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SK 언니와 접시꽃 당신

내가 다녔던 회사는 “특허 법률 사무소”였다. 특허와 관련된 일을 법적으로 대리해 주는 곳이고, 나는 상표부에서 일했다. 상표부에서는 외국 회사 “상표”의 출원에서 등록까지의 절차를 처리했는데, 외국 회사에게는 “너희들 지시대로 잘 진행하고 있다” 서신을 쓰고, 관련 서류를 특허청에 제출하는 일을 했다. 특허청 서류는 “청서류“팀에서 만들어 줬고, 나는 그 서류를 다시 한 번 점검하고, 결제를 맡고, 다시 ”청서류“ 팀에 가져다 주었다. ”청서류“를 갖다 주고, (사실 청서류의 실체는 황화일이다. 혼란 없으시길^^) HSK 언니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기억이 안 나는데, 내가 일상이 좀 지루하다, 심심하다 뭐, 이런 이야기를 했던 거 같다. 그래? 심심해? 그럼, 이거 읽을래? 하면서, HSK 언니는 책상 오른쪽 제일 밑 서랍을 열었다. 세상에!!! 그 안에는, 그 큰 서랍 안에는, 시집들이, 그 얇고도 작은 시집이 빼곡이 들어차 밖으로 튕겨나올 것 같았다. 아, 언니, 시 좋아해요? 응, 그냥, 난 시가 좋아서. 뭐, 읽을래? 아... 나는 ”접시꽃 당신“을 집었다. 아... 너무 좋은, 너무 가슴 아픈 시였다. 난, 청서류가 쌓이는 책상 속에 시집을 쌓아놓은 HSK 언니를 그날 다시 발견했고, 접시꽃 시인 도종환을 발견했다.

#2. 전교조 해직 교사

토요일 신문의 연재란에 느낌 있는 그림과 같이 실린 글을 읽다가, 도종환 시인이 오랜 시간 전교조 해직교사로서 투쟁했단 사실을 알게 됐다. 도종환 시인은 아름다운 시를 말하는 시인이면서, 복직을 위해 일하는 투사이기도 했다. 쭉 이어 읽어보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3. 명사 초청 강연회 강사

작년 12월에 도종환 시인 초청 강연회가 강북구 주최로 열렸다. 이 웬일이래 하며, 강연장소로 갔다. 강연회에서 들었던 말씀, 소개해주신 시들, 모두 좋았다. 그런데, 가장 놀랐던 건, 바로, 도종환 시인 그 자체였다. 세상에, 나이를 짐작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 “고운”이라는 단어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단어를 써도 된다면, 그 단어는 남자 도종환, 도종환 시인을 위한 단어다. 정말 고우셨다. 화려한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그 자체로도 충분히 고우셨다. 아, 시인이라 그런가. 진짜 이슬만 드시고 사시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의심하시는 분들을 위해 찍은 사진 올리고 싶으나, 핸드폰에 찍은 사진 올릴 방법이 없어 올릴 수가 없다. 단언컨대, 실제로 보면 더 동안이시다.

#4. 이제부터가 진짜 리뷰다. 헉, 앞이 길었다.

수업료를 안 낸 사람이 나 혼자라서 교무실에 불려갔는데, 언제까지 낼 수 있느냐고 묻는 담임 선생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줄 수 있는지 물어볼 어머니, 아버지가 옆에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강둑에 자전거를 세워놓고 쪼그려 앉아 울었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노래했는데,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가난함과 외로움이었습니다. (35p)

많은 경우, 가난의 긴 터널을 통과한 후, 그것이 기억 속에서 나타날 때, 가난은 아름다운 추억이고, 소중한 기억이다. 가난은 아이를 일찍 철들게 하고, 부부간의 정을 돈독하게 하고, 자식을 위해 애쓰시는 부모님의 고생을 뼈속 깊이 느끼게도 한다지만, 가난의 기억은 쓰라리다. 중학생의 나이에, 사는 게 힘들어, 너무 힘들어, 혼자 강둑에 앉아 우는 아이를 생각해 보라. 흐느끼는 가녀린 어깨가 너무 안쓰럽다. 가난은 쓰라린 기억이다.

