생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타자, 즉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매력으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사랑이란 감정은 삶의 규칙이 다르기에 내가 정확히 알 수 없는 타자에 대해 위험한 도약 또는 비약을 감행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208-9p)
사랑은 타자, 즉 다른 공동체에 속한, 혹은 다른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대할 때 느끼는 매력이라 한다. 그렇다면, 외부세계에 속한 타인에 대한 뜨거운 사랑, 열정적인 감정만이 사랑이라 명명되는가. 가족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더 구체적으로 가정을 이룬 부부간의 사랑은, 같은 공동체에 속한, 같은 삶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함께한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 닮아가는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남편과 함께 한 시간이 10년이 넘어간다. 아직도 그이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게 이상한 것 아닌가. 나는 말 그대로, 문자 그대로, 표현 그대로 ‘잘 생긴 사람’과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지금도 남편을 보고 봄처녀마냥 맘이 설렌다면 그게 괜찮은건가, 아니, 그게 가능한가.
백보 양보해 사랑이 아니라면,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면, 남편과 나의 사랑은 뭐라 말해야 하나. 우리의 감정은 동료애, 양육 파트너로서의 연대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말인가.
아들 친구 엄마에게 이 얘기를 했더니 이렇게 말한다.
“아, 그래서 남자들이 바람을 피우는구나.”
여자도 사람이니 여자도 바람 피우고 싶을 수 있겠다.
사랑의 완성에도 불행히 사랑의 비극이 조금씩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두 사람이 새로운 삶의 규칙을 공유하게 되었을 때, 이것은 두 사람이 사회가 아니라 공동체에 속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기 때문입니다. 연애가 ‘사회적인 것’이라면 결혼은 항상 ‘공동체적인 것’일 수 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결혼과는 달리 연애는 나의 맹목적인 비약이 언제든지 상대방에 의해 거부될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 그러나 결혼에 골인하면 상대에 대한 위험한 비약은 점차 사그라듭니다. 더는 상대를 조심스럽게 알고자 하는 긴장감이 없어지는 것이지요. (211p)
일단 구구절절 옳은 말씀인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얘기가 없다는 게 아쉽다. 저자는 아직 결혼을 안 했거나, 적어도, 위의 글을 쓸 때까지는 결혼을 하기 전이라는 추측만을 남길 뿐이다.
죽을만큼 사랑하는, 이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사람과 결혼해 버린, 공동체를 이루어 버린, 가족이 되어버린, 우리 기혼자들 어쩌란 말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