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추천 도서 책자에서 눈여겨 봐두었던 책이 도서관 카트에 꽂혀 있었다. 이전에도 남편이 <헌법의 풍경>을 추천했지만, 별로 흥미가 없어 그냥 지나쳤다. 이 책도 그 때 지나친 책 중에 하나다. 제목부터가 마음에 안 들었다. 불편해도 괜찮아. 뭐가 불편해도 괜찮냐. 불편하면 불편하지. 그리고, 사실은 불편하다는 얘기 아니겠어? 하면서.

책을 대출해 책 무더기에 쌓아놓으니 퇴근한 신랑이 반색한다. 그래, 이 책도 그 형 책이라니까. 그래? 심드렁한 나의 대답. 응. 자신감 넘치는 신랑의 대답. 프로필에도 나와 있듯이 저자 김두식 교수님은 선교단체 예수전도단 활동을 하셨고, 여러 교회를 섬기셨다.

"그러니까, 이 형이 사시 되고 나서, 우리 YM 선배 중에 사시 된 사람이 있단 얘길 들었어. 형도 모임에서 인사하고 했다니까. "

"그래서, 그 형이 자기를 알어?"

"아, 저런 애가 있구나 했겠지."

"?"

안녕하세요, 신랑의 선배님~ 사진을 다시 한 번 보고, 인사하면서 책 읽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빵! 터진다.

우리집 딸롱이는 말 그대로, "모범생"이라, 나도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 공부잘하다가, 아니면 모범생으로서 모범생활 하다가, 중학교 들어가서 막, 반항을 하는 건, 부모의 양육 태도에 문제가 있어서다. 저자의 표현을 그대로 하자면, "저 집이 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뭔가 문제가 있어서 애가 저럴지도 모른다.'

그날그날 우리 딸의 '지랄'을 보고하면, 유선생님은 그것보다 심한 그 집 아들의 '지랄'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 딸이 "교수 부모 밑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냐?"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더라고 말씀드리면, 유선생님은 그 집 아들이 "우리 부모는 둘 다 서울대 나왔어"라고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니 친구들이 모두 "똥 밟았네"라고 대꾸하더라는 더 심한 사연을 들려주시는 식이었지요. (18p)

초등학교 때 멀쩡했던 저자의 모범생 딸이, 중학교에 들어가자 선언을 해 버린다. "난, 엄마 아빠처럼 찌질이로 살진 않을거야.", "교수 부모 밑에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리고는 대문 바로 앞까지 남학생들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입장하신다. 상상해보라. 완전 울고 싶다. 그래도 저자는 딸의 '지랄'을 보고할 때, 들어주시고, 더 심한 '지랄'을 이야기해 주실 조언자가 옆에 계셨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할까.

이 첫번째 이야기, "청소년 인권"에 대한 이야기에 소개된 드라마는 "네 멋대로 해라"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네가 결정해.", "엄마 아빠는 네 결정을 존중한단다." 하지만, 실제로 아이가 어떤 '선택'을 했을 때, '짬뽕' 말고 '짜장면'이 어때?, '분홍색 티' 말고 '노란색 티' 어때?'를 연발하지 않는가. 나도 그렇다. 솔직히 난 그런다. 그렇게 하면 할수록 아들롱이 딸롱이들의 '지랄'은 더 심해질 뿐이다. 그래서, 저자가 제안한 방법이 이거다. 좀 늦으면 어떠냐, 겪지 않아도 될 시행착오를 겪으면 어떠냐, 청춘의 몇 년이 좀 늦어지면 어떠냐. 그 아이가 '네 멋대로' 하도록 놓아두자. 내버려두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조종하려 하지 말고, 놓아두자. 그리고 기다리자. 응원하면서 기다리자.

두번째 이야기는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이야기다. 들여다 볼 영화는 <300>.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멋진 남자들의 벗은 몸이 뗴거지로 나온다는 거는 확실하다.