그 때 우리는 서른 두 살이었습니다. 젊디젊은 나이에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황망한 일이었지만, 여기서 생이 끝나고 만다면 무엇이 가장 아픈 일일까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바르게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런 날이 짧아지는 것이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몸에 성한 곳이 있다면 주고 가자고 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살다 가겠다고 했습니다. 병상에서 이 시를 읽어주며 나는 울었지만 아내는 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자기가 죽거든 눈을 다른 이에게 기증해달라고 말했습니다. (120p)

서른 두 살, 서른 두 살에 죽음을 이야기한다. 예전엔 “서른 두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00가 세상을 떠났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서른 두 살 적지 않은 나이인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그 나이를 지나고 보니, 그러고도 아직 철들지 않고, 그러고도 아직 고민하고, 방황하는 내 자신을 보니, 그 나이가 참 파랗도록 젊디 젊은 나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내의 죽음을 대면하며 울면서 시를 쓰던 시인은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집으로 유명세를 얻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픔을 극복하려는 시인에게 얼마나 냉정한지. 나중에 좋은 분을 만나 재혼한 시인에게 쏟아진 비난은 이전에 쏟아졌던 관심만큼 시인을 당황하게 했다. 시집이 헌 책방으로 쏟아져 나오고, 만나는 사람마다 ’왜 재혼하셨어요?‘ 재촉하며 물어온다. 사람들은 시인이 언제까지나 떠나간 ’접시꽃 당신‘을 그리며 울고 있기를 바랬던 걸까.

비는 내리는데 미안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배운 글씨로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게 하는 아버지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었습니다. 아이들이 보고 싶어 차가운 회색 벽에 이마를 대고 그 벽을 손바닥으로 치며 울었습니다. 이런 내가 싫었습니다. 나를 가두고 있는 벽을 뚫고 넘어 아이들에게 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감옥 문을 발로 차고 이마를 짓찧어 피를 흘려도 벽은 무너질 리가 없어 다음 날 아침 망연히 앉아 있다가 뾰쪽한 젓가락 같은 나무로 벽에 금을 긋기 시작했습니다. 가로세로로 수없이 문질러 파서 벽에다 십자가를 새겼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85-186p)

전국교직원노조 일을 계속하던 시인은 결국 감옥에 갇히고 만다. 수상한 시절, 이 때, 정부와 학교측으로부터 의심의 눈길을 받는 문제 교사는 1) 아이들에게 열성적인 교사 2) 아이들과 함께 문집을 만드는 교사다. 감옥에 갇히고, 해직되고, 생계는 어렵고, 엄마도 모르는 아이들은 아빠를 잃어버리고. 시인이 직접 몸으로 겪은 시대가 너무나도 가혹해서, 생각만해도 맘이 아프다.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을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을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졸시 <담쟁이> 전문 (208p)

강연회에서 시인은 말했다. 이건 제가 쓴 시이지만, 어려분들이 읽고, 여러분들이 외우면, 그것은 “여러분의 시”입니다. 수천개 담쟁이 잎을 이끌고 벽을 넘는 담쟁이 잎 하나는 연약한 우리 자신이면서, 또한 우리 옆 사람이다.

이렇게 맑은 시를 쓰는 시인이 끌려가고 거리에서 집회를 이끌고 민주화 운동을 하는지 혼란스럽다고 말하는 소리도 듣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조직적이고 투쟁적인 일을 도모하면서 어떻게 이런 여리고 부드러운 시를 쓸 수 있느냐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 두 가지를 아우르며 양쪽 일을 잘 해내기란 쉽지 않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됩니다. 둘 중 하나는 진정성이 결여되었거나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분들이 납득하고 이해해할 만한 대답을 잘 찾지 못합니다. 나는 그저 "나같이 여리고 약한 사람도 앞에 나서서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를 살았던 거지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러면 그 말이 수긍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제대로 된 대답을 들었다는 표정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264-265p)

송경동 시인이 생각난다. 시를 써야하는 사람이, 희망버스를 타고, 감옥에 가고. 할 일이 많다. 시를 쓰는 일만큼, 앉아서 시를 쓰는 일만큼, 거리에서 집회를 하고, 민주화운동을 하고, 노동자들을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셨기에, 그리 하셨으리라 생각한다. 자신을 버리는 용감한 모습에 숙연해진다.

살아 있는 동안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꿈을 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원하던 것을 이루는 일이 아니라 "자신 생애를 밀고 쉼 없이 가는 일"입니다. "텅텅 비어버린 꿈의 적소에서 다시 시작하는 일“입니다. 다산 선생이 그러하셨듯 좌초한 그곳에서 찬물에 이마를 씻고 다시 정좌하고 붓을 드는 겁니다. (347P)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닌데.

아이들은 가능성을 인정받고, 청소년들은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젊은이들은 열심히 일하고, 젊은 부부는 걱정없이 예쁜 아이들을 낳고, 엄마 아빠는 집값 걱정, 물가 걱정, 사교육 걱정 없이 살고, 노인들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삶을 살 수 있고. 이렇게 하는데, 그렇게 많은 돈이 필요한건 아닌데. 왜 우린 그런 사회에 살 수 없을까. 왜 그런 사회는 오지 않을까.

시인은 내일을 말한다. 살아있는 동안에 꿈이 이루어질 수 없다 할지라도, 그래도 꿈을 버릴 수는 없다고. 꿈을 버릴 수는 없다고 말이다.

캄캄한 시대, 암담하고 답답하지만, 그래, 기다리자. 꿈을 잃지 말고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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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2 1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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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3 14: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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