우리는 영화를 볼 때마다 영화 속의 누군가와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동일시의 대상은 보통 그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그런데 영화감독이 동일시의 대상으로 제시한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우리를 동일시하다보면 알 수 없는 불편함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 영화<300>에서 적대적 인간의 꼬리표를 붙이기 위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짐승'입니다. 영화는 비인간화의 과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영화 속의 페르시아 군대를 복면이나 투구로 포장합니다. 그리고 설사 그 복면이나 투구가 벗겨져도 우리에게 인간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저 안면장애에 가까운 시커먼 형체가 드러날 뿐입니다. (132-134p)

영화를 보며 영화의 주인공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주인공의 역경, 고난이 완전히 내 것이 되었을 때, 주인공의 최후 승리에 나도 맘껏 기뻐할 수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주인공이 아니었다. 나는 기실, 영화감독이 동일시의 대상으로 제시한 주인공보다 주인공의 대적, 주인공의 방해물에 더 가깝다고 생각될 때, 말그대로 난감해진다. 영화 <300>에서 내가 주인공이라 여길 때는 괜찮을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우리는, 슈퍼울트라 철인 주인공보다는 그가 '짐승'이라 부르며 응징하는 페르시아 군인에 가깝다. 이 영화를 보며 주인공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사람들은 "백인 남자", 그것도 "건강한 백인 남자" 아니겠는가.

그럴 때마다 저는 이런 의문을 품습니다. '철도공사 직원이 국립대 교수보다 월급을 많이 받는 게 도대체 뭐가 잘못된 일일까?' 물론 교수 되는 데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박사학위 취득할 때까지 학비도 많이 쏟아 부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억지로 시켜서 그리된 게 아니라 공부가 좋아서 선택한 길입니다. 교수들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하고 원하는 글을 쓰며 그걸로 월급을 받습니다. 조금만 노력하면 명예와 존경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왜 자기들이 철도공사 직원보다 돈을 더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궤변을 늘어놓는다고 생각하신다면 질문을 좀 바꿔보겠습니다. 어느 공기업의 평균임금이 6천만원이라는 사실에 분노하는 분들은 우리나라 최대기업 등기이사들의 평균연봉이 78억가량이라는 사실도 알고 계실 겁니다. 철도공사 직원들이 자신보다 몇천만원을 더 받는 데 분노하는 사람들이 왜 자신보다 100배의 연봉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능력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차이가 100배에 이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194-195p)

논점 1. 철도공사 직원이 국립대 교수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게 뭐가 잘못되었나?

대답 1. 첫째는 철도공사 직원은 국립대 교수보다 많은 월급을 받지 못 한다. 둘째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수가 철도공사 직원보다 더 많은 월급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저자의 의견에 100% 찬성한다. 공부하고 싶은 사람 공부하고, 일하고 싶은 사람 일하라. 교수에게는 학문적 성과로 인한 평가, 사회적 인정이면 족하다. 그거면 됐다. 물론, 대학강사는 아니다. 대학강사는 말 그대로 경제난 때문에 죽을 고생을 하며 대학에 강의를 나간다. 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내 박사친구는 강의료로 딸아이 어린이집 보낼 비용도 안 된다고 했다. 대학교수 월급에 1/2만 지급해도 이러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등록금 올리면 절대 안 되고, 교수 월급을 나눠줘라. 일한만큼, 노력한만큼 월급 받아라. 동일 노동, 동일 임금!

논점 2. 노조 간부의 임금이 직원들의 평균 임금보다 더 높은 것은 뭐가 잘못된 일인가?

대답 2. 언론이 노조의 파업을 부정적으로 그리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노조 간부들의 임금이 노동자 평균 임금보다 높으면 어떤가. 훨씬 더 위험한 일을, 훨씬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방법으로 실천하고 있지 않은가.

논점 3. 철도공사 직원들이 자신보다 몇천만원을 더 받는 데 분노하는 사람들이 왜 자신보다 100배의 연봉을 받는 등기 이사들에 대해서는 분노하지 않는가.

대답 3. 이에 대한 대답은 장하준 교수님(존경한다, 교수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Things 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를 참고하면 되겠다. 결론을 말하자면, 경영자, 등기 이사, CEO의 월급이 너무 많다.

추천영화 : <안토니아스 라인>, <가족의 탄생>,

추천도서 : <앵무새 죽이기>

쓰다 보니, 나름 긴~~~ 리뷰가 되었다. 므흣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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